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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어린 두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양 집사님은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두 내외분이 약간 어눌하셨는데 빠짐없이 대부분의 예배를 참석하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꼬박꼬박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최소한 제가 보기에는 누구못지 않은 착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집사님은 다른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어서 그런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왜소하면서 남루한 집사님의 외모를 보고 일부러 제가 피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부분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던 집사님이 수요, 금요 예배에 참석하지 않더니 주일예배도 격주로 나오면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궁금하던차 그 선교회 소속 집사님에게 물어보니 생활이 많이 힘들어져서 전에는 하지 않던 연장근무와 철야근무까지하고 아내집사님도 어린 두 딸을 어린이 집에 맞기고 맞벌이로 직장을 다닌다고 하더군요.
많이 힘든가 보다 하고 잊혀가던차 교인들 모두는 그 집사님이 먼 강원도 어느 산 속 모친 묘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습니다. 장례를 치루는 동안 온통 내 머릿속을 회리바람처럼 휘몰아 친것은 성도가 자살하면 지옥을 간다고 여러번 그동안 설교를 통해 들었는데 현실로 접하니 복잡한 심경을 헤아릴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 슬픔에 잠겨 있는데 대놓고 목사님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
허나 더 충격적인 사실은 양집사님은 자살하기 전 여러번 담임목사님에게 자기의 고충을 이야기 하고 최소한의 도움을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선교회 (담임목사님의 함구령으로 끝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집사의 다단계판매에 넘어가 강매식으로 빚을 얻어 수천만원어치 물건을 사줬는데 나중에 환불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 , 이것을 담임목사님에게 말하고 (이자를 내고 나면 월세 낼 돈도 없으니) 중개역할을 부탁했는데 풀리지 않아 고민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먼 곳에 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더욱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착하게 살던 양집사님은 지옥에 갔을까요?
저는 장로교든 감리교든 개신교 교리에는 당연히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연옥' 이라고 있으니 다행이겠지만 개신교인은 어떻게 될까요?
성경적인 근거로 답을 찾기위해 많은 카페의 글을 찾아 봤지만 올려진 글도 많이 없을 뿐더러 주로 교리에 입각한 설명들이어서 내심 답답했는데 어느 한 카페에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자살에 대한 글이 있더군요.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는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제 신앙의 경륜으로는 도저히 알수가 없어 신실한 회원님들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자살, 그리고 헛됨을 모르는 삶의 헛됨
한숨 잠을 자고 일어나 기분 좋은 상태로 모니터를 켜니, 눈뜬 장님... 자살 선진국... 이런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사랑을 위한 자살은 '예쁘다와 멋있다로 시작되는 것'인데... 그리고 ...이즘 ...주의 ...사상으로 시작되는 자살 테러. 인생사의 고민으로 택하는 자살. 이런 따위의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든 생각은 '헛됨, 진실, 진리', '과연 인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마음의 허망함이나 그 실체를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혹 '여러분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씁니다.
어떤 두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것이 그 두 사람의 연애사의 마지막입니다.
과연 그 두 사람의 자살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멋있다', '예쁘다'로 만남이 시작됩니다. 만일 안 멋있고, 안 예쁘게 보였다면 그 죽음으로 끝을 낸 사랑은 시작조차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뻤는데 시간이 지나다가 안 멋있어진다면 죽음으로 끝이 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예쁘다'라는 인식이 있을 때, 혹은 없을 때 다음의 진도가 나갈 수도 있고 못 나가게도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고민, 고통, 그로 인한 동반 자살의 시작은 이렇게 껍데기를 보는 마음이 '예쁘다', '안 예쁘다'에 의하여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살이라는 결과를 낳은 원인인 '예쁘다'는 과연 실제일까요?
아무리 예쁜 얼굴도 서로 이마 붙이고 보면 전혀 안 예쁩니다. 아무리 예쁜 '손'이라도 돋보기로 보거나 현미경으로 보면 징그럽습니다. 또, 눈으로 보는 거리를 잘 맞추어 예쁘다고 인식할 수 있는 거리에서 그 피사체를 본다고 해도 만약 그 피사체가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비듬이 잔뜩 있는 상태라면 그 피사체는 꽃이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그 꾸민 모양에 따라 '가치 있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끼리든지, 물건이든지, 어떤 희망 사항이든지 그것은 모두 자기가 '가치'를 부여하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시작이 되고 어떤 가시적 결과를 냅니다. 그리고 그 가시적인 결과들은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또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고, 그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사고를 '사상', '사조', '의식, '사회적 통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들은 그것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교육 교재와 어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관의 흐름 속에서 '유행'이 나오기도 하며, 누구의 '팬'이 되기도 하며 살다가 3~40년을 살면 누구의 설득도 작용하지 않는 인생관이 정립되고, 그 결국에 누구는 인생이 헛되다고 말하면서도 죽기 싫어하고, 누구는 인생이 살 만하다고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에서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키기 위하여 '자살'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인생들의 세상사가 단지 각도와 거리에 따른 외모의 판단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건의 발명이나 멋진 건물의 축조도 모두 그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말합니다. '유한한 공간'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과 느껴지는 것들로부터 시작되어 형성된 모든 인생들의 가치관과 그로 인한 인생들의 문명은 '유한한 공간' 안에서 80년을 사는 인생이라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시 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형성된 당신의 가치관은 80년을 사는 당신이 정말로 80년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가치관으로 인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늘이라는 지금, 당신은 '내일'에 대한 확고한 보장이 없습니다. 80년도 그나마 이론상의 80년이고 한낱 인생들의 소망일 뿐이지 실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지 않은 한 시간 뒤의 일을 생각하며 기쁘기도 하고, 공포스러워하기도 하며, 괴로워도 하고, 즐거워도 하면서 지금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은 이 글을 읽고 있지만 당신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시간에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시간 전에 자신의 사고를 예견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과 같이 당신이 안전하다 생각하는 지금, 그리고 한 시간 뒤에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달을 가려 보자는 심정으로 보험에 가입을 합니다. 그나마 보장 없는 미래에 대한 마음의 안위를 돈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된다." 하셨습니다.
[전도서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하지만 그 돈으로 받는 위안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위안일까요? 아닙니다. 보험료 내기가 벅찬 사람에게나, 혹은 돈이 아주 많은 부자는 그 보험으로 마음이 든든하지 않습니다. 보약을 먹는다고 건강에 대한 염려가 없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오지 않은 미래, 갑자기 다가오는 자기의 끝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수고를 통하여 삶의 수고의 끝에 가지게 되는 가치관들이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인 '헛됨'에 대하여 그 다음 길을 성경에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전도서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며 인생은 에덴 밖, 즉 세상에서 '수고'와 '고통'이라는 짐을 지고 고민을 하며 '지옥', 즉 '죄인을 가두는 땅'인 세상을 살아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보내진 곳이니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맞고,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그곳이므로 여기가 곧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옥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은 잠언이라는 지혜가 있는 높은 산에 이르기까지 줄곧 올라만 갑니다. 그리고 그 올라가는 중에 넘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면서, 연단을 받게도 하셨고, 또 낳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기쁨도 겪으며 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먼 길, 멀고 먼 길을 올라가는 '수고'를 하게 하신 것은 산꼭대기에 있는 '절벽'에서 '떨어지게'가 아니라, '날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날아다니는 때가 공중 나는 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때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살아가는 때입니다. 그래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하나님의 지혜인 잠언과 한 줄거리로 엮여 이어진 전도서는 성경 전체의 '반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 하시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으라 하시고, 지혜를 구하면 반드시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로 인한 성령의 법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한 지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들어가면 즉시 "지혜도 헛된 것이다." 하고 가르칩니다.
[전도서 2장]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18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를 인생들이 보고는 '허무주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가소로운 발상입니다. 허무를 가르치는 것은 인생이고 세상입니다.
그리고 전도서는 "그 허무에도 목적이 있다. 영원함을 갖고 싶으냐? 그러면 뛰어 내려라. 날아라. 그렇게 될 때에 너는 유한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영원함 중에서 죽어도 사는 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너는 사는 것도 사는 것처럼 살 것이고 죽음도 없는 상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상태, 네 가치관의 결과가 자살이나 사고나 모든 위험으로부터 발생하는 비참한 죽음으로 결론이 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전도서 12장]
6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의 시작이 '헛되다'로 시작을 하니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스크림의 첫 느낌은 '차다'라고 말하며, 아이스크림은 소름끼치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인생들이 전도서를 읽고 허무주의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바로 '눈뜬 장님'들입니다.
유한한 인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먹는 것도 하루면 뒤로 나가고, 그로 인한 건강함도 무사히(?) 80년이 지나면 먹고 뒤로 나간 그것이 간 곳, 즉 흙으로 돌아갑니다. 명예도 땅에 묻히고, 권력도 사라지며, 부도 의미 없어집니다.
[시편104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편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러면 그것이 인생에서만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의 삶 속에서 행하는 모든 것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즐거움 외에 낙이 없다"고 전도서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고운 것도 헛되고, 돈도 삶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고, 지혜도 자기의 마음을 안존히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까지도 헛되다고 전도서는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헛된 것입니다.
그 헛된 인생의 날을 지나는 지금, 당신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살기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인생에서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그저 입고 있는 육신은 한낱 잠시 입고 있던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 껍데기를 입고 우리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을 살면 됩니다. 그것 이외에 더 가치 있게 육신을 쓰고, 마음을 쓰고, 정신을 집중할 가치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가치관은 그렇게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가 부인되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집중하고 있는 모든 대상이 실은 그렇게 다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 즉 '마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63] "육은 무익하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살아 있으면 그 껍데기에 어떤 것을 입어도 그것은 나이며, 우리의 정신은 인생의 혼이 아닌 하나님의 혼, 즉 신의 혼을 입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몸을 입고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혼, 선과 악을 알되, 절대로 악을 행하지 않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는 신의 혼을 입고, 그리스도의 마음, 신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시간에 껍데기를 입고 인생의 혼을 가지고 인생의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지금 가지고 있는 정신으로 마음에 무엇을 원하며 행하고 있는 중입니까?
헛된 인생의 날에 헛된 인생에 속한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옳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포인트를 맞추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한정된 인생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세상을 나그네가 잠시 머무는 곳인듯 여기고 아버지를 향해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당신의 마음에 분명히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살피십시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까?
왜 그것을 하지 않고 껍데기가 속한 세상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속한 목적을 접는 데는 반드시 두려움이 따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 1:9] "담대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라고 가르치십니다.
혹, 당신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니 나는 이미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바울보다 못한 당신은 아직 "이미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아직 이미 얻지도 않은 당신이 무슨 배짱으로 세상에 속하여 주어진 하루를 헛된 일로 소진하며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내일 반드시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택하신 것이 분명하므로 당신의 목숨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다 쓰실 때까지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 일꾼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째서 "오늘 하나님의 의를 위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일을 하면서 근본도 없이 형성된 인생의 가치관 속에 파묻혀 지금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일꾼으로 쓰시려면 나는 먼저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시는 대로, 말씀으로 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일꾼으로 쓰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5장]
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도서 8장]
15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서두르십시오.
내일, 아니 잠시 뒤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차일피일 망설이며 미루다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라도 한다면, 하나넬 망대가 쓰러져 죽은 숫자 중에 당신이 끼이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헛되이 왔다가 헛되이 가고 마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3:20] "흙으로 지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 대로 헛된 수고만 하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수고를 수고답게 하고 육신과 정신을 사용하여,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의에 맞추어 행하다가, 수고한 대가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로 지금 이 시간을 보내시겠습니까?
이제 판단하셔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길을 간다고 하면서 육신은 세상에 속한 일을 도모하고, 정신도 모두 그에 빼앗기고 마음도 모두 그에 빼앗겨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음 말씀을 따라 공중 나는 새가 되는 당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