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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가, 은혜인가? 偶然なのか、恵みであるか。( 2024년 4월 28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8:26~40
행 8:26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27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29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마차에 바짝 다가서거라."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가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35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36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37절 없음)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40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26. さて、主の天使はフィリポに、「ここをたって南に向かい、エルサレムからガザへ下る道に行け」と言った。そこは寂しい道である。27. フィリポはすぐ出かけて行った。折から、エチオピアの女王カンダケの高官で、女王の全財産の管理をしていたエチオピア人の宦官が、エルサレムに礼拝に来て、28. 帰る途中であった。彼は、馬車に乗って預言者イザヤの書を朗読していた。29. すると、霊がフィリポに、「追いかけて、あの馬車と一緒に行け」と言った。30. フィリポが走り寄ると、預言者イザヤの書を朗読しているのが聞こえたので、「読んでいることがお分かりになりますか」と言った。31. 宦官は、「手引きしてくれる人がなければ、どうして分かりましょう」と言い、馬車に乗ってそばに座るようにフィリポに頼んだ。32. 彼が朗読していた聖書の個所はこれである。「彼は、羊のように屠り場に引かれて行った。毛を刈る者の前で黙している小羊のように、/口を開かない。33. 卑しめられて、その裁きも行われなかった。だれが、その子孫について語れるだろう。彼の命は地上から取り去られるからだ。」34. 宦官はフィリポに言った。「どうぞ教えてください。預言者は、だれについてこう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自分についてですか。だれかほかの人についてですか。」35. そこで、フィリポは口を開き、聖書のこの個所から説きおこして、イエスについて福音を告げ知らせた。36. 道を進んで行くうちに、彼らは水のある所に来た。宦官は言った。「ここに水があります。洗礼を受けるのに、何か妨げがあるでしょうか。」37. フィリポが、「真心から信じておられるなら、差し支えありません」と言うと、宦官は、「イエス․キリストは神の子であると信じます」と答えた。38. そして、車を止めさせた。フィリポと宦官は二人とも水の中に入って行き、フィリポは宦官に洗礼を授けた。39. 彼らが水の中から上がると、主の霊がフィリポを連れ去った。宦官はもはやフィリポの姿を見なかったが、喜びにあふれて旅を続けた。40. フィリポはアゾトに姿を現した。そして、すべての町を巡りながら福音を告げ知らせ、カイサリアまで行った。。
우리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에는 一期一会(いちごいちえ)라는 말도 있지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사소한 것도 사소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 소중하다는 뜻이겠지요. 더구나 우연이라는 말은 매우 매력적인 뉘앙스가 있는데요. 우연한 기회에 우리는 기적적인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그 모든 우연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 안에서 필연적인 은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속적 가치관의 사회에서는 성공적인 성과를 내고, 결과를 자랑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많은 부러움을 삽니다. 그래서 대체로 성공이라는 기준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칭찬과 인정받는 것이 포함되지요. 어쩌면 누군가 자신의 성공사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복과 성공적인 삶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인과응보의 원리를 신봉하며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뭔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로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지요.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님은 성공보다 은혜 주시는 것을 더욱 바라고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대신하여 심부름을 하는 천사가 빌립을 광야길로 인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헬라어(고대 그리스어)로 ‘앙겔로스’라고 말하는데요. 영적인 존재로서의 ‘천사’라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단순히 심부름꾼을 의미하는 ‘사자’로도 번역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은 꼭 어떤 환상을 보았거나, 영적인 감동을 느끼고서만 광야길로 나아간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천사를 말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굳이 성령이나 주님의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천사, 혹은 사자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가 어떤 구체적인 실체를 실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유도 포함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육신의 어떤 질병이 있었다고 하지요. 바울은 이에 대하여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7)
이처럼 사자, 혹은 천사는 영적인 존재를 포함해서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존재에 대하여도 비유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 주님의 천사는 빌립에게 말하기를 광야길(일본어로는 寂しい道 한적한 길)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전도할 대상자가 없는... 광야로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존재였든, 그렇지 않고 영적인 존재였든... 중요한 것은 빌립은 그 음성(혹은 그 상황)을 주님의 명령으로 알아듣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전도할 대상자가 있을지 없을지를 자신이 판단하지 않고 주님이 열어 주시는 인도하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빌립의 순종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이라면 흔쾌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광야까지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명령에 불순종할 수도 있지요. 우리는 그런 불순종의 자유까지 주어진 존재이니까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연스레 따르게 되는 본능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님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본능만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크리스천이며 신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자율적인 사랑과 믿음을 하나의 우화로 설명하였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여인을 사랑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였습니다. 물론 왕의 신분을 이용해 권력을 사유화하여 그녀를 억지로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임금은 그 자신의 존재 그대로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왕으로서 그녀 앞에 나타나면 사랑하는 사람이 선택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 그는 평민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왕위를 내려놓고 초라한 외투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변장을 한 것이 아니라, 신분을 아주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철학자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흔쾌히 인간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어떤 현실적인 보상, 혹은 인과응보의 결과, 또는 기적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곧 진정한 자유이며, 참된 사랑이고,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부활하신 것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9)
눈으로 나타나는 어떤 결과와 성과를 보고서 믿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본이 되는 믿음, 능력이 있는 믿음은 볼 수 없는 소망을 붙들고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4-25)
빌립은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곳을 향해 자원하여 나아갔습니다. 어떤 성과나 인과관계를 따져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동행하시는 길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원하여 나아간 것이지요. 빌립이 스스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익이나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사건들, 부조리한 일들을 만나서 실망만 하게 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장밋빛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풀려나가고, 모든 사람이 만족하며 사는 유토피아도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눈에 직접 보이지 않으시지만 분명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부활하셔서 우리와 지금도 동행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능동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빌립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이어지는 길로 갔을 때 사실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마치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던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관리하는 고위급 관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마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마침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성경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역사적인 고난의 과정으로 인해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 옛날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로마제국 시절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하게 됩니다. 소위 70인역 헬라어 성경인데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디오피아 고관이 읽던 성경은 바로 그 70인역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고관도 당시에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접하고,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는 열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하나님을 알기 위해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까지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오늘날처럼 수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 정도로 재력이 있고, 당시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읽을 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유대교에 대한 신앙을 갖고, 당시에는 쉽지 않은 여행을 하며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까지 읽을 정도로 열심을 내었던 그도 유대교의 교리에 따라서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율법을 지켜야 했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더구나 홍수 시대에 홍수가 끝나고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자고 있던 노아의 허물과 치부를 보고 비웃다가 저주받은 함의 자손인 구스 땅에 속한 에디오피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다만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성전을 방문하고 가던 길에 이사야서를 읽고 있던 그에게 우연히 빌립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빌립과 에디오피아 고관의 우연한 만남은 오직 하나님의 각별하신 계획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 필연적인 만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리적으로 빌립이 전도하고 있던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디오피아의 고관과 빌립이 만난 광야 길은 예루살렘의 남쪽에 위치해 있지요. 게다가 빌립은 걸어서 갔고, 고관은 마차를 타고 갔지요. 시간 상으로 빌립이 먼저 주님의 천사가 말하는 것에 순종하여 광야길을 향해 떠났고, 고관은 그 며칠 후에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고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은 갖고 있었지만,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의 한계를 경험하던 고관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빌립에게 광야길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고관은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질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답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한국이 처음으로 미국과 접촉했던 1800년대 말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조선은 미국의 대사를 맞아들이고, 그 답례로 민영익이라는 대신을 대표로 중앙관리들을 미국에 보내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게 합니다. 그 일행이 배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서부 해안에 도착해서 동부로 가는 기차를 탑니다.
그 기차 여행 중에 볼티모어라는 곳에서 미국인 감리교 목사인 가우처 박사와 만나게 됩니다. 가우처 박사는 그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 관리들의 나라인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됩니다. 또 조선의 관리들은 자신들에게 친절한 가우처 박사에게 조선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가우처는 사재를 들여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낼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당시 30여년 일찍 미국을 통해 개방을 하여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던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목사님께 편지를 보냅니다. 가우처의 편지를 받은 매클레이 선교사는 마침 김옥균이라는 젊은 조선인 관리와 인연이 있었습니다. 매클레이 선교사는 김옥균을 통하여 왕(고종)을 만나서 교육과 의료선교를 위한 허가를 받아냅니다.
한편, 이에 앞서 조선에서는 근대적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한 사절단을 일본에 보냅니다. 이 사절단에 지인이 있었던 이수정이라는 젊은 관료는 일본에 건너가 직접 선진문물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오게 되지요.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신 학문인 서양식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인 농학자 츠다 센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그와 면담을 하던 중 족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족자에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츠다 센은 일본 감리교회의 신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진 농업기술을 계기로 복음을 나누는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수정 선생은 몇 달 뒤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 세례는 조선인의 이름으로 받은 공식적인 최초의 세례입니다.
이수정 선생은 세례 교인이 된 후, 일보인 크리스천들과 교류합니다. 그리고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미국 선교부에 편지합니다. 그리고, 일본어 성경과 한문 성경을 보면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가우처와 매클레이, 그리고 김옥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선교사(아펜젤러, 스크랜턴, 언더우드)를 한국에 보내주십니다. 그들이 조선에 들어갈 때 그들은 이미 한글로 번역되어 인쇄된 마가복음 성경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연과 만남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은 바로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인간의 역사에 쌓여 가는 벽돌 한 장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은 자신의 일상 가운데 자신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본은 하나님께서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사용하신 나라이며 그 백성들이 사는 곳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적지만, 일본에서 먼저 믿던 믿음의 선배들이 이웃 나라 조선의 청년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순종하였던 역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이 일본 땅에 발을 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음을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소한 인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인연과 만남은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그 이유는 그 만남과 인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를 소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생각나고 떠오르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만일 어떤 일상에서든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해 생각나게 하시는 것,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 생각날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나타난 열매를 통해서 주님께서 생각나게 하신 것임을 아는 것 등등...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복음으로 살고 싶어하는 생각을 떠오르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생각에 순종하여 주님께 쓰임 받는 귀한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무리하면서 오늘의 본문 중에 다시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방인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방인의 구원은 곧 우리와도 직접 연결되어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합당한 인과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은혜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유대인 제자였던 빌립과 이방인이며 흑인이었던 에디오피아 여왕의 신하인 내시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교류도 교제도 없고, 이방인이 세례를 받고 기뻐하며 갔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 후의 기독교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던, 조선의 고위급 관리였던 민영익과 그 일행, 열차에서 그들을 만난 가우처 박사, 가우처 박사의 편지를 받고 조선의 왕을 만나러 온 매클레이 선교사, 그를 왕에게 소개해 준 김옥균이라는 젊은 청년 정치가, 일본인으로 감리교인이었던 츠다 센이라는 농학자, 그리고 그를 통해 복음을 들었던 이수정... 이들의 만남과 일상과 삶은 곧 역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믿고 예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인생이 곧 하나님 나라의 역사입니다. 비록 소수의 모임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대단하지도 않은 것 같이 보이지만, 저와 여러분의 시간이 곧 역사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할 때 우리가 만나는 일상생활의 우연들이 비로소 필연이라는 은혜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많은 경우 저와 여러분의 일상과 삶의 작은 조각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완성될 것을 믿는 소망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채워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전에도 한 번 소개한 시구가 떠오릅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인데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동입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그 한 인생들을 품고 서로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일련의 평가들도 인생에서는 퍽이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연을 필연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기에 우리의 일상은 역사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마음에 순종하여 단 하루를 살더라도 역사적인 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나의 삶에 임재하고 계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로만 우리의 영과 육은 회복될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으로 더욱 채워지는 일상을 살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시길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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