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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하나님 몫을 보장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 신24:19-21
주신 말씀 신24:19-21절 중심으로[하나님 몫을 보장하는 자에게 주시는 전인적인 복 ]이란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 받으시기 원합니다.
신24장은 선민이 지켜야할 각종 율법들의 세부 조항을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고별설교중 사회생활 관련규례를 주고 있는 내용 중 약자보호규정입니다.
본문은 24장 마지막 단락의 마지막 구절로써 가난한 자를 위한 담보규례, 품군의 품삯에 관한 규례, 연대처벌 금지규례, 빈민층의 권익보호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빈민층의 권익보호를 위한 규례로써 가진 자의 양보와 자비를 전제한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용을 개략하면 10-13절은 가난한 자를 위한 담보규례입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채무자의 기본적인 생존권을보장해 주라는 것은 아무리 귀한 그 무엇이라도 사람의 생명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은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물질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은 곤궁하고 빈한한 자들의 품삯을 해가 지기 전에 주라고 명하신 이유는 그 품군은 그 품삯을 가지고 가야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먹일 수 있기에 가난한 자를 배려하라는 것 즉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박정희때 심각하게 논란이 된 연좌제를 금하는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조차 서로의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지 않도록 하신 이유는 모든 인간이 각각 하나님 앞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속량하신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은혜를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베풀줄도 알라고 하십니다.
오늘 주신 본문 19-21절에서 하나님의 몫을 보장하는 자에게 범사에 복을 주시겠다는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원문을 대조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몫을 보장하는 자에게 범사에 복 주시겠다는 것인가?
첫째로 잊어버린 곡식단을 다시 찾지 말라 (19)
19절에서 ‘그 한 뭇’ 오메르는 곡식의 한 다발을 말하기도하지만 때로는 한 [오멜]로써 이는 곡물을 재는 단위로서 에바의 십분의 일 즉 약 2리터의 무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농부가 밭의 곡식을 수확하여 단으로 만든후에 이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하여 곡식 단의 일부를 밭에 남겨 둘 수 있는데 이것을 다시 와서 가져가지 말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합니다.
여기서 남겨두라는 말은 단순히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야(חיה)동사의 미완료형이 사용되어 밭에 두고 온 그 한 다발을 단순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객,고아, 과부,)를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는 뜻입니다.
즉 밭에 두고 온 한 뭇은 단순히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한 뭇이 누구즉 객과 고아와 과부의 몫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 기업이 없는 레위인이 백성들의 십일조로 생활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가 반드시 레위인에게 돌아가야 하듯, 그 한 뭇 또한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땅이 없는 자들에게 돌아갈 몫으로 지정해 놓으신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약자들에게만 인색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색한 것이며 , 이는 결국 사회적 약자의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여 깨닫고 하나님의 몫을 보장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손대는 일마다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하는 말씀 중 그리하면은 레마안(למען)은 ‘~을 목적으로’‘~하기 위하여’라는 목적을 수반하는 접속사입니다.
문맥에 따라서 결과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행동하는 자가 그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해야 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레마안(למען)은 [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번역해보면 ‘그리하면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 안에서 너를 복 주실 것을 바라고’가 되어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일의 잘되고 못됨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복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에게 임하는 하나님 주시는 복이 진정한 복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시는 복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격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기준은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의 많고 적음이나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명예의 존귀비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개개인의 영혼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의 공급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가진 것이 복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출 중에는 그들이 차지해서는 안 되는 가난한 자들의 몫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몫은 하나님의 몫이며 하나님께 복받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가난한 자들의 몫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밭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곡식과 함께 자라고 수확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의 것이 아니라 객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몫 즉 [잊어버렷거든;ושכחת) 잊어버리라(샤카흐שכחת)는 것입니다.
즉 객과 과부와 고아를 위해 일부러 한묶음의 다발을 남겨두라(샤카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객과 과부와 고아의 몫 즉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형통하게 이끌어가신다는 단순한 세상적 물질적인 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진정한 복된자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영육간에 복된 자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에대한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빈들에서 해가질 무렵 어린아이의 박한 음식으로 놀라운 이적을 행한 것처럼, 가난하고 약한 자의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보인 것 처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의 몫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림으로 물질뿐만 아니라 영육간에 복을 받아 누리는 귀하고 아름다운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몫을 보장하는 자에게 범사에 복 주시겠다는 것인가?
둘째로 턴 올리브 나무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라 (20)
올리브 나무는 서남아시아에서 흔한 나무로써 채취한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되기도하고 기름을 짜서 약이나 향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첫 열매는 첫 기름을 짠 것은 성전에 들여졌고, 둘째 짠 기름은 향품으로 그리고 세 번째는 식용으로 네 번째 짠 기름은 등잔용으로 사용되는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열매는 여러 용도로 귀히 쓰임받기 때문에 올리브열매 수확규정이 특별이 언급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무화과는 식용으로만 쓰이기에 규정은 없지만 감람나무의 규정을 그대로 따르라는 것이죠.
성전에 쓰임받는 올리브 나무가 하나님께 먼저 생각나고 하나님의 규정에 들어가죠...
본문에서 중요한 말씀은 [그 가지를 살피지 말라]는 파아르(פאר)가 본문에서 강의형 미완료형2인칭으로 쓰여서 [너는 가지들로 가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로 번역된 아하레카(אחיך)는 뒤에라는 뜻에서 온 말로써 이 둘을 연결하여 ‘로 케 파에르 아하레카;רךלא תפר אחיך)를 번역하면 ’너는 네 뒤에 있는 가지들로 다시 가지 말 것이다‘ 는 말입니다.
특별히 올리부 수확을 할 때는 막대를 사용해서 쳐서 떨어 뜨렸는데, 본문이 암시하는 것은 막대가 닿지 않는 곳까지 닿게 하려고 억지로 뻗치지 말며 ,또한 심하게 나무를 흔들어 대어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끝까지 따려 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가 딸 것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오늘 우리의 소득 중에는 가난한 자들의 몫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소득에 포함되어 있는 가난한 자들의 몫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많은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시겠지만,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소득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고 이미 받은 은혜와 복도 빼앗기게 될 것을 명심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까치밥을 남겨 두라 했습니다.
하물며 객과 과부와 고아가 같이 없는 사람이 먹을 몫을 남겨두고 나누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이며 이것은 자기 몫을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며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고 이를 무시하고 각박하게 하나님의 것조차 자기 것인 양 차지하는 자는 저주를 못 면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올리부 가지를 털고 다시 그 가지에 남은 것을 취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가난한 자들의 몫을 보장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과 자비와 나눔과 돌봄이 있어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올바른 나라 사회가 되기를 축원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몫을 보장하는 자에게 범사에 복 주시겠다는 것인가?
셋째로 포도를 딴 후 다시 모으지 말라 (21-22)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לא תעול אחריך)에서 ‘그 남은 것을... 따지 ’로 번역된 테올렐은 (תעול )은 알랄(עלל)강의형 미완료형으로써 ‘가차없이 심하게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욕망만 채운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은 확신하고 신학은 확고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라는 아하레카 אחריך와 함께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 네 뒤의 것을 가차 없이 심하게 다루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 번 거둔 포도를 다시 한 번 거둘 수는 있으나 이때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따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수확을 마치면서 이삭줍기를 할 만큼 남겨두고 수확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테올렐이라는 문자가 주는 어감으로 볼 때 단순히 포도나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분야까지 침투해서 시장을 교란하고 있습니다.
전주에서 시장한 대형마트 의무휴일제를 지키는 곳이 없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은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영역을 보장하고 사용자는 노동자의권익을 보장하고 가진자는 없는 자를 돕고 배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집 건너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왜 범죄는 줄어들지 않는가하고 고이병철회장이 물었다죠?
세계굴지의 삼성이 노동좁합을 인정하지 않고 지역차별을 하여 전북지역에 기업을 배치하지 않는 지역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가 개교회중심으로 시장경제논리에 의해 빈익빈부익부로 대형교회에 몰려들어 일부교회는 너무 많아 넘쳐나고 소형교회들은 미자립80% 상태로 생존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 앞에 하나님몫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한 모든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결국 온 나라 모든 백성이 하나님 몫을 인정하고 가난한 자를 배려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은 나라를 강하게 하고 기업을 튼튼하게 하고 아름답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영혼이 구원을 이루는 귀한 날들이 될 줄 믿습니다.
22절 말씀에서 이 명령은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기억하라(וזכרת)는 말은 구원 받기 전 세상에서 살던 모습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야하는 규정을 말하면서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하신 것이며, 거저 받은 은혜를 나누는 일에 결코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본문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자들은 실제로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겪었던 자들이 아니라, 모세에게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고 그 땅에서 살아갈 가나안 땅을 정복한 백성들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나라의 법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말씀을 듣고 전하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애굽은 구원 받기 전의 우리의 옛 사람의 살던 삶의 터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옛 터전에서 살던 세상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단 영적인 일 , 곧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영생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물질은 나누는 일에도 앞장서라는 주님의 명령임을 명심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세 개의 생존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하레카 다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잊어버린 곡식단을 다시 찾지 말라 (19) 사카흐
둘째로 턴 올리부 나무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라 (20) 파아르
셋째로수확한 포도밭의 포도를 다시 모으지 말라 (21-22) 알랄
성도는 거룩한 욕망을 활활 불타올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것을 취하려하거나 하나님의 몫을 탐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인적인복을 받아 누리는 핵심임을 깨닫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