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이밍 / 솔향
“너희 둘이 만나면 되겠다. ㄱㅅ도 전화 왔더라. 외박 나왔다고.” 스물일곱의 어느 금요일 저녁. 여수에 있는 친구에게 심심하다고 전화한 참이었다.
다음날, 급작스럽게 서울에서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를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ㄱㅅ과는 대학 4년간 같은 과 친구로 지냈다. 졸업하고 그는 군대에 가고, 나는 경기도에서 근무하며 정신없이 지내느라 서로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제대할 때가 가까워졌다.
영화 보고, 점심 먹고, 실내 야구장에도 갔다. 갑자기 눈을 못 마주치고, 수줍어하는 게 영 웃기다. 내가 알던 시원시원한 상남자, 그 친구 맞나? 군대도 아닌데 서울 거리 한복판에서 군기가 바짝 들어 부자연스럽게 팔을 높이 흔들며 걷는 걸 보니 쿡쿡 웃음이 났다. 어색하다, 어색해. 하긴 대학 때부터 알오티씨(ROTC) 제복을 입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알고 보니, 그날 그는 사랑에 빠졌단다. 지하철역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자기를 올려다보는데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 같았다나? 푸하하하.
허우대는 뭐 봐줄 만하다. 그래도 남자가 고백 좀 했다고 내가 그리 쉽게 홀랑 넘어갈 여자는 아니었다. 종교나 거리 문제 등 걸리는 것이 많았다.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 만나다 헤어지는 꼴도 봤다. 안 돼. 일단 튕겼다. 나 무지하게 눈 높은 여자거든. 그래도 그는 감성이 그득한 시와 그리움이 철철 흐르는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아니, 술만 잘 마시는 줄 알았더니, 얘가 이렇게 달달했다고? 제대하고 발령 나서도 지치지 않고 마음을 전했다. 주말마다 군포까지 먼 거리를 꽃을 안고 달려왔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여수에서부터 들고 왔단다. 어느날, 계속 밀어내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다부진 어깨가 떨렸다. 아! 눈물에 약한 건 남자만이 아니다.
그만큼 진심으로 나를 아껴 줄 사람은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잡자. 교회도 다니고 담배도 끊기로 약속했다. "널 사랑한 이 기억만으로도 난 평생을 살 수 있어." 드디어 허락하자 그가 말했다. 크! 감동적이다. 그는 말 한 마디로 면죄부 몇 장은 얻었다. 본인은 그런 걸 받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진즉 다 떨어졌으니 이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사귀는 2년 동안 단 한 번도 싸우거나 서로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결혼할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 우리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식상한 말이 있다. 사실 대학 다니면서도 남자다운 매력이 있는 그가 신경 쓰였다. 그도 내가 좋았단다. 그때 마음을 표현하고 사귀었다면 지금 서로의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영화관 문 앞에서 다시 만난 그 즈음, 27년 동안 모태 솔로의 길을 걸었던 나는 연애 두려움증에서 벗어나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중이었고, 그는 여자 친구 없이 3년을 군대에 박혀 있었다. 어떤 여자라도 예뻐 보였을 수 있다. 적당한 때에 운명적으로 그에게 콩깍지가 씌는 바람에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 볼 줄 알았던 나도 열렬한 로맨스를 맛볼 수 있었다. 모든 타이밍은 결과로 말한다. 둘 다 여수 친구에게 전화한 타이밍이 기막혔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마무리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막상 결혼하고 나니 눈에 안 띄던 서로의 단점이 보였다. 연애하면서 깨만 볶은 게 아쉬웠는지 신혼에 한꺼번에 다 싸웠다. 연애는 환상이고 결혼은 생활이었다. 무조건 위하고, 감싸고, 져 줄 걸 기대했는데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벽에 가로막힌 듯 답답하기도, 배신감에 떨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기르면서 모난 귀퉁이를 둥글게 갈아 서로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 나갔다. 사랑하고 의지하고 때론 서운해하면서 현재의 평안에 이르렀다. 뭐 지금도 가끔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자기는 내가 왜 좋아?" "쉽지 않아서." "엥?" "여전히 튕겨서 늘 새롭네. 크크." 이런 재치 있고 귀여운 남자 같으니라고. 그래, 이만하면 22년 넘게 심심치 않게 잘 지지고 볶았다. 가만. 그렇다고 ‘타이밍’과 ‘운’을 동일시해도 되는지는 알쏭달쏭하다. 이 남자를 만난 타이밍만큼 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해 주시길. 돌리기엔 이미 늦었으니까.
첫댓글 하하하! 재밌습니다. 건강한 조정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주 건강해 보입니다.
한수 가르쳐 주세요.
쉽지 않은 여자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데 진짜 엄청나네요.
사귀면서 싸운 적이 없다니.
나는 백 번쯤 사운 것 같은데. ㅋㅋㅋ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황선영 밀고 당기고를 잘 해야죠. 20년 넘었어도.
그렇죠? 삐걱대지 않으면 수상한 거죠?
아직도 신혼이네요. 달달합니다.
신혼은 아니지만, 노력은 하고 싶습니다. 하하.
서로 어울리는 두 분이 잘 만난 것 같습니다. 타이밍도 좋고 운도 따랐네요. 솔향 선생님도 매력적이지만 글 속에 가끔 등장하는 남편분도 아주 멋지신 것 같았거든요. 쭈욱 행복하게 사시길요.
고맙습니다. 배려하고, 참고, 손해 보고, 그래야죠.
금슬 좋은 부부인 줄은 알았지만, 사귈 때도 서로 좋아서 싸우지도 않고... 뿅 갔군요. 부러워요.
사귈 때만요. 배신감.
허우대는 봐줄 만하다.
그건 남편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던데요.
아주 멋지고 근사한 분이셨어요. 하하하.
(우리 송 샘, 약오르겠다.)
그거 제가 봐 줄 만하게 만든 거예요. 하하하.
자식 칭찬 들은 것처럼 좋습니다. 약 오르지 않아요.
친구가 남편이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흔한 건 아니더라구요.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었네요. 이런 건 인연. 하하.
통통 튀는 젊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글이 너무 가볍네요. 사람이 가벼워 그런가.
이쁜 꽃이 튼실한 열매까지 맺었다는 이야기가 될 만하겠어요. 유머있고 현명한 두 분의 성품이 그려지는 향기가 그윽한 글 잘 읽었어요..
선생님은 댓글도 모두 한 편의 시로 쓰시네요. 선생님 댓글만 쭉 모아서 글로 내도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