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오는 시간 / 정희연
“이모가 죽고도 세월은 흘렀다. 이모를 죽인 겨울이 지나고 봄은 무르익어 사방에 꽃향기가 난만했다. 겨울이 있어 봄도 있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글 공부를 같이한 이○○ 선생님이 양귀자 소설 《모순》의 한 대목을 옮겼다. 생각에 잠긴다. 죽음과 삶이 그러하듯, 건설 현장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짜증은 무엇으로 연결될까.
건설사업관리의 준공은 공사를 마친 단계를 넘어, 그간 쌓아온 모든 기술적 가치를 전수하는 과정까지다. 따라서 최종 설계 변경이 반영된 준공도면, 정산의 근거가 되는 준공 내역서와 수량 산출서, 생생한 기록인 사진첩과 비디오 자료, 품질시험 성적서와 검측 서류 등 시설물의 이력을 증명하는 방대한 행정 서류를 체계적으로 갖추어 넘겨줘야 한다. 동시에 시설물의 기능을 보존하고 안전을 높이는 유지관리 지침서와 주요 자재 및 업체 연락처, 실무자 교육 자료, 복잡한 기계·전기·통신 계통도를 명확히 전달하여 운영의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사용승인서와 각종 안전검사 필증, 책임 한계를 명시한 하자보수 보증서 같은 법적 근거물을 빠짐없이 챙기는 것도 기본이다. 현장의 모든 요소를 세심하게 정리해 인계할 때 공사는 끝이 난다.
공공공사의 문서 이관은 만만치 않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엄격한 기준을 지켜야 하는 행정적 완결 과정이기 때문이다. 실무부서로부터 관리번호를 받아 문서 목록표, 화일철, 문서 보관 상자를 규격에 맞게 준비하는 일부터가 그 시작이다. 개별 문건을 사안별로 분류해 3cm 이내의 두께로 묶고, 문서 하단에 쪽 번호를 매겨 자료의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 그 화일철 정면에 생산 연도, 문서명 등을 기록하여 이관 문서 상자에 담는다. 수년간 쌓인 서류를 정리하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시공사의 준공 처리가 끝나면 화려했던 현장의 열기는 가라앉고, 동료들은 하나둘 짐을 싸서 떠난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에게는 시설물을 각각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더 세밀하고 까다로운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 공사를 완료 했더라도 결과물은 그 기능을 충분히 갖춰, 관리 주체에 따라 도로, 가로등, 상수도, 조경수 등 전문 부서로 세분되어 이첩된다. 우리는 현장 사무실을 철거한 후 마을 회관을 빌려, 한 달 동안 방대한 서류 뭉치를 정리했다.
수년간 켜켜이 쌓인 서류를 규정에 맞게 다시 빚어내는 일은 그야말로 종이와의 전쟁이다. 마을 회관에서 문서 담당자와 사무 직원만 남아 감당해야 하는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순서별로 파일철을 만들고 쪽 번호를 부여하고 목록표에 맞게 정리하는 일은 마치 출구 없는 미로와 같았다. 시간은 흐르는데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방대한 종이 더미와 씨름하고 법적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에 짜증이 극에 달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고개를 든다. 더 깊은 인내가 필요한 때다.
그렇게 몇 날을 보내고 휘몰아치던 짜증이 서서히 잦아들고 서류가 모양새를 갖추어 갈 때 건설사업관리자로서의 내 소임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시린 겨울이 지나야 눈부신 봄이 당도하듯, 극에 달했던 감정의 소요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켜켜이 쌓인 기록이 숭고한 유물처럼 남았다. “짜증은 기쁨과 맞닿아 있는 것일까?” 지독한 시간을 보낸 뒤 기록의 결실이 남았다. 둘은 어쩌면 삶과 죽음처럼 떼어낼 수 없는 한통속일지도 모른다. 마을 회관의 낡은 책상 위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진다. 거실 건너편에는 정성을 다해 묶어낸 종이 뭉치가 방 하나를 가득 메운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된 듯 하다.
첫댓글 일이 다 끝났나요? 고생 많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배를 타지 않고도 바다를 보면서 예쁜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되네요.
위 글은 장흥 정남진대교를 마무리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여수)로 와서는 습관처럼 처음부터 하는 일이 그것을 준비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였는지 울산에서는 짜증 없이 어렵지 않게 잘 끝냈습니다.
이상하다 했어요. 아직 개도까지 다리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은 못 들어서요. 정남진대교 이야기라니까 안심이 됩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사흘동안 감사입니다. 선생님은 그리 철저히 준비해 두셨으니 별일없이 넘어갔지요?
개미들이 먹이를 옮기는 듯한 모습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모습이 조금씩 변하는 걸 봅니다.
앞으로 3년 가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리 공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네요. 고생도 많고 보람도 크겠습니다. 훌륭하십니다.
현장의 끝자락에서 권한보다는 책임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오지만,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에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