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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근대까지 한국의 그림
Ⅰ. 선사시대
◇ 선사시대의 회화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川前里岩刻畵)
농경문 청동기(農耕文靑銅器)
Ⅱ.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
안악 3호분(주인공 초상)
안악 3호분(부엌, 고깃간, 차고)
안악 3호분(우물)
안악 3호분(대행렬도)
쌍영총 차마인물도
무용총 무용도
무용총 수렵도
각저총 씨름도
오괴분(五塊墳) 5호묘 해의 신
오괴분(五塊墳) 4호묘 달의 신
오괴분(五塊墳) 4호묘 학을 탄 신선
강서대묘 현무도(江西大墓玄武圖)
천마도(天馬圖)
의본 외 / 대방광불 화엄경 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
Ⅲ. 고려시대
◇ 고려시대의 회화
공민왕 /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이제현 /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서구방 / 서구방필 수월관음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관경 서분 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
Ⅳ. 조선시대 초기
◇ 조선시대 초기의 회화
안견 /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안견 / 적벽도(赤壁圖)
신잠 / 탐매도(探梅圖)
강희안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강희안 /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이상좌 /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양팽손 / 산수도(山水圖)
문청 /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이수문 / 악양루도(岳陽樓圖)
이암 / 모견도(母犬圖)
이암 /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신사임당 / 초충도병풍(草蟲圖屛風)
Ⅴ. 조선시대 중기
◇ 조선시대 중기의 회화
김시 /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이불해 /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
이정근 /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함윤덕 / 기려도(騎驢圖)
이숭효 / 어부도(漁父圖)
이흥효 / 산수도(山水圖)
이경윤 / 시주도(詩酒圖)
이경윤 /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이경윤 / 탁족도(濯足圖)
윤의립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윤정립 / 관폭도(觀瀑圖)
나옹 이정 / 한강조주도(寒江釣舟圖)
이징 / 연사모종도(煙寺暮鍾圖)
이징 /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김식 / 수하모우(樹下母牛)
김명국 / 기려도(騎驢圖)
김명국 / 달마도(達磨圖)
김명국 /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이명욱 /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조속 / 금궤도(金櫃圖)
조속 / 고매서작(古梅栖鵲)
이영윤 / 화조도(花鳥圖)
조지운 / 숙조도(宿鳥圖)
황집중 / 묵포도도(墨葡萄圖)
탄은 이정 / 묵죽(墨竹)
탄은 이정 / 문월도(問月圖)
어몽룡 / 월매도(月梅圖)
윤두서 / 자화상(自畵像)
윤두서 / 채애도(採艾圖)
윤두서 / 선차도(旋車圖)
윤두서 /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윤두서 / 노승도(老僧圖)
Ⅵ. 조선시대 후기
◇ 조선시대 후기의 회화
정선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 / 금강전도(金剛全圖)
정선 / 박연폭(朴淵瀑)
정선 / 정양사(正陽寺)
정선 / 통천문암(通川門巖)
정선 / 총석정(叢石亭)
정선 / 청풍계(淸風溪)
윤덕희 / 관폭도(觀瀑圖)
조영석 / 설중방우(雪中訪友)
조영석 / 바느질
조영석 / 새참
조영석 /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
윤용 / 나물 캐는 여인
강희언 / 인왕산도(仁王山圖)
강희언 / 사인휘호(士人揮毫)
김두량 /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김두량 / 긁는 개
변상벽 / 고양이와 참새
변상벽 / 암탉과 병아리
심사정 / 방심석전 산수도(倣沈石田山水圖)
심사정 / 파교심매도
심사정 / 딱따구리
심사정 / 하마선인
이인상 / 검선도(劍僊圖)
이인상 / 수석도(樹石圖)
강세황 /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강세황 / 영통동구(靈通洞口)
강세황 / 백석담도(白石潭圖)
신위 / 묵죽(墨竹)
정수영 / 만폭동(萬瀑洞)
정조대왕 / 파초(芭蕉)
이인문 /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이인문 /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
김홍도 / 군선도팔곡병(群仙圖八曲屛)
김홍도 / 총석정도(叢石亭圖)
김홍도 / 기와 이기
김홍도 / 주막
김홍도 / 무동
김홍도 / 벼 타작
김홍도 / 자리 짜기
김홍도 / 그림 감상
김홍도 / 씨름
김홍도 / 서당
김홍도 / 대장간
김득신 / 야묘도추
김득신 /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
신윤복 / 미인도(美人圖)
신윤복 / 연당야유도(蓮堂野遊圖)
신윤복 / 월하정인(月下情人)
이재관 /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
정약용 / 매조서정(梅鳥抒情)
Ⅶ. 조선시대 말기
◇ 조선시대 말기의 회화
김정희 / 세한도(歲寒圖)
김정희 / 부작란도(不作蘭圖)
김정희 / 지란병분(芝蘭竝盆)
조희룡 /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허유 /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허유 / 방석도산수도(倣石濤山水圖)
허유 / 묵모란(墨牡丹)
전기 /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유숙 / 대쾌도(大快圖)
남계우 / 호접(蝴蝶)
김수철 / 연꽃
김수철 /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홍세섭 / 유압도(游鴨圖)
홍세섭 / 해오라비
장승업 / 방황자구법 산수도(倣黃子久法山水圖)
장승업 / 귀거래도(歸去來圖)
장승업 / 호취도(豪聚圖)
이하응 / 묵란(墨蘭)
민영익 / 묵란(墨蘭)
조석진 / 수포고촌(水抱孤村)
안중식 /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안중식 / 도원문진(桃源問津)
작자 미상 / 오봉산 일월도 병풍(五峰山日月圖屛風)
작자 미상 / 까치호랑이
작자 미상 / 문자도 병풍(文字圖屛風)
작자 미상 / 책거리
Ⅷ. 근대 및 현대
◇ 근대 및 현대 회화
변관식 / 누각청류(樓閣淸流)
변관식 / 외금강삼선암(外金剛三仙巖)
이상범 / 산가설한(山家雪寒)
이상범 / 모추(暮秋)
허백련 / 계산청취(谿山淸趣)
김은호 / 간성(看星)
김환기 / 점화(點畵)
김환기 / 달밤의 화실
이중섭 / 황소
박수근 / 고목과 여인
오지호 / 사과밭
오지호 / 남향집
장욱진 / 풍경
이응로 / 문자 추상
[저 자] 이선옥
전남대 독문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 미술사 박사
대우재단 근무, 아주대에서 미술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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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도강도 (騎馬渡江圖)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간혹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 〈기마도강도〉도 분명하게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익재(益齋)라는 서명과 이제현인(印)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오래 전부터 이제현의 작품으로 전해온다.
화풍으로 보아도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오는 〈천산대렵도〉의 채색 기법과 닮은 데가 있어서 그 무렵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말을 탄 다섯 사람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산천은 강을 따라 지그재그 식으로 이어져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눈 내린 경치가 맑고 말 탄 인물의 모습이 의젓하며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생동감이 있어 격이 높은 화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배경의 산수는 필치가 섬약하고 인물에 비해 매우 소략하다.
http://www.steppenreiter.de/Korea/kema.htm
< 동양화 >
한국의 전통적 기법과 양식에 의해 그린 회화. 조선시대 말기까지 글씨와 함께 서화(書畵)로 지칭되던 한국의 전통회화는 근대 이후 새로 들어온 기법의 서양화와 구분하여 동양화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중국의 전통회화는 중국화(中國畵)로, 일본의 전통회화는 일본화(日本畵)라고 하였으나, 일제(日帝)는 한국인의 고유의 전통과 민족성에 대한 자각을 꺼려, 전통회화를 조선화(朝鮮畵)로 지칭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대신 동양화로 부르게 하였다.
동양화라는 용어의 공식적인 사용은 1922년 개최된 조선총독부 주최 제 1 회 조선미술전람회 (약칭 鮮展)의 제 1 부를 동양화부로 부르면서부터였다. 이 명칭은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어 48년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창설되어 81년까지 지속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에서도 동양화부로 불렀다. 70년대에 이르러 이 명칭은 한국 전통회화의 독자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타율적으로 붙여진 용어라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불식을 위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한국화>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82년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한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에서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83년 이래 미술교과서에서도 같은 명칭이 쓰여 이 용어가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역 사
한국화는 종이나 비단 위에 먹이나 물에 녹인 안료(顔料)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모필(毛筆)로 그리며, 동양적 자연관과 가치관에 바탕을 둔 회화관(繪畵觀)과 화론(畵論)에 입각하여 주로 중국의 전통회화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선별적(選別的)으로 받아들여 한국 특유의 양식을 형성하여 왔다. 그 원천은 선사시대의 선각화(線刻畵)나 암각화(岩刻畵)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삼국시대 중반인 4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인 발전을 하였다.
⑴ 삼국시대:삼국의 회화는 중국의 한(漢)나라와 육조시대(六朝時代) 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감상적인 목적보다는 실용적인 목적과 기능을 위하여 그려졌다. 주로 고분벽화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회화는 어느 나라의 회화보다도 힘차고 율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고, 백제의 회화는 완만한 곡선 중심의 부드러운 양식이며, 신라는 전반적으로 경직되고 사변적인 느낌을 준 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회화는 담징(曇徵)·가서 일(加西溢)·인사라아(因斯羅我)·백가(白加)·아 좌태좌(阿佐太子) 등에 의해 일본에 전해져 그 곳 회화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 게 각기 다른 양식을 형성했던 삼국의 회화는 통 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하나로 통합, 조화되었다. 솔거(率居)의 황룡사(皇龍寺) 《노송도(老松圖)》에 관한 일화를 통해 이 시대에 사실적 화풍이 크게 진작되었으며, 당(唐)나라와의 빈번한 문화교류를 통하여 궁정취향의 인물화와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가 성행한 한편, 불교화가 활발히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⑵ 고려시대:고려시대에 이르러 한국화는 한층 다양하게 발전하여 실용적 기능을 지닌 작품은 물론 여기(餘技)와 감상을 위한 순수회화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그림의 소재도 다양해져 제왕(帝王)·공신(功臣)의 초상화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금강산도(金剛山圖)》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 등의 진경산수화가 태동되었으며, 사대부 화가와 선승(禪僧)화가들에 의하여 흑죽·흑매·흑란의 문인화가 성행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이영(李寧)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인 《예성강도(禮成江圖)》와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로 그 이름을 중국에까지 떨치었다. 이제현(李齋賢)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와 공민왕의 《수렵도(狩獵圖)》 등은 모두 북종적(北宗的)인 원체화풍(院體畵風)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에 확산된 한국화의 전통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폭넓게 전개되면서 확고한 기반을 형성하여, 소재는 물론 구도·공간처리·필묵법·준법·수지법(俊枝法) 등에서 두드러진 독자적 양식을 이룩하였다.
⑶ 조선시대:조선시대의 회화는 그 변천과정에 따라 4기로 나뉜다. ① 초기(1392∼1550):세종 연간을 중심으로 하여 이미 안견(安堅)·강희안(姜希顔) 등의 거장이 배출되었다. 이 시기는 후대 한국 회화 발전의 토대를 이룬 시기로, 중국에서 전래된 여러 가지 화풍을 토대로 하면서도 중국 회화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16세기에 이르러 단선점준 등의 한국적 준법이 발생되었다. ② 중기(1550∼1700):초기의 화풍들이 계승, 지속되는 한편 영모(翎毛)·화조 부분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와 조선시대의 정취를 짙게 풍기는 화풍이 등장하였으며, 묵화의 발전과 함께 문인 화가들이 배출되었고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가 전래되어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③ 후기(1700∼1850):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 자아의식이 짙은 화풍이 풍미하였던 시기이다. 영조·정조 연간에 대두된 실학 발전의 영향으로 새로운 경향의 회화기법과 사상이 수용되어 절파계(浙派系)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문인화가 성행하였고, 독특한 화풍의 진경산수(眞景山水)가 정선(鄭敾)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또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등은 당시 생활과 애환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를 그렸으며, 청(淸)나라로부터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일부 수용되기도 하였다. ④ 말기(1850∼1910):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남종문인화가 세력을 떨친 시기이다. 남종화법의 토착화는 한국 근·현대의 수묵화가 남종화로 치우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한국화의 전통은 국내 정치적 격동에 의해 위축되어 갔으며 장승업(張承業)을 고비로 전체적으로 침체화되기 시작하였다.
⑷ 근대·현대:1910년 국권피탈을 계기로 한 일 제의 문화말살정책 등으로 한국화는 더욱 위축되었었다. 그러나 11월 서화미술협회(書畵美術協會)를 창설한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 등 장승업의 화풍을 이어받은 두 사람의 노력과 그 문하생인 이상범(李象範)·김은호(金殷鎬)·노수현(盧壽鉉)·변관식(卞寬植) 등에 의해 맥락이 이어져 왔다. 이와 함께 문인화 전통이 강한 이희수(李喜秀) 맥의 이응로(李應禿) 등과 전통적인 남종산수화를 정착시킨 허유(許維) 맥의 허영·허백련(許百鍊)·허건(許楗) 등이 근대한국화단을 풍요롭게 했다. 오늘날의 한국화는 민족미술의 원래 얼굴을 되찾고, 이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직임으로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성·고유성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한국화의 현대화와 세계미술의 주역으로서의 비약이 모색되고 있다.
조선시대 4대 화가 : 안견, 정선, 장승업, 김홍도
http://www.shinchangkun.com/oriart1.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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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 前半期의 山水畵>
머리말
조선초기에 수용된 화풍
조선초기의 산수화
조선중기의 산수화
安 輝 濬
서울大學校 敎授
2. 조선초기에 수용된 화풍
고려시대의 화풍
조선 초기(1392∼약 1550)의 산수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산수화와 구분되는 한국적인 양식을 형 성하였음이 현존의 작품을 통해서 밝혀진다. 이 시대의 화풍 형성에는 고려시대로부터의 전통과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역대의 화풍들이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즉 이러한 두가지 요소들 을 토대로 조선 초기 특유의 화풍이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들 중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화풍]은 쉽게 규명이 되나 [고려시대로부터의 전통]은 남아 전하는 작품 이 희소하여 구체적으로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지금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그 시대의 산수화풍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듯한 것은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 소장의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판화, 노영(魯英)이 1307년에 금니(金泥)로 흑칠소병(黑漆小屛)에 그린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이제현(李齊賢, 1287∼1367) 필(筆)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 그렸다고 전해지 는 [수렵도(狩獵圖)] 등이다. 이밖에 일본에 고려시대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산수화가 몇 점 알 려져 있다. 고연휘(高然暉)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미법(米法)의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와 [동 경산수도(冬景山水圖)] 쌍폭, 경도(京都) 상국사(相國寺) 소장의 절해중진 찬(絶海中津 贊) [산수 도(山水圖)] 등은 그 대표적 예들이다.
국내외에 전해지는 이 작품들을 모두 고려시대의 회화로 간주한다면 이 시대에는 북송대(北宋 代) 산수화의 영향과 원대(元代) 원체화(院體 )의 영향이 파급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노영의 [지장보살도]에 보이는 산들에서 이.곽파(李.郭派)-북송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에 의해 성립된 화파-화 풍의 영향이 엿보이고, 고연휘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산수도] 쌍폭에서 미법산수의 전통이 나타 나고 있는 점 등은 아무래도 고려시대의 산수화풍 형성에 북송대 회화의 역할이 컸음을 말해 주 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공민왕의 전칭작품들과 이제현의 [기마도강도] 등은 원대의 북경을 중심 으로 했던 산수화풍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고려시대의 산수화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라고는 확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선 이 작품들의 대부분이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고, 그 위에 또 공민왕의 전칭작품들처럼 조각난 그림들이거나 [어제비장전]처럼 판화이거나 아니면 일본에 있는 그림들처 럼 아직도 국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비교적 낮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 등지에 남아 있는 불교회화와 청자등으로 미루어보거나 송 휘종(徽宗)으로부터 극구의 칭찬 을 받았던 이녕(李寧) 등에 관한 기록들로 미루어보면 고려시대의 산수화는 오늘날 행운에 힘입 어 전해지고 있는 앞에 열거한 몇몇 작품들의 수준보다 월등히 높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어쨌든 고려시대의 산수화가 북송과 원대의 화풍을 수용하여 나름대로 발전했었음은 분명한 사 실이라 하겠다. 이녕이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와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실경산수의 전통(傳統)을 형성하였고, 그 뒤에 여러 화가들에 의해 [진양산수도(晋陽山水圖)], [송도팔경도(松 都八景圖)], [금강산도(金剛山圖)] 등 실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던 사실은 산수화가 고려시대에 이미 한국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발전된 한국적 산수화가 조선왕조 초기에 계승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유추되나 그 구체적인 파 악은 전해지는 작품이 영세하여 어려운 실정이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왕조로 계승된 것은 비단 고려의 회화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축적되었던 중국 역대의 화적들이 조선 초기로 전해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중국의 명적들은 고려의 회화와 함께 조선 초기의 산수화 발달에 바탕이 되고 자극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중국화풍의 영향
조선왕조 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축적된 畵跡과 전통을 이어받고 명(明)과의 교섭를 통하여 몇가 지 화풍들을 수용하여 그것을 토대로 이 시대의 특징적인 화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주요 산수화풍은 다음과 같다.
북송대의 이성과 곽희에 의해 이룩되고 금(金)과 원대에 널리 추종되었던 이곽파 또는 곽희 파화풍
남송의 화원이었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의해 형성되고 원명대로 계승되었던 마하파화 풍(馬夏派畵風)과 그밖에 유송년(劉松年) 등을 포함한 남송의 원체화풍
북송의 미불(米 )과 미우인(米友仁) 부자에 의해 이룩되고 원대의 고극공(高克恭)등이 발전 시킨 미법산수화풍
명초의 대진(戴進)이 마하파화풍과 이곽파화풍 등을 혼합하여 발전시킨 절파화풍(浙派畵風)
명대의 기타 원체화풍
이러한 몇가지 화풍들이 조선 초기의 화단에 수용되고 당시의 한국화 발달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초기의 산수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위에 적은 화풍들에 관해서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①이곽파화풍
먼저 이곽파화풍은 그 개조(開祖)인 이성의 화풍이 뚜렷이 규명되지 않고 학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심하여 보다 화풍이 뚜렷하게 밝혀진 이성의 추종자 곽희의 이름을 따서 곽희파라고도 일 컬어진다. 이 이곽파의 화풍은 우선 산수의 소재를 황토지대의 침식된 산천을 대상으로 택하여 다루는 것이 첫째의 특색이라 하겠다. 이성은 그의 고향인 산동성의 낮으막한 언덕들을 즐겨 그 렸기 때문에 이른바 평원산수(平遠山水)의 창안자로도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곽파화가들은 평 원산수만을 그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고원산수(高遠山水)를 더욱 즐겨 그렸던 듯하다. 이 화파의 많은 화가들이 침식된 황토지대의 산들을 주로 그렸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의 산들은 구름기둥(雲柱)처럼 보인다. 즉 산등성이는 둥글고 완만하며 산체는 기둥처럼 높이 서 있고 이 산 들의 좌우 허리에는 여러가지 불규칙한 침식공(浸飾空)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운주 모양의 산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 화파의 화가들은 필선이 하나하나 구분되어 보 이지 않도록 붓을 잇대어 쓰고, 산정(山頂)은 비교적 진하게 그리고 산 자체는 연하게 먹을 칠하 여 표현한다. 이러한 일체의 표현을 운두준법(雲頭 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산의 밑둥은 햇빛 이 비치고 있는 것처럼 조광효과(照光效果)를 내기도 하여 산정이나 산체에 비해 밝게 표현하는 게 상례이다. 이러한 조광효과는 대체로 11세기의 곽희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곽파의 산수는 대개 근경, 중경, 후경이 점차 상승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경향을 띠며 고원산수의 경우 형호(荊浩) 이래의 거비파적(巨碑派的)인 모습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즉 산수는 거대하고 우람하게 표현하고 사람이나 동물은 개미처럼 작게 묘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자연의 모습은 곽희가 그의 {임천고치(林泉高致)}의 [산수훈(山水訓)]에서 주장했듯이 거 리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각기 달리 보인다고 믿어, 계절이나 시간의 변화를 화폭에 담으려는 경 향을 짙게 띠었다. 이 점은 물론 이곽파화풍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그밖의 화파들에서도 나타난 경향이지만 북송대에는 특히 이곽파화가들과 미법산수화가들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구사되었 다.
앞에서 얘기한 몇 가지 특색들 이외에 이곽파화가들은 수지법(樹枝法)에서 해조묘(蟹爪描)를 거 의 전매특허처럼 자주 묘사하였다. 즉 나무가지를 표현함에 있어서 게의 발톱처럼 보이게 묘사하 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소나무의 표현에 이 해조묘법이 거의 예외없이 응용되었다. 이 때문에 이 화파의 소나무들은 잔가지들이 게의 발톱처럼 보이고 침엽(針葉)은 송충이의 털처럼 느껴진다. 이 러한 소나무의 표현이 보이는 그림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개 이곽파화풍의 영향이 미쳤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 화풍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전래되어 조선초기에 널리 수용되었으며 당시의 한국적 화풍 형성에 하나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세종조(世宗朝)에 크게 활약하였던 조선 초기 최대의 산수화가 안견(安堅)은 그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전칭작품인 [사시팔경도]에서 보듯이 곽 희파화풍을 토대로 그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5세기와 16세기의 조선 초기 산수화가들에 의해 널리 추종되었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 안견파(安堅派)라고 지칭할 수 있다. 안견파의 화풍은 조선 초기에는 물론 조선 중기에도 그 전통성을 강하게 유지하였던 것 이다. 이런 점에서 이곽파화풍은 결과적으로 조선 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다.
②마하파화풍
두번째의 마하파화풍은 12세기말부터 13세기초에 걸쳐 남송의 화원에서 활약했던 마원과 하규 가 이룩한 화풍으로서, 화북지방(華北地方)의 산천을 주 대상으로 했던 북송의 산수화와는 달리 양자강 이남의 강남지방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항주(杭州)에 도읍했던 남송의 지리적 환경은 양 자강 북쪽의 그것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개천과 湖水가 많고 산들은 나즈막하며 기후는 온화하고 안개가 자주 끼는 그런 환경인 것이다. 이 지역의 환경은 자연 이 시대의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 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을 반영한 것이 곧 산들은 가라앉을듯 나즈막하고 물은 넘칠듯이 그리는 소위 잔산잉수식(殘山剩水式)의 산수화인 것이다.
마원과 하규는 이러한 잔산잉수의 강남지방 특유의 자연환경을 소재로 그렸다는 점에서부터 북 송대의 거비파화가들과 스스로 구분된다. 이들은 자연을 묘사하되 웅장하고 경의로운 대자연을 전부 표현하려 들지 않고 자연의 일부분을 잡아 요점적으로 간결하게 묘사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화면의 하단부 한쪽 구석에 중요한 경물(景物)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이러한 구도를 [일각구도(一角構圖)] 또는 [변각구도(邊角構圖)]라 부르는 것인데, 혹은 마원이 창안하고 즐겨 그렸기 때문에 [마지일각(馬之一角)]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그림의 한쪽 구석에 근경의 경물을 부각시켜 그리되, 그 나머지의 멀리 있는 경물들은 안개 속에 사라지듯 희미하게 시사적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마하파의 산수화에서는 질 펀한 강이나 안개낀 공간을 시사하는 여백이 중요시되었다. 이처럼 여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경(中景)이나 원경(遠景)의 경물들이 시사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림 전체에 어떤 이상적인 취향이 배어나 경향을 띠게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대(前代)의 산수화에서와는 달리 자연과 인물 의 비중이 거의 대등해진 점도 매우 괄목할 만한 사실이다. 대자연 속의 미미한 존재로서가 아니 라 자연을 향유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암벽의 처리에 부벽준(斧劈 )이 자주 구사되고, 버드나무는 유연하고 간략하게 묘사하 면서도 소나무 등은 굴곡이 심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런 점들도 남송대 산수화의 한가지 두드러진 특색이라 하겠다.
마원과 하규 이외에도 남송 때의 화원으로 후대의 중국 및 한국 산수화와 관련하여 중요시되는 인물은 유송년이다. 그러나 그의 화풍도 넓은 의미에서 마·하의 화풍과 상통하므로 더 이상 상 론(詳論)하지 않겠다. 남송대에 이들을 중심으로 이룩된 원체화풍은 후대에 명의 절파화풍의 형성에 토대가 되었으 며,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고려 때에 유입되어 조선 초기에는 곽희파화풍 다음으로 영향을 미쳤 다고 믿어진다. 조선 초기의 이상좌(李上佐)는 그의 전칭작품인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에서 보 듯이 마원의 화풍을 수용했던 대표적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점에 관해서는 검토의 여 지가 많이 남아 있다. 조선 중기의 윤의립(尹毅立)은 안견파화풍 이외에도 하규의 화풍을 따라 그 렸음이 그의 작품들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중기의 이불해(李不害)도 하규의 화풍을 수용하였음이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에서 분명히 간취된다. 이밖에 안견파의 그림들 중에도 강안(江岸)이나 토파(土坡)의 묘사, 공간의 처리 등에는 남송원체화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감지된다. 이처럼 남송 의 원체화풍도 이곽파화풍과 더불어 조선 초기와 중기의 한국화풍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이다.
③미법산수화풍
세번째의 미법산수화풍은 북송의 유명한 문인화가이자 서예가이며 감식가이자 수집가였던 미불 (米 )에 의해 창안되었는데 미점(米點)을 구사하여 비온 뒤의 습윤한 자연의 모습을 묘사하는 등 안개낀 자연의 독특한 분위기 묘사에 특출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 화풍은 그의 아들 미우인(米 友仁)에 계승되고 원대의 대표적 문인화가였던 고극공에 의해 새롭게 발전되는 등 남종문인화의 하나의 중요한 계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미법산수화풍은 북송때 시작되어 원·명·청을 거치는 동안 어느 정도의 변모를 겪으면서 현대의 동양화단까지 전승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연휘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그림들이 미법산수로 서 고려시대의 것이라 추측되고 있으며, 조선 초기에는 최숙창(崔叔昌), 이장손(李長孫), 서문보 (徐文寶) 등의 작품들에 원대 고극공에 의해 새롭게 발전된 미법산수의 전통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에는 명대화(明代化)된 이정근(李正根)의 미법산수가 전해지고 있어서 이 산수화풍이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수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④절파 및 명대원체화풍
네번째의 절파화풍은 명초의 절강성(浙江省) 출신인 화원 대진을 개조로 하고 있는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남송대의 원체화풍을 주로 하고 그밖에 이곽파화풍 등 여러가지 요소들을 가미하여 이루어졌다. 이 화풍은 절강성을 위시한 강남지방 출신의 화원들에 의해 명대의 화원에 뿌리를 박게 되어 15세기 후반부터는 화원의 주도화풍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사실상 네번 째의 절파화풍과 다섯번째의 명대원체화풍은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편의상 여기 서는 함께 묶어서 간단히 다루기로 하겠다.
절파화풍은 남송의 원체화풍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여백과 공간을 중요시하고 시사적인 표현을 통한 어떤 이상적 분위기를 묘사했던 남송의 산수화와는 달리 中景을 삽입하여 구성을 복 잡하게 하고 거친 필치를 구사하여 그림 전체가 조야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 화풍은 15 세기후반부터 더욱 거칠고 대담해져 [광태사학(狂態邪學)]이라고 불려지게까지 되었다. 중국에서 는 이러한 절파화풍이 명말의 남영(藍瑛)을 고비로 남종화풍(南宗畵風)에 밀려 종말을 고하게 되 었다.
명초의 절파화풍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15세기 조선초기였다고 믿어진다. 즉 강희안 (姜希顔) 등을 위시한 사행원(史行員)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강희안의 [고 사관수도(高士觀水圖)]와 기타 전칭작들, 그리고 안견의 전칭작인 [적벽도(赤壁圖)]<도 > 등은 이를 말해주는 대표적 예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 화풍은 초기에는 일부 화가들에 의해서만 소극 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김제(金 ), 이경윤(李慶胤), 김명국(金明國) 등에 의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대충 살펴본 몇가지 화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고 수용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분 명히 유념해야 할 것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우리나라 화가들은 이러한 화풍들을 그대로 모방하기 보다는 이를 토대로 중국회화와는 구분되는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점 은 이 시대 산수화가 보여주는 구도, 공간개념, 필묵법, 수지법, 준법( 法)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뚜렷이 간취된다. 따라서 조선 초기와 중기의 산수화를 위시한 회화는 중국 송원대 회화를 모방 하는 데 그쳤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겸재 정선(謙齋 鄭敾) 등에 의해서 비로소 한국적인 화 풍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매우 그릇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제시대(日帝時代)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영향을 은연중 받은 이러한 잘못된 편견을 탈피하여 조선 초기와 중기의 회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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