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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10월21일, 인도) 라지브 간디 현대문제연구소 강연
뉴 휴머니즘의 세기로
미국·중국·인도가 신세기의 주축으로
삼국이 협조하여 세계를 평화의 궤도로
오늘은 너무도 그립고 존경해 마지않는 라지브 간디 전 수상을 기리는 재단의 초대를 받아, 이렇게 걸출한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최대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소냐 간디 총재, 아비드 후세인 부의장을 비롯해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게는 꿈이’
12년 전(1985년) 일본을 방문하신 라지브 수상과 대화를 주고받던 그 가을의 하루가 지금도 여전히 나의 가슴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라지브 수상은 그 시원한 눈동자로 21세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젊다. 내게는 꿈이 있다. 나는 이런 인도를 꿈꾼다. 강하고 독립되고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세계 여러 나라들의 선두에 서서 ‘인류에게 봉사하는’ 인도를 꿈꾼다.”
신세기를 지향하는 라지브 수상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문명의 뒤떨어짐’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과학기술을 말한다면 그것은 비약적으로 발달했습니다. 사실 나는 일본에서 출발하여 그 날로 귀국에 도착했습니다. 옛날이라면 몇 개월 또는 몇 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대담한 토인비 박사도 현대의 특징을 ‘거리의 소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금세기 세계는 순식간에 좁아졌습니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순식간에 세계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세기만큼 ‘인류가 인류를 살해한’ 세기는 없습니다.
인류의 ‘마음의 거리’는 조금도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현실에 인간은 여전히 대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지브 수상은 ‘시대에 뒤떨어짐’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에 응하지 않는 시대 뒤떨어짐
빈곤과 기아를 극복할 만큼의 힘을 인류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인류는 대량살육의 핵무기를 비롯해 거대한 자원을 낭비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시대에 뒤떨어짐’입니다.
요컨대 인류는 막혀 있습니다.
‘새로운 현실’은 있는데 ‘새로운 인간’이 없습니다. 어지러울 정도의 스피드로 세계는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삶’ ‘새로운 철학’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계’가 확대되지 않는다. 여기에 현대의 근본적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21세기의 요청’입니다. 이 ‘미래에서 들려오는 외침의 소리’에 예리하게 답하려고 했던 것이 라지브 수상입니다.
오늘은 선각자인 라지브 수상을 그리며 소감의 일단을 ‘뉴 휴머니즘의 세기로’ 라는 주제로 피력하고자 합니다.
삼국지와 같이
지금 미래는 너무도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거시안(巨視眼)에서 보면, 나는 21세기는 미국, 중국, 인도라는 삼국이 주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입니다.
정(鼎-세발솥)이라는 다리 셋 달린 그릇은 두 개의 다리로는 안정되지 않습니다. 세 개의 다리여야만 안정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전에 <삼국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두 대국이 대립하는 가운데 세 번째 나라가 일어나면서 그 균형에 의한 평화를 추구해 갔던 것입니다.
그것을 확대해 보면 세계도 두 나라가 중심이 되면 아무래도 대립의 방향으로 가고 맙니다. 세 나라가 있어야만 항상 대화하고 연계를 취하면서 평화의 방향으로 전체의 궤도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도가 세계평화의 이상(理想)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아가 거기에 ‘세계연방’적인 방향으로 갈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세계를 안정시키는 요인으로서 귀국 인도의 흥륭이 매우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국이 지금 시장경제나 고도의 과학기술을 활용하면서 21세기로 웅대하게 비상하려는 자세는 실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다시 한 번 현란한 ‘인도 르네상스’를 나는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인류가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국이 지닌 ‘비폭력의 메시지’는 금후의 인류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계의 내일’을 이미 앞서가는 나라가 귀국인 것입니다.
‘회한(悔恨)의 세기’
한편 20세기를 한 마디로 말해 ‘회한의 세기’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진보를 믿고 경쾌하고 씩씩하게 나가기 시작한 금세기도 되돌아보면 이전에 없던 ‘메가 데쓰(Mega death–대량살육)’와 ‘환경파괴’, 부끄러워해야 할 ‘빈부격차의 확대’라고 하는 황무지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류는 어디서 길을 잘못 든 것일까요.
세기말 인류의 심상(心象) 풍경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귀국의 위대한 왕 아소카 대왕입니다.
무수하게 많은 세계의 왕 가운데에 한층 더 뛰어난 ‘왕 중의 왕’.
토인비 박사도 ‘EU(유럽연합)’의 원류를 만든 카레르기 백작도 나에게 대왕을 격찬하셨습니다. 앙드레 말로 씨, 폴링 박사, 키신저 박사와도 대왕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아소카 대왕의 법칙(法勅-법칙서, 법칙령) 중에 이런 일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깊은 회한이다.”
대왕은 무엇을 후회한 것일까요? 인도 전체를 통일한 강대한 왕의 ‘회한’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알고계신대로 카링가 왕국의 정복입니다.
그 무렵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던 카링가 왕국을 대왕은 침략했습니다. 이겼습니다. 압도적 승리였습니다. 정복은 성공했습니다.
아소카 대왕의 ‘마음의 혁명’
그러나 전쟁의 희생은 너무도 컸습니다. 카링가 왕국에서는 10만 명이 살해되고 15만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몇 배나 되는 사람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버리고 유랑을 해야만 했던 난민도 많았겠지요.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스승과 제자가 - 수많은 아픈 이별이 거듭되었습니다. 한탄하는 소리가 천지를 뒤덮었습니다.
이 지옥도를 면전에 두고 아소카 대왕은 통절한 회한에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이런 정복을 했던가?
무엇을 위해 나는 영토를 확대했던가?
무엇을 위해 나는 ‘힘’을 행사했던가?
행복해야 할 인생이지 않은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지 않은가. 그것들을 파괴하는 전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내게는 대왕의 ‘혼의 외침’이 시대를 뛰어넘어 가슴에 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금세기는 전 세계에서 이것에 몇백배, 몇천배나 되는 비극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인류는 아소카 대왕의 ‘회심(回心)’에서 배워야 한다고 나는 강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의 정복이 아니라
아소카 대왕의 회한은 철저했습니다. 가차 없이 자신을 책했습니다. 그리고 대왕은 분명하게 안 것입니다.
‘힘에 의한 승리’는 진실한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패배에 지나지 않는다. 헛되고 아무런 가치도 낳지 않는다.
‘힘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달마(법)에 의한 정복이야말로 참된 정복’이라고 대왕은 깨달았습니다.
이 ‘힘’이란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을 포함해도 좋겠지요.
또한 ‘달마’란 진리, 정의, 덕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다의(多義)적인 말이지만 귀국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달마’란 ‘문명’이라는 말에 가장 가깝다고 했습니다. 또한 국부(國父) 간디는 ‘문명’의 본의(本義)를 고향의 말(구쟈라트어)로 ‘좋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에 입각하여 나는 ‘달마’란 참된 ‘문명’이고 ‘인도(人道)이며 휴머니즘’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소카 대왕의 ‘마음의 혁명’에 의해 ‘군고(軍鼓)의 울림’은 ‘달마라는 휴머니즘의 교향곡’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내 생애의 테마는 “한 사람 인간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일국의 숙명을 전환하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도 전환할 수 있다”입니다.
그 역사의 일례가 대왕입니다.
대왕은 몽상가는 아니었습니다.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이 없는 휴머니즘은 말의 모순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왕은 완전히 새로운 철학과 완전히 새로운 비전에 의한 ‘실험’을 개시했습니다.
대왕은 국내에서는 복지정책에 힘을 쏟았습니다. “생명 이상으로 존귀한 것은 없다”는 정신의 구현이었습니다.
인간을 위한 병원뿐만 아니라 동물을 위한 병원도 건설했습니다. 약초의 재배나 가로수의 식수 등, ‘환경보호’도 실시. 우물을 파고 각지에 휴식처를 설치했습니다.
여성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여성을 위한 봉사자’라고 불리는 직위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스스로는 불교에 귀의하면서 모든 종교의 정신성을 존중했습니다. 이른바 ‘신교(信敎)의 자유’의 보장입니다. 고대에는 극히 드문 일입니다.
경제의 격차를 시정
이러한 ‘휴머니즘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경제력이 필요해졌습니다. 대왕은 경제기반의 확충을 위해 교통망을 정비하고 그리스, 중동방면과 무역을 확대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석존이 가르쳐 준 경제윤리인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는 원칙’을 실천하고 경제의 격차를 시정하고자 애쓴 것입니다. ‘힘’을 어디에 사용하는가 하는 ‘지혜’를 가진 대왕에게 이미 미혹은 없었습니다.
대왕은 또한 다른 나라들과 적극적으로 문화교류를 했습니다.
시리아나 이집트, 마케도니아 등 서방에도 '평화사절'을 파견하여 평화외교를 전개했습니다. 사절들은 방문한 각지에서 언어나 풍속 등의 차이를 뛰어넘어 자비의 행동에 투철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그 활동을 ‘고대의 평화부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왕의 휴머니즘이 세계를 연결한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의 역사입니다.
라지브 수상이 평화외교를 전개하여 인도의 수상으로서 중국에 34년만에 방문하고 또한 파키스탄과의 우호에 진력한 것은 대단히 유명합니다.
나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몇 번이나 대화하고 대담집도 발간하였습니다. 고르바초프 씨는 라지브 간디 수상과 공동으로 발표한 ‘델리선언(핵무기와 폭력이 없는 세계의 제(諸)원칙에 관한 선언. 1986년 11월)’에 대해 내게 이렇게 피력하셨습니다.
선언 후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우리들은 무조건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회상하며 “간디 수상은 나의 숭고한 벗이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고르바초프 씨는 또한 “나도 인도에 대해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깊은 동정이 있고, ‘평화’와 ‘자유’와 ‘정의’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폭력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선택
폭력은 현실을 악화시킬 뿐
나는 이 의지를 현실정치에 살리고자 한 것이 아소카 대왕이며 마하트마 간디이고 네루 수상이며 라지브 수상이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비폭력이라는 이상(理想)을 현실에 적응시킨다’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폭력은 현실의 과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다. 악화시킬 뿐이다. 비폭력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방침이다’는 확신이지 않을까요.
오랜 기간에서 보면 ‘인간사회’이기 때문에 인간주의(휴머니즘)야말로 구극의 ‘힘’인 것입니다.
해방된 인간이 욕망의 노예로
하지만 하나의 소리로 ‘휴머니즘’을 말해도 그 내용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휴머니즘의 변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지만, 근대 시민사회의 에토스(기본정신)가 된 것은 르네상스와 종교혁명을 거쳐 서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인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하겠지요.
19세기 후반에 그 모순과 취약함을 드러내면서 지향한 것이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도입니다. 이들 근대 휴머니즘은 분명히 중세적인 ‘절대자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욕망에 휘둘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폐해가 사회의 퇴폐와 환경파괴, 빈부의 확대라는 인류적 과제로 분출된 것입니다.
게다가 다양한 원리주의(原理主義)의 대두에 상징되듯이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인류사는 미증유의 시련을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뉴 휴머니즘(우주적 휴머니즘)’은 주장한다
한 사람의 인간은 ‘우주대’로 존귀하다고
이 국면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발랄하고 평화로운 ‘지구문명’의 창조를 향해 어떻게 발을 내딛을 것인가. 그것을 위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나는 막혀버린 근대 휴머니즘을 뛰어넘어 우주관에 입각한 휴머니즘을 제창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이원적 대립’이며, 아무래도 타자(他者)를 ‘차별’하고 ‘배제’하기 쉽습니다.
이에 비해 우주관은 보다 깊은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모든 타자를 수용하는 ‘관용’이라는 특유의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아소카 대왕의 ‘달마라는 휴머니즘의 정치’입니다.
그 첫 번째는 ‘불살생(不殺生)’입니다.
그 두 번째는 ‘서로 공경하라’입니다.
불살생에 대해서는 인간 이외의 생물에도 확대하여 논해야 하겠지만, 나는 적어도 “인간은 인간을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21세기의 ‘인류헌장’의 첫머리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그리고 지금도, ‘정의(正義)’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요.
근대 휴머니즘의 상징인 프랑스혁명에서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습니다. 또한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이 실험과정에서 당초의 취지에서 벗어나 수천만이라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것도 금세기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비극을 단연코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요구되는 ‘뉴 휴머니즘’의 제1항목은 절대로 ‘살생하지 말지어다’라는 황금률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살(殺-죽이는 것)’과 ‘폭력을 동반하는 정의(正義)’는 어떠한 논리로 치장한다 해도 전부 거짓된 정의입니다.
타고르가 평생을 외쳐온 것처럼 ‘희생물’을 요구하는 신(神)은 거짓 신인 것입니다.
인간 신뢰의 철학
그러면 이제까지의 ‘휴머니즘’의 취약점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정밀한 분석을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생략하겠습니다만, 그 근본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아닐까요.
‘인간에 대한 불신’은 자기로 향해지면 무력감이 되고 타인에게 향해지면 대화의 거부가 되고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불신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이 끝없는 유전(流轉)에 제동을 거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야말로 ‘한 인간의 생명은 대우주와 일체가 되는 넓이를 가지며 최고로 존귀한 것’이라고 보는 ‘우주적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상은 귀국의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현인이나 석존의 가르침으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석존의 가르침의 최고봉인 ‘법화경’은 그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화경은 사람들에게 ‘차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공통된 ‘생명의 대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대지에 서면 ‘차이’는 대립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풍부함을 가져오게 됩니다.
‘법화경’의 약초유품(藥草喩品)에서는 갖가지 초목이 같은 비를 맞아 물기를 머금어 동일한 대지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비유를 설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정책은 ‘교육’
그러나 단지 ‘뉴 휴머니즘’을 외치고 ‘우주적 휴머니즘’을 논할 뿐이라면 그것은 관념론이겠지요. 그런 ‘생명 존중’의 사조를 현실에서 펼쳐갈 방도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그 중대한 기둥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나 이데올로기만 있고 ‘교육’이 없다면 아무래도 ‘독선(獨善)’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개개인의 자유라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시대적인 추세이겠지만, 종교를 독선에 빠뜨리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평화의 방향으로 이끄는 날개는 ‘교육’입니다.
타고르가 그의 깊은 종교성에다 서양인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부여했던 열쇠는 그의 교육이며 지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대학의 설립을 비롯하여 교육에 의해 인간을 개발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교육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성이야말로 인류가 그 곳에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보편적 무대입니다.
교육은 사람을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폭력적 열광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킵니다. 우주의 모든 법칙에 대한 무지(無知)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은 교육입니다.
또한 교육에 의해서만이 우리들은 무력감에서 해방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감에서 해방됩니다.
자신의 내면에 잠들고 있는 능력을 꽃피게 하여 ‘완전한 것에 도달하자’는 혼의 의욕을 마음껏 뻗어 간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훌륭한 체험일까요.
차이를 뛰어넘어 ‘생명의 대지’를
자신에 대한 불신감에서 해방된 개인은 타인에게 잠재하는 가능성도 믿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지금의 겉모습은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내면에 더욱 훌륭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는 겁니다.
표면적인 차이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통된 ‘생명의 대지’ ‘생명의 대해’를 간파하는 눈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교육입니다. 석존의 실천도 또한 한편에서 보면 교육활동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를 ‘열어’ ‘보이고’ ‘깨닫게 하여’ 그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 불교 구극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과 완전히 궤도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뒤집어 말하면 인간교육이고, 한편 ‘교육’은 인간신뢰라고 하는 정신성으로 뒷받침되어야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격을 형성’하고, ‘평화에 지성’을 부여하고, ‘사회에 공헌’할 것을 가르치는 ‘인간애의 교육’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SGI의 원류는 ‘창가교육학회’입니다.
마키구치(牧口) 초대회장, 도다(戶田) 제2대회장도 교육자였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는 신념에서, 그 행복의 내용을 추구하고 불교의 생명철학에 도달한 것입니다.
인도와의 인연
마하트마 간디나 네루 수상이 반(反)식민주의 투쟁을 전개한 동(同)시대의 일본에서 도다는 마키구치 초대회장과 함께 반(反)군국주의를 관철했습니다.
마키구치가 73세로 옥사(獄死)한 비탄을 극복하고 제자인 도다는 폐쇄된 독방에서 ‘법화경’ 등을 의거하면서 ‘우주적 휴머니즘’의 원점을 기심(己心)에 각지(覺知)한 것입니다.
전쟁 후 나는 이 은사와 만났습니다. 기이하게도 50년전 귀국의 독립 전야인 8월 14일입니다.
그 제헌회의 석상에서 네루 초대수상은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거두는 것이 내 조국의 목적”이라는 간디의 ‘꿈’을 인용하며 외쳤습니다.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여하튼 교육이 여는 ‘영지의 세계’가 없다면 종교의 신앙도 ‘맹신’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육’에 의한 영지의 광원(光源)을 가진다면 종교에 의한 ‘정신성’도 보다 빛을 발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초대·2대회장이 참된 ‘교육’을 탐구하는 연장선상에서 민중 속에서 ‘불법(佛法)’을 실천하게 된 것이 가장 도리에 맞는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그 ‘불법’을 기조로 하여 우리들은 세계의 모든 사람, 민족, 나라들 속에서 ‘교육’과 ‘문화’와 ‘평화’의 보편적인 연대를 넓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국가’라는 차원보다 높다
1974년에는 나는 중국과 소련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이 해 중국에는 두 번 갔습니다.
당시는 중소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러나 양국의 수뇌에게 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관계개선을 호소하였습니다. 특히 소련을 방문할 때는 종교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나라에 왜 가는가 하여 몇 차례의 비판도 받았습니다.
나는 그 때마다 ‘거기에 인간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작년에는 미국과 함께 쿠바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카스트로 의장과도 우정의 연대를 굳혔습니다.
국가가 서로 험악한 관계에 있을지라도 한 걸음 더 높은 ‘인간’의 차원에서 본다면 결코 뛰어넘지 못할 벽은 없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가슴 속에는 라지브 수상의 저 늠름한 소리가 되살아납니다.
“세계문명에서 인도가 최대로 공헌한 것은 다양성과 민족의 독자성이 결코 대립하지 않음을 증명했다는 데 있다. 우리들은 오천년을 살아온 경험을 통해 우리들의 다양성 가운데 통일이 생생하게 현실이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 왔다.”
21세기의 지구가 직면하는 것은 이 ‘다양성의 통일’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일점입니다.
인류는 지금이야말로 귀국의 존귀한 역사와 지혜에서 진지하게 배울 때가 오고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국은 금년 영광스러운 독립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역사상 ‘비폭력에서 태어난 최초의 나라’가 귀국입니다.
‘가장 오래된 나라’임과 동시에 ‘가장 새로운 나라’가 귀국입니다. 인류 진보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가 귀국인 것입니다.
그 장대한 실험은 인도를 뛰어넘어 세계에 깊은 정신의 계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씨에 의한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투쟁도 그러했고, 저 89년의 동유럽혁명 또한 그러했습니다.
“수원(水源)이 멀면 흐름도 멀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일을 향하는 ‘평화의 대하(大河)’를 구한다면 그 수원은 가장 깊은 인간성의 원류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흔들림 없는 평화를 구한다면 흔들림 없는 토대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아소카 대왕을 일례로 들어 귀국이 21세기를 향해, 22세기를 향해 라고 발언하는 ‘평화의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성으로 향하는 위대한 신앙
혹은 이런 시각은 너무나 낙관주의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절대로 손을 떼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성(휴머니티)으로 향하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날 라지브 수상과 나는 도쿄에서 대화했습니다.
“인류의 ‘마음의 벽’을 제거합시다!”
벽을 제거한 후에는 넓디넓은 ‘공생의 대지’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 대지 위에 평화의 대하가 흐르고 문화의 정원이 펼쳐지며 교육의 대수(大樹)가 하늘을 향해 뻗어갈 것입니다.
사실 나와 수상과는 그 때 일체의 차이를 넘어 서로의 가슴 속에 있는 ‘평화의 선율’로 맺어졌던 것입니다.
라지브 수상은 자신이 내세운 ‘꿈’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용자(勇者)는 용감하고 의연하게 사람들 속으로, 민중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꿈’에 순교하고, ‘휴머니즘’에 순교했습니다.
수상은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계십니다. 그 장엄한 ‘생(生)’과 ‘사(死)’로써 신세기의 인류가 갈 곳을 크게 비춰 주시고 있습니다.
귀 재단은 라지브 수상의 ‘정신의 후계자’로서 수상의 저 숭고한 ‘꿈’을 구체적으로 추구하고 계십니다. 그 ‘꿈의 추구’에 인도는 물론 세계의 의식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계획에 참여할 것입니다.
“인류여 라지브 수상을 이어라! 그 전도에 ‘평화’가 있다”고 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청년시대부터 애송한 타고르의 ‘마지막 시’의 일절을 낭독하고 스피치를 맺고자 합니다.
오오 위대한 인간이 찾아온다 -
도처에서
지상에는 모든 풀들이 흔들린다
천상에는 소라고둥이 울려 퍼지고
지상에는 승리의 큰 북이 울려 퍼진다 -
위대한 탄생의 기쁨의 순간이 온 것이다
오늘 어둔 밤의 요새의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해 떠오르는 산정(山頂)에 새로운 생명을 향한 희망을 품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며 외치는 소리가 있다
인간의 출현에 승리 있으라 하며
광대한 하늘에 승리의 찬가가 메아리친다
감사합니다.
단테와드(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십니다
생명으로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