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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박 찬 덕 선교사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누가복음 18장에 관한 교제의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복음의 18장은 그동안의 16장 17장에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가 있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신 후에
좀 더 자세하게 더 깊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몇 개의 항목들을 더 가르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에서는 이 과부의 이야기를 통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상징되고 있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속적인 간구의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라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고요.
그리고 9절에서 14절까지는 이 세리와 같이 겸손해져야 되는 이야기를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또15절부터 17절까지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시고요.
그리고 18절부터 30절까지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따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31, 32, 33, 34절에서는 바로 구주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친히 밝히시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5절부터 43절까지 여리고 근처에서 눈먼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전체적인 장면에 대한 얘기는 우리가 다음에 교제를 통해서 나눌 것이고요.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서두에 있는 18장 1절부터 8절까지 이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
왜? 지속적인 주님을 향한 기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여러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누가복음 9장에서부터 19장까지 아주 많은 거의 열장이 넘도록 주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을 때
자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 이 가르침에 대한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르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참 복음으로 나타난 참 희년에 관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알 수 있도록 그들을 특별히 사례들을 통해서 그 제자들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여정 가운데 펼쳐진 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 이라든지 또는
이 18장에서 기록되고 있는 이러한 희년에 관한 참 복음을 은연 중에 계시해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 경륜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이 지속적인 과부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를 실족시키는
반대자들인 적들과 바로 그 적들의 가장 우두머리인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참 희년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큰 방해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참 희년을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이러한 지속적인 과부의
기도가 왜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세심하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참 희년이 무엇인가요? 여러분 지금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이신 주님을 끊임없이
귀찮게 해야한다 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는데요. 이러한 이유는 우리에게 참 희년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계시로 알려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의 참 나타나심이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가 참 희년이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참 희년이라는 말씀은 실제적으로 외형적으로는 누가 복음 안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포괄적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에 있는 문제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도록 이러한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사례를 통한 가르침을 통하여 이 희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이 누가 복음 안에 암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로서 하나님의 왕국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어느 곳에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인 참 희년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희년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왜? 이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가 어떻게 희년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이시며 참복음인 희년으로서 만유를 포함하는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반드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되고 장사됨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과한 후에 부활 안으로 들어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하는 십자가의 죽음인 구속을 통하여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사탄으로 인하여 비롯된 모든 종류의 억압과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해방될 수 있도록 그 요구 조건을
성취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통한 구속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만유를 포함하는 구속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속박과 사단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그 요구
조건을 성취하신 것이 그 예수 사람으로오신 구주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이 사단으로 인하여 기인된 죄와 세상과 그리고 "나"라는 존재인 자아와 그리고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진 옛 창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 구속을 통한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와 세상과 그리고 사탄과 "나"라는 자아와 옛 창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전적으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알아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굴레와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기초를
이루어 주신 그 다음에 아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좋은 것들인 아버지의 기업, 아버지의 분깃, 그 신성한 기업의
누림안으로 우리를 친히 인도하기 위하여 부활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하는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속을 통하여서는 소극적인 좋은 것이지만 사단과 필연적으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소극적인 사탄의 모든 억압과 속박과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했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그 분깃과 신성한 그 아버지의 하늘나라의 그 기업의 누림안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반드시 부활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하심이 없이는 우리가 주님의 그 참 희년 안으로 전혀 들어갈 수 없고 맛볼 수 없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는 이 하늘의 신성한 기업이요 신성한 몫이요 신성한 분깃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만유를 포함하는 영이 되기 위하여 정말 성령님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나신 그 후부터 지속적으로 30년 동안의 육신의 삶을 사시고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삶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만유를 포함하는 구속을 통하여 사단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죽음을 당하시고 또 3일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바로 우리의 누림을 위한 만유를 포함하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기 위하여 육신의 삶의 과정을 거치신 그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버지의 신성한 기업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 안에서는 직접적으로 희년에 대한 말씀은 잘 나타나지 않지만 그 희년이 그 기초가 되고 근거가 되는 사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이어서 사도행전과 그리고 사도바울 선생님이 기록한 서신서들과 그리고 사도 요한에 의하여
기록되어진 요한계시록에 주어진 계시와 아주 일치가 되고 조화되는 것이 누가 복음 안에서 그 희년이 그 기초가 되는
사상이라는 이러한 견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신약 성경에 나타난 그 누가라는 저자를 통해서 기록되어진 사도행전으로부터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까지의 책들은 바로 우리 믿는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고 쫓는 모든 자들을 사단으로 인하여 기인된 죄들과 세상과 “나” 라는 자아와 옛 창조의 속박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는 일, 해방되어지는 일, 자유를 소유하게 되는 일, 이런 모든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고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신성한 기업을 우리에게 소유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누림을 위하여 이런 부활하심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만유를 포함하는 영, 곧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어 부활하기 전까지는 바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이 그냥 감추어져 계셨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들에게 생명 주시는 그 영을 주실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억압과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그리고 만유를 포함하는 영이신 삼일 하나님의 누림안으로 우리를 적극적으로 인도케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누림안으로 우리를 강하게 이끄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누가복음 안에서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희년에 대한 말씀의
계시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희년의 삶이 무엇인지를 앎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의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세 분 하나님의 누림안으로 들어가서 완전한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맛보는 삶을 갖게
된 것이 희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속적인 과부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바로 누가복음 16장에서 먼저 선제적으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바로 돈을 매우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이 돈을 매우 좋아하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물질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14절까지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인 고로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13절 사이에 이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 또 다른 하나의 비유인 불의한 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이 불의한 심판관은 다름 아닌 의로운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장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사람에 대한 얘기와 그리고 18장 1절부터 14절에서는 불의한 심판관으로 나타나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6장에서는 주님의 청지기들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청지기들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다면 18장 1절부터 14절에 나타난 불의한 심판관이신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얘기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한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청지기들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를 상징한다면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에 나타난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그 불의한 심판관에 대한 말씀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사람과 하나님 이렇게 두 가지 사례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실까요? 주님께서는 바로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인 바로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바로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불의한 청지기
곧 지혜로운 청지기로 처신함으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장래를 도모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신 얘기와 그리고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두 비유를 이렇게 순서적으로 우리에게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는 다름 아닌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말미암아 불의한 청지기는
주님을 섬기는 바로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심판관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불의한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수밖에 없었느냐 그것은 우리를 실족시키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우리의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불의한 심판관으로 이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더불어 나타난 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바로 불의한 심판관에 대한 얘기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주님을 쫓는 제자들과 무리들 곧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아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2절부터 보면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절에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자주 갔다고 하죠 그리고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 이 과부의 원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대적자인
바로 사탄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암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믿는 자들에게 아주 못된 아주 악한 자인 원수가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자인 이 원수는 사실은 이 하나님의 대적자요 바로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킨 사단이요 마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 그리스도 안에 믿는 자들을 실족시키고 넘어뜨리게 하는
큰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원활하게 풀어주시는 일이 필요하다 라는 것이 바로
이 누가복음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이 원수 갚음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참 희년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참 복음인 희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원수를 불의한 재판관으로 등장하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결해 줘야 된다 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4절 말씀에 의하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너무나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그가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난 이 의로우신 하나님은 잠시 자신의 대적자요 그 과부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일시적으로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과부는 사실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아내인 것입니다.
그 잠시 이 외견상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부재하고 있는 동안에 혼자 세상의 삶을 살고 있는 이 과부의 삶은
매우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 이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난 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 4절과 5절 말씀을 통해서 그 밤낮 자신에게 찾아와서 계속
하소연하고 간구하고 요청하며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면 오히려 고통을 당한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기어이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해결시켜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때가 되면 풀어주리라 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8절의 마지막
말씀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믿음에 대한 얘기를 또 한편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8:1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18: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8절에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이 사탄에 대하여 하나님이
원한을 풀어주심이 언제 풀어주십니까?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이 악한 자에 대한 그 원한을 하나님께서
해결시켜주시는 시점이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파루시야 구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일 것을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 언제 해결됩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 그 사탄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그 모든 일에서 우리가 자유함과 해방을
당할 것임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과부의 기도 같이 이 믿음을 가지고 바로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난 의로우신 하나님께 그 자신의 간구하는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도의 믿음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지속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반드시 그 악한 원수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나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원한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구주께서 다시 이 세상에 두 번째로 오신다 라는 이 재림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이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나신 의로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이 믿음은 지속적인 기도의 지속적인 믿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완전한 주관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두 번째로 이 땅에 우리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반드시 오신다 라는
이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지속적인 기도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이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 될 이유에 대한 이 가르침에 대한 비유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여정 가운데 나타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여정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19장 27절까지 아주 긴 장문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긴 여정이지만 실제적으로는 6개월 남짓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안에서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자신의 노정 안에서 제자들과 자신을 쫓는 모든 무리들에게 희년에 대한 것을 지금 가르쳐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희년은 하나님의 나라이신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 자신인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이시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희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참 복음인 참 희년을 선포하셨다ㅡ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전한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그러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오기 위하여 곧 참 희년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참 희년이신 자신의 누림안으로 이 성도들을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수많은 문제들과 사례들을 통하여 가르치고 계신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과 관계된 수많은 항목들과 사례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이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얘기와 장래에 도래하는 그 천년 왕국과 새 예루살렘 안에서의 삶에 대한 보상에 대한 얘기 왕국에 대한 보상에
대한 말씀과 그리고 바로 이 악한 세대에게 바로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돈을 매우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상태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의 왕국과 왕국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온전한 그리스도의 누림인 참 희년의 삶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정말 수많은 사실들을 통한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계신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 악한 세대는 우리를 이 그리스도의 이 참 누림인 희년의 삶을 맛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가장 강한
무기가 되는 그런 금전과 돈 소유와 부를 통해서 우리를 실족시키고 그 맘몬신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이 말씀들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이 물질들에 대한 미련과 이 세상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을 통하여 우리 믿는 성도들을 매우 무감각하게 마취시킴으로 말미암아 참 희년을 가지고 오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친밀한 어떤 누림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그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바로 돈을 통하여 금전을 통하여
부와 물질들을 통하여 우리를 아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에 가장 강력한 무기인 금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께서는 이 무감각하게 되고 돈으로 인하여 물질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아닌 맘몬신에게 치우쳐서 마치 롯의
처와 같은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오늘의 악한 세대를 향하여 바로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가 왜 필요한지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만물의 대표자인 이 인류 곧 죄인들인 사람들에게
온통 관심이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은 사람의 참 자유와 해방과 온전한 누림을 위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에게 그러한 부요함과 어떤 만족함과 배부름을 맛보게 하는 참 희년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면 세상은 그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정말 위대하시고 자비와 큰 사랑이 많으신 사실을 전혀 알 수
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은 사람의 온전한 누림을 위하여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사람의 누림을 위하지 않고 계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나타나진 바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영광의 하나님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누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셨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셔서 사람의 누림인 참 복음 곧 희년의 온전한 맛을 맛보게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의 누림을 위하여 세상에 하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주관하는 사탄에 의하여 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금전과 물질과 부와 소유를 통하여 타락한 인류가 맘몬신에게 치우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마비가 되고 이 물질과 금전을 통하여 무감각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크신 자비와 사랑과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이 사람의 누림을 위하여 존재하신 분임에 대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냐면 누가복음 17장 27절과 28절 말씀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느라 바쁘고
사고파느라 바쁜 이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은 사람들과 그리고 롯의 처와 같은 소돔성에 있는 악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소돔에
살고 있는 그 시대의 삶이 오늘날의 이 악한 세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사고팔고 바쁘고 하는 이 사업에 전념하여서 사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금전의 소유를 통하여 탐욕의 마음을 갖고 온갖 정욕적인 삶을 도모하고자 하는 맘몬신을 쫓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사단의 아주 간교한 책략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 악한세대는 모두가 맘몬신에게 부와 소유와 물질들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감각하게 되고 마취가 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인류에게 부여 해 주고자 하는 사람의 누림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누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얼마나 가치가 있고 얼마나 소중하고 정말 세상에 속한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이 누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참 희년의 누림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이 노아의 시대와 같은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이 악한 세대라는 것입니다.
롯의 처의 시대처럼 온통 맘몬신을 향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인류가 바로 하나님의 희년을 통한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분깃이요 하나님의 몫인 신성한 기업을 소유하기보다는 세상에 보이는 잠시 잠깐의 어떤 여흥과 기쁨과 즐거움과 오락과 만족을 갖게 하는 이 물질과 금전들만을 향해서 살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크게 경고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3년 남짓한 그러한 긴 여정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누림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하려는 참 희년을 맛보게 하려는 이 문제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다루시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14장에서 그분은 제자들을 통하여 이 세대에 속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라고 가르치신 다음에 미워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미워해야 되냐 하면 그들 자신의 혼 생명까지도 미워할 때 바로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자신들의 혼
생명까지도 미워할 때 그제서야 이기는 자들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서는 바로 이 자신을 쫓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부여해 주시는 신성한 기업의 누림인 희년의
삶을 맛보게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장애물을 갖고 오게 하는 그런 금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또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해서도 안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실족을 당해서도 안 되는 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언급하시고 만약에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면 7번씩 7번을 (7번씩 70번을 )용서해 주라는 이 용서에 대한 가르침의 말씀을 자세하게 하고 있는 장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남들을 용서해 줘야 될까요? 물론 우리 자신들의 그 남들에게 실족을 당하고 넘어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상처를 입게 되고 또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게 하는 일들은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온전케 하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혼잡스럽게 되고 많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특별히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기업인 참 누림 그 온전한 희년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용서하지 못하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성한 기업인 참 희년의 삶의 누림을
소유케 하기 위해서 이 17장에서 이 문제를 실족케 하는 일과 용서해야 되는 일을 우리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라는
말씀을 여러분들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18장에 우리의 그 희년의 온전한 누림에 관계된 것을 친히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묵시적으로 사단의
원수로부터 오는 이러한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이죠. 예 바로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의
원수로부터 오는 핍박을 통하여 장애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큰 방해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참 희년이신 하나님의 누림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 때문에 18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지속적인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희년의 누림에 관계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장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희년의 누림에 관계된 말씀은 전혀 없지만 실질적으로 누가 복음 전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참 복음인 참 희년에 대한 말씀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사단이 우리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이 주관하고
있는 이 세상을 통하여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사단의 무기는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물질과 부와 소유와 금전 돈이라는 것입니다.
이 금전들, 이 물질들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성도들을 마취시키고 무감각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들을
과부와 같이 살게 한다 라는 아주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악한 세대를 사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역사하고는 공격하는 이 물질과 소유, 맘몬신을 통하여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가 마취되지 않고 무감각하게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과부와 같이 끈질기고도 지속적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조종하고 있는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단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 믿는 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가 금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2천년전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그리고 죽음을 통과하신 후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은 실제적으로 외견상으로 없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우리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고 없는 분으로 그 부재중이신 주님으로 우리가 여겨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외견상으로는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교회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외견상으로 남편이신 우리의 주님은 부재중에 계시기 때문에 홀로 이 세상에 외롭게
살고 있는 그 여자는 과부와 같은 존재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핍박하고 대적하는 그 원수인 사단을 이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만유를 포함하는 온전한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로 친히 가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유를 포함하는 구속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이 사단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친히 손과 발이 찔림을 당하고 옆구리에 창을 찔림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옆구리가 쪼개져서 피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의 참 희년이시요 하나님의 나라이시며 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들을 그 하나님의 누림안으로
직접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여러 방면을 통하여 자신을 쫓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여러 문제들과 사례들과 방면들과 비유들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씩 하나씩 참 희년의 삶의 누림안으로 그들을 이끄시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의 깜깜해진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들을 하나하나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시는 것과 같은 그러한 여러 방면의
가르침들을 우리가 수없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악한 세대는 사단으로 인하여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들이 너무나 너무나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이 현 세대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는 그런 상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현 세대는 매우 악한 세대로서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의 원수인 사단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우리는
실족할 수밖에 없고 끊임없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족 당할 때의 문제와 그리고 혹시 남을 실족시켰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방법을 주님께서 계속 가르쳐주시고 계신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 세대는 매우 악한 세대로서 마치 노아의 방주의 시대와 같고 롯의 처의 시대와 같은 소돔성에 속해 있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마치 남편이신 주님께서 부재중인 것처럼 보여지는
과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가 그 수없는 대적자들과 우리의 원수들인 사단에 의한 공격을 세상을 통하여 받을 때
어떻게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금전들과 물질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무감각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맘몬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가 종종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믿는 자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마취를 시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자신을 쫓는 모든 무리들에게 첫 번째로 무엇을 강조하고 있냐면 너희가 세상과
하나님 곧 맘몬신과 하나님이 있을 때 맘몬신이 아닌 땅에 속한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미련을 갖기보다는 온전히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쫓고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생명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쫓고 찾으라고 권고하시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롯의처 처럼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세상에 속한 것을 소중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소돔성에서는 비록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으나 온전하고 안전한 처소로 도착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중간지대의 외딴 곳에 조롱받고 고통받는 장소에 처하게 된다 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참 희년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누림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를 실족케 하고 우리를 넘어뜨리고 실패하게 하는 모든 일들과 모든 것들을 반드시 미워해야 한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 계시하시고 계십니다.
왜죠? 그래야만 우리가 희년의 참 누림 안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을 통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이 사단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부활을 통하여 적극적인
아버지의 그 신성한 기업들을 소유케 하는 그 일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미워해야
되고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제거하고 미워해야 할 것을 주님께서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그분을 참 희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이며 참 희년이며 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한 기업인 참 희년을 누릴 때 우리의 적이요 우리의 원수인 사단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인 반대자들을 통하여 심히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쫓아 온전한 삶을 살 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희년의 삶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원수요 하나님의 대적자인 이 사탄으로부터 크게 공격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친히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을 통하여 그리고 세상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금전들과 물질들인 이러한 맘몬신들을 통하여 우리가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핍박은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우리의 원수인 사단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사단은 사실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전적으로 서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희년의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사단은 크게 분을 내어서 우리의 원수가 된 자인 것입니다.
그 원수는 세상을 통하여 세상에 있는 물질과 금전들을 통하여 우리를 실족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고 자신의 편에 있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18장 1절부터 8절 말씀에 이 과부를 통한 이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말씀은 사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이 내 곁에 없는 것처럼 여겨짐으로 말미암아 부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바로 이 우리가 이 신부인 과부로 나타난 이 여인은 남편이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을 통하여 부재하여
자신의 곁에 없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적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이 매우 클 때 매우 어려움을 당하고
그 다가오는 공격과 핍박과 반대와 고난을 이길 수 없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지속적인 기도를 과부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실은 부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외견상으로는 부재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님은 부재 중이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믿는 성도들과 함께 계시고 그리고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그 집합적인 단체인 교회에 함께 계신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셔서 보헤사 성령님으로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늘날 교회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주님께서는 외견상으로는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께서 부재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안 계신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그 아내로 상징된 이 과부는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물질에 대한 어려움, 삶에 대한 어려움, 뭐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이유들을 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그 반대자로부터 항상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과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견상으로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께서 부재하는 것처럼 곁에 안 계신 것처럼 느끼고 사는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대부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특별히 이 말씀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과부가 느끼는 것처럼 마치 불의한 재판관으로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외견상으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이신 주님께서 부재중이신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재판관으로 여겨져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처럼 보일 때 바로 우리가 행해야 될 일들은
과부처럼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사단이 이 세상을 통하여 반대자를 통하여 우리를 핍박하고 그리고 어려움을
주고 있는 동안에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마치 안 계신 것처럼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
하고 어떻게 이렇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부당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일을 이렇게 방관하십니까? 내가 지금 말할 수 없는
비참함 가운데 빠졌습니다.부당하게 마치 욥처럼 부당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수없이 되뇌일 수 있는 의혹들이? 내가 지금 부당하게 핍박당하고 있는데 왜 이것을
그냥 가만히 허락하시고 방관하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이 왜 이 일들을 처리해 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함
으로 말미암아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으로 보여짐으로 말미암아 의롭지 않으신 하나님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때 왜 그렇습니까? 부당한 핍박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당할 때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면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우리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처럼 핍박당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당하게 핍박당할 때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곤고함과 어려움과 고난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일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지자인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이 마지막 선지자로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옥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를 당하였고, 사도 베드로 선생님도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 박혀 순교당했다는 말씀도
있고요. 바울 선생님은 옥에서 투옥되어져서 참형되어졌다는 말씀과 요한은 밧모섬이라는 그 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유배당하는 이러한 우리의 원수인 사단에 의하여 사단의 소유가 된 이 세상을 통하여 핍박을 당하는 일이 말할 수 없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신실하게 믿고 신실하게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부당한 핍박을 당할 때 우리는 의아함과 의혹과 많은 의심을 침례자 요한처럼 갖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도 그런 의혹을 가지고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물었죠. 당신이 오실 그리스도이십니까?
왜 자신은 옥에 갇혀서 지금 곧 죽게 생겼는데 왜 살려주지 않느냐 주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고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리게 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심지어는 과부의 독자까지도 살리신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신을 구출해 주지 아니하는 예수님께 대한 큰 섭섭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까 라고
묻게 하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를 부당한 핍박에서부터 벗어나게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나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냥 그것을 방관하시고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왜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야 온전한 희년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이
주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큰 아픈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핍박당하는 삶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는 것을 이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하는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암시의 말씀으로 계시해 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잘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욥처럼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부당한 학대를 받고 부당하게
핍박을 당하고 반대자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피해의 일들을 당하고 심지어는 배척받고 죽는 일까지도
오늘날 심심치 않게 종종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로우신 하나님이 오셔서 심판하여 정당함을 입증해 주시면 좋겠는데 그분은 오히려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재판관처럼 나쁜 하나님 아주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으로 등장하심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마치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공평하시지 않고 정의롭지 아니하신 의롭지
아니하신 하나님처럼 여겨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재판관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하신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부당하게 핍박당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의 일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있는 99% 모든 좋은 것들 원하는 것들 모두를 다 소유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욥에게 100가지 중에서 99가지 모두를 소유했지만 단 한 가지 소유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고 소중하며 가장 집중해야 되는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하나님을 소유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그에게 허락되어진 99가지의 좋은 소유된 모든 것들을 다 파쇄시키고 제거시키고 잘라내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편이신 주님께서 외견상으로 마치 부재 중이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함께
계시나 외견상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분으로 외견상으로 주님께서 부재 중이신 것처럼 보일 때 우리를 변호해 달라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부당하게 핍박받고 있는데 우리를 위해서 나중에 이 변호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 달라는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장면이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믿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침례자 요한처럼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 이시라면 왜 나를 그냥 방관해 두십니까? 왜 내가 지금 이런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핍박당하고 곧 죽게 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도대체 왜 그냥 나를 내버려 두시고 모른 척 하고 계십니까?
도대체 주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이 상황을 도대체 보고 계시기는 하는건가요 라는 이런 의혹과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내가 지금 억울하게 부당한 핍박을 받고 있는데 지금 우리를 핍박하고 있는 자들을 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강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라는 이러한 의문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장 1절부터 8절의 비유에 과부를 통한 지속적인 기도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믿는 자들이
반대자요 원수들에 의하여 핍박을 당할 때 하나님은 마치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것처럼 어찌 보면은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으신 것처럼 어찌 보면은 살아계시지 않은 하나님으로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능력한 하나님처럼 지금 핍박당하고 있는 이 현실의 삶에서 나를 전혀 도와주지 않고 나를 전혀 구출해주지
않을 때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나서 나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당할 때 고난을 당할 때 어려움을 당할 때 문제가 생길 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마치 살아계신 것 같지 않고 의로움을
행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 같지도 않고 우리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 주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사랑하시지 않은 것처럼
보여지는 이 상황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악한 세대를 살고 있는 노아 시대 같이 롯의 가족과 같은 소돔성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고 있는 이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분께 기도할 때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대면하여 설 때 모든 것이 의로우신 주님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는 어떤 관계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지속적인 기도를 드려야 되는 일에 대한 필요성을 통하여 믿는 자들이 지속적인 기도가 나중에 그 일을
성취시켜 주시고 이 기도가 상달되었음을 알려주시는 이런 얘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요한계시록 6장 9절과 10절에
보면은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이 재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요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원수 갚아주지 아니하시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시려나이까 마치 이 과부는 살아생전에 이 불의한 재판관이신 의로우신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이미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 지속적인 기도를 하는 이들은 순교 당한 성도들의 혼들에 의하여 지속적인 기도를 통하여 수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러분 우리만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당한 성도들의 혼들에 의하여 이 기도도 지금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혼들이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이 재단 아래에서 제단은 여러분 어디에 있습니까?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죠. 그러나 성막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에 마주하는 곳이 바로 이 성전의 바깥뜰인 것입니다.
이 성전의 바깥뜰의 제단이 이렇게 놓여져 있습니다.
이 제단은 성막과 성전의 바깥들에 위치한 곳에 있는 것이므로 말미암아 성소와 지성소 안에 있지 않고 성막과 성전 바깥에
이게 놓여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성전의 바깥뜰 땅을 상징하고 있죠.
그래서 제단 아래에 있어 그들이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한 자들이 큰 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시오 우리를 심판하여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원수 갚아주십시요 라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오심을 간절히 그분의 강림과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통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장래의 일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제단 아래는 땅을 상징하는 곳으로서 바로 제단 아래는 땅 아래를 말하는 것이며 순교당한 성도들의 혼들이
있는 곳입니다. 예 바로 제단은 성막과 성전 바깥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성전 바깥뜰은 땅을 상징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제단에 있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제단 아래 우리의 피를 원수 갚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이 호소의 얘기는 제단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제단 아래는 땅 아래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 당한 성도들이 지금 땅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바로 순교당한 성도들의 혼들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누가복음 23장 43절에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한편 강도와 함께 오늘 네가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 라는
얘기를 통해서 낙원 안에 있는 것이 순교당한 성도들의 혼들이 있는 곳인 낙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낙원이라 얘기했지만 사도행전 2장 27절과 누가복음 16장 22절부터 26절까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구약의 모든 성도들과 신약의 의인들이 지금 육체가 죽었을 때 그들의 영들과 혼들이 가서
잠시 머무는 곳이 바로 음부임에도 불구하고 위로의 구역 음부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대부분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지만 바로 음부에는 한 방면에 위로의 구역이 있고 또 한 방면에는 고통의 장소, 부자가 간 곳은 고통의 구역인 음부이고
바로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은 아브라함이 있는 위로의 구역이며 즐거움의 구역인 곧 고통이 없는 장소인 바로 음부인 것입니다.
“이 음부에 대한 말씀은 이 말씀 바로 전에 정리해서 올려드린 눅16:19~31/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와 그렇지 못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 편에서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당한 성도들의 혼들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그래서 지속적인 믿음 안에서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대적자요 우리의 원수인
이 땅에 거하는 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여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고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를 순교케 한 우리의 피를 원수
갚아주시지 아니하시기를 언제까지 하시렵니까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도대체 왜 침묵하고 왜 방관하시고
아무 움직임이 없으십니까? 이런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외견상으로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정의로우신
분으로 불리어지지만 외관상으로 마치 공정치 않으신 하나님처럼 우리가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지속적인 기도를 합니다 라고 불의한 재판관을 향한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께서 계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바로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아주 당연히 의로운 재판관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당하게 핍박당할 때 그것을
허락하시고 방관하시고 내버려 두시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의 간구들을 전혀 듣지 않으시는 아주 그러한 불의한 재판관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땅 위에서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 부당한 핍박과 억울함과 말할 수 없는 그 원수들에 의하여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이 고난과 핍박을 이 원수를 통하여 받는 이러한 억울한 일들을 언제까지 우리가 참아야만 됩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셔서 우리의 원수 갚아주는 그 일이 해결될 수가 있습니까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보이지 아니하는 영역인 음부로 나타난 위로의 구역이며 고통이 없는 장소이며 즐거움의 구역으로 나타난
누가복음 16장 22절부터 26절 사이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간 곳, 곧 아브라함이 있는 그곳이 음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장소, 위로의 장소이며 어떤 면에서는 즐거움의 구역인 낙원 안에 있는 순교 당한 성도들로부터
나오는 간절한 기도가 바로 순교 당한 성도들의 지속적인 기도의 모습이듯이 살아생전에 주님께서 마치 부재중이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 남편이신 주님이 외견상으로 없는 것처럼 보여질 때 그 반대자로부터 과부가 말할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불의한 하나님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의로우신 하나님일지라도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지속적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그 불의한 재판관을 귀찮게 하고 괴롭게 하는 그 반복적인 일을 통하여 우리들의 피를 원수를 갚아주는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참 요지는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나신 의로운 하나님이 사실은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심판하시고 안하시고는 그분의 그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아주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하고 마치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께서 부재중인 것처럼
보임으로 말미암아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고 우리가 억울하게 지금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는 이 일들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 없이 정말 우리가 부당하게 핍박을 당하고 곤고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배척을 당하고 죽게 되는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아내로 상징된 그 과부의 기도의 말들을 들으시고 계시고 언젠가 응답하실 것을 마음에
가지고 계실 수 있지만 사실은 그 과부의 간청의 말에 주님께서는 주권자로서 들으실 수도 있고 또는 과부의 말을 듣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청하는 기도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의 간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간구하면 응답해 주시겠지 또는 듣지 않으시는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설왕설래의 예들을 우리가 볼 수 있지만
그분은 우리의 간구한 기도, 우리의 요청들을 들으실 수 있고 그 과부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그분이 전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판관은 주권을 가진 자의 특권이 있습니다.
의로운 하나님이신 불의한 재판관으로 나타난 그분께서는 주권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권적인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시간에 듣고 안 듣고는 그분 마음입니다. 과부가 지속적으로 기도를 했다고 그래서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시간에 심판 하신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재판관으로서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과부의 말을 들으실 수도 있고 안 들으실 수도 있지만 계속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그분을 괴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귀찮게 함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이고 우리의 책임의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바로 그 우리의
간청하는기도의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변호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세상 가운데 알려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그러한 요청들을 통해서 변호를 간절히 바라는 이 대주재자여 땅에 관한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원수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언제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하시려나이까 라는 이 간청의 기도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변호하실 수밖에 없는 근거를 가지고 오시기 위하여 곧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오시는 이 강림을 앞당길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관인 주님께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지만 이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를 주님께서는 지금 기다리고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참 희년의 삶인 안식과 평안과 부요함과 그리고 만족함과 배부름 안에
우리를 이끌어주셔서 하나님의 신성한 기업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누림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의 말씀을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이 말씀을 올리기 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성령님께서 붙잡아 주셔서 잘 마칠수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불의한 재판관으로 등장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다시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주님께서 갈릴리로 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기나긴 여정중에 주님께서 떠나시고 난후 제자들이 또 오늘날 주님을 믿는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이
우왕자왕 하지않게 하시려고 많은 문제들과 그 실예를 들어서 세세히 가르치고 또 알려주시는 장면을 보면서 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에도 힘겨웠을 그 시간들을 홀로 오롯이 감내하시면서 또한 남겨질 제자들을 염려하시는 지극하신 사랑 정말 염랑 거미와 같은 다함이 없으신 그사랑을 이말씀을 통하여 새삼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왜 이 과부의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알게 되는것 같습니다. 결국 듣고 안듣고는 하나님의 주권이시며 응답하고 않하고도 하나님의 주권이시지만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반드시 주님께서 다시 세상에 강림할 것이지만 우리의 지속적인 기도를 인하여
그 일을 더 앞당겨 질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 줄수는 있다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나 혼자가 아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제단아래에 있는자들의 혼들이 또한 계속 적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왜 그렇게 불리워지는 지를 알게 된 말씀이었던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