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87)
제10권 오월춘추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9)
노정공이 계손사의 집으로 몸을 피한 같은 시각.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공궁을 공격하고 있었다.
궁중 수비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공산불뉴는 숙손첩의 안내를 받아 내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궁중 어디에고 노정공(魯定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정공(魯定公)이 계손사의 집으로 피신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군사를 몰고 계손사의 집으로 향했다.
반란군이 대문을 부수고 대(臺) 위로 올라가려는데, 문득 한 사내가 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자였다.
반란군은 대부분 비읍(費邑)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공자(孔子)가 백성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공자를 보자 주춤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때 공자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희들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다. 주공이 여기 계신데, 너희들은 어찌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 것이냐?
속히 무기를 버려라. 그러면 지금까지의 잘못은 처벌하지 않겠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반란군은 하나 둘씩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변에 당황한 것은 공산불뉴(公山不狃)였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대(臺) 안으로 진입하라!“
악을 써댔으나 몇몇 군사만 그에 호응할 뿐 대부분의 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산불뉴(公山不狃)는 악에 받쳐 직접 대 위로 뛰어올라가 공자를 베려 했다.
그 순간 좌우에 매복해 있던 사마 신구수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역적은 함부로 성인의 몸에 더러운 손을 대지 마라!"
공손불뉴(公山不狃)는 기겁초풍했다.
그는 좌우에 계손씨의 가병이 매복되어 있음을 알고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달아났다.
이어 숙손첩(叔孫輒)이 그 뒤를 따랐다.
겨우 곡부성을 빠져나온 그들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오(吳)나라를 바라보고 달아났다.
이로써 '공산불뉴의 난'은 진정되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맹손무기와 숙손주구도 후범의 난을 진압했다.
후범(侯犯)은 겨우 탈출하여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양호에 이어 공산불뉴, 후범 등의 난이 연이어 일어남에 따라
계손사(季孫斯)와 맹손무기(孟孫無忌), 숙손주구(叔孫州仇)는 서둘러 자로(子路)를 보내어 각 식읍의 성을 허물고 높이를 세 척쯤 낮추었다.
계손사를 비롯한 삼환(三桓)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공자는 이 모든 게 소정묘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자(孔子)는 모든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사구의 자격으로 소정묘(少正卯)를 탄핵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소정묘가 교묘한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이 같은 말에 신료들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소정묘(少正卯)는 우리 노나라에서 명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데, 어찌 공산불뉴의 난이 소정묘의 농간이라고 하십니까?"
공자(孔子)가 다시 노정공에게 아뢰었다.
"소정묘(少正卯)는 거짓을 참말처럼 말하고, 행동과 말이 같지 않아 알게 모르게 인심을 어지럽혀왔습니다.
저런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은 대사구(大司寇)입니다."
그러고는 좌우 무사를 돌아보며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군사들은 저자를 속히 참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소정묘를 결박했다.
결국 소정묘(少正卯)는 궁정 앞뜰로 끌려나가 참수형에 처해졌다.
모든 신하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이후로 노(魯)나라 정치에 공자의 뜻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대사구 겸 재상이 된 공자(孔子)는 먼저 궁중 기강을 세우고 관료들에게 예의를 가르쳤으며 염치를 알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하루가 다르게 안정되어 갔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통해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공자(孔子)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가격을 속이지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는 따로 걸었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여행자들은 관리에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모두 잘 접대를 받아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바야흐로 공자의 이상(理想) 정치가 노나라 땅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BC 496년(노정공 14년).
공자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이상 정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공자의 예법과 인의지도(仁義之道)로 인해 노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노나라 공실과 경대부들은 다시 사치와 향락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노(魯)나라 정치가 다시금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된 원인으로 재미난 일화가 전해온다.
그 무렵 제(齊)나라는 명재상 안영이 세상을 떠나고 제경공의 총신인 대부 여미(黎彌)가 정책을 입안하고 있었다.
제경공(齊景公)은 노나라가 하루가 다르게 안정 되어가는 것을 보고 몹시 불안해했다.
"공자가 정치를 잘하면 노(魯)나라는 패권을 잡을 것이요, 노나라가 패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우리 제(齊)나라를 억압하려들 것이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대부 여미(黎彌)는 잔꾀를 내는 데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제경공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아뢰었다.
"주공께서는 공자 때문에 걱정하시면서 어찌 그를 방해할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무슨 수로 공자의 정치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공께서는 신의 계책을 들어보시렵니까?“
"말해보라.“
"신이 듣건대 매사가 안정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사치스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주공께서는 노후(魯侯)에게 우호를 두터이 한다는 핑계로 음악 잘하는 미인들을 많이 보내십시오.
노후가 그 미인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틀림없이 정사(政事)에 게을러질 것이요, 자연 공자(孔子)를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는 노(魯)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것이니, 공자 없는 노나라가 어찌 패권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묘책이로다!"
제경공(齊景公)은 몹시 기뻐하며 그날부터 전국 각지에서 아름다운 처녀 80명을 뽑아들여 10대(隊)로 편성했다.
그리고 그 미인들에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힌 후 밤낮없이 노래와 춤과 음악을 가르쳤다.
이때 가르친 음악이 '강악(康樂)'이며, 그 춤을 '강악무(康樂舞)'라고 한다.
강악은 전에 없이 아름다운 곡조였으며, 강악무는 황홀하기 그지없어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을 정도였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첫댓글 선생님.
오늘도 고맙습니다ㅡ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제 행사를 마치고 나니 저녁부터 추워지더니
오늘 갑자기 추워졌어요.
건강 유지 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