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하는 청보님께!
안녕하세요?청보님!
우리는 머릿속 목소리에 끌려 다니며 생각과 마음에 소유 당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소유한 그것이 자아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 실패하여 왔죠. 마음이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기 때문에 이 조건을 해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되풀이 해서 과거를 재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카르마> 또는 <업>이라고 부르지요.
이 머릿속 목소리와 동일화 되어 있울 때는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알 수 있다면 더 이상 그것에 소유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마음과 완전히 동일화 됨으로써 에고(ego)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에고(ego)는 관찰되지 않은 마음, 관찰되지 않은 감정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매우 짧은 순간일 지라도 누구에게나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삶에 살아갈 가치를 주는 평화와 기쁨, 창조성과 사랑, 그리고 자비의 마음도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지속된 오랜 우울증과 심리적 방황으로 종종 자살 충동까지 느꼈던 에크하르트 톨레, 그는 스물 아홉 살 생일이 지난 어느 날 밤 중요한 내적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한 밤중에 일어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우울증으로 정말 괴로웠다." 삶의 깊은 회의(懷疑)와 공허를 느낌과 동시에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어" 라고 외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 자신과 살 수 없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가 둘 이란 말인가?' 그러한 의문에 휩싸이개 되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진짜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곧이어 그런 생각들 조차 정지시키는 진공과도 같은 에너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변화를 경험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떳을 때 그는 그저 평화로워 졌다. 커튼 사이로 부서지는 투명한 햇살과 아침을 알리고 있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시간이 정지한 듯 했고 모든 질문은 사라졌다.
오직 평화로움 만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 내가 사라지고 오직 현재 순간에 대한 감각, 혹은 단지 관찰하고 지켜보는 존재만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톨레는 모든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교통 체증 조차도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 느낌이 지속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 밑 바닥에 강한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절망의 나락에서 깨달음의 밝은 순간으로 갑자기 이동하는 이 아름다운 경험이 있은 후 톨레는 대학원을 중퇴하고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이해하고자 많은 시간 동안 공원의 벤치나 불교 사원 등에 머물며 세상을 지켜 보았습니다. 또한 마음에 대한 책을 읽고 영적 스승들을 만나면서 수 년간 내면 여행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노숙자 처럼 지내는 그를 가족들이 무책임하며 정신이 나갔다고 여길 정도로 이 무렵 그는 완전히 내적 탐구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머릿속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생각의 흐름입니다. 이 목소리가 명령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고 톨레는 말합니다. 그 생각의 흐름 배후에는 그 생각들에 물들지 않은 그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한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톨레는 <순수 존재> 혹은 <순수한 있음>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순수한 있음>과 의식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결이 에고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평화이고 고요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것을 <있음의 기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에고(ego)라는 관념과 욕망, 감정의 감옥속으로 태어납니다. 이 감옥은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과 감정들, 조건 지어진 그것들이 삶의 진정한 실체를 보는 것을 방해하는 감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나 자신이 아닙니다. 에고라는 것은 모든 상황에서 <나>를 말하고 싶어하는 우리 안의 존재입니다. 게다가 에고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에 자신을 동일화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무엇인가는 지위나 명예, 신앙, 고급 브랜드의 상품, 외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과 동일화 되든 에고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동일화 될 외부의 대상을 찾아 다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고가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에 눈을 떠야 합니다.
내 생각, 감정, 감각, 경험은 내가 아닙니다. 그저 존재함의 기쁨이 곧 <나>입니다. 톨레는 말합니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규정짓는 것을 중단하라", "그래도 당신은 죽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부터 톨레의 글을 살펴 보겠습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의 저서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유시화 옮김)」
깨어남의 핵심적인 부분은 깨어있지 않은 자신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즉, 자신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고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그 깨어 있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게 만드는 집단적으로 조건 지어진 심리 작용도 이해하는 일입니다.
에고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기본 구조를 알지 못하면 에고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에고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계속해서 에고를 자신이라 믿습니다. 이것은 당신인 척 가장하는 사칭꾼인 에고가 당신을 점령하고 지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안의 무의식을 알아볼 때 그 <알아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바로 의식의 일어남이고 <의식의 깨어남> 입니다. 어둠과 싸울 수 없듯이, 에고와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의식이라는 빛입니다. 당신이 그 빛입니다.
인류의 오랜 종교들과 영적 전통들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면 표면에서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그 밑바탕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두 가지 핵심적 통찰이 있습니다. 그 통찰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다르지만 모두 근본적인 진리의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킵니다.
이 진리의 첫 번째 부분은 대부분 인간의 정상적인 마음 상태에는 기능 장애, 또는 광기라고 부를 수 있는 강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힌두교 핵심에 해당하는 몇몇 가르침들은 아마도 이 기능 장애를 집단적인 정신병 형태로 보는 시각에 가장 근접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마야>, 즉 <망상의 장막> 이라 부릅니다. 인도 출신의 위대한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는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은 마야이다>. 불교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합니다. 붓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정상 상태에서 <두카>를 가져옵니다. 두카는 고통, 불만족, 혹은 평범한 불행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그것이 인간 조건의 특징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두카는 빠르든 늦든 모든 상황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붓다는 말합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류라는 집단의 정신적인 상태가 <원죄>입니다. <죄>라는 단어는 매우 잘못 이해되고 잘못 해석 해석되어 왔습니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고대 희랍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죄는 화살 쏘는 이가 과녁을 빗맞히듯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는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 존재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서투르고 눈이 먼 채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통을 겪고 고통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들을 걷어내면, 죄는 인간의 조건속에 내재한 기능 장애를 가리킵니다. 인류가 눈부신 성취를 이룬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습니다. 불과 200년 전이라면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은 매우 지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지성은 광기로 물들어 있습니다. 과학 기술은 인간의 정신에 늘 따라다니는 기능 장애가 지구와 다른 생명체, 그리고 인류 자신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더욱 확대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기능 장애, 그 집단적 광기는 20세기의 역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기능 장애는 실제로 더 심해지고 있고, 더 가속되고 있습니다. 두려움, 탐욕, 권력욕, 이러한 것들은 기능 장애 자체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집단적 망상 > 이라는기능 장애의 결과물입니다. 많은 영적 가르침들은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대개 실패로 끝이 납니다. 기능 장애의 근원까지 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탐욕, 그리고 권력욕은 근본 원인이 아닙니다. 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 하고 고상한 일처럼 들리지만,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노력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역시 똑같은 기능 장애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더 미묘하고 순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자기를 강화시키는 형태입니다. 그런 노력 역시도 자신이 관념 속애서 <나>라고 여기는 그 이미지를 더 크게,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 좋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좋은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오래된 종교들과 영적 전통의 대부분에는 공통된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 정상적인 마음 상태에는 기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련된 이 통찰, 이 나쁜 소식으로 부터 두 번째 통찰이 생깁니다. 인간 의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힌두교 가르침에서는 때로는 불교에서도 이 변화를 <깨달음>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소멸>이라 합니다. 이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해탈>과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예술 작품도 과학도 기술도 아닙니다. 자신의 기능 장애, 광기의 인식입니다. 자신의 광기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온전한 정신의 등장입니다. 치유와 초월의 시작입니다. 이미 이 행성 위에는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나타나 최초의 꽃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먼 옛날에 이미 이 인식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기능 장애를 가장 분명하게 알아차린 사람은 3000년여 전 인도에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 일 것입니다. 훗날 <붓다>라는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붓다는 단순히 <깨어난 자>를 의미합니다.
동시대에 중국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인류의 교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노자>입니다. 그는 가장 뛰어난 영적 서적 중 한 권인 <도덕경>에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 드문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망상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방식을 보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만들어 내는 고통을 보라" 그런 다음 그들은 정상적안 인간 실존의 집단적인 악몽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동시대 뿐만 어니라 후세 사람들에게도 잘못 이해 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강력했지만 왜곡되고 잘못 해석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제자들에 의해 잘못 기록되었습니다.
몇 세기가 흐르는 동안 본래의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오히려 근본적인 오해를 반영하는 많은 것들이 첨가 되었습니다. 이들 인류의 스승 중에는 웃음거리가 되고 매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신>으로 숭배 되었습니다. 인간 마음의 기능 장애를 극복하는 일, 집단적인 광기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을 보여준 가르침들은 철저히 왜곡되었습니다.
그것마저 그 광기의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는 인간을 통합하기 보다는 분열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인식을 통해서 폭력과 증오에 종지부를 찍는 대신, 더 심한 폭력과 증오를 일으키고, 인간 동료와 다른 종교, 심지어는 같은 종교 내부 마저 분열시키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이념이 되고, 사람들이 그것들과 동일화 되어 허구의 자아 의식을 강화시키는 신념 체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믿음을 토대로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로 단정 지었습니다. 적을 <타인>, 배신자, <그릇된 사상을 가진 자> 라고 불렀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자신에게 대립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종종 정당화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 떠 <신>을 만들었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하며 나의 신과 우리의 신으로 믿고 숭배해야 하는 마음속 우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이 모든 광기어린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핵심에는 그들이 가르켜 보인 진실이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흐릿하더라도 수많은 겹의 왜곡과 잘못된 해석들을 뚫고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은 자신 안에서 그 진실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지 않는 한 그 빛을 알아볼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역사 속에는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고, 그래서 모든 종교가 가르켜 보이는 것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 왔습니다.
그들을 통해 거의 모든 주요 종교 안에서 새로운 종파와 운동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본래의 가르침의 빛이 재발견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한 층 더 빛을 발하였습니다. 이미 이천 오백년 전 고대의 지혜로운 스승들이 깨달았고 이제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점점 강화되고 있는 에고가 지배하는 인간 마음의 기능 장애가 최초로 이 행성 자체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인간 의식의 꽃이 폭넓게 피어나지 않은 것은 아직 그 정도의 절박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아닐지라도 지구상에 많은 이들이 머지 않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 진화할 것인가? 사멸할 것인가? 에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숫자가 적지만 이미 자기 안에서 에고의 지배를 받는 오래된 마음의 방식이 붕괴하고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등장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믿음 체계도, 새로운 종교도, 영적 이데올로기도, 신화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화 뿐 아니라 이념과 믿음 체계의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변화는 마음의 내용물 보다도 더 깊은 곳, 생각보다도 더 깊은 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로운 의식의 핵심은 생각에 초월해 있습니다.
생각보다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생각보다도 무한히 광대한 차원이 자기 자신 내부에 있음을 깨닫는 새로운 능력에 있습니다. 그때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누구인가' 에 대한 느낌을 지금까지 자기 자신으로 여겼던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에서 찾지 않습니다.
자기의 머릿속 목소리가 사실은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 자신은 누구인가요? <진짜 나>는 생각 이전에 그 알아차림, 생각이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자신입니다. 감정와 감각, 지각이 일어나는 그 공간이 자신입니다.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형상은 주로 생각의 형태입니다. 만약 <악(惡)>이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사실 악이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지만 악에 대한 정의도 이렇게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형상을 자기 자신이라고 완전히 믿는 것, 물질적인 형상, 생각, 형태, 감정 형태와 동일화 되는 것입니따.
그래서 자신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모든 다른 사람과 생명의 원천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연결성에 대한 기억 상실, 그것이 원죄이고, 고통이며, 망상입니다.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밑바탕에서 지배할 때 나는 과연 어떤 종류의 세상을 창조할까요?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보거나 역사책을 읽거나 혹은 오늘 밤 텔레비젼 뉴스를 보면 됩니다. 인간의 마음 구조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똑같은 세상, 똑같은 악, 똑같은 기능 장애를 계속 반복해서 창조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없어 졌더라" 우리는 여기서 '하늘'이 공간적인 장소가 아니라 내면의 의식 영역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단어의 비전적 의미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담긴 의미입니다.
또한 땅은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난 외부 세계를 의미합니다. 외부 세계는 언제나 내적 세계의 반영입니다. 인류의 집단 의식과 이 행성 위에서의 삶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하늘은 변화된 인간 의식 상태의 등장입니다. 새로운 땅은 그것이 물질 세계에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입니다.
인간의 삶과 의식은 지구의 삶과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낡은 의식이 소멸하면 그것에 공명해 지구의 많은 곳에서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중 일부를 이미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나> 라는 단어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에 따라 가장 심각한 오류가 될 수도 있고, 가장 심오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나' 라는 단어에는 원천적인 오류, 즉 자신이 누구라는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에고(ego)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실체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지녔던 아인슈타인은 이 환상의 자아 의식을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 환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환상의 자아가 그 후에 모든 해석의 토대가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에 대한 오해의 토대가 되고, 모든 사고 과정, 상호 직용, 관계의 근본이 됩니다. 당신의 현실은 이 근본적인 환상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환상은 환상이라고 알면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환상의 알아차림은 환상의 종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실체로 오해하고 있는 동안만 환상은 생존합니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 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의 실체가 저절로 나타납니다. 당신이 '나' 라고 말할 때 보통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닙니다.
부모의 성대가 만들어 내는 일련의 소리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단어는 아이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됩니다. 아이는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 하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에서 어떤 아이는 "디나는 배고파요" 라고 말하듯이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합니다.
머지않아 아이는 '나' 라는 마법의 단어를 배우고 이미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는 이름과 똑같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다른 생각들이 '나' 라는 생각과 합쳐집니다. 그 다음 단계는 나의 일부로 보이는 것을 지칭하는 '나의', '나의 것' 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바깥의 물건과 자신을 동일화 하는 일입니다. 즉, 물건에 엄밀히 말하면 물건에 해당하는 자신의 생각에 자아 의식의 옷을 입힘으로써 물건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나의 장난감이 부서지거나 빼앗기면 강렬한 고통이 일어납니다.
고통스러운 것은 그 장난감 자체가 가진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쨌든 곧 그것에 대한 흥미를 잃고 다른 장난감과 물건으로 관심이 옮겨갈 것입니다. 아이의 고통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옵니다. 장난감은 아이의 발달하는 자아 의식, 즉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나' 라는 생각은 다른 생각들을 그것에 끌어당깁니다. 성별, 소유물, 감각을 가진 육체, 국적, 인종, 종교, 직업 등에 자신을 동일화 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등의 역할, 축적된 지식이나 의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과거에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나와 동일시 됩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기억은 나와 나의 이야기로써 나의 자아 의식을 다시 한번 규정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내가 자아 의식을 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정하게 붙들고 있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통 '나' 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은 이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나' 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대개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그 구조물의 일부, 즉 에고의 지배를 받는 자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후에도 당신이 여전히 '나' 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때 그것은 당신 안에 훨씬 깊은 곳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인간 내부의 몸은 고체의 물질이 아니라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형상이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입니다. 육체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동시에 인간의 머리로는 실로 일부분 밖에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엄청나게 많은 기능을 조종하는 지성입니다.
당신이 그것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릴 때, 실제로는 그 지성 자체가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까지 어떤 과학자도 발견하지 못한 정의 내리기 힘든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찾고 있는 의식이 바로 그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자들이 밝혀냈듯이 물질이 견고함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사실 인간의 감각이 만들어 낸 환상입니다. 이 물질에는 육체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하나의 형상으로 지각하고 형상으로 생각하지만 그 중 99.99%가 실제로 텅 빈 공간입니다.
원자의 크기에 비하면 원자와 원자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방대하며 그 각각의 원자 안에도 또 다시 넓은 공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점에 있어서 육체는 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입니다.
천체와 천체 사이의 공간이 어느 정도로 거대한지 알려면 다음을 생각해 보세요. 초속 186,000마일의 속도를 가진 빛은 달에서 지구까지 1초가 약간 넘게 걸립니다. 태양으로부터의 빛은 약 8분 20초 만에 지구에 도달합니다.
우주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별은 우리의 태양과 가장 가까운 다른 태양인데, 그 태양의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4년 반을 여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공간의 크기입니다. 그 다음에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이 있는데 그 광대함은 더욱 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우리 은하계와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은 240만 년이 걸립니다. 당신의 육체가 이 광대한 우주 만큼이나 광활한 빈 공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나요? 따라서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현상인 당신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형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비록 내적 공간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강렬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 텅 빈 공간은 충만함으로 가득한 <생명>입니다. 그 곳에서부터 모든 것이 나타나는 숨은 원천입니다. 전통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그 원천이 바로 <신>입니다.
생각과 단어는 형상의 세계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형상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 낸 오해입니다. 육체로 나타난 의식 즉, '나는 있다고 하는' 의식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과 일시적인 현상인 나를 혼동하지 않으면 그 무한하고 영원한 것, 즉 신의 차원이 나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상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줍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적 공간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나는 자 자신의 현존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있음>인 현존을 감지할 수 있는가?"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이 진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지금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지금>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가?"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시간을 초월한 살아있는 "내적 공간인 그것을 알아차리는가?"」
지금의 공간을 알아차리게 되면 갑자기 자기 내면에서 더 강한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내부의 몸이 살아 있음을 <순수한 있음의 기쁨>이 고유하게 가진 그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가능한 한 자주 내부의 몸을 자각하고 그럼으로써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잠시 멈춰서 하늘과 나무와 꽃과 연인, 그리고 아이를 바라볼 때, 그것과 자기 내면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부의 몸에 살아있음을 <순수한 있음의 기쁨>이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경험할 때, 의식은 형상 속으로 태어납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느낌, 하나의 감각, 지각, 하나의 경험으로 환생하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벗어나고자 희망하는 윤회의 순환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힘을 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이 취하는 형상을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은 '지금'의 본질인 공간에 내적으로 맞춰집니다. 받아들임을 통해 당신은 내적으로 공간이 넓어집니다. 형상 대신 공간에 맞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삶에 진정한 시각과 균형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톨레의 글을 살펴 봤습니다. 예전에 나왔던 책은 「NOW」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나 최근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유시화 옮김)」로 다시 출간 되었습니다. 우리가 관념이라는 머릿속 프로그램에 의해 삶을 지배당해 왔습니다만 이제는 한 평생 조건화 해 온 과거의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새로운 버젼의 참나 프로그램을 업로드하는 의식 혁명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보님! 원산과 더불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진정한 나의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보십시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근묵자흑이라는 사자성어와 같이 먹물을 가까이 하면 검은 물이 드는 것처럼,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원산과 함께 천하사를 집행할 준비된 자의 길을 선택해 주시길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산 박성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