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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과 소실 위기 극복
조선시대에 들어와 팔만대장경은 태조 7년(1398년)에
서울 지천사(支天寺, 현재 서울 시청 맞은 편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왕족실록 <태조실록>5월 10일조의 기사에 보면, 태조가 용산강(龍山江)으로 친히 행차하여 강화 선원사로부터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다음날에는 비가 오는 가운데 2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지천사로 옮기되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력들이 독경하였다고 적고 있다.
지천사에 모셔졌던 팔만대장경은 여름철 우기가 지나고 가을 들어 곧바로 다시 해인사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데, 정종 원년 정월초 9일조 기록에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해인사에서 장경을 인출하는 승려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게 하는데, 태상왕(은퇴한 태조 이성계)이 사재로 대장경을 인출하기 위하여 동북백(함경도)에 조와 콩 540석을 단천 · 길주의 두 창고에 납부하고 그것으로 해인사 근처 고을에 있는 쌀과 콩을 그 수효만큼 교환케 하였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바로 그 해 말에 해인사로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을 옮기는 행렬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와 함께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열었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거나 지게에 이거나 머리에 이고 행렬을 이루어 나아갔을 것이다.
이 행렬은 서울 지천사에서 시작하여 장호원과 충주를 지나 조령 · 문경 · 점촌 · 구미를 통과하여 장경나루를 거쳐서 해인사 판전에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배를 띄워 대장경판을 싣고 서해 바닷길을 통해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에 이르러, 그곳에 배를 대로 해인사까지 운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개포마을의 이름도 ‘경을 풀었다’는 뜻에서 나온 ‘개경포(開經浦)’가 전화된 것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머나먼 합천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지면서, 해인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법보종찰(法寶宗刹)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왜구들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극성을 부리게 되는데, 강화에도 여러 번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자행한 사실이 나와 있다.
고려말에 왜구 소탕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기할 수 있었으나, 팔만대장경을 강화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는 위치상 외적의 침입이 미치기 어려운 곳인데다 그 이전 고려시대에도 <고려왕조실록>를 보관했던 사고지였고, 화엄사찰로서 교종의 뿌리가 깊었기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조선 태조는 해인사를 팔만대장경의 최종 보안지로 확정하였다.
팔만대장경이 보안되어 있는 해인사 대장경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의 60간짜리 165평씩의 두 긴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판고로서,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 부르는데,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 기능을 위해 일체의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전통 과학의 우수성이 독창적으로 발휘된 건물이다.
세 가지 재앙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는 해인사는, 그러나 내부에서 대규모의 화마(火魔) 재앙을 맞곤 했다.
조선시대에 7번이나 대화재가 나서 그때마다 해인사 건물들 대부분이 소실되어 힘들여 중창해야 했다.
하지만 이 대장경판전만은 조선 초기 태조대에 지어진 뒤, 조선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정희왕후 윤씨의 뜻을 받들어 30간을 증개축한 일이 있을 뿐, 대화재 속에서도 조금도 다치지 아니하고 기둥 한 군데 기울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판가(板架)의 진영장치뿐 아니라 주변 환경과 공기의 흐름을 정확히 이용하는 통풍방식, 방습을 위한 배부 구성, 인경작업할 때의 편의성 등이 완벽히 조정되어 있어서 가히 전통과학의 보고라 할 만하다.
팔만대장경이 위기를 맞은 것은 대화재 때만이 아니었다.
선조 연간 임진년(1592)에 왜군들이 대규모로 침입, 부산포에 상륙하여 이후 전국을 병화로 몰아 넣었을 때 팔만대장경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
임진년 4월 13일에 침공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5일에는 동래, 17일에는 양산 · 울산, 19일에는 밀양 들로 파죽지세 진군하여 21일 창원 · 창녕으로 휩쓸고 들어와 거창을 점령하고 지례를 지나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해 들어 왔다.
불과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이 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것이다.
왜군이 거창이나 성주에서 한발 옆인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을 약탈하는 것은 이제 죽먹기보다 쉬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우리 팔만대장경본은 물론 그 경판 까지도 줄곧 눈독들이고 요구해 오고 있었던 터였고, 조선의 우수한 문화재와 장인들을 우선적으로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거창의 김면(金沔)장군,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장군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이었다.
망우당(忘憂當) 곽재우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의령에 묻혀 살다가 41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맞자, 개전10일 만인 4월 24일 가솔 5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낙동강 지류로 움직이는 왜군의 유통로를 초반에 막아버렸다.
그러자 곧 거창에서는 의병장 김면이,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주요 읍성을 점령한 왜군의 준동을 갸야산에 의지하여 막아냈다.
송암 김면과 내암 정인홍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중앙 벼슬자리를 사퇴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소암대사는 휴정(休靜) 서산(西山)대사의 제자로서 임진왜란을 맞자 승병을 모아 해인사를 수호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주를 점령한 왜군들 일부가 해인사로 접근하자, 승병들을 이끌고 절로 들어오는 앞의 큰 산고개를 막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지금도 그 산고개를 왜구치(倭寇峙)라 부른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힘을 합쳐 5,000의 의병으로 낙동강 동쪽 현풍 · 창녕 · 영산 등지의 왜군 제9군 11,500명과 대결, 이들을 영산성으로 몰아붙이고는 다시 성주성으로 쫒아냈고, 김면 의병군과 정인홍 의병군은 합동으로 손금보듯 잘 아는 고향 땅 지세를 방패삼아 성주성에 몰린 2만 왜군의 발목을 묶었다.
성주성을 둘러싼 8월과 9월, 12월의 대규모 의병 공격에 몰린 왜군은 이듬해 1월에 개령 · 선산 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됨에 따라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가야산을 의지한 경상도 의병이 펼친 전대미문의 유격전쟁과, 해인사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승려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의병장 김면 장군이 이듬해인 계사년(1593)에 전장에서 과로로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시는 당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우리 조상들의 절절한 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 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兄知有國 不知有身)"
치욕적인 일제시대를 지낸 뒤, 팔만대장경이 또 한 번 중대한 소실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민족 상잔의 비극이 전개되었던 6.25 전쟁 때였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그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가야산에 숨어 가야산 줄기와 계곡의 요처인 해인사를 중심으로 주변 숲을 진지화해서 소탕작전을 펴는 국군과 맞섰다.
운명의 기로는 195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토벌을 진행하던 육군이 공중지원을 요청하여 해인사 주변의 공비를 폭격해달라는 주문을 낸 것이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는 각각500파운드 폭탄 2발씩과 5인치 로켓탄 6발씩을 장착하고 있었고 특히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어서, 투하했다 하면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인민군의 소재지를 파악한 정찰기가 백색 연막탄을 투하해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폭격지점으로 가리키자, 즉각 미군사고문단에서 폭격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런데 1번기를 기수로 해서 4대의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가던 그 순간, 갑자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김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인민군의 지상포화가 교차하는 속에 기총소사로 공격하던 비행편대에 다시 정찰기로부터 폭격 재촉 명령이 떨어졌다.
“해인사를 네이팜탄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령을 들은 기장들은 인민군들이 공격을 피해 해인사로 몰려가고 있으니 빨리 폭격을 하자고 편대장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날카롭게 명령을 뒤집었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러고는 기수를 돌려 몇 바퀴 선회하다가, 몇 개 능선 뒤의 성주쪽 인민군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 날 바로 미군사고문단이 윌슨 장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령불복종을 항의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여 김 대령을 총살이 아닌 포살(砲殺)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때 배석하고 있던 당시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명령불복종 행위를 겨우 무마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해인사 폭격에 맞섰던 김영환 대령의 형이기도 했다.
그 날 저녁, 미군사고문단 책임자가 국군전대본부를 방문하여,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편대원 전원과 작전참모 장지량 중장 등과 한자리에 모여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인 명령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했다.
이에 대하여 죽기를 각오한 김영환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아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투철한 군인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민족의 유산 팔만대장경을 지키려 했던 김영환 대령은 그 뒤 1955년 강릉 지구에서 순직했다.
민족적 자긍심과 참된 기개를 가진 김 대령이 거기 없었던들, 팔만대장경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뒤 현대에 이르기까지 750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고 화재를 맞았음에도, 그 대규모의 전질 모두가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게 보안되어 있으니 실로 신비롭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팔만대장경의 인출 및 배포
팔만대장경은 양적으로 대규모여서 인출(印出)하는 일도
소요 인력과 물적인 동원면에서 국가적인 결정이나 지원이 없이는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에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행차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팔만대장경 판각을 완료한 뒤 처음으로 전질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고려 말기의 충숙왕대나 우왕대에 여러 번 인출작업이 수행되었는데,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이 아버지 이곡(李穀)의 서원을 받들어 우왕 7년(1381)에 여러 곳의 도움으로 인출하여 여중 신륵사의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은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억불정책이 줄곧 진행되었던 조선조 500년 동안 인출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태조 2년(1393)에 왕명으로 인출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고, 정종 · 세종대에도 인출 기록이 보이며, 세조 4년(1458)에는 왕이 신미(信眉) 등에게 명하여 50질을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도 20질이 인출된 기록이 있다.
그 뒤 고종 2년(1865)에는 2질을 인출하여 오대산 적멸보궁과 설악산 오세암에 각각 한 질씩 봉안하였고, 1899년에는 상궁 최씨의 발원으로 왕실 내탕금과 성금을 모아 4질을 인출하여 해인사 · 통도사 · 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한 질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 질은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7년 뒤인 고종 광무 10년(1906)에도 왕실에서 내탕금 6만 전을 들여 1,400권을 인출하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봉안했다.
자랑스런 인류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
고려팔만대장경의 영향력은 비단 우리나라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출된 팔만대장경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불교문화에 중대한 촉진제가 된 사실은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과거 일본에서도 대장경 사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는데, 고려팔만대장경이 완성되자 스스로 판각하기보다는 이 팔만대장경의 수입을 갈구해마지 않았다.
고려후반부터 사신들을 보내 장경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고 조선 초기에 이르면 태조대에 4차, 정종대에 7차, 세종대에 9차에 걸쳐 각종 공물을 바쳐오면서 대장경을 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판 자체를 무리하게 요구해온 것도 3차례나 되었다.
세종대에는 일본 국사가 들어와 대장경판을 하사하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면서 집단으로 단식하다가 6일 만에 그만둔 웃지 못할 일까지 있었다.
이렇듯 우리의 팔만대장경본은 수십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불교문화의 발전에 촉진제가 되었다.
일제시대 초기인 1915년 당시 총독이었던 테라우치는 교토의 천용사에 봉안하고자 인출했는데, 그 뒤 동경제대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1923년 동경대지진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에 인출된 또 한 질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37년에는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2질을 인경하여 선물로 보낸 적이 있으나 만주국이 붕괴되면서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다른 한 질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안장하기로 했다가 사정상 영변 보현사(普賢寺)에 봉안하였는데 현재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후신인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일본은 인출해간 우리 팔만대장경본을 정본으로 삼아 메이지 연간에 송 · 원 · 명대의 대장경본을 교합하여 축쇄장경을 펴냈고, 타이쇼 연간에도 팔만대장경본을 바탕으로 삼아 오늘날 한자권 불교정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정신수장경을 엮어냈다.
결국 팔만대장경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불교정전의 원본인 셈이다.
한 예로, 1986년 영국의 동양학자 제임스 레그(james Legge)가 법현(法顯)의 『불국기』를 영역할 때 사용한 텍스트가 바로 우리의 팔만대장경본이었다.
마지막 인경작업은 1963년부터 1968년에 있었다.
설제(設題) 김두호(金斗鎬)가 문공부의 인출 허가를 받아 총 13질을 인경하여 국내에는 동아대 1질, 동국대 1질, 성균관대 1질, 중동중고등학교에 1질을 봉안했고, 국내외로는 일본 사천왕사(四天王寺) 1질, 비예산사(比叡山寺)1질, 고야산사(高野山寺)1질, 일본국 국회도서관 1질,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1질, 영국에 2질, 호주에 1질, 대만에 1질을 보냈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해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여 총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완성,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 나라의 유명 도서관에 보냈다.
불교문화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우리 팔만대장경의 우수성이 전 세계 불교학계에 알려지면서,
유네스코에서는 1995년 우리나라의 석굴암 · 종묘와 함께 경판을 봉안한 대장경 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2007년 고려 팔만대장경을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그 문화적 가치와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우리 후손들 모두가 길이 보전해야 할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확정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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