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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운(國運)은 여기까지인가?
이 글이 발제하는 질문은 제가 2017년 3월 15일에 동기회 홈페이지에 올렸던 칼럼 『북악을 보면서…』와 같은 관점에서 쓰고 있다는 것을 우선 밝혀 둡니다. 그 글에서 제가 풍수와 도참사상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청와대 건축의 몰락’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국운과 관련하여 북악의 터가 무시할 수 없는 물리적 공간이라고 거론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이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국운이 상승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되기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풍수(風水)와 도참(圖讖) 수준은 아니더라도 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예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신성한 곳이 어딘지, 명당은 어느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신성한 시간까지도 알고 있었지요.
말하자면 인간은 어느 집단, 어느 민족이던 신성한 곳과 속(俗)된 곳을 구별하였으며 이것은 인간의 원형(元型,Archetype)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종교철학자 엘리아데는 이것을 종교의 뿌리가 된다고 그의 저서 『성(聖)과 속(俗)』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물리적 공간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지요.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라고 일어나 박근혜 탄핵을 통하여 태어난 정권입니다. 결국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는 대통령 직을 파면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촛불시민들이 통탄한 “이게 나라냐”라는 바로 그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취임사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국민에게 드리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향후 문재인 정권의 통치행위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취임사에서 2017년, 5월10일. 이 날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데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시대를 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이제는 청와대의 비극은 끝나겠구나 생각을 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미신(迷信)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북악의 터와 청와대는 군림하는 자리인지는 몰라도 국민과 소통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만큼 북악의 터는 지기(地氣)가 센 자리여서 온전한 대통령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터의 기를 누그러뜨리는 데는 사찰이나 수도원, 성당 같은 것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지만, 그가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육영수 여사의 포용성이 권력을 중화시키는 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박정희 자신이 직접 목숨을 걸고 그를 따른 젊은 장교들과 국가를 개조 하겠다
는 결기가 있었습니다. 경제자립, 자주국방을 위한 과감한 시도에 반발도 있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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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소리치며 오직 권력의 논리만을 따라 통치행위를 한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등공신 안희정 지사도 폐족(廢族)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박근혜는 스스로를 유폐시켰습니다. 저의 짧은 식견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박근혜를 나르시즘의 주술에 빠진 인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구구한 억측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심리적 현상은 명백한 입증은 불가능하므로 억측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최고의 존엄성을 가진 권력의 자리에서 파면을 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는 그런 치욕을 감당하는 사람을 그런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즈음 또 한 사람의 나르시즘의 주술에 빠진 사람을 봅니다. 바로 조국 민정수석이며 법무장관에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 주술은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더욱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건축은 시대정신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적의 건축물들은 그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사원이나 신전, 그리고 극장과 광장이나 왕궁들까지 그런 철학을 깔고 있다고 봅니다. 이번 파리의 노트르담 화재사건에서도 우리는 프랑스 국민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세계시민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건축이 공간으로 번역된 시대정신이라면, 정치가의 임무는 그 시대와 장소의 특정한 사회 환경에 꼭 알맞은 음(音)을 전음계(全音階)에서 골라 치는 것이며, 그 음(音)은 시대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은 계몽철학을 완성한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관통하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헤겔은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역사와 문명에서 발현되는 시대정신은 어떻게 형성됩니까?
역사는 현재를 해석할 수 있는 배경이며 또한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대정신이란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미래에 대한 보편적이고 당위적인 가치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헤겔은 이것을 세계정신이라는 것으로 확대해서 보아야 초점을 맞출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미래에 대한 보편적이고 당위적인 가치가 과거의 사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러한 평가의 총합이 역사입니다. 그러할 때 과거의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기준에 맞추어 과거를 잘못된 것으로 폄훼(貶毁)하며 적폐로 모는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 적폐를 모두 해결한 후에야 미래로 전진할 수 있다는 사고자체는 역사의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과거는 미래의 결과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지 청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핵무장을 한 북한과 월등한 경제력의 대한민국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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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인 관계, 그리고 위안부와 징용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한일관계에 비로소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득불평등으로 초래되는 빈부격차, 교육자질도 세습되는 현실, 첨예한 노사갈등을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다음단계의 사회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가진 시민이라면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그러한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서로가 국민의 인기와 표를 의식하여 적대적 공생관계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성숙한 시민이라면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정치인의 자질이 부족한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부추기는 이해집단의 국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수준 이상의 지식과 전문성, 그리고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정치권에만 들어가면 동물적인 수준의 지성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외계에서 온 것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우리 시민의 수준이 그렇게 만든다고 봅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그것을 『도덕적 개인과 부도덕한 사회』라는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집단의 일원이 되면 정치적인 동물로 변한다는 것이지요.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라는 학명이 생긴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재인정권이 취임식에서 5월 10일은 진정한 국민통합의 날이라고 선언하고 청와대를 나와 광화문시대를 열겠다고 한 것은 이제는 무망(無望)한 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약속을 폐기처분한 것만으로도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는 계속될 것으로 봅니다. 그기에 더하여 그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 라고 하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보고 있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빨리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보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출발선에서부터 기회가 평등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자의 전문성과 능력에 맞추어 다양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과정의 공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부(富)와 명예가 자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사회에서 과정이 공정할 수가 없습니다. 겉치레이고 형식적인 공정보다 차라리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공정, 즉 과정의 투명성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개천에서 용이 안 나더라도 승복할 수 있습니다.
조국 수석의 말대로 개천의 모든 물고기가 용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의 삶에서 성공의 색깔은 달라도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면 작은 행복으로도 족하니까요. 무라마키 하루키가 말한 소확행(小確幸)이 국민의 삶 속에 뿌리 내릴 때 우리는 건강한 시민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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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다양할 것입니다. 과정은 투명할 것입니다. 결과는 평등할 것입니다.”
한 때 우리는 민주주의만 쟁취 한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가 올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체코의 벨벳 혁명에서부터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 그리고 모로코·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의 봄은 어떠했습니까. 체코는 성숙한 시민과 시인 하벨의 유능한 지도력으로 민주화가 연착륙 했습니다만 루마니아를 위시한 아랍의 국가들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간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독재만 무너뜨리면 민주화가 저절로 오는 건 아닙니다. 민주화보다 중요한 건 민주화 이후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민주화를 이끈 80년대 운동권세력인 386세대의 민주화 이후는 성공했을까요? 운동권 세대의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지만 사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우리 삶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데 필요한 제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운동권의 주요 세력들은 무슨 신성한 제단인 것처럼 민주주의라는 제전을 독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비효율적입니다. 작동하는 과정이 여러 단계를 거쳐야 되기 때문에 군주제나 파시즘에서 볼 때는 낭비라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권력의 독점과 탄압을 막으며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자정(自靜)능력이 있기에 차선으로 채택된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보다 더 선명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더 나은 삶은 자유가 없으면 성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경험은 자유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과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시장은 교환이라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공간이며 시민의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교환행위는 시장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래서 시장이 성숙하면 자유도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시민사회를 만든 힘입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근대 시민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며 하나의 과정이 됩니다. 프로세스임으로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성된 인격이 없는 것처럼 완성된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인격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부단히 노력해야 유지되는 제도입니다.
현대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포퓰리즘과 파시즘에는 좌와 우가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부서지기 쉬운 제도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이라는 영국도 브렉시트 문제로 시끄러우며, 버거운 싸움을 하던 데레사 메이 총리도 퇴진하고 폭언과 막말을 일삼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나타나며 영국의 정치가 천박해지고 있습니다. 도날드 트럼프의 미국은 세계 최강국가에 걸맞
은 존경을 얻지 못하고 자국우선주의라는 포퓰리즘에 사로잡혀 있으며 한반도를 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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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중국·러시아·일본 또한 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적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숨에 이룩한 한국은 압축성장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노동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의 절제되지 못한 욕구들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모습입니다. 어설픈 민주화가 만들은 우리의 자화상은 과잉 민주주의로 시도 때도 없이 우리의 광장을 점령합니다.
그에 반해 시민운동이 적극적이지 못한 일본은 소극적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성숙한 민주주의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중국은 홍콩시민들이 본토의 사법적 소환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며, 이 시민운동은 시진핑정권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물러설수도 없는 딜렘마입니다. 무너지면 위구르족과 티베트족 같은 소수민족들의 도미노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단언컨대 영국의 자유정신을 물려받은 홍콩시민들은 중국의 구체제로 회귀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이미 혁명의 강을 건넌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의 민주주의와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를 보더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교본은 없습니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기학습적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좌파·진보세력은 시장이 만들은 자본의 횡포와 자유민주주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만들은 칼 마르크스의 이념을 강령으로 받들고 있으며 철저하게 교육받고 세뇌화되어 있습니다.
세뇌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청산유수 처럼 말을 잘 합니다.
제 가까운 일화를 하나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 집안에 시집온 형수 중에 말을 제일 잘하는 형수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형수는 우리 집안 식구들 중에서도 학력이 가장 낮은 데도 대학나온 형수보다 말을 더 잘합니다.
어느날 어른들과 숙모들이 “저 애가 예전엔 안그랬느데 언제부터 저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지?”하며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좀 능청맞게 대답했지요.
“형수가 교회나가면서 언변이 틔었습니다” 숙모들이 묻습니다.
“교회나가면 말을 저렇게 잘하게되나.” 제가 다시 능청을 떨었습니다.
“본래 빨갱이와 예수쟁이는 말을 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교조적인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수·우파세력은 말로서 싸우면 지게되어 있습니다.
진보·좌파 세력이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보수·우파는 논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진보적인 지식인과 보수적인 지식인이 서로를 인정하자는 뜻으로 곧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말인즉슨 좌우의 날개는 서로 대칭관계가 아니며 서로 보완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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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 그럴 듯 하지만 나의 식견으로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수는 한 쪽의 날개가 아니라 새의 몸통입니다. 새의 날개는 물고기가 물 속에서 떠 있기 의하여 부레를 진화시키듯이 양력(揚力)을 얻기 위하여 몸의 근육을 진화시킨 것입니다. 나는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시조(始祖)새 연구도 진화발생학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진화발생학을 이보디보(Evo-devo)라고 하는데 다윈도 일찍이 진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발생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발생학은 형태의 변화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사실들이 담긴 학문인데, 내 책을 평하는 사람들 중 그점을 언급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 아무도 없습니다.”(다윈이 미국 하바드대학의 생물학교수 아사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동시대 생물학자이며 다윈을 존경하여 다윈이 살고 있는 다운하우스까지 방문했던 독일의 헤켈은 너무 앞서 통합설을 세우려고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재현한다”고 오버하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찰스 다윈은 생명을 포함한 자연계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생명이 진화한다’는 자연현상은 알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진화하는지는 몰랐습니다. 다윈이 그 작동방식을 찾아내었습니다.
바로 자연선택이라는 메카니즘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비글호항해를 포함해 30년이 넘는 관찰과 연구 끝에 찾아낸 이론입니다. 이론은 단순합니다. 자연선택은 체로 걸러내듯이 걸러내는 작업입니다. 아이디어가 너무 단순하다 보니까 당대의 이름있는 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조차 “내가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못했지…”하며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다윈은 자기 이론을 모든 생명기관에 다 적용된다고 보았는데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 ‘눈의 구조와 기능’이었다 합니다. 눈은 우리 신체 부위에서도 가장 정교한 기관입니다. 사실 그런 정교한 기관이 초기의 단순한 광수용체(光受容體)에서 지금의 복잡한 기관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제일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눈은 어느 기관보다도 중요합니다. 눈이 발생하면서 생명의 기능은 한 단계 높아져 캄브리아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을 보아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것과 함께 또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안(心眼)인 지적인 식견입니다. 그 식견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공동체라는 집단에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주군(主君)이 제일 어려운 것이 재지인(在知人)이라고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건륭황제가 말합니다.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위인설관(爲人設官)인지 위민설관(爲民設官)인지 도통 분별력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그들의 유치한 언설이 아마추어 수준임을 진즉 알아보았지만 일본의 무역보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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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대처가 고작 죽창가(竹槍歌)나 불러대는 모습은 나라의 격(格)을 떨어트리는 자학적인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오지랖 떨고 있다”고 비아냥되는 겁니다. 남녀간의 연애에도 밀당이라는 연애의 기술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물며 국운이 걸린 외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보수든 진보든 전가(傳家)의 보도처럼 소환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입니다.
전력(戰力)의 현격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23전23승이라는 해전사상(海戰史上) 유례가 없는 승전은 약소국 국민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순신 장군같은 인물은 몇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초인적 인물입니다. 초인이라 함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육사 시인도 그런 초인을 기다린 듯 합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런 장군에게 인간의 얼굴로 다가간 작품이 있습니다. 소설은 장군의 독백으로 시작하여 독백으로 끝납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입니다. 그러한 글은 이순신이라는 캐릭터에 사로잡힌 영혼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백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충(忠)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나는 이 구절을 지금 청와대를 향해 칼을 빼든 윤석열 총장에게도 들려 주고 싶습니다. 그런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했다하여 삼도수군통제사(지금의 해군 참모총장)에서 직위해제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 생각될 때 전쟁에 임하고 불리할 때는 전쟁에 임하지 않는 아주 신중한 장군입니다. 왕명이라 하더라도 부하 장수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싸움에 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 시간에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전함(판옥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에 대한 훈련과 군기를 가혹할 정도로 다듬어 나갔습니다. 훈련과 군기는 사실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판옥선은 제일 밑층에 노를 젓는 격군이 있고 그 위에 함포를 두고, 그위의 갑판에는 궁수와 지휘관이 포진하는 아주 효율적인 전함이었습니다. 이순신이 펼친 전술인 일자진(一字陣), 장사진(長蛇陣), 어린진(魚鱗陣), 학익진(鶴翼陣)은 숙달된 훈련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전술입니다.
한산도 대첩은 일자진에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쳐 함포사격으로 적선 57척을 궤멸시켰습니다. 일자진에서 학익진으로 전환하는 이러한 전술은 노를 젓는 격군들의 오랜 훈련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전술입니다. 한산대첩 이후 왜군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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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의 대체재였던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왜군과 정직하게 맞선 칠전량 해전을 치릅니다. 이 칠전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전함 134척 중 122척이 침몰하여 대패를 하고 원균은 섬으로 도망가다가 왜군에 의해 사살됩니다.
그 이후 복귀한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남은 12척의 배로 명량대첩을 이루는 과정은 시시각각 죽음의 위험에 선 초인적인 사투였습니다. 진주에서 재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곧 바로 가지않고 구례로 향해 군비를 확보하는 한편, 옛 부하장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전라좌수영을 함께 지휘했던 역전의 용사들을 모아 곡성을 거쳐 순천, 보성에 닿을 때까지 모을 수 있는 군사들을 다 모았습니다. 나는 백척간두의 나라에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재회였는지를 상상해 봅니다. 육지에서는 명나라 장군 양원이 지휘하는 조명연합군이 남원에서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실망한 선조임금의 교지가 내려졌습니다. “병력이 적으니 해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선조임금에게 올린 글이 그 유명한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해 항전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무기창고는 이미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보성창고에는 말 네 마리분량의 무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귀, 태귀생 같은 무기제조 기술자도 이순신의 이름을 듣고 합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투를 치를 장소를 직접 선정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울돌목 명량입니다.
아마 그곳에서 죽을 생각으로 전투장수를 정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위험한 험지였습니다. 서진하던 일본의 대함대를 피해 해군기지를 해남 동쪽 이진에서 서쪽 어란포로 옮겼다가 다시 울돌목 동쪽 벽파진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아마 일본의 대함대에 의해 궤멸되었을 겁니다.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늘이 도왔다”
또한 그는 그의 심복을 첩보원으로 보내 시시각각으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육지는 전국토가 일본의 고니시와 가토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으므로 무엇보다도 정보가 전략을 세우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전투는 병사들의 사기가 중요합니다. 칠전량의 참혹한 패전을 경험한 부하장수와 병사들의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하여 직접 소규모의 전투에 참여하여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명량해전에서 그는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하면 살수 있다”(必死卽生, 必生卽死)
명량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울돌목입니다. 울돌목은 조류가 강물처럼 거세고 가장 좁은 곳은 폭이 280m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부산의 영도다리 밑의 좁은 해역을 초량목이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적선 200여척이 진을 치고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울돌목을 통과해 조선함대 12척과
대결할 수 있는 배는 일본의 중형선 세키부네(關船) 6척이었습니다. 판옥선 1척에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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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네 5~6척이라는 일본 전술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습니다. 우리판옥선의 주력무기는 대포이고 활은 조총보다 사거리가 길었습니다. 조총이 주력무기인 일본은 근접 해야 사용할 수가 있고, 그런다음 배에 올라타 칼로 싸우는 등선백병전을 구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작전을 알아차리고 백병전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적선 수십척을 궤멸하고 일본 장수 마다시의 몸을 마디마디 잘라 내걸엇습니다. 왜군 200척이 겁을 먹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도운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철저한 준비로 이긴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 국무부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관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방문했을 때 안보실장실의 벽에는 ‘거북선’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시·도지사 간담회 후에 가진 식사도 해운대 미포에 있는 ‘거북선’이라는 횟집이었습니다.
그런 데몬스트레이션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이순신을 생각할 때 김 훈작가의 눈에는 소인배들이나 하는 기행쯤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범용한 인간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철리(哲理)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만 조선의 성리학(性理學)은 나중에는 현실과 괴리된 관념과 형식으로 흘렀지만 조선의 중기까지는 교육과 가치관의 지표가 되어 많은 학자와 관료들을 배양했습니다. 16세기 성리학은 퇴계 이 황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 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여기에 기대승· 화담 서경덕· 조 식같은 대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순신은 말하자면 조선의 성리학이 빚어낸 인물 중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같은 큰 별이 되었습니다. 아니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최고의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동아시아의 변방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에서 참혹한 시대와 온 몸으로 맞서 싸우며 동아시아 패권전쟁에서 시대를 극복한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다른 관점에서 몰락하는 나라에서 시대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겪었던 암울한 이야기를 말하고자합니다. 그는 정치가도 아니고 관료도 아니고 무인(武人)아니지만 지적(知的) 열망이 많았던 한 사람의 과학자였습니다.
그런 과학자가 야만과 광기의 시대를 굳굳하게 견디며 다음에 올 시대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역사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20세기 전반은 유럽의 물리학자들이 세계의 물리학계를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과학적 지식도 부족하고 식견도 짧지만 과학자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은 세계에는 감탄을 넘어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세계는 일상의 평범한 교양인들에게도 이 세계와 우주를 해석하는 지평을 넓혀 주었을 뿐만아니라 자연계의 극히 작은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겸손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의 업적 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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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로서도 아마추어를 넘어 선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양자역학의 최첨단에서 연구를 하면서 동시대의 유명한 과학자와 교유하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정리한 책 『부분과 전체』를 읽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사유의 지평이 철학과 정치와 윤리로 확장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도 그렇게 넓고도 깊었던 모습은 과학자들에 대한 진부한 이미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교유하며 대화를 했던 동시대 사람들은 평범한 교양인들도 다 알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막스 플랑크, 아인시타인, 닐스 보아, 슈뢰딩거, 페르미, 막스 보른 같은 대학자들이었습니다. 유럽의 물리학은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 우뚝 선 사람은 아인시타인이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시대는 세계 1차대전을 전후하는 무렵부터 2차대전 이후까지 이어지는 야만과 광기의 시대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자의 길이 아니었으면 피이니스트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드 슈마허도 어느 실내음악 연주회에서 그가 베토벤 피이노3중주를 연주할 때 청중 속에서 감상하고 있던 묘령의 처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와 더불어 나는 독일을 생각하면 늘상 일어나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문학과 철학에서 수많은 현자들이 나타난 것 뿐만아니라 18세기 바하,모짜르트,베토벤과 그후 슈베르트, 슈만과 브람스로 이어지는 고전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나라가 ‘어떻게 나치(국가 사회주의)와 같은 폭력적인 정권을 낳을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며 철학적 실존과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면, 음악은 사람의 감성을 정화시키는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을 고조시키고 앙양되게만들어 우리의 천박함을 부끄럽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정신의 위대함까지 이끌어 내는 이런 음악의 힘과 나치라는 폭력정권을 병치시킨다는 것은 나로서는 혼란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것은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惡)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와 정신분석학을 사회심리학으로까지 끌어올린 에리히 프롬의『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읽으며 어느정도 이해는 했지만 좀처럼 심리적 승복은 되지 않았습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어 보십시오. 가능하면 바리톤 가수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가슴이 뭉클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나그네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이젠베르크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슈베르트를 어느 작곡가보다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마 제가 경험한 전류처럼 흐르던 감정의 여운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최전방 군 복무시절 어느 만추의 저녁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대의 참모장교들이 모두 퇴근하고 참모실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울컥할 때, 사무실의 낡은 라듸오에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The Unfinished)이 흘러 나왔습니다.
교향곡에는 악장마다 주제멜로디가 있고 또 그 주제를 변주하는 리듬이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주제와 변주가 반복을 하면서 듣는 사람을 감정의 끝으로 몰고 갑니다. 그때의 주제멜로디가 나중에 작곡을 전공한 친구가 알려준 것이 솔시레파미레도였습니다. 그 단순한 멜로디에 홀린 듯이 도취되었습니다. 천재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나는 미완성 교향곡을 들을 때는 될수록 만추의 저녁에 들어라고 권합니다. 슈베르트는 수줍은 천재였고 베토벤을 존경했던 그는 뛰어 넘을 수 없는 벽과 자기의 외모에서도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아마 나도 같은 동질감에서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제대로 변변한 여성은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요즈음 말로 성매매 여성에게서 매독에 걸려 31살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그때는 항생제가 없어서 매독에 걸리면 치명적이었습니다.
인터넷시대의 요즈음 남자들이 포르노의 자장(磁場)에서 자유롭지 못하듯이 그 시대의 천재들도 난잡한 여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나 봅니다. 평생을 베토벤을 존경했으며 죽으면 베토벤의 묘소옆에 묻히고 싶어했던 슈베르트에게는 베르테르의 롯테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음악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재물리학자들과 음악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책은 수학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라고 갈릴레오가 말했습니다. 그 말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와 같이 ‘시어(詩語)와 음표에는 수(數)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수학교수인 김민형교수가 말합니다.
“쇼팽의 악보는 카오스(Chaos) 그 자체죠. 겉으로 보면 굉장히 복잡하고 어지러워요. 하지만 연주를 들어보면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어요. 선율은 아름답고 멜로디는 울창하죠. 수학이 그래요. 부분적으로 복잡성이 합처져서 전체적으로 순수한 구조의 에센스가 나타납니다.”
음계를 처음 만든 사람 또한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 피타고라스였습니다. 그는 음정이 ‘수(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시타인도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 정도로 훌륭한 연주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詩)와 음악에만 운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산문(散文)이라도 뛰어난 작품에는 운율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20대 젊은 시절에 읽은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헤르만 헤세의 『싣달타』에서 호흡조절도 없이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작품에서는 물 흐르듯 흐르는 막힘없는 운율을 느꼈습니다. 그 후 나이 들어서 읽은 이문열의 작품과 김훈의 소설에서도 일정한 운율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를 이해할려다 보니 음악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가 연구한 양자역학은 사실 과학에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년배로도 그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닐스 보어조차도 이렇게 말합니다.
“양자이론에 충격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양자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 유머를 즐겼던 천재 물리학자 리챠드 파이만은 이렇게 너스레를 떱니다. “당신이 양자이론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흠…당신은 양자이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것은 물리학을 모독하는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白遍義自見)이라는 중국의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책이나 글을 백 번 읽으면 그 글이 담고 있는 속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책이나 글에는 해당될지는 몰라도 양자역학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가 더 이상 가설의 세계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과학처럼 검증가능한 세계는 아닙니다.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신(神)의 가설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 수 있습니다. 이런 원자의 세계를 어떻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겟습니까
그런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에 하이젠베르크는 불과 23세의 약관의 나이에 운명적으로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리고 고작 2년만에 저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를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아인시타인조차도 놀랐으니까요. 이 세계가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다는 아인시티인의 우주론은 “신(神)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혼돈의 양자역학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27년 26세의 나이에 라이프니츠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93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41년에 베를린대학 교수, 전쟁이 끝나고 독일과학을 건설하는 괴팅엔의 막스 플랑크연구소 소장등을 맡았습니다.
파인만 조차도 “현대 물리학은 불확정성의 재해석에 불과하다”할 정도로 하이젠베르크의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에는 분명 경계가 존재합니다. 1926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양자의 세계를이해할 수 있는 물리학적 운동방정식을 발견했습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이 행성의 움직임을 포함해 지구상에 일어나는 물리적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슈뢰딩거의 운동방정식은 전자의 움직임을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방정식입니다. 이 방정식은 전자가 원자 안 어디서 존재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확률적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아와양자역학애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은 치열하기까지합니다. 이론에 부정적인 부문을 확인하고 검증을 통하여 제거해 나가는 슈뢰딩거와 닐스 보아의 대화는 몇날 며칠이 계속되어 두 사람이 앓아누울 정도로 치열한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결국 보아의 부인이 슈뢰딩거를 간호하여 원기를 찾아주기까지 하는 과정을 보면 양자의 작동방정식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또한 베를린대학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그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시타인, 플랑크, 폰 라우에등과 토론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토론회가 끝난 뒤 아인시타인이 새로운 이론에 대해 좀 더 상세히 토론하자면서 그를 자기집으로 초대하여 아인시타인과 나눈 대화는 과학사에서도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론이 비로소 사람들이 무엇을 볼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아인시타인의 말
에 큰 힘을 얻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닫혀 있던 현관문의 열쇠가여기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볼프강 파울리(1945년 노벨물라학상)와 자연과학과 종교에 대한 첫 대화를 시작으로 아인시타인은 ‘우주의 질서’에서 느끼는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막스플랑크는 자연과학은 객관적인 물질세걔를 다루고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세계의 그런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을 그렇게 나눌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공동체가 지식과 신앙의 이와같이 날카로운 분열 속에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독일의 나치정권이 유럽을 점점 정치적 파국으로 몰고 갈 때 그는 도시가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서 처자식들을 피란시킬 산속의 별장을 준비해 놓아야 했습니다. 그곳은 친구 볼프강 파울리와 자전거여행 중 양자이론을 토론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폭발하기전 처리해두어야 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많은 친구들(대개 나치를 피해 망명한 학자들)이 있었는 데, 아직 여행이 가능할 때 그들을 한번 만나보아야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 파국뒤에 자기가 만약 다시 재건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시절 괴팅엔의 막스 보른 세미나에서 같이 공부했던 페르미(1938년 노벨물리학상)를 만났습니다. 다음은 페르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페르미가 하이젠베르크의 미국이민을 권유하며 둘이서 나눈 대화입니다.
페르미: 도대체 당신은 독일에서 무엇을 더 바라는 것입니까. 당신은 물론 전쟁을 저지할 수도 없을 것이고, 원치 않는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되고 또 책임지기 꺼려지는 일을 책임져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모든 불행을 함께 함으로써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당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곳은 유럽에서 고향을 등지고 피난온 사람들이 건설한 나라입니다. 그들은 그곳 유럽의 협소한 환경과 끊임없는 분쟁과 싸움, 억압, 그리고 해방과 혁명들, 이 모든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비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광막하고 자유로운 신천지에서 역사적인 과거로부터 밀려오는 사슬을 풀어 버리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존재였지만 이곳에서는 한낱 젊은 물리학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시원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중략…이곳에서 당신은 훌륭한 물리학에 전념할 수 있으며, 이 나라의 자연과학의 커다란 비약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왜 이런 행복을 포기하시는 지요.
하이젠베르크: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바로 그러한 물음을 천번이나 스스로에게 반복하였습니다. 저 협소한 유럽에서 이 넓은 나라로 이민 올 수 있다는 것은 니다.…중략…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머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과학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이바지하고, 전쟁 뒤에 독일에서 훌륭한 과학을 재건코자 하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내 주위에 모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 젊은이들을 버린다면 그들은 나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길 겁니다.…중략…나는 이 전쟁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의 위기 때 나도 소집을 당했었는데, 그때 나는 이 전쟁을 원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통이라는 사람의이른바 평화정책이라는 것이근본적으로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때 독일 민중은 자각하여 히틀러와 그의 신봉자들을 추방하리라 생각합니다.
페르미: 그러나 또 하나 당신이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오토 한이 발견한 원자력 분열의 과정이 연쇄반응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자폭탄이라는 형태로 원자력에너지의 기술적 응용의 가능성을 고려하자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중략…원자물리학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이 계획에 참여할 것을 원유 받을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공동책임에 자유롭지 않다는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민을 해서그와 같은 책임을 면제 받을 수 있을까요? …중략… 확언을 할 수는 없지만, 기술적 응용단계까지는 원칙적으로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고, 그 전에 전쟁은 끝나리라고 봅니다.
페르미: 혹시 당신은 히틀러가 전쟁에 승리할 가능성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이젠베르크: 아니오, 현대전은 기술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정권은 독일을 모든 강대국으로부터 고립시켰기 때문에 독일쪽의 기술적 잠재력은 상대국가들에 견주면 상대도 안 될만큼 뒤떨어져 있습니다.…중략… 그러나 그의 과대망상은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않고 불합리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페르미:그럼에도 당신은 독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하이젠베르크: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일정한 주위 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 영역에서 매우 어릴 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적절하게 성장할 수 있으며, 또 그곳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루어 본다면 어느 나라든 조만간 혁명과 전쟁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마다 미리 이민을 해야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충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중략…사람들은 되도록 비극을 미연에 막으려고 애써야 하며, 도망갈 생각부터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파국은 자기 스스로 해결해 달라고요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중략… 그러나 제 아무리 개개인이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대다수 민중이 완전히 잘못된 길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일반적인 규칙은 없으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결단은 자기 스스로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중략… 나는 몇 년전에 독일에 남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결심은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 결심을 바꿔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불의와 불행이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았으며, 그러한 결정에 대한 전제들이 아직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페르미: 그것은 유감천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 뒤에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후 하이젠베르크는 콜럼비아대학의 실험물리학자인 페그람과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간곡하게 미국으로 이민오라고 권고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1939년 8월1일 그는 오이로파호를 타고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그 배는 거의 비워있었는데 유럽으로 가는 배가 텅비어 있다는 것은 페르미와 페그람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징조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8월 후반에 그의 가족은 산속 별장으로 피신하자 곧 폴란드와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며칠 뒤에 소집영장을 받았습니다. 베를린의 육군병기국에 출두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물리학자들과 함께 원자력에너지의 기술적인 이용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원자에너지를 연구하는 ‘우라늄 크럽’에는 자신의 제자를 포함하여 약 70명의 과학자가 참여하였으며 세계적인 물리학자만 해도 9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 크럽의 책임자로써 그들을 이끌어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치정권의 광기와 폭력성을 일찍부터 알았던 하이젠베르크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까 하면서 고심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은 그가 제자 칼 프리드리히와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하이젠베르크: 지금이 평화스러운 시절이고 우리의 과제가 다른 아무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이렇게 흥미있는 문제를 같이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나. 그러나 지금은 전시이며 우리가 연구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극단적인 위험상태로 이끌어 갈지도 모르니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을 거듭해야 하네.
칼 프리드리히: 그 점에 관해서는 확실히 선생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저는 이 과제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전방근무를 지원하면 쉽사리 해결될 수 있을 것이고, 좀 덜 위험한 다른 기술적 발전에 협력할 길도 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역시 우라늄 프로젝트 쪽을 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프로젝트야 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나 우연에 맡기는 것보다는 우리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쪽에 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리학자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간 단계가 상당히 오래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하이젠베르크: 그러나 그 일은 이 병기국 당국자와 우리 사이에 신뢰관계가 성립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자네는 내가 1년전에 여러 번 게슈타포에 끌려가서 신문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있응 것이다. 나는 그 지하실 감방을 생각할 때마다 불쾌감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들과의 신뢰관계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칼 프리드리히: 신뢰린 어떤 자리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 육군병기국안에도 아무 편견없이 무엇이 합리적인 처사인가를 상의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근본적으로 그와 같은 입장이 양쪽을 위해 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이젠베르크: 그럴지도 모르지, 조심스럽게 해야될 걸세.
칼 프리드리히: 신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가능한 정도의 신뢰를 가지고도 지나친 불합리한 발전을 막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며 여러 연구원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라늄235를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인 우라늄노(爐) 개발이 선행되어야 하며 기술출자도 원자폭탄보다는 훨씬 적게 든다는 것을 알았으며 우라늄235 생산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일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중략…
칼프리드리히:선생님이 말씀하신 점은 분명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매우 안심이 됩니다. 우라늄에 대한 연구는 전쟁이 긑난 다음에도 매우 유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평화적인 원자기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라늄노(爐)에서 출발할 것이 틀림없으며, 그때 우라늄노는 발전소나 선박을 움직이는 동력이나 그 비슷한 목적에 쓰이리라고 봅니다. …중략…어쨋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원자탄의 발명으로 결판이 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젊은이들의 몽상적인 희망과 일부 연장자계층의 사악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불합리한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중략…어쨋든 전쟁이 끝나면 다음 시대는 원자기술이나 다른 기술의 진보로 특징지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이젠베르크: 그렇다면 자네도 히틀러가 승리하리라는 가능성은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단 말인가?
칼 프리드리히: 솔직히 말해서 나는 상당히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 특히 저의 아버지(당시 그의 아버지는 외무차관이었음)를 정점으로 하는사람 가운데는 히틀러가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불행한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는 범죄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중략…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히틀러의 지금까지의 성공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1933년 이래로 경험이 풍부하고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히틀러 비판자들이 그에 관해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 즉 사람을 휘어잡는 그의 정신력에 대한 근거를 전혀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히틀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그가 가지고 있는 지배력만을 느끼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제자가 하는 말이 동시대 독일인 중에 엘리트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가 구축한 권력기구의 저항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아끼던 제자 한스 오일러를 우라늄 프로젝트에 가담 시킬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또 그와 함께 오일러의 친구였던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핀란드 출신 그렌블룸도 있었습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병역에는 소집되지 않고 있었는데 언제라도 소집될 위험성이 있었으므로 어느날 그를 우라늄 프로젝트의 공동연구원으로신청해도 좋겠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이미 공군에 지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이것은 그에게는 청천병력같은 일이었습니다. 다음은 한스 오일러와의 대화입니다.
한스 오일러:선생님은 제가 승리를 위해서 지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저는 승리의 가능성을 전혀 믿을 수 없으며, 둘째로는 나차 정권인 독일의 승리는 핀란드를 점령한 소련의 승리 만큼이나 가증스러운 일입니다.…즁략… 물론 저는 사람을 살상하여야만 하는 그런 부대에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복무하소자 하는 정찰부대는 저 스스로가 격추당하는 일은 있어도 제가 사격을 하거나 폭탄 투하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무의미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제가 원자에너지의 이용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 현재 진행되고 있는 파국에 대해서는 아무도 어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네도 무력하고 나도 무력할 뿐이다. 유능한 사람, 무능한 사람, 그리고 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때 더 나은 세계를 다시 세우기 위히여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별반 좋은 세상이 온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는 개선할 수 있을 것이고 몇가지 잘못은 바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그러한 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한스 오일러: 저는 그런 과제를 자기 스스로 부과하고 있는 사람에게 비난을 퍼부을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일찍이 모든 상황의 불충분함을 느끼고, 대규모의 혁명보다는 끊임없는 개선을 위하여 작은 일부터 조금씩 해 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인내가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확실히 저도 한 때는 공산주의적인 이념이 사람들의 공동생활을 밑바닥부터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 폴란드나 핀란드 어디서든지 간에 전선에서 희생되고 있는 죄없는 많은 사람들보다 더 안이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중략… 만약사람들이 이 세계를 용광로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자기 스스로를 그 용광로에 던질 마음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을 선생님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이젠베르크: 그 점에서는 자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용광로 이야기에 덧붙여 말한다면 바로 그 용광로가 한 번 냉각되어 응고될 때는 그 사람이 원하였던 그대로의 형체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응고할 때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힘은 어느 개인의 소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소원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스 오일러: 제가 여전히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면 저는 다르게 행동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현실의 무의미성은 미래를 위해 용기를 갖기에는 너무나 지나친 것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게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오일러의 마음을 더 이상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훈련을 받으러 빈 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후 몇 번의 편지가 왔습니다. 처음에는 내용이 매우 무겁고 우울한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은 차츰 자유롭고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1941년 5월말에 오일러는 다시한번 남쪽에서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그의 비행중대가 그리스로부터 크레타섬과 에게해에 걸친 지역의 정찰비행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그 편지는 과거의 일도 미래의 일도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여건에서 매우 자유롭고 명랑한 기분으로 씌어 있었습니다. 오일러의 심중의 변화를 기쁘게 생각하며 닐스 보아와 주고 받던 대화 속에서 읊었던 실러의 시(詩)가 떠 올랐습니다.
삶의 모든 근심을 던져 버리고/ 이제는 어떠한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용감하게 운명과 맞서고 있다/오늘 맞지 않으면/내일이면 맞으리/ 내일 맞는 것이라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아직 남은 귀중한 시간의 술잔을/마지막까지 기울여 보세.
몇 주일 지난 뒤 소련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조프해의 첫 정찰비행에서 오일러가 탑승한 비행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앗고, 그 뒤로도 비행기와 승무원에 관한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오일러의 친구인 핀란드 출신 그렌블룸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하이젠베르크가 존재하는 것의 원초적 슬픔, 그 실존적 슬픔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모릅니다. 제 생각엔 아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치면서 울음을 삼키지 않았을까 하며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상기해 봅니다.
“신(神)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주셨지만, 그것을 감당할 어깨도 함께 주셨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의 혼란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이 어떠한 사람일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참혹한 시대를 극복한 이순신장군, 그리고 다음시대를 준비한 하이젠베르크에 감동의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역사의 신(神)이 살아 있다면, 역사가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을 믿으며…”
2019년 10월 3일 김 정 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