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갓 쓰고 도롱이 입은 노인
-윤동재
벌써 여러 해 전 일입니다만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퇴계退溪 태실胎室에 들렀다가
가까이 있다는 퇴계 묘소에도 한 번 가보려고
들길을 걷는데
삿갓 쓰고 도롱이 입은 노인
삽을 들고 논물을 살피고 있었지요
나는 노인에게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가 어디쯤 있습니까? 하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은 아닌 듯한데
살아서 소과小科 대과大科를 거쳐 판서判書, 좌찬성左贊成,
더욱이 정일품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오르고
죽어서 영의정領議政 추증追贈과 문순文純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거기다가 종묘배향宗廟配享, 문묘종사文廟從祀까지 이루어졌으면 됐지
명名으로는 이보다 더한 명名이 어디 있소?
힘 빠진 늙은이가 되어서야 낙향해
만은晩隱이라 하면 되겠소?
명名과 은隱을 다 차지하겠다면 너무 지나치잖소?
아직 이 둘을 다 차지한 사람은 없었소
거기 일부러 찾아갈 것 없소
갈 길이 바쁘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하고는
나를 데리고 노인의 집으로 갔었지요
노인은 혼자 사는지 감자밥을 손수 짓고
마당에서 놀던 닭을 잡아
아침에 걸렀다는 옥수수 막걸리를 밤새 대접했지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려 했더니
노인도 집도 사라지고 마당귀 늙은 감나무 아래
나 혼자 벌렁 누워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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