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와 사의재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1801년(40세) 11월, 정약용은 머나먼 바닷가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다.
강진 사람들은 유배된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그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은 다행스럽게도 정 많은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철저히 홀로된 정약용을 보고 측은히 여긴 주막집 동문매반가의 노모가 거처할 방 한 칸을 내준 것이다.
이곳이 강진 읍내 동문 밖 샘 거리에 있었던 흙으로 지은 토담집으로 정약용이 4년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는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몇 날 며칠 술로 마음을 달래며 힘든 유배 생활을 시작하지만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라며
스스로 위로하며 끝내 붓을 든다.
강진읍이 와우형국이고 동문 마을에는 소의 왼쪽 눈을 뜻하는 샘이 있다.
강진읍성 사대문의 하나인 동문이 있어 마을 지명을 동문(동문안)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문샘은 마을 안에 있는 샘이다.
마을 뒷산 우두봉을 황소의 형국이라 하여 동쪽에는 동문정이 있고
서쪽에는 서문정이 위치하고 있어 이를 황소의 왼눈과 오른눈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동문샘은 마을 주민이 상을 당하거나 어린아이가 출생하였을 때
반드시 물 색깔이 하늘색으로 변한 후 다시 맑은 물로 된다고 한다.
42세 되던 해인 1803년 정약용은 자신이 주모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4년간 머문 주막집 조그마한 방 한 칸을 공부방으로 만들어 사의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사의재(四宜齋)란 생각이 맑아야 하고, 외모는 장중해야 하며, 언어는 과묵하고,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용모·언어·행동의 네 가지를 의(義)로써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정약용의 생활철학이 담겨있다
이것은 자신의 수양방법인 동시에 유배 생활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품격을 잃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주위에서 지켜본 정약용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조선의 천재 실학자답게 학문 또한 깊었다.
정약용의 훌륭함에 매료된 고을 아전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데리고 와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정약용은 자신의 철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유배 생활의 괴로움과 아픔을 이겨나간다.
조선 개혁 정신의 상징이자 실학의 정점이었던 고독한 철학자 정약용의 다산 실학의 출발은
사의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