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의정서 체결 후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편지
역사서에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의 기록은 거의 없다.
역사가 권력자들과 전문가 집단의 관심과 이념에 의해 자료가 취사선택되어져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역사 공부는 사가들이 집필한 역사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서는 한 가지 사건을 극과 극으로 기록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전문가처럼 공부를 해서 시시비비를 밝힐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 기록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의문점들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이고 특별히 조선 역사 기록에 그러한 것들이 많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은 소론의 윤증이 주장하였으나 노론 학자들은 송시열이 한 것처럼 조작을 하였고, 그 거짓이 버젓이 교과서에 까지 실렸으며,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적이 없는데 서인들의 자기들의 시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거짓으로 창작하였다.
가장 기가 막히는 것은 실학이 한번도 역사에서 적용되며 이름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우리 역사책은 이덕무, 서유구, 박제가, 정약용 등을 들먹이며 엄청난 영향을 끼쳐서 영정조시대를 문예부흥의 시대로 만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책은 정조의 박해로 단 1권도 출판되지 않았다. 정조는 1786년 중국으로부터 서양 서적 수입을 금하고 중국인과 학문 교류를 금함으로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였으며 1792년 문체반정을 일으켜 개혁사상을 주도하며 북학파로 알려진 유득공, 서상수, 이서구, 홍대용, 백동수, 박지원, 이덕무의 학문 연구에 철퇴를 가하였다. 그들은 정조에게 반성문을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 정조는 이덕무와 박제가의 문체가 패관과 소품에서 나왔다고 강도 깊은 비난을 하였다. 이덕무는 고민하다가 반성문을 쓰지 않은채 죽었다. 박지원은 반성문을 쓰고 관직을 유지하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반성문을 쓰지 않고 벼슬을 떠났다. 후세 사가들에 의해 실학파로 규정되고 있는 그들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정조는 박지원의 글 열하일기를 패관잡기 문체의 원흉으로 낙인을 찍고 혐오하였다.
홍문관 수찬 윤광부가 "정학(주자학)을 밝혀 사설(서학을 비롯한 양명학 등)을 물리치시라"며 홍문관에 있는 서양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리라고 상소하자 정조가 " 멀리까지 내갈 일이 있겠는가.죽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려라." 답했다. 그리하여 궁중 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서구 문명의 서적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정약용의 경우 3,000권의 저술 중에 실사구시에 대한 책은 목민신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권정도 밖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 성리학에 대한 저술인데도 우리는 그를 영•정조와 순조 시대를 빛 낸 실학의 최고 대가라고 여긴다. 그의 책은 그의 생전에 한 권도 출판되지 않았으며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가 식민지 강점시기인 1934년에야 정인보와 안재홍에 의해 비로소 출판되었지 그 이전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목민심서가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의 애독서라는 유언비어에 우리 국민들이 우쭐거리지만 호치민 기념관에는 목민심서도 없고 그는 목민심서라는 책을 알지도 못하였다.
우리는 1894년에 시작된 농민봉기하면 동학과 전봉준을 떠올리고 을사조약하면 반사적으로 을사오적을 떠올리고 한일병탄조약하면 자동적으로 이완용과 경술8적을 생각한다. 3•1만세 시위하면 유관순 이름이 튀어나오고, 청산리전투하면 김좌진이 나오고 임시정부하면 김구를 떠올린다. 이런 누군가 한 두 사람에게 모든 책임 전가 또는 모든 공을 몰아세워주는 방식의 역사 기록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이런 요지부동한 기록들은 당시 시대를 이끌어가는 권력자들의 요구 반영이거나 그 사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므로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거짓 데이터를 진짜인 것처럼 만들어 민족주의를 내세워 역사를 미화시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사가들만으로 역사 날조는 바로잡히지 않는다. 더구나 나라와 민족주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사가들의 역사 미화는 바로 잡히기 어렵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갑남을녀, 장삼이사인 보통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며 지역사회 역사부터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하며 세뇌된 사고에서 벗어날 때 역사는 역사의 민낯을 보여주며 미래의 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
고종에 대한 많은 수많은 기록이 있지만 우리 역사는 망국의 왕인 그에 대하여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왕조실록과 외교문서와 외국인들에 의해 기록된 글을 보면 그는 매관매직과 탐학을 일삼았으며 청과 미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사대주의 외교로 자신과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자했던 전주 이 씨 집안의 일개 가장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래는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에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와 나눈 대화와 이토에게 보낸 편지다.
박종인 저 ⌜광화문 괴담⌟ 305,306, 307쪽에서 그대로 옮긴다.
3월 25일 이토가 귀국 인사차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가 말했다. “한국(대한제국)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애매한 방책을 택하면 한국에 이로운 방책이 될 수 없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해진다고 한국군이 총을 일본에 돌린다면 우리는 한국을 적국으로 간주할 것이다.” 협박하는 이토의 강경한 태도 앞에서 일순 분위기가 긴장됐다. 그러나 이무렇지 않게 대화가 이어지고 고종이 이렇게 말했다.
"황제(일본 황제)께서 본인이 신임하는 경(이토 히로부미)을 특파해주었으니 짐과 황실과 일반 신민 모두가 기뻐 마지않는다. 나 또한 경을 깊이 신뢰하니 그대 보필을 깊이 기대하겠다. 수시로 와서 유익한 지도를 해주기를 희망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말이 일국의 왕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그러나 고종은 쌍수를 들어 이토를 대한제국을 보필 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라고 추켜세우며 극도의 아첨으로 그를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넉 달이 지났다. 1904년 7월 21일 고종이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급히 불렀다. 하야시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한국(대한제국) 시정 개선을 위해 이토 후작을 짐이 신뢰하니 지도를 받기 위해 그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하야시는 “이토가 추밀원 의장이며 천황의 중신이라 천황의 재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고종은 “짐이 직접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겠다”고 했다.
7월 22일 고종은 심상훈과 이지용을 일본으로 파견해 이토를 초빙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다음 말 고종은 일본공사관으로 메이지 천황에게 보낼 친전 초안을 보내왔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대한제국 황제 이희가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에게 친히 전보를 보냅니다. 저희나라 (폐국)의 서정 개선은 지금이 좋은 기회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본국 신료를 비롯하여 일함에 신중하지 않는바 아니나, 시행 조치함에 언제나 늦어짐이 근심됩니다. 짐은 원래부터 폐하의 중신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견식이 탁월함을 알고 올해 봄 그가 사명을 받들고 왔기에 그와 담화한 바, 짐의 뜻과 깊이 합치하였습니다. 만약 이 사람을 얻어 좌우에 두고 시정을 함께 기획한다면 곧바로 개선될 것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주어 부탁드리니, 폐하께서는 사랑을 나눠주시어 곧 이토 후작에게 명하셔서 한국에 오게끔 해 주시기를, 회신 전보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고종의 이토와의 대화나 편지를 읽노라면 국가의 자존심을 팽개친 그의 언행에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백성들의 생사여탈을 쥐고 신으로 군림하는 그가 이토에게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 못할 뿐만 아니라 그를 구세주처럼 신뢰하며 친애하는 초라한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는 조선 왕 고종이 보인다.
조선 오백년 역사에는 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금기가 있었다. 위의 편지는 그 엄청난 금기를 스스로 깨고 고종이 자기 이름 이희를 걸고 일본 황제 메이지 천황에게 이토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친서이다.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조선 침략의 첨병으로 와 있는 일본의 정치인들을 신뢰한 고종의 마인드는 무엇인가?
침략국 일본의 노회한 정치인에게 맡기려는 고종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일본인 이토가 자신의 충신이 되어 조선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이토가 일본 침략으로부터 왕궁을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로 보였을까?
자신의 전보로 일본의 천황과 정치인들이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였을까? 정치 쇼였을까?
청나라, 미국, 러시아에 의존했던 실패로 말미암아 더 이상 오갈 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얼마나 혼미하고 분별력이 없으면 적과 동지, 원수와 친구도 분별할 줄 몰랐을까?
얼마나 미련하고 순진했으면 원수의 나라 정치인을 개혁을 책임지는 최고실권자로 불렀을까?
답은 그의 ⌜한일의정서⌟에 대한 자세와 태도에 있다.
고종은 러일전쟁의 전쟁터로 조선을 내주고 전쟁의 물자를 제공하기로 한 ⌜한일의정서⌟인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외부를 향해서는 강제로 맺은 것으로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군자금을 헌납하고 그 대가로 두 배 이상의 뇌물을 받는 이중적인 처세를 하였다.
일본은 이토를 보내는 대신에 한 달 뒤인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을 맺고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타 다네타로를 재정고문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한일의정서⌟로 국토 사용권을 일본에 넘겼고 ⌜1차 한일협약⌟으로 재정관리권을 일본에 넘겼다.
누가 조선을 일본에 넘겼는가?
그럼에도 교과서는 을사오적과 경술팔적과 친일파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역사의 수많은 문서들은 고종이 그들 중심에 있음을 고발한다. 우리 역사를 미화시키기 위해서 망국에 대하여 거짓과 왜곡의 역사를 쓰는 것은 조선 왕과 왕가, 관료와 선비(성리학 지식인), 양반들에게 망국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면죄부를 받은 자들의 지적인 독선과 기득권 의식은 유명가문에서 지역에서 학교에서 각종 단체와 기관에서 계승되고 있고 지금도 같은 수법으로 사람들의 편을 가르며 역사를 난도질하고 있다.
2023.1.20.금 대한(大寒)
우담초라하니
참고 문헌
박종인 저 ⌜광화문 괴담⌟, 와이즈맵,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