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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돌이동 하회마을을 다녀와서
현충일인 2009. 6. 6. 우리 72회 친구들은 마눌님들을 모시고 1박2일로 안동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을 다녀왔다. 서애 류성용의 후손인 류벽하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한 까닭을 우리 동기들에게 알려주고자 진작부터 준비해온 것이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특히 이번 답사는 지난 3월 서산 지역 답사시 명쾌하고 멋들어진 설명으로 우리들, 특히 마눌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봉렬 교수가 다시 한 번 수고해주기로 하였기에 더욱 기대되는 여정의 출발. 많은 동문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정영기 부인은 얘기 안 할 수가 없다. 저번 서산 답사 때는 남편 정영기 교수가 급한 일로 참석을 못함에도 꿋꿋하게 혼자 참석하더니만, 이번에는 답사를 앞두고 갑자기 무릎을 다쳤음에도 기브스를 하고 나타났다. 아무래도 김교수 팬클럽 회장으로 추대해야겠다.
강남과 분당에서 각기 떠난 2대의 버스는 여주 휴게소에서 랑데부를 한 뒤 중부내륙고속도로로 하여 안동으로 내려간다. 안동은 왕건이 이곳에서 견훤의 군사와 대결하여 큰 승리를 얻은 후 동쪽을 편안하게 하였다하여 이곳 고을 이름 고창을 안동(安東)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지. 그 전에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사랑하는 장군 신숭겸, 김락 등의 목숨까지 잃었던 왕건으로서는 이 전투에서 이기자 고을 이름까지 바꿀 정도로 크게 기뻐했을 것. 안동 하면 안동 김씨, 안동 권씨가 유명하지 않은가? 바로 이 전투에서 이들 성씨도 생겨났다. 전투를 앞두고 이 지역의 성주 3사람이 태조에게 귀순하자 왕권은 이들에게 김씨, 권씨, 장씨의 성을 하사한 것. 안동 태사묘가 바로 이들 김선평, 권행, 장정필 3 사람을 모신 사당이다.
1. 병산서원
11:15경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낙동강변의 조그만 언덕길을 넘어온 차가 서원 앞에 도착하다. 얼마 전에 일 때문에 대구로 내려간 정호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서울서 내려온 마눌님과 반갑게 재회. 병산서원은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하회마을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류성룡이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 이곳으로 옮겼는데, 유성룡 타계 후 우복 정경세가 1614년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병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병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의 서원중의 하나이다.
서원으로 올라가는데 2005. 11. 13. 미국 41대 부시 대통령 내외가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소나무가 보인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안동 출신인 풍산금속 류회장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하여 부산에서 아셈회의가 열렸을 때 잠시 이곳을 방문하고 기념식수를 하였다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곳을 들렀다고 하니까 부시 대통령도 와보고 싶었던 것일까?
복례문(復禮門)을 지나 만대루 밑으로 진입하니 마당 좌우로는 유생들이 기숙하던 기숙사 동재, 서재가 있고, 정면에는 원장이 유생들을 앉혀놓고 강론하던 입교당(立敎堂)이다. 우린 신발을 벗고 입교당 마루로 올라가 김교수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이곳에서 앞을 바라보니 만대루의 일곱 기둥으로 분할되는 낙동강과 건너편의 병산(屛山)의 풍경이 정말 설명처럼 7폭 병풍에 담은 풍경화로 보인다. 그래서 屛山이라고 하였나? 이제 김교수의 명강의가 시작된다. 다들 김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가볍게 '아하!'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설명을 들으면서 점점 더 병산서원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가만히 고개를 오른쪽 위로 쳐드니 교수님들의 거처인 경의재(敬義齋) 현판 위에서 제비 한 마리가 앉아 역시 김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저 제비도 김교수의 명성을 듣고 이곳으로 찾아왔구먼.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도 눈은 자꾸 앞의 만대루로 향하는데, 그러다보니 만대루 마루 위에 한복을 입고 느긋하게 앉아 가볍게 부채질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점점 익숙해져온다. 이게 누구야? ALP 6기 동기인 권오춘 이사장님이 아닌가? 자신이 안동 권씨의 후예임에 자부심을 느끼는 권이사장님이 전에부터 안동의 99칸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하는 것을 못가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우연히 뵐 줄이야! 권이사장님은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풍류가중의 한사람이다. 일찍이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증권투자로 큰돈을 번 후 사업에서 손을 떼고는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을 하면서 전통문화에 많은 후원을 하고, 본인도 전통문화에 심취하여 직접 전통춤도 배우면서 인생 후반기를 멋지게 살고 있다. 전에 권이사장님이 두물머리 서종면 푯대봉 산자락에 지은 별장으로 동기들을 초대하였을 때, 별장의 마루에서 두물머리로 흘러드는 북한강과 건너편 문안산을 바라보면서 전통춤과 창, 국악의 향연에 빠져들던 것이 생각난다. 그 때 권이사장님의 인생 풍류에 반하여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였었지.
입교당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의 발길은 당연히 만대루의 마루로 향한다. 만대루(晩對樓)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층의 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를 그대로 마루에 얹히고 계단처럼 나무를 파낸 것이 재미있다. 만대루 마루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낙동강에 비치는 병산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머지 일정을 미루고 그냥 여기에 이렇게 마냥 앉아 있고만 싶다.
입교당 뒤로 돌아간 곳엔 병산서원 건물중 유일하게 건물에 울긋불긋 단청을 칠한 존덕사. 유교의 검소함을 건물에도 나타내고 있는 서원인데 이곳에만 단청을 칠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곳이 산 자의 공간이 아닌 죽은 자의 공간 - 사당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겠다. 존덕사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어 문틈으로만 들여다 볼 수밖에 없는데, 닫힌 문의 기둥 주춧돌에 태극의 8괘가 무늬로 새겨져있다. 기둥에 이런 8괘가 들어가 있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냥 무늬를 넣은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2. 부용대
병산서원을 떠나 우리가 들른 곳은 부용대. 우선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본 후 머릿속에 하회마을의 전경을 그리며 하회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류벽하 부회장이 먼저 이곳으로 우리를 안내. 차에서 내린 우리는 절벽 위로 올라가는데, 안타깝게도 다친 발을 이끌고 열심히 우리를 쫒던 정교수 사무님도 이곳에선 어쩔 수 없는 듯.
다들 부용대 절벽 위에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며 '야~아~~'하는 자연스런 합창. 하회마을소개에 즐겨 나오는 사진이 바로 여기서 찍은 것이구나. 꽃뫼(花山)에서 뻗어져 내려온 평지에 자리 잡은 하회마을을 화천(花(화)川(천))이 - 이곳을 감아 도는 낙동강을 특별히 화천이라고 부르나보다 - 빙 돌아 감아 나가고 있다. 그래서 물이 돌아나가는 마을이라고 하여 물돌이마을이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하회마을. 뒤로 화산을 베개 삼고 낙동강이 마을을 빙 둘러 나가는 것이 가히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하회마을을 가거처(可居處)로 할 만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회마을이 워낙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익숙하긴 하지만 물돌이마을이란 순수 우리말 표현을 좀 더 살려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물돌이마을이다.
물돌이마을은 산과 강이 어우러져 'S'자 모양의 태극형을 이루고 있어 '산태극 물태극'의 형국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면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국이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절벽을 연꽃을 바라보는 대(臺(대))라고 하여 부용대(芙蓉臺)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나. 또 물돌이마을은 행주형(行(행)舟(주)形(형))이라 배가 가라앉는다고 함부로 우물도 파지 않고 화천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쓰고, 또한 배가 무거워진다고 하여 가급적 돌담도 피하였다네.
부용대 위에선 우리에게 물돌이마을을 설명해주기 위하여 벽하의 일가분인 하회마을 보존회 사무국장님이 나와 계신다. 나이는 우리보다 많지만 벽하의 손자뻘이라고... 덕분에 김교수는 잠깐 쉬고, 물돌이마을 토박이 국장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원래 이곳 물돌이마을에 살던 이들은 화산 산기슭에 자리 잡았던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 그런데, 고려말에 풍산 류씨의 류종혜 공이 자손대대로 세거(世居(세거))할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화산에 올라 관찰한 결과 화산 기슭보다는 지금의 마을 있는 곳이 적소(適所(적소))라고 보아 그때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살기 시작한 것.
물돌이마을의 한가운데로 마을의 큰길이 S자로 휘어서 질러가는데, 이를 기준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 있다. 북촌의 대표적 종가댁은 서애 류성용의 형 류운룡의 양진당(養(양)眞(진)堂(당))이고, 남촌의 대표적 종가댁은 류성용의 충효당(忠孝(충효)堂(당))인데 물돌이마을의 대표적인 종가라 여기서도 쉽게 눈에 띈다. 그런데, 김교수는 마을의 집들을 이리저리 가리키면서 마을의 집들이 좀 어수선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집을 지을 때 집이 어디를 향해 바라보며 짓느냐를 먼저 정하는 데(案對), 물돌이마을의 경우 빙 둘러 산이라 서로 바라보는 산이 틀리면 집도 앉는 방향이 다른 법. 어떤 집은 산을 안대로 하지 않고, 종가집을 안대로 하기도 했단다.
화천 건너편에선 강가에 많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473호로 지정된 만송정(萬(만)松(송)亭(정)) 숲이다. 만송정은 자연적인 숲이 아니고, 물돌이마을 북서쪽의 산이 낮아 북풍에 마을의 지기(地氣(지기))가 흩어질 것을 우려하여 인공적으로 비보(裨補(비보))숲으로 조성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벼랑으로 이루어진 부용대의 살기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부용대 왼쪽 아래쪽에 있는 옥연정사 앞 강가에선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물돌이마을로 건너가고 있다. 김교수는 오래 전에 저 화천을 얕잡아보고 그냥 건너가다 혼났다나?
3. 옥연정사
물돌이마을을 그만큼 보았으니 이제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하였다는 옥연정사도 한 번 둘러보자. 부용대 절벽 위에서 옥연정사(玉淵精舍)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라 아줌마들이 쩔쩔 맨다. 옥연정사는 서애 선생이 1586년 평소 가까이 지내던 승려 탄홍(誕(탄)弘(홍))의 도움으로 지었다는데, 유학자로 불교에 엄격할 줄 알았던 서애도 가까이 지내는 스님이 있었구나. 서애가 가까이 지내는 스님이었다면 탄홍 스님도 뛰어난 스님이었을 터. 서애의 장점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을 알아볼 줄 안다는 것이 아닌가?
임진왜란 무렵 당시 이순신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이가 바로 서애 선생이 아니더냐. 서애가 이순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하여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아무도 남해와 서해를 지키지 못하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간죽문(看竹門)을 통하여 옥연정사로 들어선다. 서애는 문 주변에 오죽(烏竹)을 심고 때때로 이 문을 나서 대숲을 바라보고, 강바람 부는 날에는 물결이 바람에 나부끼며 옥이 부서지듯 내는 해맑은 소리를 듣기도 하였단다. 그런데, 서애가 심었다는 오죽의 숲은 다 어디로 갔지? 대청마루 안쪽에 걸린 현판은 광풍제월(光風霽月). 가만있자... 광풍제월이라면 담양 소쇄원에도 광풍각, 제월당이 있는데 양산보나 서애나 주무숙의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에서 이를 따온 모양.
4. 물돌이마을
이제 물돌이마을로 들어가보자. 우선 마을 입구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드디어 물돌이마을로!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도 마을까진 상당히 걸어야 한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땐 매표소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물돌이마을을 찾는 이들이 많으니 매표소를 마을에서 더 앞으로 빼내고 주차장도 크게 확장한 모양. 마을까지 들어가는 셔틀버스가 있으나 우리는 그냥 걸어 들어가기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사람들 심심하지 않게 몇 가지 이야기를 써놓았다. 그중 하회탈에 대한 이야기 한편 소개. 옛날에 물돌이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마을사람들의 걱정이 대단하였다. 하루는 이 마을에 사는 허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지금 마을의 재앙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며, 그 신을 위해 탈을 만들라면서, 단 탈을 만드는 동안 누가 이를 엿보면 탈 만들다가 죽는다고 얘기를 하였다. 마을을 위하는 일인데 안 할 수 있나? 허도령은 마을 어귀에 탈막을 짓고 탈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평소 허도령을 사모하던 마을 처녀가 그만 탈막을 엿본 것. 어떻게 되겠나? 산신령 말대로 허도령은 피를 토하여 죽고, 처녀는 처녀대로 자기 때문에 허도령이 죽었다며 자결. 그 후 마을 사람들이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산 중턱에 성황당을 짓고 처녀를 성황신으로 받들어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사를 올린단다. 처녀를 위해선 제사를 올려주는데, 그럼 허도령에 대해선?
가. 하회별신굿 탈놀이
마침 3시부터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이 있다고 하길래 우리들은 먼저 공연장부터 찾았다. 별신굿은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이 생길 때 한다고 한다. 공연장을 둘러싼 스탠드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고, 게중에는 외국인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사람들 머리 사이로 이리 저리 고개를 삐죽이 내밀다가 여의치가 않아 스탠드를 따라 돌다가 배우들 출입구쪽에 와서 멈췄다. 지금 저 배우들이 쓰고 있는 탈들이 허도령이 만들던 탈인가? 탈놀이라는 것이 조선시대 억압받던 민중들의 한(恨)의 배출구라 내용에는 당연히 양반들의 위선과 무지를 폭로하는 장면이나 중의 파계를 통해 불교의 타락상 등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탈춤이 민중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생각했으나, 물돌이마을에선 이러한 탈놀이 자리를 양반들이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허긴... 이렇게라도 하여 민중들의 恨을 배출하는 마당이 있지 않았다면 그 폭발적인 힘이 어디로 빠질지 모르는 것이라, 양반들 스스로 배출구를 마련해준 것이리라.
나. 삼신당
공연이 끝나고 그 많은 관중들 틈에 섞여있던 우리 동기들과 마눌님들은 용케도 김교수 있는 곳으로 잘 찾아온다. 김교수가 우리를 이끌고 먼저 찾은 곳은 삼신당. 그런데, 그 사이 낯익은 얼굴이 늘어났다. 구미에서 온 이세제와 장성호, 대구에서 온 노은배가 합류한 것. 반갑다! 친구야!! 풍수지리상 마을의 혈에 해당하는 마을 중앙의 약간 도톰하게 솟아오른 곳에는 나이가 600년 이상이 된 느티나무가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싼 짚 울타리에는 하얀 종이 조각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다가가보니 이곳을 놀러온 관광객들이 자기 소원을 적어 끼어 놓은 종이 조각들이다. 이곳 삼신당이 물돌이 마을에서 기가 가장 많이 응집된 곳으로 여기서부터 각 지맥을 따라 마을 곳곳으로 흘러가는 곳이라 하니 오는 사람들마다 소원 종이 끼워 넣기에 바쁜 모양이구나.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런 오래된 느티나무를 갖고 있는 다른 농촌의 동리들에는 이런 느티나무 앞은 널따란 광장으로 되어 있는 게 보통인데, 왜 이곳 느티나무는 집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일까? 더구나 탈놀이를 하려면 넓은 광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명색이 유생인 이곳 양반네들이 이런 미신적인 신앙의 유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하면 남들이 보고 뭐랄까 이렇게 은밀히 숨겨놓은 것 아닌가? 김교수 왈, 양반들이 토속신앙에도 보험을 들어둔 것이라고... ㅋㅋ 하긴 요즘 세상에도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뒤로는 은밀히 점을 보러 다닌다고 하니...
다. 충효당
이런 신앙적 유물을 보았으니 이젠 류벽하 가문의 종손이 거주하시는 보물 414호인 충효당으로 가보자. 충효당은 서애 선생이 거처하던 집은 아니다. 서애 선생이 정계에서 물러나 낙향한 이후에는 징비록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기면서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집도 없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셨다. 충효당은 일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선생의 맏손자 류원지가 안채를 짓고, 그의 아들 류의하가 사랑채를 지어 확장한 것이다. 충효당 앞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 충효당을 방문하였을 때 기념으로 심었다는 구상나무가 우아한 모습으로 서있다. 구상나무에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할 때 옷을 걸어놓는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그래서 여왕은 기념식수로 구상나무를 선택한 것일까?
대문 안으로 사랑채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사랑채의 문들은 창호지문이 아닌 나무문으로 닫혀있다. 왜 이리 답답하게?? 충효당은 집 뒤의 화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 보이는 원지산을 안대(案對)로 하여 서향을 하고 들어선 집이라 오후에 들이닥치는 햇살 때문에 사랑채가 외양만 이쪽으로 보고 있지 실제 생활은 옆으로 난 공간으로 하고 있단다. 보통 관광객들은 여기서 돌아서는데, 우리는 벽하의 백으로 안채까지 들어간다. 툇마루에선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종부(宗婦)께서 우리가 온다는 연락을 받으시고 뭔가 준비하고 계셨고, 잠시 후에 종손 류영하 옹께서 나오신다. 얼굴에 거뭇거뭇 검버섯이 핀 종손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시는데, 종손이라 그러신가 그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에는 권위가 있다.
그런데, 툇마루에 덧붙인 작은 마루에 뭔가 쓰여 있어 들여다보니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설치한 마루란다. 이런 마루를 딛고 올라서는 습관이 안 된 여왕에겐 그냥 마루로 발을 올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여 그보다 한 단 낮은 마루를 설치했던 모양이다. 처음 여왕은 한국의 풍속을 모르고 이 마루를 그냥 신발을 신고 올라섰다가, 통역의 얘기를 듣고 비로소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고 한다. 영국 여성들에겐 신발을 벗고 남에게 맨발을 보여준다는 것은 마치 자기 알몸을 보여주는 것 같아, 여왕이 그렇게 신발을 벗고 올라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나?
여왕을 위해 설치한 마루 위쪽으로는 천장에서부터 줄이 하나 내려서있다. 안부사(安扶絲)라고 나이든 어르신들이 마루를 오르내릴 때 잡으라고 설치한 끈이란다. 그렇겠지. 종손이 거주하시는 곳이니 나이 드신 종손이 자칫 마루를 오르내리다 다치면 큰일인지라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쓴 것이겠지. 혹시 예전에 종손이 한 번 사고를 당한 후 설치한 것은 아닌가? 종부께서 우리를 위해 음료수를 준비하시니, 벽하 아내가 눈치 빠르게 달려가 음료수 준비를 돕고 있다. 우리는 시원한 음료를 대접받고, 준비해간 큰 프라이팬을 선물로 드렸다. 웬 프라이팬이냐고? 벽하가 미리 선물로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 여쭈니 아무래도 종가집이다보니 많은 손님을 맞이하여 음식 준비할 일이 많은지라 큰 프라이팬이 필요하다나.
라. 영모각
충효당엔 류성룡의 종손이 사시는 곳이라 류성룡의 유물을 전시하는 영모각(永慕閣)도 있다. 서애 선생의 임란 당시의 활약상도 설명해놓았는데, 그중에 눈길을 끄는 서애 선생의 한 말씀.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땅에서 떠나신다면 조선은 곧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선조는 왜군이 평양성까지 점령하였다고 하니까 중국으로 도망가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겠다하고, 서애는 목숨을 걸고 임금의 도강(渡江)을 막으면서 한 말. 쯧쯧... 어떻게 한 나라의 임금이 조국과 백성을 위해 한 목숨 바칠 각오를 하지 않고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중국으로 도망가겠다는 말인가?
5. 봉정사
물돌이마을의 집들은 하나하나가 역사적 이야기를 간직한 유서 깊은 집들인데, 우리는 이를 다 돌아볼 수 없고 류시주 가옥과 원지정사만 더 둘러보고 물돌이마을을 나와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천등산(天燈山) 봉정사로 향한다.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그보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들른 사찰로도 유명하다. 봉정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시계는 7시를 향하고 있어 못 들어가보는 것 아닌가 걱정했으나, 다행히 매표소 관리원은 단체 관광객들의 목돈을 생각해서인지 망설임 없이 오케이. 봉정사로 오르는 길 입구에는 이곳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촬영 장소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봉정사로 오르는데 산사의 종소리가 산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절을 찾으니 산사의 울림도 듣게 되는구나. 산사에선 아침이면 화엄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28번 종을 치고, 저녁이면 정토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33번 종을 친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종소리는 우리가 만세루인 덕휘루(德輝樓) 밑의 돌계단을 통하여 절 안마당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려나오고 있다.
봉정사는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이곳에 내려앉아 절을 창건하였다는데, 아하! 그래서 절 이름이 봉황이 머무른 절이라 하여 봉정사(鳳停寺)였구나. 봉황이 머무른 천등산 이름에도 전설이 있다. 천등산의 원래 이름은 대망산이었다는데, 능인 스님이 중턱 동굴에서 수행하던 중 어여쁜 여인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자 그 여인은 선녀로 변해서는 수행을 시험하고자 했노라며 동굴을 환하여 밝혀주었다고 하고... 그래서 하늘에서 내린 등불이란 뜻에서 천등산(天燈山)이라고 부른다나? 봉정사는 고려 공민왕 때 크게 부흥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와 2년을 머물렀는데 이 때 공민왕이 봉정사를 중창하였다.
가. 극락전
봉정사는 뭐니 뭐니 해도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제15호 극락전으로 유명하지 않는가? 사실 관련 기록이 모두 불타 이 극락전이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임을 알게 된 것은 1972년 극락전 해체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인함이다. 극락전은 한눈에 보기에도 여태 보아오던 절 건축과는 형식이 다르다. 보통 절건축은 전면에 여러 칸의 문으로 되어 있는데 극락전의 전면은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는 문 하나와 그 양옆으로 낱살문만 있을 뿐이고, 나머지 3면에는 문이나 창이 전혀 없는 감실형 건물이다. 김교수 왈, 고려시대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절로 찾아오는데 굳이 절 건물을 개방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고...
그런데,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라 하여 머릿속으로는 세월의 역사가 덕지덕지 붙은 낡은 건물을 연상하였는데, 외양은 최근에 다시 칠한 듯 깨끗하다. 김교수는 목조건물이란 창건 당시의 목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창건 당시의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기에, 그 후에 그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목조 부재를 전면적으로 갈았어도 창건 당시의 목조 건물로 인정해준다고 한다. 일본에서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자랑하는 것들도 건물이 오래되면 그 양식 그대로 그 옆에 그대로 짓고 오래된 건물은 헐어버린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면 예전 건물로 쳐준다는 것. 설명을 듣고 보니 목조건물의 경우엔 그렇게 해야 할 듯. 김교수는 그렇기에 숭례문이 불탔을 때에도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 설계도를 그대로 갖고 있기에 그대로 복원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나.
김교수가 봉정사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우리들은 이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소란스러워지니 스님이 나와서 뭐라 한 말씀. 그렇겠지? 지금 이 시간은 관광객들은 모두 나가고 산사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할 땐데 우리가 너무 떠들고 있으니... 그 바람에 원래는 영산암까지 보고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그냥 내려갈밖에... 김교수는 영산암은 건축학적으로 건물과 조경의 절묘한 배치로 한번 둘러볼 만한 곳이라 하였고, 또한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주무대로 영화에서 영상이 무척 아름다웠던 곳이라 둘러보고 싶었는데... 봉정사를 물러 나오는데 절에서 나오는 차는 헤드라이트를 킬만큼 어둠이 내리고 있다. 시간을 보니 벌써 7시 반을 넘어섰다.
나. 명옥대
일주문을 지나 내려오는데 아까 오를 때 보았던 숲속의 정자를 다시 지나친다. 올라갈 때는 내려오면서 보야지 하였으나 지금 시간은 많이 늦었다. 어떡하나? 그래도 지금 안 보면 언제 또 와서 보랴. 나는 뛰어서 정자로 다가가니 이곳의 이름은 명옥대(鳴玉臺). 명옥대는 원래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으나 봉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던 퇴계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현종 6년(1665)에 사림들이 건립한 정자로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飛泉灑鳴玉)'라는 글귀에서 따서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퇴계는 이곳에 머물면서 이곳의 아름다움을 여러 편의 글로 나타냈는데, 김교수가 한마디 아쉬움을 표한다. 봉정사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고... 흐흐 건축과 교수로선 당연히 아쉬웠겠구나.
봉정사에서 나온 우리는 황소곳간이라는 안동의 유명한 고기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한다. 진짜 유명한지 사람이 바글바글. 벽하가 우리를 위해 먹거리까지 상당히 신경을 썼군. 다른 손님들이 많아 오붓한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안동까지 내려온 기분에 서로들 기분 좋게 한잔씩 하며 오늘 하루의 피로를 푼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들은 이제 두 패로 나뉘어야 한다. 오늘 귀경하는 친구들과 내일의 일정을 마저 돌려고 하는 친구들. 그런데, 봉렬이까지 올라가겠단다. 이리 저리 만류도 해보았으나 학교일 때문이라는데 어찌 강제로 막을 수 있겠나. 하긴 요즈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얼마 전까지 교학처장을 하였던 김교수가 이를 모른 체 할 수는 없겠지. 우리는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환송인사를 하고는 오늘의 숙소인 국학진흥원으로 이동하여 즐거웠던 하루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며 술 한 잔과 함께 밤늦도록 담소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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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오지 못했네요,,,,역사책에서만 보고,,,경남,,강원을 왔다 갔다하면서 이정표만 보고요,,언젠가는 가겠죠,,,집에 가면서,,,넉넉한 시간으로,,,,,다시한번 잘 봤습니다,,,
20년전 애들 어릴쩍 갔던 기억 새롭네요, 유성룡의 별장에서 묵을 행운(?--그러나 모기 장난 아니었음)을 누리며 강물을 쳐다보며 밥먹고, 익사 사고도 한건 나고, 물놀이하고, 병산서원등등----안동하회별신굿 공연장에서 태평소를 부시는 윤항수(영주예총회장)님을 혹시 만나셨는지, 할매역할하시는 선생님(진주시립박물관학예연구사 손상락님)도 잘 계시는지---
공연만 보고 나왔기에 누구를 특별히 만나지는 못하였습니다. 할매 역할 하시는 분이 그런 분이셨군요.
오래전 류성용 불천위제사와 능안시제를 밤세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선배 사진가 황헌만씨가 얼마전"하회마을"이란 저서를 출판했습니다.사진이 압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