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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65. [역경의 열매] 조배숙 <1-10> 회개·묵상으로 인내한 4년… ‘선거 승리’ 영광 주셔
18대 의원 때 바쁜 일정 이유 신앙 소홀… 기도하는 자세로 선거운동하자 ‘순항’
전북 익산을 선거구에서 당선된 국민의당 조배숙 후보가 지난 13일 선거사무실에서 당선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4·13총선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전북 익산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4년 전 19대 총선 때는 당내경선에서 탈락했다. 준비를 많이 했지만 상대가 여성 정치신인에게 주어지는 20%의 가산점을 받음으로써 고배를 마셨다. 지역에서 두 번 국회의원에 당선돼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나의 부족함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낙심하기도 했지만 지지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누가 뒤에서 “의원님!” 하고 불렀다. 이제 국회의원이 아닌데 누가 나를 의원이라고 부르나 뒤돌아보니 전혀 모르는 여자 분이었다. “의원님, 아유 왜 떨어졌어요. 저도 찍었고, 꼭 되실 줄 알았는데…. 다음에 꼭 나오세요. 제가 꼭 찍어드릴게요.” 내 손을 꼭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 시민들 중에 나를 이렇게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 상처가 치유됐다. 힘도 얻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바쁜 정치 일정으로 기도를 소홀히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했다. 앞으로는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더 많은 기도와 말씀묵상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고 4년 뒤를 기약하면서 지역을 떠나지 않고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서민들은 경제가 어려워 힘들어 했고 아들·딸, 손자·손녀들 취직이 안 된다고 걱정이었다. 농민들은 농산물 값 폭락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어렵다고 호소하며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분들도 하나님을 알게 해서 소망을 드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선에서 탈락한 뒤 많은 정치적 동지들이 현역 국회의원 쪽으로 떠났다. 그런데도 나를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남아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이분들과 함께 지역을 누비며 활동을 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고,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일들이 원만히 해결됐다.
작년은 호남과 야당에겐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탈당해 신당인 국민의당에 몸을 실었다. 공천을 받긴 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4년 전에 경쟁했던 전정희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에서 컷오프되자, 국민의당에 입당해 나와 다시 경선을 하게 된 것이다. 재대결에서는 당당하게 승리했다.
공천이 확정된 뒤에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더민주당이 익산갑 경선에서 패배한 한병도 후보를 익산을에 전략공천한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고 지난 13일 선거에서 나는 46.1%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 과정에서 익산지역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며 힘을 모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4년간 외롭고 어렵고 흔들릴 때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도움 받게 해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해 주셨다. 제20대 국회에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의정활동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될 일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할 것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배숙 <1> 회개·묵상으로 인내한 4년… '선거 승리' 영광 주셔
* [역경의 열매] 조배숙 <2> 열 살도 안된 딸에게 "판사 되겠다는 각서 써라"
* [역경의 열매] 조배숙 <3> 두 언니와 자취하며 공부… 경기여고에 합격
* [역경의 열매] 조배숙 <4> 사법시험 낙방으로 힘들 때 신앙 처음 접해
* [역경의 열매] 조배숙 <5> 부흥집회 보며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구나' 생각
* [역경의 열매] 조배숙 <6> 사법시험 앞두고 교회 목사님 꿈에 나타나
* [역경의 열매] 조배숙 <7> 이혼 겪고 힘들 때 새벽기도 시작 10여년 계속
* [역경의 열매] 조배숙 <8> 성실한 변호로 '여성이라 일을 더 잘한다' 평판
* [역경의 열매] 조배숙 <9> '군산 개복동 참사' 계기 성매매방지법 대표 발의
* [역경의 열매] 조배숙 <10·끝> "기도할수록 부족함 깨달아… 주님 능력에 의지"
◇약력=△1956년 전북 익산 출생△서울대 법대 △사법시험 22회 △한국 최초 여검사(서울지검) △서울고법 판사 △여성변호사회장 △제16·17·18대 국회의원 △익산 성산교회 권사
***[역경의 열매] 조배숙 <2> 열 살도 안된 딸에게 “판사 되겠다는 각서 써라”
사업하던 아버지 “법 알아야” 절감… ‘여성검사 1호’ 영광의 밑거름 돼
1956년 전북 익산에서 1남5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난 조배숙 당선자의 유년시절 모습.나는 1956년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남5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집에선 아들이길 바랐는데 낳고 보니 딸이라서 무척 섭섭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를 자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고 한다. 밤늦게 어머니가 나를 둘러업고 병원 문을 두드리던 기억이 난다.
몸이 약했던 나는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가든, 친구 집에 놀러 가든 항상 동화책을 꺼내놓고 읽었다. 유년 시절 빼놓을 수 없는 게 영화 이야기다. 아버지가 극장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언니들을 따라 자주 놀러갔었다. 그때는 영화보다 어머니, 아버지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극장은 놀이터였다.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아침에는 사촌들과 극장을 휘젓고 다녔다. 심지어 지붕 위까지 올라가 장난을 치곤했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이 있다. 책 제목처럼 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1960년대 다들 힘들고 못사는 상황이었지만 수입영화에 나오는 외국의 모습은 동경의 세계 그 자체였다. 엄앵란 신성일 등 청춘남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서울을 동경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즐거운 기억이 대부분이다. 특히 소풍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음식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의 김밥은 항상 인기였다. 당시 이리에는 유원지가 배산과 송화단 두 군데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오락시간에 당시 유명했던 코미디언 서영춘씨의 흉내를 냈더니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묘향산 등 산 이름을 대다가 갑자기 ‘영진 구론산’이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등 강 이름을 대다가 갑자기 ‘허장강’이라고 하는 등 지금 들으면 유치한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여자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딸이라고 차별을 두지 않고 대학교육을 시켜준 분이다. 당신이 사업을 하시면서 ‘하면 된다, 어렵게 보여도 어디엔가 길이 있다’는 진리를 체험하셨는지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내게 종이를 한 장 내미셨다.
“배숙아, 여기에 판사가 되겠다는 각서를 써라.” 나는 판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어렵고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만 막연하게 들었다. ‘그래, 아버지가 하라는 것이니 좋은 것일 거야.’ 그대로 각서를 썼다. 아버지는 그 각서를 당신의 책상 옆에 붙여 놨다.
그때는 여자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물으면 거의 현모양처라고 답하던 시절이었다. 여성 판사라고 해봐야 고 이태영 황윤석 판사 딱 두 분뿐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딸을 판사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은 상당히 앞선 것이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법을 몰라 손해를 보신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 판사와 변호사를 다수 접하면서 ‘남을 도우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신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을 법조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어찌됐건 내가 법조인이 되고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선견지명과 동기부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셋째 딸에게 율사(律士)의 길을 권해주시지 않았다면 ‘여성검사 1호’의 영광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6학년이 되던 해부터 중학교 입시준비를 했다. 한 학년 위였던 고종사촌 오빠의 책을 물려받아 공부를 했다. 고모부는 고등학교 수학교사였다. 오빠는 고모부의 지도를 충실하게 받았는지 낱말 밑에 뜻이나 주석을 꼼꼼하게 달아 놓았다. 그 책으로 공부한 결과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이리 남성여중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3> 두 언니와 자취하며 공부… 경기여고에 합격
상경하면서 서울 사람 된다는 설렘… 수재들 모인 학교서 공부에 긴장
조배숙 당선자(오른쪽)가 경기여고 2학년 재학 시절인 1973년 4월 경주 수학여행에서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나는 남성여중 학생이 됐다. 학년 전체에서 2등을 했고 부모님이 바라시던 대로 장학생이 돼 수업료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그때도 아버지의 극장에 자주 갔다. 극장은 학교에서 인정하는 단체관람 때를 제외하곤 금지구역이었다. 친구들은 영사실에서 영화를 보는 나를 부러워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리(현 익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서울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보내주세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여름방학 때 서울에 올라와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난생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난 것이었지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서울에는 약대 졸업 후 약국에 취업한 큰언니와 대학에 다니는 작은언니가 한남동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1개월간 서울생활을 마치고 이리로 내려갔다가 입시를 앞두고 다시 올라왔다. 버스 안에서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는데 세련된 표준말이었다. ‘아, 이제 나도 서울사람이 되겠구나!’ 묘하게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언니와 함께 종로에 있는 경복학원을 찾아갔다. 재수생이 많았지만 나처럼 서울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학생도 많았다. 인생의 첫 번째 시련은 1971년 1월에 닥쳐왔다. 이화여고 입학시험을 쳤는데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낙심한 나를 보며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배숙아,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다시 이리로 내려와서 남성여고에 진학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까짓것 1년 재수하면 어떠냐. 나이도 어리고 학교도 1년 일찍 들어갔으니 다시 도전하면 입학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의 격려에 1개월간 쉬고 다시 경복학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예과반에 들어갔지만 월말고사 성적이 좋게 나와 특수반으로 옮겼다.
한번은 학원에 가다가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원인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큰언니는 이미 약국으로 출근했고 작은언니도 학교에 갔기 때문에 나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혼자 방에 누워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해 여름 청계천 고가 옆 아파트로 이사했다. 비록 연탄을 때야 하는 방 2개짜리 서민아파트였지만 언니들과 함께 사는 독채 전세여서 마냥 좋았다. 무척 만족스러웠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드디어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 왔다. 경기여고에 원서를 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합격했어요!” 아버지의 소원을 반쯤 이뤄드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국가에서 상을 받아 휘장을 몸에 걸치는 꿈을 꿨다”면서 내가 합격할 줄 알고 계셨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 후 1개월간의 여유가 있어 영어학원에 다녔다. 당시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핑퐁외교를 앞세워 중국과 수교했을 때다. 헨리 키신저의 외교 역량에 세상이 감탄했고, 마오쩌둥과 닉슨의 만찬 메뉴인 원숭이두개골, 제비집 요리 등이 큰 화제가 됐다.
1972년 긴 머리를 자르고 단발머리로 경기여고에 입학했다. 과연 전국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답게 학교 시설이나 선생님의 수준이 높았다. 경기여고 입학을 위해 미리 팀을 짜서 과외공부를 했던 아이들이 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는 사람이 없던 나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 어색했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4> 사법시험 낙방으로 힘들 때 신앙 처음 접해
대학 졸업 앞두고 시험에 실패… ‘4년간 이룬 것 없다’ 깊은 좌절
조배숙 당선자(왼쪽 세 번째)가 서울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7년 전북 이리(현 익산)의 고향집을 방문해 부친(맨 왼쪽) 등 가족들과 함께했다.경기여고 입학 후 공부를 못하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재수할 때만 해도 쾌활했는데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친구들은 다들 ‘수학의 정석’을 붙들고 있었다. ‘왜들 벌서부터 대학입시를 고민하며 야단인지 모르겠네.’
공부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성적은 32등을 맴돌았다. 한번은 31등을 해서 ‘등수가 올랐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한 친구가 아파서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의 책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전혜린의 세련된 문체와 유려함, 젊은이를 매혹하는 이상에의 열정, 엄청난 독서량 등이 나를 매혹했다.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실이 그녀를 한층 더 가깝게 느끼게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으며, 독일 유학 후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혜린은 우리의 우상이었다.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갑자기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험 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그러자 성적이 4등으로 뛰어올랐다. 갑자기 선생님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리(현 익산)에서 아버지가 하시는 극장이 크냐? 그런데 왜 부모님이 학교에 한 번도 안 오시냐?” 부모님은 자녀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 컸기 때문에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부모님은 졸업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기여고에 오셨다.
방학이 되면 고향인 이리로 내려갔다. ‘제인 에어’ 등 책에 몰두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책부터 찾았다. 밤에 잠을 자기가 아까울 정도로 책을 읽었다. 소설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2학년이 돼서 시험을 치렀는데 다시 30등으로 추락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가 왜 그리 비참하게 느껴지던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예습과 복습을 철저하게 했다.
고3이 됐다. 오전 7시40분에 첫 수업을 시작해 10교시 수업을 마치면 저녁 7시쯤 됐다. 하루 5시간만 자면서 공부했다. 그때는 대입을 앞두고 상당히 긴장했다. 그때의 강박관념이 남아서 그런지 지금도 가끔 고3 때 꿈을 꾼다. 그렇게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며 열심히 공부한 끝에 1975년 마침내 서울대 인문대학에 진학했다. 사회계열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담임선생님은 안전하게 가자고 했다. 그렇게 인문계열로 진학했지만 아버지는 내가 법대에 가길 원하셨다. 다행히 인문·사회계열을 통틀어 1등을 해서 법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법학은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교재에 한자도 많이 나와 읽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6개월 정도 지나니 익숙해졌다. 사법시험은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대학교 2학년 말에 별 준비 없이 시험 삼아 치른 사법시험 1차에서 너무 쉽게 합격한 것이 화근이었다. 3학낸 때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2차 시험에 응시했으니 합격할 리 만무했다.
대학 4학년이 돼 1차와 2차를 동시에 준비해야 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4년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고민을 한 뒤 무엇인가 자신 있게 준비해서 사회에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4년을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나는 극도의 우울함과 불안감에 빠졌다. 같이 시험을 치른 후배들은 모두 합격했는데 나 혼자만 사법시험에 낙방해 더욱 힘들고 외로웠다. 그 힘든 시절, 나를 지탱해준 것은 친구 소개로 접하게 된 신앙의 힘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5> 부흥집회 보며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구나’ 생각
한완상 교수님한테 교회 추천 받아 예배·성경 읽고 자신감 되찾기 시작
1979년 2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조배숙 당선자. 조 당선자는 이 무렵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1979년 2월이다. 당시 나는 서울대 법대 졸업을 앞두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사법시험을 치러야 하는 부담감까지 안고 있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나에게 김방희라는 친구가 다가왔고 하나님을 전하고 싶어 했다.
서울대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잠깐 교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모임이 끝나자 인도자인 선배가 같이 기도를 하자고 했다. “주님,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뭐야, 내가 죄인이라고?’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부감을 느끼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뒤로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초월적인 존재에 맡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나에게 한사랑선교회 김한식 선교사님을 소개해줬다. 선교사님의 얼굴을 보니 평안함이 느껴졌다.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구원의 진리를 접했고 기도를 했다. 그날 밤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로 옮겨가는 꿈을 꾸었다.
얼마 안 있어 사시 1차 시험을 봤는데 낙방을 했다. 낙방 소식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도서관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주섬주섬 싸들고 도서관을 나와 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앞으로 1년 동안 펼쳐질 회색빛 미래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내려가고 있는데 친구 방희가 반대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방희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물었다. 방희는 나를 위로해줬다.
“배숙아, 너무 걱정하지 마.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마침 김 선교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가 있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
1차 시험도 떨어졌고 책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아 승낙했다. 집회에 갔는데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학생들이 모여앉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다들 희망이 넘쳐 보였다. 그곳에서만큼은 세상의 근심 걱정이 없어보였다.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면서 주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 한 명을 발견했다. 그는 어렸을 때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었는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바깥출입을 피했을 것 같은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을 인도해서 찬송을 부르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다.’
그 뒤로 모임에 몇 번 나갔지만 점점 부담이 느껴졌다. 가르치는 말씀을 행하기도 힘들었다. 아직 욕심을 버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달 만에 또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다른 선교단체에도 가봤지만 마음을 잡지 못했다. 평소 존경하던 한완상 교수님을 찾아가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교수님은 서울 상도동에 있는 남현교회를 추천해 주셨다.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남현교회 예배에 출석했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음악선교사였던 최귀라 선생님의 찬송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을 청했다.
학교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도 성경을 읽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베푸셨던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렇게 좋은 성경말씀을 왜 그동안 몰랐을까’ 후회스러웠다. ‘진작 알았다면 대학시절 그렇게 방황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일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매사에 불안했는데 걱정이 사라지고 소망에 부풀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매일 밤 성경을 읽고 사도법관 김홍섭씨의 책을 읽었다. 그분의 아들이 신부였는데 그가 남긴 수필집도 읽었다. 그러다 그해 11월쯤 이상한 꿈을 꿨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6> 사법시험 앞두고 교회 목사님 꿈에 나타나
사시 합격 후 가족들 교회로 인도… 대한민국 최초 여성검사에 임관
조배숙 당선자는 검사로 근무하다가 1986년 판사로 전관했다. 92년 서울지법 남부지원(현 서울남부지법)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조 당선자.김홍섭씨는 법조인이면서 성자와 같은 생활을 하셔서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청빈했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지인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때도 ‘법관으로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다’라며 눈물을 흘려 법정이 울음바다가 된 일화도 있다. 그분이 남긴 글을 모은 책 표지에는 법모를 쓰고 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이 뇌리에 남아 있어서였을까. 꿈에 김홍섭씨가 나타났다. 그분의 표정은 엄숙하다 못해 무서워 보였다.
그분께서 내게 법복을 건네주셨는데 법복을 받아보니 ‘검사 조배숙’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금 지나니 ‘판사 조배숙’으로 쓰여 있었다. 지금도 그 꿈이 생생하다. 내가 법조인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예시였다.
나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공부했다. 내 일생에서 그렇게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겨울에는 도서관 난방이 되지 않아 몹시 추웠다. 하루는 너무 추워 울면서 공부하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친구가 준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저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이 정도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라며 위로했다.
드디어 사법시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또다시 꿈을 꿨다. 내가 다니던 남현교회 목사님이 꿈에 나타났다. 긴 막대기에 조롱박이 달려있었고 그것으로 기름을 떠서 내 머리에 붓는 꿈이었다. 기뻤다. 그리고 시험기간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민사소송법 책을 한 번 읽으려면 최소 두 달이 걸렸는데 반나절 만에 일독을 했던 것 같다. 예상문제도 많이 적중했다.
시험이 끝났다.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이제 합격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나고 1980년 사법시험 22회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다. 나를 포함해 여성 합격자가 3명 있었다. 서울대 법대 대학원 2학년 시절인 24살이었다. 지금은 사법시험에 여성 합격자가 많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언론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인터뷰도 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사법시험 합격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나에게 주신 이 직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겠다.’ 나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며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중보기도에 들어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절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절로 향했다. 내가 사법고시를 보던 그해 사월초파일에는 어머니가 나의 합격을 기원하며 일천배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진리를 체험한 나로서는 가족의 구원을 미룰 수 없었다.
내가 교회에 나가고 난 뒤 우리 집안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가 두통에 시달리며 잠을 못 이루고 산책을 다니곤 하셨는데 우연히 나와 새벽기도를 가셨다가 은혜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그날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불교신도였던 어머니에게 전도하셨다. “여보, 이제 배숙이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선 부부가 교회에 나가야 하지 않겠소?” 자연스레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1991년 별세하실 때까지 익산 성산교회에 출석하셨다. 교회에선 교회 설립 후 최초로 교회장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교회 건축과 어려운 신학생 학비 지원에 앞장섰다. 물론 생전에는 가족에게 일절 내색하지 않으셨다. 1982년 사법연수원 생활을 무사히 마친 나는 임숙경 검사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검사로 임관했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7> 이혼 겪고 힘들 때 새벽기도 시작 10여년 계속
목사님 말씀과 기도로 마음 안정… “차선의 삶이라도 최선을 다하자”
조배숙 당선자(왼쪽)가 경기여고 동기로 1994년 서울고법에서 판사로 같이 근무하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북한산에 올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1982년 서울지검 검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검사실에 출근하자 검사 밑에서 일하는 수사계장들이 불편해했다. 계장들은 여성 검사와 같이 일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굉장히 자존심 상해했다. 주변에서도 남자가 여자 상사를 모시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고 놀렸다. 여직원들도 덩달아 여성 검사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사 임관 첫날부터 하나님의 선한 뜻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니 조금씩 적응하는 것 같았다. 검사로 근무하다가 4년 뒤인 86년 인천지검 검사를 끝으로 법관으로 전관했다. 솔직히 검사로 일하는 동안 엄청난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법원은 검사보다 스트레스가 덜하겠지’하는 막연한 생각에 전관했지만 법원도 만만치 않았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사후에 판단하는 것, 특히 객관적이고 솔직하지 않은, 이해관계가 대립돼 있는 양측 증인의 말을 듣고 사건을 재구성하고 가늠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말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형사 사건의 마지막 순간까지 과연 이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 확신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 누구 말대로 꿈에 산발한 여인이라도 나타나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수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다가 88년 대구로 전근했다. 89년에는 1년간 일본 게이오대와 세케대 객원연구원으로 연수했다. 91년은 내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81년 결혼을 했던 나는 당시 이혼을 하고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남의 일이라고 여겼던 이혼을 막상 겪고 나니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망했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견딜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외롭게,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그런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밀려오는 공허함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 괴로움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남성전으로 향했다. 새벽기도 때 목사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 어느새 마음이 안정됐고 새로운 소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래, 누구나 최상의 삶을 살고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차선의 삶을 살더라도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91년부터 시작한 새벽기도는 거의 10여년간 이어졌다. 95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2년 전에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 제가 판사로 계속 일할 수 있지만 저는 변호사로서 일하는 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언제 시작하면 좋을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십시오.’ 그러나 그때가 아니라는 대답을 주신 듯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인지 꿈으로 좀 알려주세요.’ 기도 후 어느 날 꿈에 내가 출석하던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남성전의 고석환 목사님이 나타났다. 그리고 서울 서초동 정곡빌딩 서관에 사무실을 크게 내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95년 4월의 일이다.
꿈에 정곡빌딩 서관이라고 해서 우선 그쪽 사무실을 알아봤다. 그런데 정곡빌딩 서관에는 나온 사무실이 없고 동관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동관 사무실을 계약하기로 했다. ‘분명 꿈에는 정곡빌딩 서관이라고 알려주셨는데….’
동관을 계약하기로 한 그날, 그 사무실의 변호사가 미안하다면서 사무실을 그냥 양보해달라고 했다. 본인이 뉴질랜드로 이민 가는데 사무실을 모두 후배 변호사에게 인계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통 사정을 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8> 성실한 변호로 ‘여성이라 일을 더 잘한다’ 평판
의뢰인 위해 기도하며 변호에 최선… 선임하고 싶은 변호사로 손꼽혀
조배숙 당선자가 1988년 대구지법에서 판사로 근무할 때 동료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왼쪽 첫 번째가 무소속 주호영 의원, 두 번째가 김수남 검찰총장이다.다시 사무실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하루는 법원 17층에서 내려다보는데 웬 건물에 ‘임대’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린 게 보였다.
사무장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평수도 적당하고 1층인 데다 법원과 검찰청도 가까웠다. 안성맞춤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규모의 그 건물은 정곡빌딩 서관 뒤에 있었다. 명함에 정곡빌딩 서관 뒤 법조빌딩이라고 기재했다. 웃음이 나왔다. ‘아, 어쨌든 기도대로 정곡빌딩 서관이구나.’
1995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처음 사건을 수임했다. 월급 개념이 아닌 수입은 난생 처음이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니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정신없이 일했다. 당사자들을 만나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처음 5개월간은 내가 맡은 사건의 목적을 거의 달성했다.
당시 법조계에는 ‘판사들이 대부분 남자인데 여성 변호사가 어떻게 그들과 술을 마시고 로비를 하겠느냐’는 분위기가 강했다. 내 의뢰인 중에도 여성 변호사의 능력에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꿔 ‘여성이라서 일을 더 잘한다’는 소문을 내줬다.
초창기엔 사무실이 한산했지만 2∼3개월이 지나자 나와 상담하기 위해 복도까지 줄지어 앉아 기다릴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 당사자들이 정말 변호인의 충분한 변호를 받지 못하고 있구나.’ 6개월이 지나자 나는 가장 선임하고 싶은 변호사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소명이 아닌가 싶다.
95년부터 2000년까지 여성변호사회 회장도 지냈다. 당시는 여성변호사가 10여명에 불과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여성 변호사로서 인정 받으며 가수 현진영, 고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여성 앵커 백지연 등 유명한 사건을 선임해 언론에 회자됐다. 그 즈음 동기 변호사들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조 변호사 같은 경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여성들을 위해 정치 일선에 나서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정치권 인사들과 교류도 안 해?”
나는 동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정치에 입문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구태여 정치권 인사들과 교류하거나 정치적 행동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거야.”
1999년 나는 정치권으로부터 새천년민주당의 발기인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이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새천년민주당 발기인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나는 비례대표 23번으로 지명됐다.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당선권 안에 드는 순번을 부여받기 위해 정치 실세를 찾아가 로비를 하곤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그런 방법을 권유했지만 최초의 여성 검사로서, 판사 출신으로서 그렇게 정치 실세를 찾아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례대표 23번은 당선권에 미치지 못했다. 낙선한 후 원외에 있는 정치인들의 어려움과 사정을 이해하는 시간이라 여기며 보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전도하고 예수를 증거했다. 2001년 9월 DJP 연합이 깨지고 비례로 국회의원을 하시던 분들이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국회의원 직을 승계하게 됐다. 11월에는 서울 중곡동 예수선교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맡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기도의 위대한 힘을 믿고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도 새벽에 부르짖는 기도로 많은 응답을 받았다. 국회의원으로 많은 입법 활동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9> ‘군산 개복동 참사’ 계기 성매매방지법 대표 발의
많은 여성 인권 사각지대 탈출 보람 “새 삶 살게 해줘 감사” 인사 못잊어
조배숙 당선자(가운데)가 2008년 9월 서울 국회도서관 회의실에서 열린 ‘성매매특별법 4주년 성과 및 향후 과제’ 토론회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2002년 1월 전북 군산 개복동에서 꽃다운 나이의 여성 13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같은 지역의 대명동 화재사건으로 5명이 사망한 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사고라 충격이 컸다. 무엇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은 대명동 사건 당시 여성들을 감금한 채 성매매를 강요한 악덕 업주 중 개복동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입건된 뒤에도 버젓이 성매매 영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웅장한 홀이 있는 10억짜리 룸살롱을 주택가에 짓다니.’ 그는 그러고도 초호화 생활을 했다. 성매매 업소는 주택가와 학교 주변까지 침투해 있었다. 이 같은 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만 국내에 150만명으로 추산됐다. 가임여성 10명 중 1명이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미국은 2001년 인신매매 보고서에 한국을 3등급 국가로 분류할 정도였다. 국제적 망신이었다.
문제는 법 때문이었다. 1961년 제정된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성매매 알선 포주와 주변 매개체에 대해 너무 경미한 처벌을 내리도록 했다. 그렇다보니 명의만 바꾸면 영업을 할 수 있었고 감금 여성이 탈출하면 업주가 사기죄로 고소해 체포를 당하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군산화재 사건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진술은 충격적이었다. 경찰이 업주들로부터 성 상납을 받고 단속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등 유착관계가 심했다. 사실 경찰이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철창이 쳐진 2.6㎡(0.8평) 크기의 쪽방에서 24시간 감금하는 노예매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2002년 성매매방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그 과정에서 ‘의원님이 여성이시라 남자를 너무 모르시는 게 아니냐’는 항의도 있었다. 국회 홈페이지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접속으로 다운되기도 했다. 법이 제정되면 손해를 보는 집단이 만만치 않게 있었다는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여러 번의 공청회와 논의를 통해 2004년 4월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2005년 9월 인천 숭의동 지역에서 시행 중인 성매매여성 자활지원 시범사업을 돌아볼 일이 있었다. 마침 일자리 창출프로그램 수료식이었는데 10명의 여성들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들 대부분은 중졸 이하의 학력이었다. 평균 14세의 나이에 성매매산업에 유입돼 10년 이상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집이 가난해 ‘가족들을 위해 나 하나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견뎠지만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고 했다.
“왜 성매매가 싫으면서 빠져나오지 않았어요?” “거기서 나오면 생활할 곳도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어서요. 엄두를 못 냈어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기는 했지만 법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업주들은 ‘너희들을 붙잡아 경찰에서 잡아 가두고 처벌하려고 한다’며 왜곡해서 알려줬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그들 중 한 여성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이 법을 발의해 주시고 저희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의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들과 포옹을 하면서 입법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법 제정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 법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 고통에서 해방된 모습을 보니 큰 보람이 느껴졌다.
성매매방지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성산업이 번창한다면서 회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법으로 인해 성매매 집결지가 축소되고 성매매가 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긍정적 효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특히 최근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사건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위헌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감사한 일이다.
***[역경의 열매] 조배숙 <10·끝> “기도할수록 부족함 깨달아… 주님 능력에 의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 기도로 응답… 주변 사람들에게 늘 전도 기회 찾아
조배숙 국회의원 당선자가 정치권 복음화와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들은 새벽에 부르짖는 기도로 많은 응답을 받았다. 특히 한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는 긴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97년의 일이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소설가 정연희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다니…. 왜 그렇게 됐는지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조 변호사님, 변호사는 접견할 수 있잖아요. 박지만씨를 만나 위로해 주시고 예수님을 증거해 주세요.”
내가 담당 변호사도 아닌 데다 접견 신청을 한다고 해서 본인이 응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반신반의했다.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니 하나님께 기도하고 접견하기로 했다. 오후에 서울구치소로 가서 접견 신청을 했다. “조배숙 변호사입니다.” “아니, 회사 직원이 벌써 갔습니까?” “예?”
나중에 알고 보니 지만씨가 그날 오전 면회 온 회사 직원들에게 “조 변호사가 성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으니 그분을 변호사로 선임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께서는 이미 지만씨와 나의 만남을 예정해 놓으신 거구나.’ 지만씨는 의외로 예의 바르고 겸손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점잖고 예술적 감수성이 예민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어머님이 계실 때 그분의 가르침대로 하면 실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부모님이 모두 흉탄에 돌아가신 후 정신적 충격이 몹시 컸던 것 같았다. 그가 만약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고 날 지만씨는 실형을 각오하고 법정에 섰다고 한다. 그러나 집행유예가 선고되자 나와 약속한 대로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 “어느 교회에 가고 싶으세요?” “박태준 전 총리께서 출석하시는 소망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시 소망교회 장로이셨던 정상학 부장판사께 연락을 드렸다.
2008년 형사 사건을 공동으로 준비한 후배 변호사도 자연스럽게 전도를 했다. 상당히 어려운 구속 사건이었다. 공판을 앞두고 회의를 마칠 때마다 구속된 피고인의 회사 관계자, 담당 변호사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신앙이 전혀 없던 그 변호사는 기도과정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하나하나 풀리는 것을 경험했다. 결국 구속됐던 2명의 피고인이 보석으로 석방되고 나머지 1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기도의 힘을 체험한 후배 변호사는 크리스천이 됐다.
“선배님, 저는 회의 때마다 선배님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발로 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됐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조배숙 변호사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됐다고 말씀드렸어요.”
1988년 대구에서 판사로 일하며 모시던 부장판사를 전도했던 기억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계시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 그리고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고 전도하며 전파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 우리는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향기를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함으로 생활에서 항상 전도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기도할수록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 한계를 많이 깨닫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신실하심, 우리를 향한 크신 사랑, 죄인의 연약한 손을 붙잡고 강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심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