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전윤호는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정선』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
『늦은 인사』
『봄날의 서재』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등의 시집을 냈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편운문학상
을 수상했다.
전윤호 시인은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걸어가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김재성 정선군 문화체육과장은
“정선의 역사를 보완하는 자료로서 고고학적 증거와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숨겨진 사료들을 통해 작가가 보고 느낀 내용을 담았다”
며 “군민들이 고향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인 방민호 교수(서울대학교)는 서평에서 이 생에서 오로지 시를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전 시인을 언급했다.
“그대는 세상의 흐름과는 다른 시간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 ‘안맞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자기만의 삶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대는 어딘지 모르게 혼탁, 혼란스럽고, 그래서 비루하기만 한 이 세계의 고민을 훌쩍 뛰어넘는 차원의 시인같아 보여. 지금 이 세상에 시인 이름을 가진 사람 참 많지만 그대처럼 시속에 시계를 맞추지 않으려는 고집스런 시인은 아주 드문 법이지.”
방 교수는 이번 시집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어떤 존재적 고독에 침잠하여 자연 그 자체와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고 평했다.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전윤호
이삿짐을 싸는 데 익숙해진 그녀는
내가 없어도
쉽게 떠날 준비를 끝낸다
내 몫으로 남겨진 가구나 이불들은
너무 낡거나 무거워서
버리고 가도 괜찮은 것들이다
필요하다면 가볍게
그녀는 기르던 개도 이웃에 준다
함께 산 지난 오 년 동안 기른 머리를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싹둑 자른 그녀는
요즘 취한 내 옆에서 자지 않고
슬그머니 부엌으로 빠져나와
주소를 쓰지 않은 편지를 쓴다
송곳니가 빠진 날 무표정한 얼굴로
오래 살펴보면서
냉장고와 함께 밤을 새는 그녀는
낯설게 아름답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 …(중략)…
나를 사랑해주는 만큼 나도 사랑해/
그런 경우는 드물더군요/
손익을 따지고/
관세를 올리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화폐라/
같은 가치로 환전할 수 없네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 전윤호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를 위해 밤을 꼬박 새워 편지를 써도
그는 읽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당신이 그를 위해 세상의 모든 꽃을 꺾어 바쳐도
그는 향기조차 맡지 않고 발로 밟습니다
당신이 그를 위해 목숨을 버려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이 준 편지를 그 사람에게 읽어주고
당신이 준 꽃을 그 사람에게 바치고
당신이 버린 목숨을 비웃으며 그 사람과 행복해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울고불고 매달려도
그는 당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착하고 아름다워도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그를 잊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당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잠시 머물며 생각해보기
냉혹한 전반부: 시의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독자가 가진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버릴 정도로 잔인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내가 준 사랑의 증표들이 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짝사랑의 가장 비참한 단면을 보여주지요.
반전의 결말: 하지만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화자의 진짜 의도가 드러납니다. 타인에게 구걸하듯 바치던 그 거대한 사랑을 이제 **'나 자신'**에게 돌려주라는 강력한 권유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가슴이 아릿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쏠려 있던 시선이 나를 향해 돌아오는 기분이 듭니다.
혹시 이 시를 읽으며 떠오르는 구체적인 감정이나, 특히 위로가 되었던 구절이 있으셨나요? 원하신다면 이와 결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부드러운 치유를 담은 다른 시를 찾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시계
내 손목시계는 안 맞는다
시간도 틀리고
날짜도 요일도 제멋대로다
매일 아침 바늘을 맞추고
요일과 날짜를 고친다
그나마 차고 있지 않으면 멈추는
서툰 시계
숫자가 따박따박 초 단위까지 나오는
전자시계도 있고
틀릴 걱정 없는 휴대폰도 있지만
아기처럼 매일 고쳐주고 흔들어줘야 한다
너와의 약속을 한 시간 빨리 돌리고
막차 시간은 한 시간 늦추는 사람에겐
얼마나 소중한지
맘대로 차고 다니는
내 손목시계가 좋다
사랑에 대해 “
꼭 이윤을 남길 필요가 없잖아요”
“별들은 적당한 거리 두고 있을 때 빛납니다”
“만항재 오가며 눈이 붉어진 사람들/
열목어처럼 정암사에 깃들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연인들/
쨍그랑 쨍그랑 풍경에 걸리고/
사랑은 언제나 가슴 찌르며 서 있으니/
그대 절하며 소멸을 물으면/
천만년 파도로 뭉친 돌인 양/
말없이 정한 눈물로 씻겨주리”
(‘수마노탑’ 중에서)
‘이별사’
“지금 마시는 물도 공기도/
누군가의 흔적/
소멸은 소멸일 뿐이지/
벌거벗은 바람 불면/
강둑 헤매는 사람들/
아직도 기대 버리지 못해/
삼층탑 쌓지만/ …(중략)… /
당간지주만 남은 사랑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실연을 믿지마/
그저 우리가 폭발한 별자리에/ 새로운 만남이 생기겠지/
이 번잡한 우주에 아픈 우연은 한번으로 족해” (‘이별사’ 중에서)
세상의 모든 연애
세상의 모든 연애가 뻔해지는 나이
햇살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한여름
떠나는 네 등 뒤로 눈보라가 날려도
하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나이
첫 장을 읽은 소설의 결말이 보이고
중간에 본 영화의 앞까지 짐작되는
사람도 귀신도 아닌 모습으로
밤거리를 쏘다니는 나이
계속 만나면 얼마나
서로 상처 줄지도 짐작하고
지금까지 지은 죄로도
19층 지옥이 예약된 상태
세상이란 세트장을 뒤에서 보는 나이
모든 주의 사항이 우스워지고
헛된 희망을 씻어 밥솥에 안치며
두 벌의 수저를 꺼내는 나이 ***
수몰 지구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
입맛
신장개업한
자리 몇 없는
동네 평양냉면집
행여 문 닫을까
가끔 들른다
자주 가기도 어색해
걱정만 한다
내 입에 맞는 심심한 맛
당신도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우주는
언제나 간신히 열려 있다 ***
내가 고향이다
추석에 집에 있기로 했다
친정이 없어진 아내와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올 명절은
집에서 쉴 거라 했다
시장에서 송편을 사고
보름달 뜨면
옥상에서 구경하자고 했다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컴퓨터 게임을 사고
인터넷으로 떠난다
괜히 적적한 척
서울에 있을 선배에게 전화해
그날 저녁 만나기로 했다
문을 닫고 돌아누운 어두운 거리에도
작은 수족관에 불을 켜고
물방울 같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문 여는 술집이 있을 거라고
텅 빈 시내버스처럼
반겨줄 사람이 없는
성묘객이 끊어진 무덤처럼
내가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