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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1-11절. 체포당하시는 예수님. 요약설교
1. 예수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와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거기서 군병들에게 체포되어서, 제사장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2. 오늘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것이 힘이 없어서 체포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체포되신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3.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우리를 위해 체포당하시는 예수님>입니다.
1-11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진하여 체포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1. 예수님께서는 긴 다락방 강화(요 14-17장)를 마치시고, 열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감란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지금은 이 기드론 시내가 말라 있지만, 당시에는 물이 졸졸 흘렸는데, 부근에 숲이 우거져서 그 시냇물이 검게 보여서 ‘기드론’(검음)이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2.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감람산 동산으로 가신 곳은 ‘겟세마네’로서(막 14:32) 이곳에서 감란 열매를 빻아서 기름을 짰기 때문에, ‘기름짜는 곳’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2절.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1. 이 겟세마네라는 장소는 예수님이 평상시에 제자들과 함께 종종 모이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기도도 하시던 곳이었습니다.
2. 그런데 가룟 유다도 그곳을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가 이곳으로 자신을 잡으러 오실 것을 아시면서도 일부러 인류 구원의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려고 그곳으로 가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3. 우리는 지난 주간에 연합구역 예배 시간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영상물을 관람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를 보는 듯한 장면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날 밤에, 예루살렘 성안의 서남쪽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을 떠나서, 성벽 동쪽 문인 미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거기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시고, 동쪽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 속에 원래 올리브기름 짜는 곳인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가끔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하시는 곳이므로,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특별 기도를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이곳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이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죄를 짊어지고, 고난과 죽음 당하시는 일을 영광스럽게 담당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찬송가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3절.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1. 예수님의 제자 중에 배신자인 가룟 유다가 앞잡이가 되어 군병들과 성전 경비병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전쟁 무기인 병기들을 들고 왔습니다.
2. 누가복음 22장 52절에는 제사장과 관원들과 장로들도 이 경비병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4절.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1. 예수님은 앞으로 당한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면서도 유다와 군병들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백성들이 왕 삼으시려는 것을 피하신 주님께서는(요 6:15) 인류 대속을 위한 고난과 죽음을 향해서는 당당히 앞서 나가시는 모습입니다.
2. 이처럼 예수님이 자기를 체포하러 온 군병들에게 나아가신 것 바로 직전에 가룟 유다의 입맞춤이 있었습니다( 마 26:49-50).
5절.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1. 예수님께서는 도망가지 않으시고, 의연히 대처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병들에게 <내가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내로라’란 말은 유명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I I am)인데,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시는 자증언이었습니다.
즉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אֶֽהְיֶ֖ה אֲשֶׁ֣ר אֶֽהְיֶ֑ה: 야아웨 아쉐르 야아웨, Ἐγώ εἰμι ὁ ὤν: 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표현하는 자증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증언은 요한복음에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9:5.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10:9. 나는 양의 문이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다
요한복음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5:1. 나는 포도나무다
이외에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6, 8:24, 28, 58),
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1. ‘내로라’란 말은 유명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I I am)인데,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시는 자증언이었습니다.
즉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אֶֽהְיֶ֖ה אֲשֶׁ֣ר אֶֽהְיֶ֑ה: 야아웨 아쉐르 야아웨, Ἐγώ εἰμι ὁ ὤν: 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표현하는 자증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증언은 요한복음에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내로라>고 말씀하실 때, 군병들이 물러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물도 포도주로 변하고, 앉은뱅이도 고침 받고, 무서운 파도도 잔잔하고, 죽은 자도 살아나는데, 어찌 저들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의 말 한마디에 군사 50명씩 100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엘리사의 말 한마디에, 아람 군사 수만 명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바울의 말 한마디에 엘루마가 눈봉사가 되어 두루 헤매였습니다.
3.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열두 영(12영×6천 명=7만 2천 명) 더 되는 천사들을 대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지옥에서 영생천국으로 구원하시려는 크신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할렐루야!
<찬송가143>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7절.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1. 말씀 한마디에 쓰러져 벌벌 떨었으니, 어찌 무서워서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힘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단지 예수님이 스스로 잡혀가셨다는 표현이 옳은 것입니다.
금 번 연합구역 예배 때 보신 대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 <주여 누구시오니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서, 꼬꾸라져 엎드리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꼬꾸라졌으나, 회개하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도 기어코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2. 회개할 줄 모르는 멸망하는 짐승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있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소개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생각나거든 즉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 모시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1. 예수님은 두 번이나(5,7절) 저들에게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것을 확인하신 후에, 열한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체포당하시는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제자들을 도피시키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도망을 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2. ‘내로라’란 말은 유명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I I am)인데,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시는 자증언이었습니다.
즉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אֶֽהְיֶ֖ה אֲשֶׁ֣ר אֶֽהְיֶ֑ה: 야아웨 아쉐르 야아웨, Ἐγώ εἰμι ὁ ὤν: 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표현하는 자증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증언은 요한복음에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9:5.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10:9. 나는 양의 문이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다
요한복음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5:1. 나는 포도나무다
이외에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6, 8:24, 28, 58),
9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잡혀갈 터이니, 제자들은 도망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제자들을 챙기시는 지극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보호는 육신적인 보호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적인 구원을 보장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챙기고 도피시키시는 모습은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이미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성도님들도 성경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과 부활 영생 천국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실 때, 영생천국을 바라보고, 경건한 신앙생활 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 장면은 공관복음서에도 모두 나타나지만, 베드로가 치고, 당한 자가 말고라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말고’란 히브리어로 ‘왕’(מֶלֶךְ)이란 뜻입니다.
2. 당시에 제자들은 칼 두 자루를 가졌는데(눅 22:38), 베드로가 말고를 친 이유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서약한 것을 성취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고의 오른쪽 귀가 잘려진 것은 베드로가 칼로 머리를 쳤을 것인데, 말고가 투구를 쓰고 있서 칼이 비켜나간 통에 귀가 잘렸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11절.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 베드로는 무력으로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26:52).
그리고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눅 22:51).
그래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리고서도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2. 만일 이때, 베드로가 칼질을 잘하였더라면, 아마도 군병들을 다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군병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 자빠져서,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Βάλε: 집어던지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잘라버린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3. 이쯤 되었으면, 군병들과 경비병들과 가롯 유다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모두 살려주었으므로, 무릎 꿇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완악한 인생들은 자비하신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4. 베드로는 무력으로 예수님을 보호하고, 지상왕국을 이룩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주의 종들은 베드로처럼 무력이나 공권력이나 돈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기도하고,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5.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신 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예수님은 얼마든지 고난과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우리들을 대신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6.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Cur Deos Homo?>(Why God became Man?)
<어찌하여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받아야 합니까?
<찬송가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7.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로마서 5:7-8.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 그렇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지옥 멸망으로 달려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이 물속에 빠져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보지 못해서, 자식을 건져주고 대신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얼마든지 고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도, 나를 위해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크신 사랑 속에서 신앙생활에 충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