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백화(白花)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계절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꽃 천지라 눈과 마음이 단번에 환해진다. 이런 날엔 시원한 바깥 공기를 마시며 마음을 환기하는 나들이가 제격이다. 지난 3년간은 감염병의 그늘에 가려 동기들을 자주 보지 못했고, 어쩌나 만나도 그저 가벼운 점심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하였다. 하지만 오늘 사자중대의 모임은 조금 특별하다. 봄빛이 흐르는 창덕궁 비원(秘苑)을 거닐고 식사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창덕궁 후원은 해설사와 동행하는 제한 관람 지역이라 예매 전쟁이 치열하다.
전현철 지회장과 성유경 전임회장이 그 치열함을 뚫고 일찍부터 서둘러 티켓을 구한 덕분에 우리의 산책길이 열렸다. 오전 10시 30분, 안국역 3번 출구로 동기들 하나둘 모여들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창덕궁 돈화문으로 향한다. 1405년 태종 때 건립되어 임진왜란 이후 고종 때까지 조선의 으뜸 궁궐 역할을 했던 창덕궁 돈화문을 통과하자 오랜 풍파를 이겨낸 거대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반긴다.. 예부터 선비의 기상을 닮았다 하여 '선비나무'라 불리던 나무다. 금천교 아래 600년 세월을 품고 흐르는 명당수를 지나 인정전에 들어섰다.
'어진 정치'를 펼치라는 뜻을 담은 이곳은 왕의 즉위식과 국가 경축 행사가 열리던 장소다. 이어 고종이 집무실로 삼았고 조선의 마지막 황실 가족들이 머물다 떠난 낙선재를 지나, 드디어 비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섰다. 오전 11시 정각,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싱그러운 연둣빛 숲 터널을 지나자 부용지(芙蓉池)가 나타났다. 연둣빛 숲길은 봄의 생명력으로 가득했고. 숲 사이로 드러나는 부용지의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잔잔한 연못과 고풍스러운 정자, 그리고 주합루가 서로 어우러져 자연과 건축이 하나가 된 한국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왕들이 학문을 논하고 인재를 길렀던 규장각, 과거시험이 열렸던 영화당, 연못을 사랑했던 애련정, 사대부 가옥의 품격을 담은 연경당까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옛사람들의 삶과 철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모든 것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숨 쉬도록 배치된 모습은 우리 조상들의 미의식과 지혜를 새삼 느끼게 했다. 후원 깊숙한 곳 옥류천에 이르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위 사이를 타고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맑게 씻어 주기에 충분했다. 인조의 친필이 새겨진 바위와,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다는 곡수는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던 선조들의 여유를 떠올리게 했다. 존덕정과 관람정 등 저마다 다른 모습의 정자들은 숲과 계곡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천연기념물인 향나무 앞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750년 세월을 견딘 향나무는 말없이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해설사의 정성 어린 설명에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비원을 나섰다. 점심은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의 체부동잔칫집에서 함께했다. 두부전골과 홍어삼합, 해물파전을 앞에 두고
전현철 회장은 동기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건배를 제의했다. 정겨운 덕담과 말품앗이가 이어지며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진한 동기애가 묻어났다. 생도 시절 4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정을 쌓았던 사자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변함없는 친구들이며, 사자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이토록 편안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이제는 아쉬운 작별 시간이다. 이날 비원에서의 산책은 단순한 문화유산 답사가 아니라, 오랜 우정을 다시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봄 햇살 아래 숲길을 걸으며 들었던 새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사자대원들과 함께한 하루는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창덕궁 비원의 봄날은 자연과 역사, 그리고 우정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