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롬 2:1~5
제목: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회개하도록 인도하신다
●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믿으며 이를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회개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인지? 비교적 쉽게 간접적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이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성도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지 ‘의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것은 아닙니다. 수시로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 이 회개는 성도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요즘 자동차 보험료가 비싼데 그 이유는 고가의 외제차 특약을 넣어서 그렇습니다. 10억짜리 고급 외제차를 손상시키면 1억, 2억 특약으로는 깜냥도 안 됩니다. 그런데 10억짜리 외제차 주인의 아들이 그 차를 파손하면 아버지께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정도만 아뢰어도 용서받고 해결됩니다. 자식이나 가족이 아닌 외인은 그런 인자한 처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참 성도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며 의무의 성격도 있습니다. 불건전 극단적 세대주의와 구원파 계통의 이단들은 회개의 거룩한 권리와 의무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고집은 멸망으로 갑니다.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완악한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진노를 사고 심판을 받으며 궁극에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시면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시지 않으면 회개하지 못합니다. 회개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 완전 성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점진적 성화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자연인 아기가 핏덩이로 태어난 이후 점점 철이 들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가정에서 부모님의 가정교육을 잘 받는 경우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가 더 쉬운데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가정에 입양되고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롬2:4)을 받습니다. 그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믿기에 용서와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믿기에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
자연인이 그냥 있으면 불의한 상태로 죄인 된 상태로 지옥에 갈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려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가정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교육(책망, 징계)을 받는 과정에서도 회개가 수반됩니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책망과 징계를 받고 회개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대상으로 주되게 기록한 것은 인간들인데요. 구원 얻을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이 땅에서 활동하는 천사들도 죄인 한 명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기뻐합니다.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joy)이 되느니라 |
천사들의 감정에 대해서 성경이 많이 기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위 말씀에는 천사들이 죄인의 회개를 보고 기뻐한다(rejoicing)고 합니다. 의로운 천사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복(心腹)과 충복(忠僕)들이기에 그렇게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유투브를 보면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가 주인의 어린 자식을 보고 기뻐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아기를 옹위(擁衛)하는 액션을 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는 주인과 자식의 관계를 파악하는 강아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존재인 천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가능한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 회개는 진리를 알고 깨닫게 하는 주요한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딤후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새번역: 하나님께서 …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이 회개하도록 역사하신 대상자는 진리를 알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회개는 용서와 자비는 물론이고 진리를 획득하는 큰 은혜가 됩니다. 기독교에 몸담고 있었으면서도 진리를 모르고 이단이 되는 자들이 그리 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건전 극단적 세대주의와 구원파 계통의 이단들은 다른 이단들에게도 직, 간접으로 영향을 끼쳐 놓았습니다. 이런 이단들의 공통점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진리에로의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아울러, 회개는 구원과도 직결됩니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개혁주의와 건전한 복음주의는 (구원파 계통의 이단들처럼 구원을 과거의 한 시제나 깨달음으로 보지 않고) 구원을 서정(the order of salvation)으로 봅니다.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개념적 순서인데요. 이미 회개하여 믿음을 시작(회심)한 신자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성화)를 합니다. 성도가 ‘의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아니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회개는 반복되는데, 회개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결과는 물론이고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회개는 성령의 내주를 확인하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회개와 직접 연동됩니다. 이러한 진리가 명확하게 기록된 말씀은 시편 51편입니다.
시51: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구원을 받은 성도가 회개를 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 구원의 즐거움을 내적으로 회복하고 자원하는 심령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의 ‘자원하는 심령’은 ‘변치 않는 마음’(공동번역)인데요. 성령께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붙들어 주소서!’ 간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적당히 인사치레의 말로만 얼렁뚱땅 해치우고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을 쳐서 다치게 한 후에 미안합니다! 말만 하고 넘어가면 됩니까? 미안하다고 말을 했으면 그 말에 따르는 후속조치를 해야지만 진정한 사과가 되는 것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회개도 말로만이 아니라, 회개에 따르는 합당한 열매를 맺고 회개에 합당한 일도 해야 합니다.
눅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행26:20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
● 회개는 진리를 의지하여(롬2:2) 남이 아닌 나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롬2:1,3)입니다. 성도에게 회개가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고 깊이 회개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믿는 자들은 의로우며 동시에 죄인들
믿는 자들은 의로우며 동시에 죄인들이라는 루터 특유의 통찰은,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와 인간 앞에서(coram hominibus) 관찰될 수 있는 전체로서의 인간(totus homo)에 대한 그의 신학으로부터 나온다.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비록 이 의를 경험적으로 탐지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실제로는(in re) 죄인이지만, 소망 가운데서는(in spe) 의롭다. 의롭게 됨은 변형적 과정의 시작에 관한 것으로, 이 과정의 궁극적 끝은 의롭게 됨이 토대를 두고 있는 예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를 제공한다.
https://cafe.daum.net/1107/YrXT/249
다시 읽어도 은혜가 되는 좋은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이자 죄인이다. 거룩한 자이자 불경한 자이다. 하나님의 원수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 의를 얻는 참된 방법을 모르는 자는 이런 대립 관계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괴로움 속에 있는 죄인을 가르치고 위로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어야 한다. “형제님, 현세에서는 죄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형제님의 몸은 태양처럼 흠이나 점이 없이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님에게 티나 주름이 있어도 형제님은 거룩합니다. 형제님은 '내 안에 죄가 있고 죄를 느끼는데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겠지요. 형제님이 자신의 죄를 느끼고 인정하는 것은 좋은 표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병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과 같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내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또 물으시겠지요. 그러므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죄인을 구원하는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달려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화를 낸다고 말하는 이성의 판단을 따르지 마십시오. 이성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므로 형제님은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께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형제님 안에 남아 있는 죄는 형제님의 죄과가 되지 않습니다. 형제님이 믿는 분 곧 완전히 의로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게 될 테니까요 그리스도의 의는 형제님의 의이고, 형제님의 죄는 그리스도의 죄랍니다.”
https://cafe.daum.net/1107/YrXT/210
@장코뱅 루터가 말한 유명한 신앙의 격언을 오리지널로 읽으니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중생했을지라도 육신에 죄성이 남아 있어서 성도는 죄를 짓게 된다. 성도가 이렇게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요 13:10). 회개하면 죄에 대해 더욱 뼈아프게 느끼게 되며 죄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죄 용서함을 더욱 소중히 느끼게 된다. 이러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 용서의 확신을 가지게 되어 결코 정죄의 두려움 가운데 거하지 않게 된다.
https://cafe.daum.net/1107/YlDw/13
네, 잘 알겠습니다.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https://cafe.daum.net/1107/YcL1/45
잘 정독하였습니다.
회개(Repentance)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던 사람이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한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에오'(metanoeo)이며 '생각을 고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메시아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고치고 그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마3:2). 이것에 대한 예는 오순절 때의 유대인의 회개(행 2:36-37),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개(행 9:1-9) 등이 좋은 모본이 된다
회개는 단순한 죄에 대한 슬픔이나 고백만은 아니다. 그것은 회개의 원인이나 결과일 수는 있으나 회개 자체는 아니며 회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마음의 결정을 포함한다. 회개는 성경에서 100회 이상 언급된 중요한 주제이다. 회개는 세례 요한의 주제였고(마 3:1-2)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실 때 회개를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막6:12).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했고(행 2:38) 하나님께서도 회개를 명령하셨다(행 17:30).
구약에서는 율법과 희생 제물의 법대로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복음적인 회개란 죄로부터 돌아와서 것을 말한다(행 20:21). 이것은 단순히 악에서부터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기초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행 11:18).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다시 말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말하는 것이다(고후 7:10).
그러나 참된 회개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특권이다(딤후 2:25).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성령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며 그 결과로 회개에 대한 강한 소원이 개인에게 나타나게 된다. 요나는 니느웨성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설교했고 그 결과 니느웨 백성들은 그 메시지를 믿었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왔다(욘 3:3-10).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들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책망하시거나 채찍으로 치시기도 하신다(계 3:19).
출처: 비전성경사전(두란노).
회개 <--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회개'는 과거의 생각 또는 행동에 대해 단지 후회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으나(히.'나함'. 헬. '메타멜로마이'), 그 가장 충분한 의미에서 이 말은 과거에 임한 심판을 포함한 완전한 방향 전환과 미래에 대한 신중한 방향수정을 뜻하는 개념이다. (히. '슈브' "돌아가다. 돌이키다”;헬. '메타노에오' –'마음을 고치다. 회개하다, 메타노이아, 회개' ).
그 자체로서 이 개념은 변개에 포함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인 것이다(헬. '에피스트레포').
Ⅰ. 구약
회개에 대한 구약의 개념은 회개를 입증하는 뜻인 의식적 행동과 회개에 대한 선지자의 요청으로 나타난다. 금식, 베옷을 입음, 재에 앉음, 통곡과 같은 것은 회개를 뜻하는 특징적 표현이 되었다. 게다가 의식적 애가 형식은 개개인 또는 공동체에 의해 강한 죄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 의식들이 진정한 회개에 동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할지라도, 그 의식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고 의의 길을 걷도록 맡기는 것이기 보다 과거 행동의 결과들을 탈피하기 위한 단순한 후회와 바램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었다.
회개에 대한 선지자의 요청은 의지의 자리(욜 2:12-13), 마음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완전한 전환에 대한 권유였다. 이 회개에 대한 요청은 인간 존재의 기본적 물음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을 강조했다. 역사서에서 이스라엘이 나라로서 회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할지라도, 선지자들(특별히, 예레미야와 에스겔 )은 개개인에게 불경건한 삶으로부터 여호와를 순종하고 신뢰하는 삶으로 전환하라고 촉구했다(렘 4 : 1 ;26: 3;36:3;겔 18: 21-28;호6:1-6).
구약은 빈번히 하나님을 후회하시는 분으로 언급한다(예. 출 32 : 14 ;삼상15: 11,35;삼하24: 16).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해오셨거나 또는 이전처럼 하시겠다고 이야기했던 행동의 과정으로부터 전환하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에 대해 긍휼 또는 심판 어느 하나로 대응하시는 변경을 묘사하고 있다.
Ⅱ. 신약
회개에 대한 선지자의 요청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라' 외친 세례 요한의 설교에서 반영되고 있다. 요한이 외친 회개에 대한 동기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였다(마 3 : 2).
회개에 대한 이 요청은 예수님의 선포에서
재개되었다(4 : 17).
이 동일한 요청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는 명령( (18 : 3) ) 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요청(눅 14 : 33)과 같이 다른 말로써 표현될 수 있었다. 초대 교회의 말씀 전파는 회개에 대한 요청을 새로 진술했다(예. 행 3:19 ; 26:20).
그런 회개로 사람들은 믿음에로 들어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세례에서 그 회개가 증거되었다 2:38).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에서 회개는 흑암에서 빛으로 옮기는 새로운 순응으로 묘사될 수 있는 주인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되었다(26 : 18).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 회개의 주제에 대한 증거는 데살로니가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기록하는 살전 1 : 9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회개'라는 말이 바울 서신에는 빈번히 나타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실을 회개라는 개념에 대한 일식(日蝕)현상의 증거로 보았다. 바울 사도는 믿는 자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온다는 사실을 의도할 때 '믿음'(헬. '피스티스')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예. 롬 11: 20;갈3:25-26;엡 4 : 5).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교회의 쟁점, 곧 배교 후의 다시 한 번의 회개의 가능성(히 6 : 4-8)을 거론한다. 그는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는 회개에 대한 절대적 본질을 강조한다. 전 성경에서 처럼, 이 서신의 기자에게서도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통치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부터 미래에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E.M.B.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 1970 ; W Teller, The Forgiveness of Sins 1959).
@장코뱅 폭 넓고 깊은 설명에서 많이 배우네요. 감사합니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 )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 ,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 , 크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11:22),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마 7:9-11).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전 8:11).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 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1:16).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절)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절의 '용납하심'( , 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self-restrain)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 , 마크로뒤미아)은 '어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 , 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벧후 3:15) 하나님의 성품을 시사한다(Harrison).
=====2:5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톤'( )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 )과 부정접두사 '아'( )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 )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 )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신 9:27)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Luther, Calvin, Hendriksen, Harrison). 한편 '그 날'( , 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 헤 헤메라 퀴리우).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전 3:13;살전 5:4). 16절에 언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회개에 이를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무릎을 꿇리지 않고 자녀가 죄악을 깨닫고 후회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인자한 마음, 믿고 기다려주는 너그러움이 없다면 불가능하겠죠.
그런 부모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무시하고 반항하고 끝까지 거역한다면 무섭고 무자비한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함께 알게 되네요.
회개는 하나님 안에 있는 평안과 안식과 행복과 진리를 소유하게 한다는 사실이 기쁨을 줍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을 잘 알고 회개를 사랑해야겠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후회함이 없게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깨달음을 주는 묵상에 감사합니다.
깊고 풍성한 댓글에 감사합니다. 예리한 각도에서 추가적인 분별을 잘 써주신 것 같아요.
@장코뱅 공감합니다.
성경과 좋은 묵상을 댓글과 함께 읽으며 깨달음과 은혜를 나누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