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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과 발생
이영숙
내 쪽으로 달려오는 자동차가 있다. 어떤 ‘나’는 자신을 지나쳐 멀어져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좇으며 배기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참거나 자신의 머리칼과 옷깃이 날리는 감각을 느낄 것이고, 다른 ‘나’는 자동차를 내면의 어딘가로 불러들여 황량한 과거의 먼지 자욱한 하루를 호출하거나 그늘에 세워놓고 창문을 내려 잠시 한숨 돌리는 내일의 해안도로에 미리 가 있을 수도 있다. 시인의 시선은 세계이든 내면이든 늘 어딘가를 향하고 바로 그 도달 지점에서 자신의 시를 출발시킨다. 세계를 향했다가 세계의 끝에서 생성된 전자의 시는 형상화된 삶을 데리고 오고, 내면의 끝에서 출발해 돌아오는 후자의 시는 형상화된 관념을 데리고 온다. 둘 다 미적 스펙트럼을 경유하겠지만 아마도 전자는 에피소드로 구체화된 시공간을, 후자는 사유로 추상화된 시공간을 펼쳐 보여줄 것이다. 이강하 시인의 시적 영역은 후자에 속한다.
님께서 아흔아홉 번째 눈을 뿌렸다
잠시 쉬었다 가라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라고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축하하며 손뼉 친 범고래들
어제도 고마웠다
마당과 화단 사이
하얀 새끼 부엉이 닮은 눈사람들, 눈이 부시다
밤새 잠꼬대가 심했을까
눈사람 하나가 목이 삐딱하다
범고래는 떠났는데 눈사람은 살이 붙었다
밤새 얼마나 탐닉했을까
눈의 골짜기를
바람 구름 고요의 섞임이 팽팽하다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 속 사방도
오늘만큼은 샤갈의 그림이고 싶은 날
갈라진 흰빛 뒷면은 누구에나 거룩한 여백이 될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언제 사라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 몸에 스며들고 있는 서늘한 흰빛 무더기
이것이 화두다.
―「눈사람」 전문
생의 전환기에 섰을 때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을 설계하곤 한다.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라고 축원하는 이유이다. “눈”이 내리고, “정년퇴임 기념식”이 있었던 현실 공간이 “님”과 “아흔아홉 번째 눈”, “범고래들” 등으로 상징화되면서 의미의 세계로 전환되는 이 시는 이강하의 시적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시인이 장차의 “화두”로 삼은 것은 문맥적으로 현실적 고려(“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느냐”)나 미래적 염려(“언제 사라지느냐”)가 아니라 현재적 충만이다. ‘서늘한 흰빛 무더기’를 일컫는 “눈사람”을 “탐닉”하고 사물과의 교감에 이르는 일인데, 그러나 이강하 시에 있어서 이는 당장 공간의 충돌을 일으킨다. 곧 “마당과 화단 사이”의 현실 공간에 있는 “눈사람”과 “눈사람”에서 비롯된 환상적ㆍ관념적 공간(“샤걀의 그림이고 싶은 날”의 “거룩한 여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에서 이 충돌은 파괴적이거나 상호모순적이지 않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람 구름 고요의 섞임이 팽팽하다/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 속 사방도”란 두 행이 단서를 제공한다. ‘바람 구름’이라는 현상과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란 사물을 시인은 ‘고요’라는 관념과 섞어 사유의 세계로 이월한다. 현실이 아니라 내면에서 사건을 발생시키므로, 현재라는 시간성은 내면이라는 공간성에 자연스레 수렴되는 것이다. ‘서늘한 흰빛 무더기’가 스며들고 있는 ‘몸’이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정신 혹은 내면의 다른 말인 이유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칸나의 해안」은 실재하는 고유명사인가, 칸나가 피어있는 해안을 주관적으로 명명한 장소인가, 혹은 이미지로 구성된 심상적 공간인가.
나는 꿈꾸는 사계
어린 아이들이 맨발로 저벅저벅 나를 밟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붕 뜬 마음
네가 최초 걸음마를 배울 때
파도 사이로 지나가는 새끼 거북이가 된 것처럼
중심을 잃지 않게 아치를 바로잡아준 그때 그 스침이 번진다
큰 꿈이 작은 꿈을 통과하면
지우고 싶은 구멍과 상실감이 박살날까
호미 들고 뛰어온 사내아이가 갯벌 깊숙이 힘을 가하면
더 멀리 달아나는 것들
아직 상대도 스침이 두려운 것일까
그래, 아이야
그렇게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면 된다
다시 스치면 된다
매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라는 말
먼저 삶을 경험한 어른들의 소망일 테다
그러고 보니
끝없이 움직이는 수평선도
구름과 물소리를 빚어 신비한 빛이 된 저물녘도
나의 최초 조력자를 닮았다.
―「칸나의 해안」 전문
이 제목으로 시인은 이미 여러 편의 시를 써서 발표한 듯하다. 지면에서 만난 기억이 있는데, 이처럼 부제도 달지 않고 한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쓰는 행위는, 근래 여타 시인들에게서도 가끔 목격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낯설다. 부제의 기능, 일테면 시적 범주를 지시하거나, 시제에 대한 부연, 또는 시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도 있는 장치를 거부한 채 시편들이 저마다 독립 정부일 수도 있고, 뿔뿔이 흩어지는 난민일 수도 있다. 지면의 여기저기서 첫 작품처럼 혹은 마지막 작품처럼 출몰하거나 어딘가에서 분투하다가 일란성 쌍둥이처럼 극적으로 상봉하고, 땅속 넝쿨을 따라 감자알처럼 한꺼번에 딸려 올라올 수도 있다. 「칸나의 해안」을 다시 만난 소회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칸나의 해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그것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적 공간에 가깝다. “네가 최초 걸음마를 배”우던 곳이라든가 “갯벌”이라는 구체적 장소가 등장하지만, “스침”에 대한 통찰이 전면화되면서 시는 바로 현장을 벗어난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을 무장해제 시키며(“어린 아이들이 맨발로 저벅저벅 나를 밟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붕 뜬 마음”), 어른들의 속성인 후회(“지우고 싶은 구멍”)와 “상실감”을 “박살”내 줄 잠재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호미 들고 뛰어온 사내아이가 갯벌 깊숙이 힘을 가하면” 갯벌의 생물이 “더 멀리 달아나는” 건 그들이 아이의 “스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이는 사내아이가 그들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걸 그들이 모르고 있어서라는 것.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중심을 잡아줄 때 “스침”이 일어나는데, 이때 아이는 역으로 어른의 “아치”를 바로잡아 준다(이 시에서 “아치”가 자아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용어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스침”을 통해 “최초 조력자”는 아이에게는 어른이 어른에게는 아이가 되므로, 「칸나의 해안」은 스치면서 소통하는 원초적 바름을 상징하는 이강하의 내면 공간이다.
해 지는 저녁이 가면을 쓰고 꿈틀거린다
어둠 속 가면이 백기를 든 골목으로 사라지면
진실을 고백할 때다
해넘이 찰나가 해돋이 찰나를 이해하듯
바오바브나무는 성장기를 펼치며 혹한 시절의 나이를 꺼내서 매만진다
저녁이면 어떻고 새벽이면 어떤가
수백 년 뒤 작은 섬이 되면 어떻고 수백 년 뒤 모래알이면 어떤가
가슴 텅 빈 여기 깊숙한 숲에서 못생기고 뚱뚱한 동화를 쓰면 또 어떤가
서로가 통했다면 해지는 저녁이지
해 없는 동안만은 농한 기도로 고통을 덜어낼 것
해가 떠 있는 동안만은 일터에서
착한 공기로 틈과 뜸을 배우며 사랑하기
해 지는 광경은 고통이면서 기쁨이다
시공을 초월한 불사의 사다리가 길어지는 강가
바오바브나무 표정이 축축하다
바오바브나무야, 더는 자책하지 마
너는 너일 뿐, 해지는 저녁은 내 마음이야.
―「붉은 화첩」 전문
앞의 시 「칸나의 해안」에서 “나의 최초 조력자”가 존재의 순수성을 의미한다면, 「붉은 화첩」은 “해 지는 저녁”이라는 시간의 순수성에 관한 것이다. “진실을 고백할 때”이며, “서로가 통”하는 “이해”의 시간대이며, 또한 “시공을 초월한 불사의 사다리가 길어지는” 시간대이다. “바오바브나무”와 “섬”과 “해지는 광경”이 연출하는 장관으로서의 「붉은 화첩」은 그대로 마다가스카르를 연상시키는데, 이강하는 풍경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장엄한 “찰나”의 시공간을 “내 마음”에 그대로 옮겨 담는다. 이 큰 섬이 “수백 년 뒤 작은 섬이 되면 어떻고 수백 년 뒤 모래알이면 어떤가”라는, 어딘가에 얽매임이 없이 대범한 선적 사유는 “가슴 텅 빈 여기 깊숙한 숲에서 못생기고 뚱뚱한 동화를 쓰면 또 어떤가”라는, 내면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수명이 수천 년에 이르는 “바오바브나무”가 “성장기를 펼치며 혹한 시절의 나이를 꺼내서 매만”지면서 “표정이 축축”해지는 것은 인간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혹한 시절’을 위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이강하의 시에서 그것은 더욱 강조된다. “틈과 뜸을 배우며 사랑하”는 낮과 “농한 기도로 고통을 덜어”내는 밤이 “해지는 저녁” 안에서 겹쳐질 때 “고통이면서 기쁨”인 소통의 시간이 완성된다.
줄무늬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팔색조 햇살 내리는 계곡
지팡이 짚고 걷는 그림자들, 청색 층이다
줄무늬 검정돌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이
세계적 교량 일곱이 널뛰기를 했다
전쟁으로 죽은 아이가 아른거린다면서
그래, 이젠 한마음이면 좋겠어
전쟁 없는 세계라면 좋겠어
줄무늬 돌이 나무에게 말을 거는 사이
줄무늬 셔츠를 입은 소녀가 내 앞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줄무늬 셔츠는 한때 내가 사랑한 친구가 즐겨 입은 옷이었지 함께 줄무늬 셔츠를 입고 봉사하러 가는 날에는 발걸음도 초록이었지 그런데 가끔 친구의 친구들과 축구를 했던 장소가 떠올라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통증이 올 때가 있어 어쩌다가 친구의 친구와 심하게 몸싸움을 했고, 서로의 사과는 사과를 해도 피투성이 사과나무로 남았지 이제야 고백하는데 그때 그 주변 화살나무는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지금 나라 밖 전쟁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줄무늬 돌들이 계속 운다
돌과 돌 사이
물소리는 누구의 기도일까
―「줄무늬 돌」 전문
이강하는 자연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의 관계성에서 시적 기미를 발견한다. “흙덩이 하나가 바다에 씻겨 나간다면,/ 유럽 대륙이 그만큼 작아진 것이고”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는 존 던(John Donne) 식의 성찰이 시의 배경음이다. 강원도 울진에 있는 “줄무늬 검정돌”의 “우는 소리가 요란”한 것이나 “세계적 교량 일곱”(부산의 광안대교?)이 “널뛰기”하는 이유는 “나라 밖 전쟁”의 참상을 공유하거나 “전쟁으로 죽은 아이가 아른거”리는 순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친구의 친구와 심하게 몸싸움을 했”을 때, “그 주변 화살나무는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그 연장선에서 발생한다. 살상 무기인 ‘화살’을 닮았다는 점에서 배가되는 ‘화살나무’의 고통을 통해 이강하는 “전쟁 없는 세계”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셈이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나라 밖 전쟁”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구름을 피워낸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무 영혼이 빠져나가는 소리로 자라난 밑동의 가지
어린 가지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는
또 어떤 마음으로
허공을 꿰매서 저녁의 이불을 만들까
저 나무는 전생에 누구였을까
구름이었을까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지면 운지버섯을 피워낸 것일까
진정 영혼의 소리를 남겨줄 나이라서
저리도 겹겹 아름다울까
가만히 벚나무 밑동을 매만지니
내 영혼의 소리도 구름 되어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다
신발은 무겁고 몸은 더 가볍게
―「오래된 나무 이야기」 전문
수명을 다해가는 “벚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쪽에는 “겹겹 아름다”운 “운지버섯”이 자라고, 한쪽에는 “밑동의 가지”에서 “어린 가지들”이 자란다. 생과 사가 공존하는 이 치명적 공간에서 감각보다 관념이 승하다는 것은 이미지보다 의미에 무게중심이 가 있어서이다. 죽어가는 나무와 그 “밑동의” “어린 가지”에 대한 묘사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더 궁금한 이강하는 사물과 현상의 현장성을 사유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는 허공을 꿰매서 저녁의 이불을 만든다’라고 하지 않고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는/ 또 어떤 마음으로/ 허공을 꿰매서 저녁의 이불을 만들까”로 변주하며 필히 ‘마음’을 경유시키는 방식이다. 나무의 생각, 어린 가지들의 생각, 새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시인으로서의 직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강하는 사물에 깃든 “영혼”과의 “스침”을 무수히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만히 벚나무 밑동을 매만지니/ 내 영혼의 소리도 구름 되어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나무 영혼”과 교감하고, “영혼의 소리를 남겨줄 나이”에 찬탄하는 시인을 만난다.
만물은 대등하고,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비의의 문고리를 이강하는 어떤 시에서도 놓지 않는다. 비밀병기 같은 원초적 바름의 세계가 그 안에 있다.
―《시와세계》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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