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인 것을 빤히 알면서 왜 그 앞에다 절을 바친담?"
부처와 예불을 모르던 시절, 내 질문에 독실한 불교도였던
동창행은 답했었다.
"그럼에도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겸손을 바치는 게 바로 절이야.
그러면 우상이 아닌 상징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지."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으니
그것은 곧 나고 죽는 법이라네"
"생사의 갈등이 사라니고 나면
모든 것이 열반의 기쁜이어라"
그 시기가 바로 열반경 사구게(四句偈).
제생무상(諸行無常)하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고
생멸멸이(生滅滅已) 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본시 세상에는 두려운 일 네 가지가 있다고 했네.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그것이야.
사람의 목숨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기약할 수 없고
만물은 덧없이 오래 보전하기 어려운 법.
강물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듯이 사람 목숨 또한 그런 것이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일세."
"슬픈과 고통을 피해서 살아갈 수는 없나요?
닥치기 전에 미리 돌아가거나 막아낼 수 있는 비결은 없나요. 스님?"
"내 일러줄 테니 잘 듣게.
죽는 게 괴롭지?
그럼 태어나지 않으면 되네.
헤어지는 것도 괴롭지?
그럼 만나지 않으면 되네.
아, 태어나지 않고 만나지 않으면 무슨 슬픔과 고통이 있겠는가.
그게 단 하나 비결일세"
"놀리시는 거예요?
그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일세.
태어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죽는 일이 어찌 사람 뜻대로 되겠는가.
왕도, 부처도, 아라한(聖者)도, 혹은 신통력을 가진 신선들도 모두
과거로 돌아가 지금 살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질 않은가.
영원토록 사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 누구도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네."
".....결국 삶이란 고해일 수밖에 없군요."
"육신의 무상함을 알고 허무해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순간마다 거듭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게야.
죽음이란 한계상황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삶은 더욱 소중한 기회이자
더욱 찬란한 빛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더더구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건 아닌 말로 장땡 잡은 셈인데."
"그만 눈물을 거두시게나.
영겁의 눈으로 보면 모든 목숨이란게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 같은 것이네...
이런 인간실존을 깊이 마으에 새길 수만 있다면, 사실상 크게 상처입을
까닭이 없는 걸세."
"출가보다는 우선 그 화초들을 좀더 돌보면서 자중하시게나
그게 바로 보살행일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 보리(Bodhi)를 찾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하라...
보리(Bodhi)를 찾는다는 뜻은 눈을 떠서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스르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힘껏 함께 나눈다는 것
즉 보시(布施)를 말함이다.
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야말로 성불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참된 보살행이다.
여기서 '상구보리'가 먼저인가, 아니면 '하화중생'이 먼저인가
'먼저 공부해서 깨우친 다음에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내 눈이 어두운데 남을 어찌 인도할 수 있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깨우칠 수 있는가.
깨우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인가. 깨우칠 때까지 중생들은 어찌할 것인가
나무로 비유하면 '보리'는 꽃과 열매, '중생'은 뿌리가 된다.
물을 뿌리에 주어야 꽃과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보살행 역시 중생 구제를
통해 보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먼저 중생을 구제하면 자연히 깨우치게 된다는 것.
먼저 '하화중생'에 힘쓰는 가운데 '상구보리'를 병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법이다.
깊은 산 토굴 속게 박혀 홀로 수도할지라도, 이는 보다 큰 중생 구제를
위한 것일 때라야만 보살의 수행이 된다.
따라서 출가(出家)나 재가(在家)는 보살행을 위한 방법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일 뿐, 둘 사이에 본질의 차이나 우열의 차이는 없다.
집이나 절이나 시장판이나 토론이나 그 어디든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해야 하는 곳이고, 모든 일이 다 부처의 일인 것이다.
".....아시겠는가? 화초들을 좀더 돌보라고 한 뜻을 아시겠는가?
자기 혼자만의 마음의 평안을 되찾겠다는 이기심으로 출가 수행이
이루어지겠는가?
그 이기심 또한 탐욕이고 번뇌인데 부처는커녕 마음의 평안이 올 리 없지.
부디 초바림(初發心) 수행 속에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한 후 결정하시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오직 마음만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는 게야
그러니까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이 없어지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이 없어지게 되는 거지.
합장의 다른 이유는 노승과 나 사이의 뜻하지 않은 인연을
아무래도 감사해야 온당치 않겠는가 하는 생각 속에 있다.
이제 저 몸은, 저 옷은, 저 그릇은 무(無)로 돌아가려고 한다....
성철 스님 다비식이 있던 날
그저 간간이 표정 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몇 사람의 비구니와 불자가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삶과 죽음을 특별하게 구별하지 않는 불교의 사생관(死生觀)
때문일 것이다.
전생의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나 탐진치(貪瞋恥)의 고해 속에서 살아가는
생(生)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사(死), 태어나고
죽음의 구별이 없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다시 어떻게 태어나는가라는
태어나고도 태어나는 일의 끝없는 연속이다.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 中에서-
보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