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못지않게 생소했던 두시언해(杜詩諺解)
고교 동창인 K翁은 지금도 술자리에서 종종 두보의 시를 흥얼거리는데, 놀랍게도 학창시절 배웠던 두시언해(杜詩諺解)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언해(諺解)가 두보의 한시(杜詩) 못지않게 생소하고 난해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지금 언어와는 엄청나게 다른 고문(古文)을 읽고 해득하는 것도 또 다른 고문(拷問)이었으니까요.
조선조에서는 두보의 시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해 2회에 걸처 발간합니다. 초간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연간에 시작하여 40년 가까이 흐른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1481년)되었고, 중간(重刊)은 임진왜란으로 산실(散失)된 부분을 보완하여 인조 때에 출간(1632년)하게 됩니다. 다만 초간본에 쓰였던 반치음(半齒音△)이나 ㆁ음 등은 중간본에는 사라지고 자음접변이나 구개음화 등의 변화도 보입니다.

왜 이백(李白)이 아니고
한시(漢詩)의 양대산맥이라면 동시대(唐 玄宗代)를 산 이백(李白,701~762)과 두보(杜甫, 712~770)를 꼽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왜 시선(詩仙) 칭호까지 붙은 이백을 제쳐두고 두보의 시만 골라 우리말로 번안작업을 했을까요? 이는 두 시인의 행적이나 시의 내용을 조금만 봐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이백은 술에 취해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자 내시가 찾아가 물을 끼얹져 겨우 데려왔다는 일화도 있지요. 두보는 그의 시(飮中八仙歌)에서 이백을 '천자가 불러도 놀잇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칭하기를 신은 술마시는 신선이옵니다(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라 읊었을 정도이니까요. 임금이 총애하던 양귀비에게 붓과 벼루를 들게 하질 않나, 그녀를 '말귀를 알아듣는 꽃(解語花)'이라 부르지를 않나.. 당시 현종은 성총이 흐려져 그 속뜻을 모르고 그저 벙글거렸을지는 몰라도, 조선조에서는 解語花란 한문과 한시를 좀 안다는 기생을 일컬었으니 이백을 곱게만 보았을 리 만무하지요.
충직한 애국시인 두보
아래에 소개하는 오언율시(五言律詩) '춘망(春望)'만 보더라도 금새 그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지지요. 난리통(안록산의 난)에도 두보는 임금의 소재를 아자마자 달려가다가 도중에 반군에 잡혀서 장안에 압송 유폐되는데. 바로 이 때 지은 시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시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임금을 향한 충절이 느껴지니까요.
학창시절 머리 쥐나게 했던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이제 시험과는 관계없이 편한 마음으로 감상해 보도록 하지요. 당시 고등학교 교재가 없기에 그의 시 중 잘 알려진 몇편을 가려 뽑아 원시와 언해(諺解)와 요새말을 같이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春望(춘망)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고갱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가 무너지니 산과 강뿐이고
성안에 봄이 오니 풀과 나무만 깊었도다
시절을 생각하니 꽃이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이 슬프니 새의 마음(가슴)처럼 놀래는구나
(전란의) 봉화는 석달이나 이어지니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사도다
센 머리를 긁으니 또 짧아짐에
(머리칼이) 다 비녀를 이기지 못할 듯 하도다.
두시언해에 맞추어 우리말로 새기다 보니 좀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만, 이해하시는데 별 무리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江村 (강촌)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삿유)
自去自來堂上燕 (자거자래당상연)
相親相近水中鷗 (상친상근수중구)
老妻畵紙爲碁局 (노처화지위기국)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맑은 강 한구비 마을을 안고 흐르니
긴 여름 江村에 일마다 그윽하도다
절로 가고 절로 오니 집 위의 제비요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우니 물 가운데 갈메기로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그려 장기판을 만들고
젊은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고기 낚을 낚시를 만든다
잦은 病에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藥物이니
미천한 몸이 이 밖에 다시 무얼 求하리오
평생을 가난과 전란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았던 불우한 천재 시인 두보에게도 몇년간 안락하고 평화로운 때가 있어으니, 바로 이 시를 쓰던 시절입니다. 사십대 후반 친척과 벗들의 도움으로 성도(成都, 四川)로 이사하여 초가집(杜甫草堂)을 짓고 살게 됩니다. 성도 서쪽 외곽으로 완화계(浣花溪) 기슭 백화담(百花潭) 북쪽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쾌적하여 두보가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두보가 지은 수많은 시 중 자연을 찬미하고 일상의 즐거움을 읊은 몇 수 안되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江村'입니다. 극히 일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예술적 성취가 뛰어나 칠언율시(七言律詩)의 전형과 진면목을 보여준 걸작으로 뽑고 있답니다.
登高(등고)
風急天高猿嘯哀 (풍급천고원소애)
渚淸沙白鳥飛廻 (저청사백조비회)
無邊落木蕭蕭下 (무변락목소소하)
不盡長江滾滾來 (부진장강곤곤래)
萬里悲秋常作客 (만리비추산작객)
百年多病獨登臺 (백련다병독등대)
艱難苦恨繁霜鬢 (간난고한번상빈)
燎倒*新停濁酒杯 (요도신정탁주배)
*燎倒(요도) : 늙어서 정신이 흐릿해짐

바람이 빠르며 하늘이 높고 잣나비 울음소리 슬프고
물가가 맑으며 모래 흰데 새 날아 돌아오는구나
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우수수 내리고
다함없는 긴 강물은 출렁출렁 흘러 오는구나
萬里(만리)에 가을을 슬퍼하여 상시 나그네 되오니
백년 잦은 病(병)에 홀로 臺(대)에 올라라
艱難(간난) 속에 서리같은 귀밑 털 어지러움을 슬퍼하나니
늙고 정신 사나움에 탁주 盞(잔)을 다시 놓노라
두보가 생을 다하기 3년 전(56세 때) 성도(成都)에서 기주(夔州)로 옮겨와 병고에 시달리며 살던 시기에 쓴 시랍니다. 중양절(重陽節)에 쇠잔한 몸을 이끌고 높은 곳에 올라(登高) 감회를 읊은 걸작이지요. 그의 많은 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최고의 절창으로 평가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