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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적벽 대전(赤壁大戰 / 208년) Battle of Red Cliffs
(1) 개요
적벽 대전(赤壁大戰 / 赤壁大戦 / 208년)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에서 벌어진 큰 전투이다. 중국 삼국시대인 208년에 후베이성[湖北省] 자위현[嘉魚縣]의 북동,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다.
(2) 정사(正史) 《삼국지》에서의 적벽대전
정사(正史)에서는 매우 간략하게 적혀있다. 《삼국지》의 〈위서〉 무제기에서는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으로, 같은 책의 <선주(유비)전>에서는 "손권은 주유· 정보(程普 2세기말~220년대)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고, 역시 같은 책 <제갈량전>에서는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공(조조)에 대항하였다. 조공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고, <주유전>에서는 "주유와 정보를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공과 맞서 적벽에서 조우하였다. 그때 조공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공의 군대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다."고, <오주전>에서는 "주유와 정보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고,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에서는 "(정보)와 주유가 좌·우독이 되어, 조공을 오림(烏林)에서 물리쳤다."고 적고 있다.
(3) 배경
조조는 205년 원담을 멸망시키고, 206년 고간을 멸망시키고, 207년 오환 · 원상 연합군을 무찌르고 원상을 멸망시킴으로써 원씨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오환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
승상에 오른 그는 통일의 의지를 표명했으며 다음 해 여름 본격적으로 남진을 개시했다. 갓 병사한 유표의 뒤를 이어 형주목으로 옹립된 유종은 조조에게 그대로 항복하고, 한수 북부를 포기한 유비는 강릉으로 향했으나 같이 따르던 피난민들의 속도가 느려 조조군의 기병에게 당양에서 따라잡혀 위기에 빠진 후 결국 한진에서 수로를 따라 하구에 주둔하는 유기에게로 피신했다.
여기에 유기와 손권은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손권은 주유, 노숙, 정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 유기 등과 연합해 조조에게 맞서기로 결정내렸다.
손권의 선친인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력이 있는 유표의 가문에 대해 손권의 이러한 조치는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4) 준비 과정
유종의 항복과 유비의 피신 이후 거의 형주 전역을 장악한 조조는 강릉에 주둔하며 수군이 채비를 갖추길 기다렸다. 조조는 이끌고 온 보병을 나누어 수병으로 재편성하였다.조조 원정군의 대다수가 물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항복받은 후 새로 편입한 형주 수군과 함께 수전 훈련을 시키는 한편 적선보다 중량이 큰 함선을 대량으로 건조하도록 하였으며,배멀미를 막기 위해 배들을 튼튼한 쇠고리로 종횡으로 연결해 흔들림을 낮추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에서 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서 해결했다. 다만 이 점은 나중에 화공을 받았을 때 선단 전체가 불타버리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조조군은 익숙하지 못한 기후와 여름기후, 강릉에서 주둔지로 여겨지는 오림까지의 늪지대 등으로 인해 역병이 도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는 데다, 접전한 결과, 손권의 수군이 강 위에서는 우세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우위를 확보할 때까지는 장강 북안에 포진한 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유비는 유기에게 몸을 의탁한 이후 하구에서 좀 더 하류에 위치한 번구에 자리잡았는데 전부터 유기가 매우 신뢰했으므로 매우 병약한 그에게서 군무를 사실상 위임받았다. 이후 유비군은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손권과 동맹하고, 주유와 같이 적벽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 정보를 부도독으로 임명해 군의 지휘를 일임하고, 자신은 시상에 주둔했다. 주유는 함대를 이끌고 하구를 지나 조조의 수군을 마주보는 형태로 장강 남안에 포진했다.조조의 수군은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주유도 조조의 대함대를 단번에 격파할 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당분간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208년은 말에 접어들었다.
(5) 전투 경과
유비와 손권은 손을 잡아 전선을 불태웠지만 조조는 병 등 여러 까닭 때문에 물러났다. 즉, 조조는 큰 피해 없이 물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조는 이미 물러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이에 조조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적벽대전은 삼국지연의와 다르게 스케일이 큰 싸움이 아니었음을 알 수있다.
황개전을 보면 "주유를 따라 적벽에서 조공을 막을때, 화공을 할 꾀를 짰다" 라고만 나온다.
첫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머물렀다. 주유 등은 남쪽 강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배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붓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항복한다고 알렸다.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나아갔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강가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유전-
이것이 주유전에 나오는 적벽대전이다. 자세한것은 무제기(조조)전에서 조조의 정예병은 피해를 받지않고 피해를 받은 병사들은 형주(유표)의 병사들이였다.
조조는 스스로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지르고 물러났다라고 나와있다.
(6) 전후
적벽의 대패로 원정을 계속하는 것이 곤란하게 된 조조는 형주를 떠나 조인, 서황에게 남군을 맡기고 자신은 허창으로 귀환하였다. 유비와 주유·정보 연합군은 남군까지 진격해 조조 군과 싸웠다. 건안 14년(209년), 조인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마침내 주유는 남군을 손에 넣었으며,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했다. 한편, 유비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무릉, 장사, 계양, 영릉 4군 태수의 항복을 받았다. 조조는 쉽게 항복받은 옛 유표령 형주의 남반부를 잃고, 강하군 북부와 양양 이북만을 유지했다. 나머지 땅은 손권과 유비의 손에 넘어갔다.
손권은 주유에게 형주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으로 합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장희(張憙)에게 기병 1천을 딸려서 합비로 보냈는데, 장제가 4만 대군을 파견했다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서 합비성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합비성과 손권 군 양측에 모두 전해지자, 손권은 이를 믿고 진영을 불태우고 달아났으므로 합비성은 무사했다.
(7)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의 적벽대전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형주 자사 유표의 사후 그의 부하 채모가 유종을 유표의 후계자로 앉힌 후에 형주 전지역을 조조에게 주고 항복한다. 그러나 그때쯤에 조조는 신야에 머물고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신야성, 번성, 양양성을 되찾고 유비를 저멀리 장판까지 쫓아낸다.
하지만 장판 전투에서 장비가 조조군을 막고 있을 무렵 유비는 백성을 데리고 도망가고 있었는데 조조가 물러가자 제갈량은 동오로 가 손권을 설득시킨다. 손권이 결심하고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보를 부도독에 삼고 노숙을 군사(軍師)에 삼고 조조와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적벽대전의 서전에서는 유비와 손권의 동맹군의 약 10만 군사와 조조군의 100만 대군이 맞붙었는데 물량적으로는 훨씬 조조군이 유리했으나 유비와 손권 동맹군의 지략으로 조조군을 물리쳤다.
조조군이 군사를 이끌고 적벽 반대편에 대수채를 세우고 대치한 후 조조는 주유와 친했던 장간을 오에 보내서 주유를 설득 시키려고 하나 주유는 그것을 간파하고 일부러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태사자에게 전쟁이야기를 꺼내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자 장간은 항복이란 말도 못 꺼낸다.
그러나 장간은 주유가 자고 있을 때 채모와 장윤이 주유와 내통하고 있는 가짜 편지를 발견 하고 그 편지를 가지고 도망간다. 그걸 본 조조가 노하여 채모와 장윤을 베고 우금과 모개를 새 수군 도독으로 임명한 뒤 장간을 다시 보내지만 하지만 주유는 편지를 가져갔다는 명목으로 산속 처가에 가둔다. 하지만 장간은 그곳에서 탈출해 방통을 만나는데 이를 본 장간은 방통을 데리고 조조를 찾아간다.
방통은 조조군사들이 배멀미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조군의 배를 서로 연결하도록 하고 이에 서서가 이를 간파하고 방통에게 자신이 살 길을 묻자 서서에게 마초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거짓 명목으로 허창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서서는 조조에게 장패와 3000명의 군사를 얻고 목숨을 건졌다.
조조는 선상 위에서 문무백관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으나 도중 양주 자사 유복을 죽여 버리는 실수를 범해 아들 유희를 시켜 시체를 가져가라고 한 뒤 장사지내게 한다. 이에 조조의 부하 초촉과 장남, 문빙이 순시선 50척과 정예군 1250명을 이끌고 오군을 습격하지만 초촉은 한당에게, 장남은 주태에게 죽고 대패한다.
한편 조조는 장간의 내통 편지가 주유의 계략인 걸 알아차리고 채모의 동생인 채중과 채화를 주유에게 잠입시킨다. 하지만 주유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황개의 고육계를 활용해 황개를 처벌하였다. 이 때 감녕도 황개가 맞으려고 할 때 너무 늙었다고 항의하자 감녕도 처벌된다. 물론 이런 소동은 조조를 속이기 위해 황개가 주유와 짜고 황개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기까지 하며 벌인 연극이었다.
채중과 채화는 이것들을 낱낱이 조조에게 보고하고 황개와 감택, 감녕이 청룡기를 달고 군량을 실은 배를 타고 항복한다고 하였다.
채중과 채화로부터 황개와 감녕의 처벌 소식을 듣을 조조는 둘의 투항을 기정사실화하지만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한다. 그리고 주유는 감녕을 제1대로 임명해 채중과 함께 항복한 군사들을 데리고 오림을 탈취하라고 했으며 태사자는 제2대로 임명해 군사 3000명을 주어 황주 경계에 가 합비에서 오는 조조의 지원군을 막게 했으며 여몽은 제3대로 봉해 군사 3000명을 주어 오림에서 감녕을 돕고 능통은 제4대로 임명해 역시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릉 경계로 가 감녕과 여몽을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동습을 제5대로 임명해 군사 3000명을 주어 한양을 취하고 한천을 따라 조조군의 영채를 치도록 했다.
또한 각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도 임명해 제1대는 한당, 제2대는 주태, 제3대는 장흠, 제4대는 진무였고 모든 부대에 각각 전선 300척을 주어 모두 1200척의 전선이 있었고 대 앞에 20척의 화선이 앞장섰다.
제갈량 역시 조운에게 군마 3000명을 주어 오림에 매복하게 하고 장비에게도 3000명을 주어 이릉으로 가는 길을 끊고 호로곡 어귀에 매복하게 했으며 유기에게는 무창에 매복하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관우는 화용도에 매복하게 했다.
먼저 주유는 항복하는 척 오에 잠복한 채화를 처형하고 황개가 항복하는 척 접근해서 군량을 실은 배에 불을 붙이고 진군한다. 이를 본 조조의 부하 문빙이 막으려 하지만 활을 맞고 물에 빠지고 황개의 전선들은 조조군 수채에 불이 붙자 연환계에 의해 배가 다 타버고 조조군은 몰살당하고 만다.
이에 장료가 군사 10명을 이끌고 조조를 구출하고 도중에 황개를 활로 쏘아 맞힌다. 그러나 황개는 원래 수전에 적합한만큼 엄동설한에도 목숨을 부지했으며 조금 뒤 한당에게 구출되고 왼쪽에서는 한당, 장흠이 오른쪽에서는 주태와 진무가 조조를 공격했고 한복판에서는 주유, 정보, 서성, 정봉이 대선단을 이끌고 군사들을 도왔다.
감녕은 채중을 앞세워 오림으로 쳐들어간 다음 채중을 죽이고 군량에 불을 붙였으며 곧바로 여몽이 달려와 감녕을 도왔다. 조조는 장료와 함께 군사 100기만 거느리고 탈출해 문빙을 구출한 모개와 10기의 군사와도 합류해 오림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오림에서는 여몽이 기습해오고 이에 장료가 맞서지만 산골짜기에서 능통이 기습해온다. 그러자 서황, 마연, 장의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달려와 막긴 하지만 10리(4 km)도 못 가서 감녕이 달려와 마연과 장의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육손과 태사자가 합세해 조조를 공격하자 조조는 이릉으로 후퇴해 장합과 합류하지만 조운이 기습해오자 서황과 장합을 보내 맞서 겨우 탈출해 이전과 허저, 모사들과도 합류한다. 조조는 이릉으로 가던 중 호로곡에서 잠시 머무르지만 그곳에 매복하던 장비가 기습하고 이에 허저가 맞섰으나 조조군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100만에 달하던 대군도 화용도 인근에서는 단지 100명만 남아 조조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화용도에서는 그곳에 매복해 있던 관우가 나타나고 이에 조조는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겨우 남은 군사 27명을 이끌고 남군 근처에서 조인과 합류해 남군성으로 간 뒤 번성으로 도망간다.
이튿날 조조는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근거지 허창으로 돌아가고 조인에게 남군성을, 하후돈에게 양양을, 장료와 악진, 이전에게 합비를 맡긴다. 오에서는 여세를 몰아 형주를 탈환하기로 결정하고 주유는 모두 군대를 동원해 형주의 조조군을 공격하고 1년 간의 조조와 손권과의 남군 전투와 합비 전투가 벌어진다.
(8) 실제와 허구 논란
김운회 교수가 저서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적벽대전의 허구설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는 책에서 적벽대전과 관도전투를 비교하면서 위서엔 기록이 세 줄에 불과하고, 촉서나 오서를 합해도 70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사에 남겨진 양이 매우 짧다는 것을 근거로 적벽대전의 허구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오나라쪽 정사를 보면 전쟁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으므로,허구 논란은 근거가 빈약하다.
다만 일부 장수의 경우는 적벽대전에서 사망하거나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의 영향으로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태사자가 그 대표적인 예로,태사자가 적벽대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완전히 허구이며 태사자는 206년 풍토병으로 병사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미 사망한 태사자를 적벽대전에 참가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사 오서 태사자전을 보면 태사자의 최후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으므로 태사자의 적벽대전 참전은 완전한 허구이다.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177.1cm)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적을 토벌하러 갔었는데, 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망루 위에서 욕을 했다. 그 도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태사자가 활을 끌고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자,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훌륭한 활솜씨)는 이와 같았다. 조공(조조)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써서 상자속에 편지를 봉했는데, 그가(태사자가) 열어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 단지 당귀(當歸)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 태사자에게 유반을 제압할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 건안 11년(2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태사향은 관직이 월기교위까지 올랐다.“
(9) Battle of Red Cliffs (赤壁大戰 / 赤壁大戦 / 208년)
Around the time, Liu Bei had recently been defeated by Cao Cao(조조) at the Battle of Changban, and he planned to lead his followers south across the Yangtze River. Liu Bei(유비) met Lu Su(노숙) at Dangyang, where they discussed the formation of an alliance between Liu Bei and Sun Quan. Liu Bei then moved to Xiakou (夏口; present-day Hankou, Hubei) and garrisoned there. At the same time, he also sent his adviser Zhuge Liang to accompany Lu Su to meet Sun Quan and discuss a Sun–Liu alliance. Sun Quan ordered Zhou Yu(주유) and Cheng Pu(정보 程普) to lead his forces to join Liu Bei in resisting Cao Cao, and they rendezvoused at Red Cliffs (赤壁). A plague had broken out in Cao Cao's army, so Cao Cao lost to the allied forces in an early skirmish between both sides. Cao Cao then moved his camp to the northern bank of the Yangtze River while the allies remained at the south.
Huang Gai(황개 黃蓋), one of Sun Quan(손권)'s generals, told Zhou Yu: "The enemy are superior in numbers in comparison with our side. I fear that we cannot last long. However, I observe that Cao Cao's ships are linked to each other. We can destroy them by fire." Huang Gai then prepared about ten mengchongs and doujians (鬬艦; a type of warship) and filled them with the ingredients necessary for starting a fire. He also wrote a letter to Cao Cao, pretending that he wanted to surrender and defect to Cao Cao's side.
Huang Gai then prepared some zouges (走舸; a smaller type of boat), which would follow behind the mengchongs and doujians, and his small fleet sailed towards Cao Cao's base. The wind was blowing strongly from the southeast. When Huang Gai's fleet reached the middle of the river, the ships all raised their sails, and Huang Gai lifted a torch and instructed his men to shout "We surrender!" Cao Cao's troops came out of the camp to look and they said Huang Gai was coming to join them. When Huang Gai was about 20 li away from the enemy base, he ordered his men to set the ships on fire and they boarded the smaller boats behind. As the wind was very strong, the flaming ships sailed towards Cao Cao's warships at fast speed and caused them to catch fire as well. Cao Cao's ships were all burnt down and the flames also spread quickly to his camps on land. Zhou Yu then ordered an attack on Cao Cao's base and scored a major victory. Cao Cao retreated north with his surviving troops after his defeat. Zhou Yu and Liu Bei led their respective forces in pursuit of Cao Cao, but Cao had already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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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周瑜, 175년 ~ 210년) Zhou Yu
(1)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인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며 여강군 서현(舒縣) 사람이다. 태위 주충의 조카로, 고조부 주영 이래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다.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의 명신(名臣)으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위군(魏軍)을 대파하였다.
출생-사망 : 175년 ~ 210년
자 : 공근(公瑾)
국적 : 중국 삼국시대 오(吳)
Zhou Yu (Chinese: 周瑜, pronunciation) (175–210), courtesy name Gongjin (Chinese: 公瑾), was a Chinese military general and strategist serving under the warlord Sun Ce(孫策) in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of China. After Sun Ce died in the year 200, he continued serving under Sun Quan(孫權), Sun Ce's younger brother and successor. Zhou Yu is primarily known for his leading role in defeating the numerically superior forces of the northern warlord Cao Cao(曹操) at the Battle of Red Cliffs in late 208, and again at the Battle of Jiangling in 209. Zhou Yu's victories served as the bedrock of Sun Quan's regime, which in 222 became Eastern Wu, one of the Three Kingdoms. Zhou Yu did not live to see Sun Quan's enthronement, however, as he died at the age of 35 in 210 while preparing to invade Yi Province (modern Sichuan and Chongqing).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Zhou Yu was described as a strong man with beautiful appearance. He was also referred to as "Master Zhou" (zhoulang 周郎). However, his popular moniker "Zhou the Beautiful Youth" (meizhoulang 美周郎) does not appear in either the Records or the 14th-century historical novel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Some Japanese literary scholars such as Yoshikawa Eiji and Koide Fumihiko believe that this was a later invention by Japanese storytellers.
(2)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손견(孫堅)이 동탁(董卓)을 치고자 거병할 때 서로 집 옮기면서, 동년배인 손책과 주유는 친교를 맺어‘단금’(斷金), 즉 금속 끊을 정도로 굳은 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손견이 죽고서 원술(袁術)은 주유의 종부 주상을 단양태수로 임명했고 주유도 이를 따라갔는데, 원술 휘하 손책이 강동을 치러가면서 편지로 주유를 불렀고, 주유는 병사 이끌고 손책을 맞았다. 이후 손책을 따라 후한의 양주자사 유요(劉繇)의 대 원술 항전의 최전선인 횡강과 당리구에 주둔하던 우미(于糜), 번능(樊能), 장영(張英)을 무찔렀고, 장강을 건너 말릉 지키던 착융(笮融)과 설례(薛禮)도 깨부쉈으며, 호숙과 강승으로 넘어가 유요의 치소 곡아로 들어가자 유요는 달아났다. 손책은 자신은 회계로 나아가면서, 주유에게는 단양군을 지키도록 했다. 이후 원술은 단양태수를 원윤(袁胤)으로 교체하고 주상과 주유를 수춘으로 불러들였으며, 주유를 장군으로 쓰려 했으나, 주유는 원술을 낮게 보고 나중에 동쪽으로 가고자 거소장(여강군 거소국의 현장)을 자청했다. 거소장 시절에 노숙(魯肅)에게 군자와 식량을 청했고, 노숙이 가진 곡식의 절반인 3천곡을 흔쾌히 내어준 일을 계기로 노숙과 친교를 맺었다. 건안 3년(198년)에 오로 달아났다.[1] 손책은 주유를 환영하고 건위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주유는 여강군에서 민심을 얻었으므로, 우저를 지키면서, 나중에는 춘곡장도 겸임했다.
손책은 형주를 노리고, 주유를 중호군 겸 강하태수로 삼았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양주 북부의 환현을 공격했다. 이때 교공의 두 딸 가운데 언니 대교를 손책이 아내로 삼았고, 주유는 여동생 소교를 아내로 삼았다.
《삼국지연의》에서 이교는 교현(橋玄)의 딸로 “강동의 이교”라고 알려져 있어 언니는 대교, 여동생은 소교로 불려 절세의 미녀로 불리고 있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을 따라 원술 사후 독립 세력을 유지하던 여강태수 유훈(劉勳)을 무찔러 여강에서 쫓아냈고, 유훈을 돕는 강하태수 황조(黃祖)도 격파했다. 여강태수 유훈이 손책의 꾐에 빠져 상료로 군을 낸 사이, 손책은 손분(孫賁), 손보(孫輔) 형제에게 팽택에서 유훈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주유와 함께 유훈의 본성인 환성을 쳐 이겼다. 돌아오면서 예장과 여릉을 평정했고 파구에 주둔했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급사해서, 남동생인 손권이 그 뒤를 이었다. 주유는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張昭)와 함께 온갖 일을 관장했다. 이 무렵에는 손권과 그에게 의탁한 사람들 사이에 군신 관계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장소와 주유 등이 손권을 대업을 이룰 만 하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손권에게 심복하게 되었다. 건안 7년(202년), 조조(曹操)가 전년에 원소(袁紹)를 무찌른 위세를 앞세워, 손권에게 임자(지방관의 아들을 중앙직에 두어 일종의 볼모로 삼는 것, 혹은 그 아들)를 보내도록 꾸짖었다. 장소나 진송(秦松) 등은 우물쭈물하여 결단하지 못했는데, 손권의 뜻은 볼모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고, 주유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밝히자 손권의 모친도 찬성하여 결국 볼모를 보내지 않았다.
건안 11년(206년), 마둔과 보둔을 쳐 그 우두머리를 효수하고 포로를 잡아왔으며, 황조가 등룡(鄧龍)을 보내 시상현을 공격하자 이를 쳐 등룡을 사로잡아 오로 압송했다. 건안 13년(208년) 봄에 손권이 황조를 칠 때 전부대독이 되었다.
(3) 적벽 대전(赤壁大戰 / 赤壁大戦 / 208년) Battle of Red Cliffs
이 해 9월, 하북을 통일한 조조가 군대를 인솔해서 남하하고, 형주자사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그 병사를 흡수하면서, 수병과 보병 아울러서 80만이라고도 하는 대군이 되었다. 이 사태 당시의 손권 진영에서는 조조가 후한의 승상으로써 대의명분을 갖추고 있고, 장강의 지리적 이점도 조조가 형주를 얻고 유표(劉表)의 수군을 얻는 바람에 없어졌으므로 항복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유는 노숙과 함께 의견을 같이 해서 싸움을 주장했다. 주유는 조조를 후한의 적으로 규정하여 조조의 대의명분을 부정했고, 또 조조군에 있는 많은 불리한 점과 대항하는 자군의 이로운 점 등을 설명해서, 이에 뜻을 얻은 손권은 조조에게 대항하는 일을 결단했다.
손권은 3만 군사를 주유와 정보(程普) 등에게 주었고 이때 형주로부터 피해 온 유비(劉備)와 협력해 조조를 적벽의 땅에서 대치했다. 조조군은 벌써 군대에 전염병 등을 안고 있어서 단 한 번의 교전에서 조조군은 패배하고, 장강 북안에 주둔했다. 주유는 남안에 포진하고, 황개(黃蓋)의 화공책을 채용하고, 사항계라는 이중의 계책을 고안해내어 황개로 하여금 조조군에 거짓 투항하게 만들어 조조군 함대 내에서 화공을 실행하도록 계획했다. 이후 투항을 위장해 접근에 성공한 황개가 조조군의 선단에 불을 질렀다. 불은 금세 다른 배에 번져서, 거의 모든 배가 타들었다. 피해가 아주 컸기 때문에 조조군은 마침내 패배했고 조조는 도망쳤다.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조조를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曹仁)에게 강릉성(江陵城)의 수비를, 악진(樂進)에게는 양양의 수비를 맡겼고 자신은 북쪽으로 도망쳐 갔다.
(4) 강릉 전투
208년 12월에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 주유는 유비와 함께 남군까지 조조를 추격, 이후 강릉에서 조인과 대치한다. 감녕(甘寧)에게 명하여 이릉을 점령하게 하지만 감녕이 조인에게 패하여 포위당하자 위태로움을 주유에게 알렸다.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인과 전투를 치르지만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다.이에 조인이 주유를 격파하였다. 조인이 군을 이끌고 주유에게 싸움을 걸었다. 주유는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유비와 함께 조인을 공격하였다. 조인은 군량이 부족하고 부상당한 병사들도 많아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였다. 유비가 군을 이끌고 남군을 포위하였다. 주유는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말을 타고 군을 통솔했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후 유비군의 관우(關羽)와 함께 후퇴하는 조인군을 격파, 관우가 이통에게 격파당해 결국 조인을 잡진 못했으나 1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강릉을 점령한다.
(5) 일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술에 많이 취했어도 연주한 음악의 음이 틀리면 그것을 알아채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곡(曲)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라고 말을 했다.
손권의 가신 중 정보(程普)는 손견이 거병할 때부터 손가를 섬겼던, 황개(黃蓋)나 한당(韓當)보다 오래된 가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유보다 연장자이기에 그를 무시했는데, 주유는 오히려 정보에게 성의를 다한 태도를 보였다. 후에 정보는 감복하고 주유와 친해지고 존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주유의 친화력을 평하기를 “주공근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과 같아서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했다.
(6) 평가
명문가의 자제답게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당초 적벽대전 전에 주유는 손권에게 5만의 군사를 청했는데, 손권은 3만만을 주었을 뿐이다. 이후 유비와 만나고 유비가 “조조를 격파하기에는 모자라다.”라고 말을 하자 오히려 주유는 “격파하기 충분한 숫자이니 유공께서는 지켜보기만 하십시오.”라고 말을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일화이다.
당대 최고의 군략가 조조 또한 주유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며 높게 평가하였다.
손권은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칭했을 때, 공경들에게 "주공근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을 시기하여 거듭 죽이려고 하나 정사에서의 주유는 제갈량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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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1.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개요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1)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개요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영국 작가 :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풍자소설.
저자 :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국가 : 영국
장르 : 풍자 소설
발표 년도 : 1726년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는 영국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1726년작 풍자 소설이다.
총 4권, 1726년 간행. 주인공 걸리버가 항해 중에 난파하여, 소인국·대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馬]나라 등으로 표류해 다니면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는 줄거리이다.
당시 시대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로,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나라에서 동화로 각색되어 아이들을 위해 많이 읽혔다. 주로 동화에서는 3부까지의 여행을 수록하였으며, 4부는 신성 모독 등을 이유로 들어 삭제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1부인 작은 사람들의 나라인 릴리퍼트 기행을 걸리버 여행기의 전체 내용인 것처럼 알려져 왔다. 소설의 내용을 모델로 각색하여 만들어진 영화 걸리버 여행기가 개봉하였다.
자유분방한 상상력 때문에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애독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첫 2권인 소인국과 대인국 편이 다소 고쳐져서 아동물(兒童物)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원래는 모두가 통렬한 인간 매도(罵倒)의 풍자적 작품으로, 그 점에서는 마지막의 말나라편이 가장 뛰어나다. 이 나라에서는 이성을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는 존재가 말이며, 인간에 해당하는 야후(Yahoo)라는 동물은 말에게 사육되고 있든, 야생이든 간에 매우 추악·비열·불결하고 뻔뻔스러운 종족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와 동서고금을 통해서 적어도 인간인 이상 그것은 모조리 혐오해야 할 동물이라는 철저한 불만으로 일관되어 있다. 또한 인간증오의 정신과 비범한 착상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특이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1946년 조선아동문화협회 편집부에서 소인국편과 대인국편이 처음 번역 출간되었으며, 완역판은 1992년에 이루어졌다.
(2) Gulliver's Travels, or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 In Four Parts. By Lemuel Gulliver, First a Surgeon, and then a Captain of Several Ships is a 1726 prose satire by the Anglo-Irish writer and clergyman Jonathan Swift, satirising both human nature and the "travellers' tales" literary subgenre. It is Swift's best known full-length work, and a classic of English literature. Swift claimed that he wrote Gulliver's Travels "to vex the world rather than divert it".
The book was an immediate success. The English dramatist John Gay remarked "It is universally read, from the cabinet council to the nursery."[3] In 2015, Robert McCrum released his selection list of 100 best novels of all time in which Gulliver's Travels is listed as "a satirical master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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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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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모비 딕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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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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