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육체에 죄를 지실 때에
술을 마셔본 일이 없는 사람은 술의 맛 때문에 술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마셨다가 끊은 사람은 그 맛과 영향을 알기 때문에 때로는 술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죄의 유혹이다. 아는 것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죄에 빠져본 일이 없는 사람은 죄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죄를 그리워하는 것은 전에 경험한 그 죄에 대한 애착심 때문이다. 애착심은 한번 사랑했던 것으로부터 온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그리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이유는 성화 되지 못한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성화의 경험, 회개하고 거듭나며, 죄를 극복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의를 추구하려는 마음은 있어도, 자꾸 죄로 휘말리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의 소원을”(창세기 4:7) 가진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우리와 똑 같은 단계를 거치는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와 똑 같은 경험을 하셨다는 것뿐이다. 똑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다르다. 예수께서는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죄를 지셨어야 하였기 때문에 우리와 똑 같은 단계를 따라 시험 당하실 수 없었다. 예수께서도 우리들처럼 인간들이 자라나면서 시기별로 경험하는 시험들도 겪으셨지만, 종류에 따라서 우리와는 다른 시기별로 당하신 시험들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싸움은 우리 자신들과만 연관된 싸움이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과와 싸우셔야만 하였으며, 대속제물은 죄를 대신 지기전까지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처럼 죄에 속박되었다가 나온 자아를 가질 수 없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가지셨던 자아는 죄를 경험한 자아가 아니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는 아담이 타락함으로 “죄의 법”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나”이다. 구속의 경륜의 효력으로 우리 안에 “마음의 법”이 주입되고, “나”가 중립적인 상태를 얻기는 하였지만 “나”는 전과범이었다. “나”는 이미 “죄의 법”아래서 살아보았으며, 죄의 맛을 알고 있었다. 비록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로서 우리를 정죄할 수는 없지만, 아담의 죄의 결과는 유전적으로 인간의 자아의 성질을 바꿔놓았다. 죄를 경험한 “나”는 언제나 그 죄의 맛에 대한 유혹을 받게된다. 술이나 담배를 끊었던 사람들이라도 죽을 때까지 옛 기억의 유혹을 받는 것처럼 죄를 한번 경험한 “나”는 상처받은 “나”가 되는 것이다. 상처받은 “나”는 흠 없는 “나”가 될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이미 실패한 “나”의 흔적을 가지고는 흠 있는 우리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상태의 “나”를 가지고 계셨다면, 흠 있는 양을 치는 목자가 되시지 못하였을 것이다. “흠 없는 어린양”이 되시기 위해서는 우리처럼 전과범의 “나”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되었다. 죄에 대하여 완전히 깨끗한, 순결한 “나”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처럼 그 안에 “죄의 법”과 “마음의 법”을 모두 가지고 계셨지만, 성화 된 자아, 즉 흠 없는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셨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단지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주는 것이었으며, 예수께서도 우리처럼 전과범의 나를 경험하는 시험을 통과하셔야만 하셨다. 즉 죄를 아는 가운데서 죄의 유혹을 견디는 시험이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로마서8:3)심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험을 당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당해야 될 모든 남은 시험들을 경험하실 것이었다. 즉 죄의 결과와 성향으로 인한 시험을 당하시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죄를 대신지셨던 방법은 인간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는 것과 달랐다. 사람이 친구의 죄를 대신 지고 법의 집행을 받는다고 친구의 죄가 실제로 그 사람의 죄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서류상으로 죄목이 옮겨지는 것뿐이지 실제로 그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과 몸의 상태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약을 하고 붙잡힌 사람을 대신 하여 형을 받는 다고 하여도 그 마약의 효과가 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예수께서는 죄를 서류상으로 지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실제로 예수님의 육체에 옮기셨다. 모든 사람들의 죄는 예수께서 친히 지신 것처럼 예수 안에 들어왔다. 인류의 죄는 예수님의 몸과 마음에 융화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 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육신에 죄를 정하시는 것은 단순히 육신에 죄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당해야 할 모든 결과들을 실제로 느끼는 일이었다.
스스로는 완전하였던 예수의 자아는 우리 때문에 죄로 물들어지고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혀 갔던 경험을 느끼게 된다. 흠 없었던 예수의 자아는 서서히 우리들의 죄를 지시기 시작함으로 더럽혀지고 죄의 참혹한 결과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흠 없는 양으로서 죄를 지시는 의무가 시작된 것이다. 눈처럼 희었던 예수의 자아는 점점 검게 변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을 느낀다. 이제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느낀다. 한 두 가지의 죄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바로 자신이 지은 것으로 느낀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붙드시는 임재의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분은 범죄자들과 같이 취급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고 예수의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마 26:38) 되었다. 이제 예수의 자아는 죄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 세상 모든 악인들의 죗된 경험이 예수의 자신의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악인들이 죄를 지음으로 빠졌던 깊은 흑암과 연약성이 예수의 자아를 누른다. 이제 예수의 자아는 셀 수 없는 인류 전체의 죄로 인하여 타락되어지고, 연약하여지고, 망가져 버린 자아가 되어 버렸다.
사단은 그 연약성을 이용하여 십자가를 거절하도록 유혹한다. 이제는 알고 있는 죄 즉 자신의 죄처럼 되어버린 그 죄의 결과들을 이용하여 예수를 유혹한다. 인류의 죄가 만든 반역과 투쟁의 정신이 예수의 육신에서 꿈틀거린다. 사단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거절하고 자신을 살리도록 유혹한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기를 거절하고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라고 유혹한다. 예수의 마음은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구하듯 죄의 어두움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간구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끝까지 육체의 원을 따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하신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셨다. 우리가 당해야 할 영원한 죽음, 영원히 하늘 아버지와 분리되는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통하여, 우리처럼 전과범의 “나”를 경험하시었고, 죄로 물든 자아를 통하여 밀려오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심으로 마지막으로 고통과 시험의 인생을 끝내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합쳐져서 밀려나오는 죄에 대한 성향을 느끼셨으며, 흠 없는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자아는 망가지고, 더럽혀졌으나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심으로 인류의 완전한 모본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마침내, 로마 병정들의 창이나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서 돌아가시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스가랴 13: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히브리서 2:14)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 되심을 부인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요한2서:7)
베들레헴의 이야기 속에는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로마서 11:33)이 숨겨져 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는 소식이 2000년 전에 온 땅과 우주에 선포되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1서 3:1,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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