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陽明學)의 기본 사상은 무엇을 알았다고 해도 행하지 안 했다면 그 앎은 앎이 아니니,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知)와 행(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먼저 알고 이어서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잘못이며,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면서 알고서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
주희(朱熹)는 앎(知)과 행위(行)의 문제는 서로 분리 되어 있다고 보았다. 《주자어류》에서 주희와 제자의 문답을 살펴보면 “선후(先後)를 논하자면 앎이 먼저이지만, 경중(輕重)을 논하자면 실천(行)이 중하다.”고 한 대목이 있다. 주희가 격물(格物)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도 객관적인 이치를 체득한 이후에야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고, 선(善)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앎과 행위의 문제가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왕양명은 ‘양지(良知)’가 이미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의 양지는 주희가 말하는 ‘이(理)’와 다르다. 주희의 '이'개념이 존재론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는 (도덕적)지식을 체득할 수 있는 의식이다. 왕양명에게 있어서 '마음(心)'은 도덕적 품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도덕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앎은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
《전습록》을 보면 ‘마음 밖에 사태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산의 꽃은 스스로 피고 지는 것 아닌가?’ 하고 물어보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가 이 꽃을 아직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모두 적막하였다. 하지만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주희의 입장이라면 이미 ‘꽃’은 외재적 대상으로서 실재하는 것이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꽃이라는 대상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왕양명에게는 꽃이라는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꽃이 핀다.’고 하는 지식이 완성되었고 내 마음 안의 형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였다.
이와 같은 왕양명의 지식론을 살펴볼 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명제도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지, 행위와 지식의 경계를 구분하고 도덕적 실천이 도덕적 지식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왕양명이 말하는 '지행합일'이란 나의 어떤 경험적 체험이 곧 지식의 형성 과정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정약용은 ‘어떤 사람을 효자(孝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효를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효를 실천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지식이 제 아무리 출중해도 실행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고 이 사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조선시대 유교가 백면서생(白面書生)을 너무 많이 배출하여 나라가 그 힘을 잃고 말았다면 억측일까? 유교는 그 자체를 위해서나 국가 사회를 위하여 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선비들은 오직 왕권정치에 벼슬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학을 공부하였으니, 유교는 그 가치는 찾을 수 없고 과거를 준비하는 그들만의 학문이었다. 일반 민중들은 조정에서 하는 대로 본받아 따라 행할 뿐으로 유교의 참다운 가치는 일반 백성 속으로 녹아들지 못했다.
출처 : 위키 백과 등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