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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성당 ~약현성당을 잇는 6Km 성지순례길. 도보 2시간
◈ 중구 순례 역사길 코스
명동대성당→수표교 이벽의 집→좌포도청 터→의금부 터→ 전옥서 터→ 우포도청 터→
경기감영 터→ 약현성당→ 서대문밖성지(서대문역사공원)
포도청 순례길 코스 약도
☞ 찾아가는길- 4호선 명동역 9번 출구
명동성당
1882년 프랑스인 교구장 블랑 주교는 신앙공동체였던 명례방 터를 구입하여 1882년에
공사를 착수하여 교인들의 도움으로 1898년 명동주교좌 성당이 완공되었다.
명동성당은 조선시대에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명맥을 이어 온
한국 천주교 역사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1970~80년대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강했던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과 학생들을 보호한 치외법권 공간이었던 것도
명동성당이 지니고 있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의선신부가 설계한 한국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인 명동주교좌성당은 종교적, 건축적
의미는 물론 사회에 대한 종교적 책임을 가진 곳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성모무염시태
1898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하여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내부
파이프오르간
명동성당 파이프오르간은 독일 Berner Bosch사 작품으로 3단손건반, 발건반, 2700여
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으며, 1985년 2층 성당 후면 발코니에 설치되었다.
79위 복자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주교 및 두명의 성직자와 김대건 신부을 포함한 79위 복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1839년의 박해(己亥迫害)와 1846년 박해(丙午迫害)때 순교한 분들인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1866년 박해(丙寅迫害)때에 순교한 24위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명례방 초기 천주교 집회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 1785년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 사랑 대청에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와 이벽, 권일신, 이승훈등이
모여 주일 집회를 갖고 있다.
성세대
김범우 토마스 성화
김범우 토마스는 역관 집안에서 출생하여 1784년 이벽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 이승훈
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85년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와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 남인 학자 수십명이 명례방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다 발각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양반 출신으로 방면되었으나 중인인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단양으로 유배되어 고문
의 휴유증으로 1년만에 죽음으로써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가 되었다.
프란체스코 교황
빛이 들어오는 성당 안 스테인글라스가 너무 아름답다.
사형선고 받으심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던 그는 기해박해 때 순교당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성모동산 앞에서 바라본 성당
이회영 상
수표교로 가기 위해 명동성당을 등지고 내려 오면 농협 골목이 나온다. 그 길목에서 만난
이회영·이시형 6형제 집 터에 세워진 이회영 상이다.
형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 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동생 이시영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재임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수표교 이벽의 집 터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평가되는 이벽(1754-1785)이 살던 집이 있었다고 추정
되는 곳이다. 이벽(세례자 요한)은 선교사가 없는 조선에서 독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으며 북경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가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벽, 정약용, 권일신에게 첫 세례식을 거행한 장소로
최초의 자발적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곳이다.
☞ 찾아가는길- 종로구 청계천로 105
신간회 본부 터
수표교에서 좌포도청을 향해 걷다가 만난 신간회 표석으로 1927년 출범한 신간회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힘을 합쳐 민족운동을 전개한 단체로 이상재 등이
이끌었다. 1929년 6.10만세 사건 등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내부 갈등을 겪는 등
설립된지 4년 만에 해산하였다
☞ 찾아가는길- 종로3가역 15번 출구 → 종로2가방향 → YBM 어학원 앞 녹지
단성사 터 역사
이곳 단성사 터는 좌포도청만 자리했던 곳이 아니라, 최시형이 참수된 곳이기도 하네요.
좌포도청
좌포도청은 1795년 북산사건으로 시작된 을묘박해 때 처음으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하였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는 최경환 프란체스코,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
로, 남경민 베드로, 임치벽 성인이다. 1795년 을묘박해 때는 최인길, 윤유일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
아도 체포되어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기해박해 때 성인 중 70명이 포도청
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 주교, 모방 베드로 신부, 샤우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지켰던 곳이 바로 좌포도청이다.
☞ 찾아가는길- 3호선 종로3가역 9번 출구
리델주교가 기록한 좌포도청의 감옥 구조도
단성사터
1907년 6월 경성의 실업가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이 공동출자하여 이곳에 단성사를 설립하였다.
1919년 10월27일 한국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되어 '영화의 날'로 지정되었고, 1926년 10월
1일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개봉되어 단성사는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영화관으로 한국 영화관의
최시형 순교터
1898년 동학 제 2세 교조였던 해월 최시영이 이곳 죄포도청 교형장에서 순교하였다.
경시서 터
좌포도청을 뒤로 하고 의금부터로 가던 중 만난 경시서 터는 고려시대의 경시서를 이어
받아 태조1년(1392) 설치되어 물가 조절, 상인들의 감독, 세금 업무 외에 화폐의 유통과
도량형(度量衡)에 관한 업무도 담당하였다. 세조12년(1466)에는 평시서(平市署)로 이름을
바꿔 고종31년(1894)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평시서는 원래 현재의 조계사 근처인
견지동에 있다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왔다.
☞ 찾아가는길- 종로3가역 1 번 출구 → 탑골공원 정문 옆 종로2가 파출소 앞 보도
피맛골 주점촌
조선시대 종로는 궁궐과 관가가 가까워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은 큰 길이었는데, 하급관료나 서민들이 큰 길을 가다가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려 예의를 표했다. 이런 일이 빈번하자 번거로웠던 서민들은 큰 길 양쪽 뒤편의 좁은 골목을 이용하게 되었고, 이 길을 따라 목로주점, 모주집, 장국밥집이 연이어져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고,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 하여 피맛골 또는 피마길이라 불렸다.
☞ 찾아가는길- 종로 2가역 부근
의금부 터
의금부는 어명으로 사형선고를 내리던 최고 재판소로 박해 시기에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았던 곳이다. 신유년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인
최창현, 정약종 등이 모진 문초와 형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기해년에는 앵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르탕 신부 등이 병인년에는 베르네 주교, 브르트니
에르신부, 남종삼 등이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 찾아가는길-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전옥서 터
전옥서는 형조에 속한 감옥으로,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로, 남자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고,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이 상민이었으며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
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전옥서는 1785년 명례방 사건 때 김벙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 가 신앙을 끝까지 지킨
이래 천주교 103위 성인 중 전옥서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혹독한 감옥생활로 순교한 성인은
이호영 베드로와 김바르바라와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이 있다.
☞ 찾아가는길- 종로역 6번 출구 앞
우포도청 터
좌포도청과 함께 박해 시기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서울의 마지막 순교
터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그의 마지막 옥중서간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찾아가는길- 5호선 광화문 5번 출구
기념비전
고종즉위 40년 칭경 기념비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칭호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를 보호하는 작은 비각에 '기념비전'이라는 현판을 달아 격을 높였으며 비각은 2중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서 있는 정자형 건물로, 20세기 초 전통적 건축 양식이 사라지기 직전에 세워
진 것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 찾아가는길- 광화문 교보문고 앞
형조터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 찾아가는길-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 옆 건물 사이
공조터
공조는 토목·건축 공사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전국의 산림과 하천, 배와 수레, 기술자를 관리하고
관청에서 사용하는 도량형(度量衡)을 배포하며 각종 기계·도구를 제작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
다. 소규모 공사는 산하의 선공감(繕工監)이 수행하였으나 도성 수축이나 왕릉 조성 등의 대규모 공
사는 임시 관청인 도감(都 監)을 두어 담당하게 하였다.
☞ 찾아가는길- 세종문화회관 앞 횡단 보도 옆 바닥
장예원 터
장예원은 형조 산하 기관으로 노비들의 원성이 많았던 기관인데 조 선 후기에 들어와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업무가 줄어들었고 영조40년(1764) 보민사(保民司)로 개칭하여
노비 관련 소송은 형조로 이관하 게 되자 유명무실해졌다.
☞ 찾아가는길- 광화문역 8번 출구 → 광화문 4거리 방향 약 20m → 국호빌딩 앞 보도 가운데
야주개
서울포시즌스 호텔 앞에 있는 야주개 터를 알리는 작은 표석으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경희궁으로 가는 길에 작은 고개인 아주개가 있었다는 표석이다. 지금은 서대문으로 이
어지는 도로가 포장되면서 고개가 깎여 평지가 되었고, 그 자리에는 고개가 있었다는 흔적
만 남아있다.
☞ 찾아가는길- 서울포시즌 호텔 앞
군세군 앞에 세워진 김삼석 순교사관 표지석이다.
☞ 찾아가는길- 역사박물관으로 가는길에 있는 군세군회관 앞
전차 381호
이 전차는 1930년경 부터 약 38년 간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던 서울시민의 교통수단이었다.
☞ 찾아가는길- 역사박물관 옆
돈의문 터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문으 로 흔히 ‘서대문’이라고 불린다. 최초의 돈의문은 1396년(태조5년)에 도성의 8개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으나 1413년(태종13년)에 새로 지어진 서전문이 성문의 기능을 대신 하였다. 1422년(세종4년) 에 다시 서전문을 닫고 이 지점에 새로운 돈의문이 세워졌다. 이후 새로운 문이라는 뜻의 ‘새문’ 또는 ‘신문’ 이라고도 불렸다.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3월 도로확장공사를 위해 철거되었다.
☞ 찾아가는길- 강북삼성병원입구(차도) 언덕 계단 옆
경기감영 터
경기감영 터는 ‘잊힌’ 순교지로 시복을 앞둔 124위 중 조용삼베드로의 ‘순교지’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또 최창주마르첼리노와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이 1880년 10월께 끌려와 이듬해 4월 25일 고향 여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기까지 신앙을
고백한 ‘증거지’라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 찾아가는길- 서대문역 3번 출구 → 적십자병원 방향 5m전방 보도
약현성당
약현성당(藥峴聖堂)은 1891년(고종 28) 박해가 끝나고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898년 건축된 명동성당 보다 6년 먼저 세워진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로
지어진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다. 약현성당의 건축에 동원된 흙은
서소문 밖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이 묻혀 있던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 찾아가는길 - 2호선 충정로역 5번출구 → 직진300m직진 후→ 중림파출소 맞은편
성당 내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약현성당은 '작은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다.
사제관 앞에서 바라본 약현성당
서소문 순교성지
서소문밖 네거리로 불리던 이곳은 1801년 이래로 100명이 넘는 교우들이 순교한 곳으로서 한국에서 가장
큰 순교성지로, 이곳에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 마흔 네분이 1984년 5월6일 성인으로 선포됨에 따라 이곳은
빛나는 영광의 땅이 되었다.
성 정하상 바오로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평신도 신학자, 교회 지도자로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로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2일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본당 주보 성인 성 요셉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돌보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 약현성당에서 서소문 성지(서소문 역사문화공원) 찾아가기
① 성당 정문에서 왼쪽(아현동) 방향 150m
② 한국경제신문사 건물 앞 횡단보도 건너기
③ 브라운스톤 중앙통로 통과 하면 목적지다.
서소문 밖은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이곳은 103위 순교 성인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함께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입니다. 서소문 성지는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으며 공원
중앙에 순교 탑이 우뚝 서 있다.
현재는 서소문 역사공원은 공사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