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구속사 강해
이스라엘의 중보자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두 개의 돌판을 깨뜨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상징한다(출 32:19).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반신국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인하여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다. 모세는 일련의 정화의 과정을 통해 금송아지를 만든 불순한 사상을 이스라엘에서 제거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와 35장 이하의 성막 건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성막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일련의 정화 사건 이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두 개의 돌판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34:1)과 더불어 성막이 건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약 파괴에 따른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막의 기능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두 돌판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언약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막의 주요 기능이 가지고 있는 '회복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27장 구속사 강해 참고). 이런 점에서 파기된 언약이 성막 안에서 치유된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본 장은 언약 회복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과 단절된 이스라엘
하나님은 잠시 진노를 거두시고 사자를 보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몰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으로 들이시되 하나님께서는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1-3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더 이상 부정한 백성과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부정한 백성을 죽이시는 것으로도 나타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시내산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떠나게 하신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징계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이스라엘의 심적 고통과 상황은 마치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징계의 말씀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성취 될 것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곧 여호와의 사자를 가나안에 보내 이방족속을 몰아내고 그곳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해 들이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3:20-33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확인이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의 정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가나안 땅 정복에 있어 여호와의 사자( )를 앞서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출 23:21). 이름은 인격을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분이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름을 여호와의 사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이미 계시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여호와의 사자를 소개하시면서 참된 신앙으로 성결하게 살 것을 요구하셨다(출 23:24-33).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사자였다. 그리고 그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성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단장품을 제거한 일(6절)은 성결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 밖으로 '회막'을 옮기시고 그곳에서만 모세를 만나시고 말씀을 나누셨다(7-11절). 아직 성막이 건설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막을 진 밖으로 옮기신 것은 성결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회막에 구름 기둥이 머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시고 말씀을 나누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의지를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얼마나 친하게 지내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만큼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하게 구별된 인물이었다. 나아가 이 사실은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있게 알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2. 백성의 중보자로 하나님 앞에 선 모세
모세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앞서 보내시겠다는 약속(출 23:20, 33:2)을 상기시키며 그의 사역에 대해 알고자 한다(12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보자인 모세가 취해야 할 당면한 문제였다.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바로의 학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가실 것(출 3:12)이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모세는 이제 시내산에서 추방당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함께 갈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 여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내( )가 친히 가리라"(14절)고 응답해 주신다. 여기에서 '나'를 상징하는 단어는 '나의 얼굴'이라는 말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와 하나님의 얼굴을 동일한 인물로 묘사하신다. 즉 여호와의 사자( )를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대답 속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동안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출애굽의 과정과 광야 생활을 통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서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여호와께서 이루셔야 할 사역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긴장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가지신 분이시다.
모세는 하나님 자신의 위격(person)과 여호와의 사자로 묘사되는 분의 위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출 33:19)는 말씀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가리우신 후에 모든 영광을 친히 보여주셨다(22-23절). 그러나 모세는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모세가 과연 여기에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모든 의문을 다 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더 이상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모세에게 있어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위격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곧 여호와 자신이라는 점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시며 여호와의 얼굴로 묘사되는 그 '사자'는 바로 여호와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극진하신 긍휼 가운데 그를 덮고 지나가시는 여호와의 등을 보았다(23절)는 점에서 모세는 나름대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신비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모세는 더 이상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두 번째 돌판을 만들어 시내산으로 올라갔다(출 34:1)는 사실에서 모세의 의문이 풀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약의 증거판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은 깨어진 언약의 회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제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에 다시 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재차 언약을 체결하고 있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