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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오프닝 이미지(Opening Image)
영화 평론이 홍수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을 수 있는 평론은 오히려 낯선 것이 되었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영화에 대한 평가들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다. 더구나 블로그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는 영화를 본 관객 스스로를 잠재적인 평론가가 되게 했고 그래서 각자의 생각들은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굳이 나까지 그 홍수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월간 〈빛〉잡지를 읽으시는 독자들에게 내 평론이 꼭 필요 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런 저런 것들을 영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풀어나가면 괜찮을 것 같다. 친구들과 산책을 하면서 가볍게 나누는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중에 섞여 나오는 영화이야기처럼 말이다.
영화에 관한 글을 부탁받은 이유는 미국에서 2년 동안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유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언어였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교포사목을 하면서 나름대로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지내는 미국 사람들에게 지금 나의 영어실력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모두 가능하다고 했다. 입학 후 수업을 들으면서 나에게 해주었던 그들의 대답이 미국인 특유의 아주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격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에 관한 평론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를 제작하는 ‘필름메이킹(Filmmaking)’ 과정이었기 때문에 수업현장에서 알아듣고 답해야 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그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나리오 수업(Screenwriting class)’이었다. 각자가 감독할 영화에 대한 시나리오를 발표하면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그것에 관해 평가하고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이미 알고 있거나 보았던 영화라면 그나마 이해하기가 수월했을 텐데 새로운, 더구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를 영어로 이해하고 질문과 평가까지 해야 하니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수업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해 2월에 귀국해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영화와는 관련이 없다. 유일하게 영화에 대해 3분 남짓 말하는 시간이 있는데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인성캠프’이다. 프로그램 중에 학생들이 인성(人性)에 관해 짧은 영화를 만드는 시간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배우’ 혹은 ‘감독’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답은 ‘이야기’이다. 영화란 ‘비주얼 스토리(Visual Story)’, 즉 보이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인기 있는 배우가 나온다 하더라도, 현실과 분간할 수 없는 화려한 특수효과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관객들의 흥미와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면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화려한 배우들의 캐스팅과 공격적이고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개봉 초기에 잠시 관심은 얻을 수 있겠지만 이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반면에 개봉 초기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소위 말하는 ‘입소문’의 힘으로 점점 관객이 몰리고 때로는 재상영을 요구받는 영화도 있다. 결국 영화의 힘은 이야기의 힘에서 비롯된다. 물론 좋은 영화에 있어서 감독의 연출력이나 배우의 연기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연출력이나 연기력은 좋은 이야기에서만 가능하다. 수업 중에 시나리오에 관한 수업이 힘들고 비중도 많았던 이유는 영화에서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이야기’의 비중은 본질 자체이기 때문에 연출하는 감독에게 이야기의 시작은 가벼울 수 없다.
어두운 영화관, 스크린에 빛이 들어올 때 우리는 잔뜩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설렌다. 그리고 각 영화마다 길게 혹은 짧게 그 이야기에 관한 첫 인상을 남기는 데 그것을 ‘오프닝 이미지(Opening Image)’라고 한다. 2016년에 ‘립반 윙클의 신부(A Bride For Rip Van Winkle)’ 라는 영화로 12년 만에 국내 관객을 찾아온 ‘이와이 지’ 감독의 1995년 연출작 ‘러브레터(Love Letter)’의 첫 장면은 ‘오프닝 이미지’에 관한 훌륭한 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심지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각종 패러디로 인해 기억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Climax)’에서 여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십니까?)’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프닝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여자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새하얀 눈 위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숨을 참고 있다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일어나 검은 코트에 묻은 흰 눈을 털어내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조난을 당해 죽은 남자친구인 ‘후지이 이츠키’(가시와바리 다카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통 눈으로 덮인 마을로 내려가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의 ‘톤(Tone), 분위기(Mood), 스타일(Style), 그리고 주인공’을 보여준다. 감독은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숨을 참는 장면을 ‘클로즈 업 샷(Close up shot)’으로 처리해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잃어버린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아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반면에 홀로 산을 한참동안 내려가는 장면은 공중에서 주인공의 모습을 하얀 눈 속에서 아주 작게 보이도록 ‘버드 아이즈 뷰(Bird eyes view)’ 형식으로 촬영해 홀로 남겨진 주인공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그려냈다. 검은색 코트와 하얀 눈, 상반된 카메라 앵글들을 통해 묘사된 ‘오프닝 이미지’는 이 영화의 주제인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전해주고 있다.
2017년 새해 첫 달인 1월은, 올 한 해를 한 편의 영화로 생각한다면 ‘오프닝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어두운 스크린 앞에서 느끼는 호기심과 설렘은 새로운 한 해, 첫 달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러하다. 열두 달이라는 러닝타임에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처음 보는 영화가 그러하듯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사랑과 갈등을 하고 여러 가지 사건들 안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영화보다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결국 영화가 ‘보이는 이야기’이듯이 우리의 삶도 다름 아닌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기는 것은 ‘클라이맥스(Climax)’이듯 어쩌면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의 달성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프닝 이미지’가 영화 전체의 톤, 분위기, 스타일, 그리고 이야기를 그려 나갈 주인공을 짧지만 함축적으로 담아 소개시켜주듯 한 해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달에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클라이맥스’에 대한 강박보다는 차분히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를 바라보면서 올 한 해의 톤, 분위기, 스타일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 회화, 다이어트, 금연, 금주’ 같은 새해 첫 달에 세우는 반복적인 실패와 자괴감을 일으키는 목표들은 이야기에서 ‘클라이맥스’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올 한 해 펼쳐질 나의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그리고 그 이야기를 결정할 톤, 분위기, 스타일을 알아내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 단순함에서 온다. 서두르지 않는 단순함은 나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기억시키고,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쓸 수 있는 이야기’ 사이에서 오는 흥미로우면서도 구체적인 ‘오프닝 이미지’를 그려줄 것이다.
새로운 한 해,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에 설레는 첫 달, 각자의 멋진 ‘오프닝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려 나가길 소망한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갈등’(Conflict)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이야기’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창조해서 전달하는 것이 영화이다. 단순히 감독, 배우, 카메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시나리오 작가, 그 이야기를 영화적인 언어로 창조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감독, 그 영화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프로듀서, 촬영현장을 통제하는 조감독, 영상을 만들어내는 카메라 팀, 조명 팀, 오디오 팀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공동 작업이다. 그래서 영화제작현장에서 ‘팀워크(Teamwork)’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많은 감독들이 이전 그의 작품에 함께 했던 프로듀서, 배우들, 그리고 제작팀들과 다시 함께 작업하는 것은 호흡을 함께하면서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야 할 큰 일 중에 하나가 ‘팀(Team)’을 꾸리는 일이다.
마지막 졸업 작품을 앞두고 함께 작업할 사람들을 만나보고 선택하는 것으로 고민이 많았던 2년 전 봄, 식당에서 우연히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준 쾅’이라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으로 늘 성실하고 열심한 친구였다. 많은 중국 유학생들이 같은 중국사람들끼리 어울리고 함께 작업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그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 친구들과도 많이 어울리고 작업도 함께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작품에 함께 일할 팀 구성 때문에 고민한다고 말하자 준 쾅은 “뭐가 가장 걱정이니?”라고 물었다. 나는 “Conflict(갈등)”라고 대답했다. 준 쾅은 씩 웃더니 “Life is conflict.(인생이 갈등이지.)”라며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대답은 나도 의식하지 못한 내가 팀을 구성하는 기준을 깨닫게 했다. 그것은 ‘갈등을 피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팀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피하고 싶은 데에 마음이 온통 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화제작현장에서 갈등이 심각해지면 작업이 진행되는데 지장을 주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 자체가 없는 현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보이는 이야기(Visual Story)’다. 그 이야기가 진행되기 위해 반드시 나오는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갈등’이다. 모든 영화에는 갈등이라는 요소가 있다. 액션영화는 주인공과 악당 간에 갈등, 가족영화는 가족들 간에 갈등, 사회비판영화는 사회구성원들 간에 갈등 등 모든 장르의 영화는 갈등이라는 요소 없이 진행될 수 없다. 그래서 ‘갈등’이라는 요소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다.
‘갈등’은 ‘다름’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때 충돌이 일어나고 감정이 불편해진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는 갈등으로 인한 불편함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그래서 ‘갈등은 곧 불편함’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영화에서 ‘갈등’은 불편함이라기보다는 이야기를 상승시키고 흥미와 재미를 더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준 쾅의 말대로 ‘인생은 갈등의 연속’이다. 준 쾅이 다른 중국 유학생들과 달리 다른 나라 학생들과 잘 어울리고 함께 작업한 이유는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 피하지 않고 인생에서 당연히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갈등에 대한 그의 자세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일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성실함으로 드러나 누구나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로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갈등’을 부정적인 요소로만 보고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영화제작 현장에서 팀 내부에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감독이 갈등에서 오는 불편함이 두려워서 ‘좋은 게 좋다.’ 혹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회피한다면 현장은 엉망이 되고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올 수 없다. 영화제작현장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사에서 이러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갈등은 매 순간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며 일상이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갈등 상황 안에 계신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과의 갈등, 심지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의 갈등,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느끼는 당신 내면과의 갈등까지 예수님의 삶 또한 우리처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갈등을 피하지 않으셨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으셨고, 제자들 간의 갈등도 외면하지 않으셨으며, 당신의 내면 안에서의 갈등에서도 피눈물을 쏟으실 만큼 그 자체를 직면하셨다. 그래서 유다교 지도자들의 위선이 드러났고,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정화되었으며,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로 구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갈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심각한 가족들 간의 갈등상황까지 이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갈등이 결코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이 불이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 12,48)는 말씀을 통해 갈등의 불이 단순히 다름에서 일어나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닌, 신앙적 선택의 여정에서 오는 당연한 과정임을 드러내신다.
영화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갈등을 통해 진행되고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설득한다. 그래서 좋은 영화는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배우가 수상소감에서 말했듯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또한 삶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피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올바르게 해소시켜 나갈 때 좋은 영화처럼 우리를, 교회를, 사회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봄날은 간다'
계절에 관한 영화들은 늘 그 계절이 되면 우리 기억 속에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자극적인 요소 하나 없이 관객들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평범하지 않게 이끌어냈던 감독은 두 번째 작품 ‘봄날은 간다’에서도 놀랍고도 매력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음향기술자 ‘상우’(유지태)는 방송국 프로듀서 ‘은수’(이영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프러포즈의 신호를 보내는 상우에게 이별 통보를 한다. 연애와 이별의 경험이 없던 상우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은 채 자신을 피하는 은수의 태도에 당황하고 급기야 이별을 통보하는 은수에게 매달리게 된다. 특별한 것 하나 없이 너무나 평범하지만 우리 삶 속에 이별을 대했을 때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늘 우리 삶 안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물음을 은수에게 던지며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우는 은수 주변을 유치한 집착으로 서성인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 날, 그리스도교가 국교인 나라들에서는 ‘카니발 축제’를 지내며 이별 앞에서 느끼는 집착과 아쉬움을 풀어내려고 한다. 40일 동안 우리가 요구받는 것은 ‘이별’이다. 하느님 이외에 나를 지탱시켜주는 것들로부터의 이별, 나를 지탱시켜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가치에 파묻히게 하는 것들로부터의 이별. 이러한 것들과의 이별 없이는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가질 수 없기에 우리는 매년 짧지 않은 이별의 시간을 반복한다. 일정하게 수많은 반복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 시간은 여전히 처음 보내는 듯 어렵다. 그것은 ‘상실’이기 때문이다. 이별은 상실이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위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절망하고 그 절망이 우리를 긴 시간 동안 방치할 때 시간마저 약이 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이별이 주는 상실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성경은 많은 이야기들로 이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해준다. 소돔을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몸으로는 떠나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이별하지 못했던 사라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린 이야기(창세기 19장)는 이별에 잘 대처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삶도 생명을 잃고 성장을 멈춰 버린다는 것을 전해준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마태오 19,16-26)는 실제로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그것을 놓지 못해 유치한 모습을 불사하고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중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한 은수와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이별하는, 아니 이별해내는 상우의 모습은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하나의 점으로 끌어당긴다. 은수는 화분을 상우에게 주는 것으로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하며 상우의 기억 안에 자신을 붙잡아 두려 한다. 화분을 받아들고 몇 걸음 가다가 멈추고 망설이다 다시 은수에게 돌아가 그것을 돌려주는 상우, 그의 망설임 속에서 느껴지는 이별의 무거운 중력은 관객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을 해내는 상우는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라 삶에 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을 보여준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드러나지만 ‘봄날은 간다’에서 전달되는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철학’이다. ‘한석규, 심은하, 유지태, 이영애’ 같은 최고의 스타들이 나오지만 영화들 안에서 그들의 스타성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당시 배우들의 브랜드네임에 이끌려 감성의 대리만족을 위한 로맨틱 코미디나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에 감정적 이입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며 이 영화들을 보았던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적 에피소드의 잔잔한 전개에 당황해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감독은 일상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이별의 경험들을 과대포장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찰로 이끌어낸다.
십수 년 전, 본당 사무장님과 수녀님을 모시고 봉성체를 갔다가 돌아올 때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탄성과 박수로 응답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던 수녀님은 당신과 달리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처연하고 서러운 감정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무장님과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셨다. 두 남자에게는 찬란한 봄볕 아래 흩날리는 벚꽃에서 아름다움보다 이별의 서러움이 먼저 보였다. 어쩌면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이별의 서러움을 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벚꽃의 아름다움은 그 서러움에서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벚꽃 찬란한 시간은 늘 우리에게 이별을 요구하는 사순시기이다. 그러나 사순시기가 그 자체가 아닌 새롭고 진정한 부활의 생명 안에서 의미를 지니듯 하느님 이외에 나를 지탱시켜 주고 있는 것들과의 이별은 진정한 나와 참된 삶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나를 지탱시켜주는 것들 또한 하느님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에 이별이 감당하기 힘든 서러움을 준다 해도 우리는 결국 해내야만 한다. 이별을 해낸 후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밭의 소리를 녹음하는 주인공 ‘상우’의 모습처럼 우리의 마음을 흐트리는 것들에 눈을 감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진정한 삶, 부활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제였나 그대와 이 길을 걸었던 날 ... 꽃처럼 웃었던가 사랑한 아스라한 기억들 ... 언제였나 그리워 헤매던 나날들 ... 분명 난 울었던가 세월에 사라져간 얘기들 ... 나 참 먼 길을 아득하게 헤맨 듯 해 ... 얼마나 멀리 간 걸까 ... 그 해 봄에 ... 아파하던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 힘겹게 돌아오니 어느새 ... 봄이 가고 있네요 - ‘그해 봄에’(노래: 유지태, ‘봄날은 간다’ OST 중)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 속 이미지
한 달 전,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동기신부의 휴대폰을 개통하기 위해 함께 갔다. 개통을 위해 직원이 그 신부에 관한 정보를 묻다가 우리들이 신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지만 자신도 신자라고 밝히더니 우리에게 “혹시 신부님들도 라틴어를 외우면서 마귀를 쫓아내세요?”라고 물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영화 “검은 사제들”(장재현 감독, 2015) 때문인데 이전에도 종종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일하고 있는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는 3박 4일 동안 신입생 캠프를 진행한다. 그때 신부들이 수단을 입고 공연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신입생들에게 “이 옷을 어디서 봤어요?”라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 “검은 사제들”이라고 대답한다. 가톨릭이 소수인 우리나라에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가톨릭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요즘 가톨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이 나온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역사가 짧은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을 소재로 선택하는 이유는 2000년이 넘는 긴 역사 동안 지니고 있는 엄청난 이미지들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씩 가톨릭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다보면 웃음이 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사제가 주교님을 뵙기 위해 교구청에 찾아가면 주교님은 늘 정식복장을 하고 맞이하신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주교님께서 늘 자주색 수단을 입고 주께또(Zuchetto, 주교가 쓰는 붉은 작은 모자)를 쓰고 사무실에 계시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그렇게 묘사한 것은 그 인물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정보이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뿐만 아니라 의상과 배경, 색감 등 이미지들을 통해 영화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는 정보(Information)가 있다.
영화는 이야기를 움직이는 이미지들로 풀어내는 예술이다. 이제는 4D, 즉 후각과 감각까지도 느끼게 만드는 시대가 되어 더욱더 강력하게 이야기에 관객들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미지의 결합이 가져오는 힘이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이미지는 이야기가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의 힘’이며 영화가 다른 어떤 예술분야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효과를 내는 이유다. 이미지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고 그 이야기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홍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홍보실은 수많은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곳이다. 그 이미지들은 단순히 외모가 예쁜 학생들의 모습이나 멋진 건물을 싣는 것이 아니다. 학교의 교육철학과 리더의 경영방향에 대한 정보가 담긴 이미지여야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지의 홍수인 시대에 아이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contents)’의 진실성이다. 그 중요성을 나에게 보여준 분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아닌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출되시던 2013년 3월 13일, 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훼잇빌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있었다. 2002년 보스턴 교구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시작으로 미국의 가톨릭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내가 그곳에 있을 때는 그러한 분위기가 특별할 것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미군병원 성당에서 미국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그 신부님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출되시고 나서 미사에 나오는 신자들이 확연히 늘었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도 가톨릭에 대해 좋지 못한 보도로 일관해오던 미국의 TV매체들이 이전과는 달리 긍정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출 초기에 보여주신 이미지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선출되시던 날 밤, 교황 명을 가난의 영성으로 교회를 일깨웠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 정하셨고 베드로광장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며 무릎을 꿇으셨다. 또한 교황청 관저가 아닌 게스트 하우스에서 사제들과 함께 지내시는 모습, 자신의 신변보호보다는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시는 모습을 많은 매체들은 이례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보도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습은 그분이 하시는 말씀보다도 훨씬 더 사람들을 주목시켰고 그분이 앞으로 어떻게 가톨릭교회를 이끌어 가실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미지의 힘’이다. 요즘 말하는 ‘신의 한 수’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미지는 2002년 이후 엄청난 타격을 입고 회복 불가능해 보이던 가톨릭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회복시켰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보여주신 이미지들은 확실하게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 교회와 세상에 전달시켰고 변화를 일으켰다. 누구보다도 교황님은 이러한 이미지의 힘을 잘 이해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한 ‘코스프레’가 아니었다. 교황이 되기 전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으로 살아왔던 모습의 진실성이 이미지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분의 진실성이 담긴 가난의 이미지는 ‘개혁’이라는 교회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이미지로 이어지면서 폭발력을 가졌다. 그것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바티칸 은행의 개혁과 더불어 교회의 어두운 면을 숨기는 것이 아닌 리더로서 책임지는 모습으로 교회의 본질 회복에 관한 이미지와 더불어 개혁에 대한 가능성의 이미지를 충분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 이미지들이 지닌 정보와 이야기들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조작된 이미지와 진실된 이미지의 기준은 이미지가 나타내고자 하는 정보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훗날 우리 가톨릭교회가 영화의 이미지들로만 소비되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진실성을 담은 살아있는 이미지의 교회로 성장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 속 정치
넷플릭스(세계적인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2016년부터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했다.)의 인기 드라마 중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는 미국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정치 드라마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드라마는 많은 인기를 얻으며 2017년에 시즌 5가 방영될 예정이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하원 의원인 프랜시스 프랭크 언더우드(캐빈 스페이시)와 그의 아내 클레어(로빈 라이트)가 워싱턴 정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일으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드라마는 전개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영상 전체를 지배하는 색깔(Color tone)이 있는데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에서는 따뜻한 주황이나 노란색 계열을, 순수한 사랑이나 우정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는 환한 흰색 계열을 쓴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경우 전체적으로 블루(Blue) 톤 계열을 이용해 표현했다. 둘은 부부지만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는 서로의 외도조차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정치적 파트너의 관계일 뿐이고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 배신과 음모, 심지어 살인조차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와 잘못된 정치를 고발하는 내용은 영화의 주 메뉴였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는 당시의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코미디라는 장르로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많은 영화들이 당시 사회의 잘못된 현상에 답답해하던 대중들의 마음을 해소시켜 주었다.
우리나라 영화의 경우는 어떠할까? 영화 ‘내부자들’, ‘마스터’, ‘더 킹’ 등 유독 우리나라에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영화가 많다. 왜 그럴까? 영화를 제작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관객이다. 어떤 관객층을 타깃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스토리의 방향을 잡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부패한 정권과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것은 현 사회현상에 대해 답답해하고 분노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영화를 통해서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얼마 전 개봉한 ‘더 킹’(2017, 한재림 감독)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주인공 태수(조인성)의 성장과정을 한국 정치사의 어두운 면과 결합시켜 이끌어 나간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인지를 알기에 비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약간의 용기를 내 본다면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이 너무 직설적이다. 영화의 영상과 대사, 음악은 그 영화가 뜻하고자 하는 것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특히 권력의 설계자인 ‘한강식’(정우성)이 ‘태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하는 충고는 추리소설에서 누가 범인인지를 미리 가르쳐 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의 비판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기 보다는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현실상황에 대한 정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고 감히 짐작해본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사회적 부조리를 주제로 한, 특히 권선징악의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들이 흥행을 하는 것이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다. 결국 영화는 자극이 될 수 있을 뿐 현실세계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의 반복이 어쩌면 사람들에게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은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약화시키고 우리를 지치게 만들며 급기야 포기하게 만든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선의를 지니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키는 상황이 반복해서 벌어질 때 일어나는 일종의 ‘번 아웃(Burn out)’현상이다. 냉소주의는 ‘번 아웃’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냉소주의는 아직 ‘번 아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가지고, 선의를 가지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실망시키는 전염병이다. 냉소주의는 불합리한 상황의 반복에 대해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악한 자들과는 다르며,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갈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주의’가 아니라 ‘인내’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분도출판사, 2016)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라하의 사제 ‘토마시 할리크’는 “신앙과 무신론의 가장 큰 차이는 ‘인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수많은 기적과 말씀에도 불구하고 비아냥과 음모, 심지어 당신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배신까지 당하시지만 그분은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인내’이다. 그리고 지금도 인내하고 계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인내를 뜻하는 영어 단어 ‘perseverance’는 단순히 자신의 감정이나 불편한 상황을 참고 억제하는 ‘Hold’의 뜻만이 아니라 ‘steady persistence’, 즉 어려움들, 장애물들 혹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계속해서 해 나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내이며 세상을 바꿔 나가는, 하느님 뜻대로 우리를 바꿔 나가는 힘이다.
지난 몇 개월간 우리나라는 크나큰 홍역을 앓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더 이상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함께 마음을 모아 인내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는 시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배우
영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들 중 가장 관객들을 사로잡고 관객들의 기억 속에 남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배우’다. 영화를 창조하는 감독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지라도 그 감독이 창조해낸 인물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배우의 영향력은 직접적이다. 그래서 어느 감독이 그 작품을 연출했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느 배우가 그 작품에 출연했느냐가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하는데 더 큰 영향을 준다. 그렇지만 유명한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모든 영화들이 흥행하지는 않는다. 아주 훌륭한 배우라 할지라도 작품의 캐릭터(Character, 등장인물)와 맞지 않아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유명한 배우라고 할지라도 오디션(Audition)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얼마 전 필자가 일하는 대구가톨릭대학교 홍보실에서 학교 홍보영화에 출연할 배우를 선발하기 위한 오디션을 열었다. 64명의 학생들이 지원했는데 안타깝게도 영화에 맞는 캐릭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전원탈락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경험이다.
유학시절, 영화를 공부하면서 어려웠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배우를 뽑는 일이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레스토랑 홀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절반이 배우 지망생이라고 할 정도로 연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학생작품이라 해도 자신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 배우가 출연한 영화의 리스트 혹은 경력)를 쌓고자 많은 사람들이 오디션에 지원한다. 그러나 감독이 원하는 캐릭터를 소화할 만한 배우를 캐스팅하기는 정말 어렵다. 도저히 원하는 배우를 구할 수 없어 차선책으로 캐스팅했다가 현장에서 원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으면 정말 난감하다.
배우(Actor)는 흉내(Pretend)내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Acting)하는 사람이다. 감독의 생각 안에 존재하는 그 캐릭터의 인물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행동이 바뀌려면 마음이 바뀌어야 하고 마음이 바뀌려면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즉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 진짜 연기가 나온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연기가 미숙한 아이돌 스타들을 출연시키는 것을 볼 때 관객들이 느끼는 어색함은 그것이 acting이 아니라 pretend이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들이 감독이 배우에게 ‘손동작은 이렇게, 표정은 저렇게’ 하는 식으로 연기를 지시한다고 오해한다. 한국에서 공부한 경험이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굉장히 금기시 되는 디렉션 (Direction, 연기지도)이다. 배우를 디렉션하는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대본을 주지 않거나 설사 준다고 해도 아주 짧은 대사들로 이루어진 것을 주었다. 그리고 디렉션을 할 때 배우들에게는 각자에게 맡겨진 캐릭터와 상황만 알려줄 뿐 다른 배우들의 캐릭터나 상황을 알려주지 않게 하였다. 심지어 각각의 배우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 따로 디렉션을 주게 했다. 그리고 나서 배우들을 무대에 세우고 연기를 하게 하면 상대방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채 실제상황처럼 자연스러운 반응과 행동(Improvised acting)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배우는 감독의 아바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가 스스로 그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그래서 촬영 전 많은 시간들을 감독과 배우들은 주어진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창조하는 작업을 해 나간다. 이러한 감독의 역할은 이 시대의 교육과 우리의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구가톨릭대학교 홍보실에서는 광고 카피를 “The University, 대구가톨릭대학교”로 정했다. 독일의 모 자동차 회사가 Das Auto, 즉 독일어로 ‘자동차’를 뜻하는 단어를 광고 카피로 정해 그 회사가 생산한 자동차가 바로 모든 자동차의 본질 그 자체라는 것을 강조한 것처럼 대구가톨릭대학교도 대학교육의 본질 그 자체로 돌아가겠다는 새로운 리더의 교육철학과 경영방향을 드러냈다. 자의적으로 해석된 취업률과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교육부 정책을 획득했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을 발견하고 올바르고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우려와 걱정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취업률과 교육부 정책에 매달린 지금의 대학들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누구도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진짜 교육을 통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좋은 인성과 재능을 갖춘 사람을 배출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도전하는 이유는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대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뜻하는 영어 단어 ‘education’의 라틴어 어원은 ‘밖으로’를 뜻하는 ‘E’와 ‘이끌어내다’를 뜻하는 ‘ducare’이다. 즉 교육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 새로운 것을 적어 넣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심어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마치 감독(Director)이 배우(Actor)에게 일방적으로 원하는 캐릭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그 인물을 창조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하나의 잣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창조적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자 역할이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창조자이신 당신을 닮아 (하느님의 모상, Imago Dei)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또 다른 창조자가 되길 원하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며 불평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느님의 뜻을 창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저 하느님의 아바타가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간과 돈을 교육에 투자하면서도 행복해지지 못하고 점점 나빠지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견하고 성장시켜 스스로를 창조해나가는 교육의 본질, 나아가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1914년 유스티노신학교에서 시작해 103년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우리 교구가 설립한 대구가톨릭대학교가 세상이 말하는 최고의 대학은 아닐지라도 진짜 교육을 하는 진짜 대학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공간
나에게 어릴 적 가장 가고 싶었던 공간은 성당과 영화관이었 다. 두 공간이 나에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그려진 커다란 영화 간판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시작은 기대감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영화관은 내가 살아가는 일상과 공간이 카메라와 배우들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어 다가오는 공간이었다. 각자의 집에서 혹은 어느 장소에서든지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통해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직도 영화관에 찾아가는 수고를 하는 이유는 일상을 벗어나게 하는 공간이 주는 의미 때문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고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를 생각하는 자체가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기보다 일상에 반드시 필요한 여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 다양한 영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영화관은 없어질 것이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영화관은 우리들 일상 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역시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에 성당은 영화관처럼 종합예술공간이었다. 미술관이었고 콘서트홀이었다. 스토리가 담긴 아름다운 그림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일상의 빛을 천상의 색깔로 변화시켜 인간의 영혼에 와 닿았다. 성가대의 노래와 악기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평소에는 침묵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영혼을 일깨워 일상의 소리를 천상의 음악으로 변화시켰다. 또한 성경의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들이 함께 빚어내는 멋진 스토리텔링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평범한 빵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신자들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배우였다. 성당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일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 일상 안에 숨겨진 놀라운 하느님 손길의 의미를 발견했으며 그들의 일상이 영원과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창조(Creation)는 단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공간(Space)을 통해 인간들을 계속해서 창조(Recreation)해 나가셨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그 녹록지 않음으로 인해 즐기기보다는 버텨내야 하는 시간으로 느낄 때가 많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내야 하는 일들이 많고 연달아 밀려 있는 프로젝트들을 계속 치러내야 하다보면 그 일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삶은 물론 나 자신을 돌볼 여유를 가질 수 없다. 텔레비전에서는 힐링을 주제로 한 온갖 프로그램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힐링이 된다.’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자체가 공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깨끗한 물을 붓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빨리 맑은 물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아무리 많은 깨끗한 물을 더한다 해도 오히려 시간만 더 길어질 뿐이다. 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시간의 여백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는 ‘꿈’(우리말의 ‘꿈’과 라틴어에서 ‘함께’라는 의미의 CUM)이라는 책을 만든다. 함께 작업하는 작가님이 책 제작을 의뢰해오는 분들을 설득시키기 힘들 때가 여백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책에 들어가는 내용과 내용 사이에 반드시 여백의 공간이 들어가야 읽는 사람들이 답답해하지 않고 계속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는 분들은 그 빈 공간을 볼 때마다 “왜 이 곳을 비워 놓느냐?”며 하나라도 더 채워 넣기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비어있는 공간의 중요성과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이다.
음악이란 음표와 음표 사이의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음표와 음표 사이에 쉼표가 있어야 아름답고 창조적인 음악이 될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더운 여름철에는 심각한 주제의 영화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가 많이 나온다.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나치게 액션만 계속되면 재미와 카타르시스보다는 오히려 피로감을 더할뿐이다.
우리에게는 여백의 공간(Space)이 필요하다.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하루를 하느님께서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로 찍으셨다. 그 쉼표는 당신이 이 세상의 창조를 끝낸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계속 창조를 이어 가시겠다는 표시이며 당신을 닮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가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일러주시는 것이다. 일 년의 절반이 지나고 새로운 절반 앞에 서 있는 우리,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할 때이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Crew
2014년 여름, 영화학교에서 1년 과정을 마무리하는 촬영을 석 달간 이어가면서 지쳐가는 우리를 뉴욕의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는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각자에게 일주일의 촬영 시간이 주어졌고 나머지 기간은 다른 사람의 촬영에 참여해야 했다. 학생 신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촬영비용을 준비해야 했고 감독뿐만 아니라 프로듀서 역할까지 다 해야 하는 상황이 어렵고 힘들기는 미국인 학생들이나 유학생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른 반들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을 흉보면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나름 재미있게 잘 지내오고 있다고 여긴 생각이 섣부른 자만이었다는 것을 석 달간의 촬영이 증명해주었다. 서로에게 발견하지 못했던 이기적인 모습에 점점 커지는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언제인지가 문제였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하필 내가 그 중에 하나가 되어 브룩클린에 있는 스튜디오 앞에서 나보다 23세 어린 중국 여자애와 한바탕 싸움을 했다. 촬영 내내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녀의 행동을 벼르고 있었던 나는 그 친구가 촬영 후 장비반납 때 못 오는 이유를 “I am tired.(나는 피곤해.)”라고 하는 순간 아주 엄한 본당신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그때 내가 신부란 사실을 숨기고 공부했던 게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고 결국 영어가 아닌 중국어가 난무했다. 틀림없이 욕이었을 것이다. 반 친구들이 말리면서 사태는 진정되었고 모두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데 동의하며 서로 화해했다. 또한 그 사건이 우연한 사건이 아닌 영화 현장에서 반드시 겪게 될 필연적 사건임을 예감하게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우리에게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작업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을 잘 살펴보면 그 감독과 늘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감독들이 이전 작품과 함께했던 배우와 제작팀과 계속 일하는 이유는 함께 호흡을 맞추며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긴 여행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여행의 설렘이 모든 시간을 마냥 즐겁게 해 줄 것 같지만 낯선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두려움과 육체적인 피로감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만 그 영화를 실제로 작업하는 현장은 극도로 예민하다. 자본, 날씨, 촬영장소, 배우의 상태 등 모든 것이 돌발변수를 안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런 환경에서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와 배려’이며 그것은 창작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지만 함께 창조해나간다는 열정이 현장의 분위기를 형성해낸다. 결국 감독의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키는 것은 최고 개런티로 캐스팅된 배우들과 고가의 카메라 장비가 아니라 바로 ‘사람’, 아니 ‘사람들’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대구가톨릭대학교 홍보실에서는 대학교 홍보 잡지를 일 년에 두 번 출판하고 있었다. 수시지원과 정시지원 시기에 맞추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두 번 만들어내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대학이란 한정된 곳에서 두 달 사이에 다른 내용을 만든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책의 출판 목적인 수험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의 의미를 잃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전한 변화를 꾀했다. 두 번의 출판을 한 번으로 통합하여 잡지(雜誌, Magazine)가 아니라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책(冊, Storytelling book)으로 제작했다. 모든 대학교 홍보책자에 나오는 신임총장 인터뷰도 과감히 생략하고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대상도 수험생이 아닌 학교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로 정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132페이지의 분량으로 독자 중심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회의와 촬영, 인터뷰뿐만 아니라 새로운 행정적 절차를 진행시켜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학교 행사를 준비해야 해서 스케줄을 재조정해야 했고 심지어 담당 직원은 촬영기간 동안 부인과 아기를 친정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기존의 관행적인 문법으로 방어적이고 행정적인 과정으로 만들면 쉽다. 그러나 이 책을 만드는 누구도 그 쉬운 방법을 원하지 않았다. 책을 제작하는 디자인 회사 팀원들도 단순히 계약으로 형성된 관계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대학 책자를 함께 창조해 나가는 열정으로 임해주었다. 결국 창조는 돈이나 유명업체가 아니라 창조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대단한 일은 한 사람이 아니라 팀(Team)이 해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팀(Team)은 스태프(Staff)가 아니라 크루(Crew)이다. 스태프는 단순히 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라면 크루는 함께 창조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다닌 영화 학교에서는 엔딩 크레딧에 항상 ‘크루’라고 쓰도록 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만 스태프와 크루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느낄 수 있다. 일을 함께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스태프가 아닌 크루의 모습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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