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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44
3월24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UORwg88yz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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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벳자타 연못가의 한 중병환우가 기적처럼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감동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을 때, 스스로 일어나지조차 못해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뇌졸중이나 중풍이었겠죠. 점점 병이 깊어가면서 사지가 마비됨으로 인해 나중에는 한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나 치료약이 전무했던 당시에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형선고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 점점 깊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디다 보니 어언 서른여덟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 동안 옆에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은 다들 먼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명이 다하는 멀지 않은 어느 순간 세상 뜨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 효과가 좋기로 유명한 베짜타 연못가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루하루 세월을 죽여가며 그렇게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목숨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외치십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무의미한 죽음의 삶에서 의미로 충만한 생명의 삶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복음 5장 8절)
어쩌면 천둥처럼, 그리고 감미로운 산들바람처럼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경직되고 마비된 살과 뼈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는 부드럽게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세월 의지처였던 들것을 자신의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자기 발로 걸어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희망이나 기약도 없이 누워있었던 세월이 38년이었습니다. 당시 유아사망을 빼고 나면 대체로 50세 정도가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니 그는 평생토록 들것 위에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툴툴 털고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옛날 벳자타 연못가의 환우처럼 점점 기력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 교회, 점점의 사지에 힘이 빠지고 마비증세가 두드러지는 오늘 우리 수도회의 모습, 그리고 비슷한 처지인 나 자신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라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아직 거짓말처럼,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며시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벳자타 연못가의 환우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굳은 신앙입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나를 치유시켜주시리라고 믿는 강렬한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치유를 받고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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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죄를 이기고 싶은 사람에게만 세례가 유효하다>
오늘 벳자타 못에서 38년 동안 누워 지낸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7개의 표징 중 세 번째입니다. 요한복음에서의 표징은 믿음을 주는 사건이나 사물을 말합니다.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벌어졌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중개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믿음으로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표징은 어제 보았는데 그리스도께 무언가 바라는 이가 표징을 얻게 되고 그렇게 자신과 가족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세 번째 표징의 주제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믿음을 선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벳자타는 ‘올리브의 집’이란 뜻이 있습니다. 일부 수사본에서 베테스다로 되어있는데 그 뜻은 ‘은총의 집’입니다. 성경에서 올리브와 같은 ‘기름’은 ‘은총’, 혹은 ‘성령’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은총으로 새로 태어난 한 우리에 든 양들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벳자타가 “양 문” 옆에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누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가?’란 주제로 말하려고 한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깁니다.
벳자타 못은 은총이 내리는 장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못에 천사들이 내려오면 물이 출렁이는데 그때 가장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치유된다고 합니다. 38년이나 그곳에서 치유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십니다. 38년이나 그곳에서 있었다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분명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라 물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명하십니다. 들것을 깔고 있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이젠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결국 치유를 받고 예수님을 찾아 알고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숫자 ‘40’은 죄와 싸우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그랬고, 예수님도 40일간 세속-육신-마귀와 싸워 이기셨습니다. 38에 ‘은총과 진리’가 더해지면 40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실 것인지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란 자기 죄를 이길 수 있기만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겨서 은총과 진리면 곧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건강해지고 싶은 사람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따른 각국의 대응방식’이라고 해서 카톡을 통해 본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웃기 위해 가볍게 쓴 것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내용 같습니다.
1. 중국: 가둬 놓고 조용히 죽게 둔다. 인생은 어차피 일장춘몽, 밤낮없이 집에서 중국몽을 꾸다 보면 이생이 저 생인지, 저 생이 이생인지 헷갈리는 호접몽(중국의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와 외물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2. 일본: 남몰래 조용히 죽길 바란다. 너 하나 죽어 올림픽을 개최하는 가미카제가 되는 것이 일생일대의 영광이라고 느끼게 하여 사무라이 정신을 계승한다.
3. 영국: 죽음조차 개인의 자유, 죽든 말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며 국가가 관여할 일은 별로 없다.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없는 삶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마그나카르타(1215년 영국 귀족들이 국왕 존의 잘못된 정치에 분노하여,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왕에게 강요하여 받은 법률 문서)의 전통임을 재확인한다.
4. 미국: 죽음을 각오하고 람보처럼 바이러스와 교전하게 한다. 총으로 세운 나라 총으로 지키려고 총포상으로 몰려가 총과 실탄을 싹쓸이한다.
5. 이탈리아: 죽음도 예술처럼 맞이하게 한다. 발코니에 모여 손뼉 치고 노래하며 베토벤의 장엄미사처럼 사를 찬미한다.
6. 대만: 봉쇄시키고 배급한다. 가택연금 수준의 자가격리조치를 내리고 어기면 4천만 원의 벌금 폭탄을 투척하고 마스크는 배급제로 해서 양안(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 간의 관계를 일컬어 ‘양안 관계(两岸关系)라 한다)이 하나의 중국임을 입증한다.
7. 북한: 죽음도 우리끼리 주체적으로 맞이하게 한다. 국경을 철통같이 봉쇄하고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방역투쟁을 가열차게 벌인다.
8. 한국: 조용히 죽고 싶어도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 코로나를 생화학전으로 규정하고 첨단 진단키트와 방호복으로 무장한 유능한 어벤저스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들은 CSI처럼 현장과 동선을 탐문하고, CIA처럼 GPS 위치를 추적하고, 38기동대처럼 구매 내역까지 조회해서 조용히 숨어서 죽겠다는 신천지 환자들까지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많이 아픈 자는 음압병실로 데려가서 정성껏 무료로 치료하고, 조금 아픈 자는 레저시설 같은 곳으로 보내 돈까지 주면서 쉬게 한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 국경을 개방해서 타국 확진자들이 한국 오면 한국 돈으로 무료치료해주는 친절도 베푼다. 어벤져스 의료진들의 헌신으로 여전히 국민들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박탈된 일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코로나로 죽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처음부터 바이러스가 우리 안에 기생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참 바이러스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입니다. 38년 동안 자신의 죄의 자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했던 오늘 치유 받은 병자처럼 솔직하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드러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지가 있는 사람이나 공동체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깨끗하여지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남을 위한 세례는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만 붓는다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이 성체를 통해 자신 안에 살게 된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 안의 죄의 욕구가 통제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자신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사람에게만 성사가 유효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377)
자신으로부터의 참 자유를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 그래서 평생을 의미하는 38년 동안 그것만을 희망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셔서 죄를 이길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소원인 사람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게 해 주는 표징을 볼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구, 이웃을 심판하는 마음, 육체를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이 큽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싶습니까? 그러면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와 함께하는 유튜브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5qrSnMLRr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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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16 : 낫기를 원하느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대단하다. 38년이나 병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곳에 누워 기다렸다. 그는 인내심이 없었다면 자포자기 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힘에 눌리고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하고 물으신다.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해야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져주면서,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라고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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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복음서는 자주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묘사합니다. 기존에 있었던 관습들과 대치되는 예수님의 행동은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율법 조항은 육백여 개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안식일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전에 이미 앓고 있었던 질병은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날은 안식일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셨다고 비난하고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으십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점점 커지고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십니다.
지금도 아픈 사람들은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막연한 희망을 둡니다. 비록 그것이 비과학적이라 하여도 절박한 심정이 먼저입니다. 당시의 병자들에게 벳자타 못에 들어가는 것은 이런 절박함 가운데 오는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그 희망은 예수님께 옮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였던 전통적인 관습이 아닌, 말씀을 통하여 병자를 치유하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막연한 희망이 아닌 확실한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며, 실제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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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2-9)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단순한 이야기인데, 뒤에 이어지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논란과 그 병자가 예수님을 밀고했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합해서 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셔도, 그 은총을 받은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가 당신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믿음이 없었지만,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도 그에게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 이유는 순전히 그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다른 병자들은 가엾게 여기시지 않은 것일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래도 그 병자는 그 자리에 있는 많은 병자들과 장애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딱하고 불쌍하고, 가장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은 다른 병자들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딱하고, 가장 급한 병자를 우선적으로 고쳐 주신 것 같습니다.
병자들이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었던 것은 건강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겉으로만 보면 ‘하나마나 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내가 너의 병을 고쳐 주기를 원하느냐?”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못 속에 넣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것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출렁거리게 하면,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실제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또 실제로 병자들이 그렇게 해서 병을 고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라는 ‘말씀만으로’ 그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병자와 주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감사드렸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고, 기뻐했다는 말도 없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도 없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상황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그런 반응들을 일부러 생략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벳자타 못 옆의 주랑에 누워 있는 병자들의 모습과 그곳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못 속에 들어가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것이고, 물이 출렁거리기를 기다리면서 못만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출렁거리면 남보다 먼저 들어가려고 서로 다투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려는 마음은 하나도 없는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그 병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남들보다 먼저 못 속에 들어갈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미움과 원망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가족들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을까? 아니면 구걸을 했을까?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그렇게 서른여덟 해나 그곳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병을 앓던 사람이 건강해졌는데, 그것을 축하하는 사람도 없고, 함께 기뻐하는 사람도 없고, 안식일 규정을 안 지킨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만 있습니다.(요한 5,10) 그런데 그 병자는 자기가 건강해진 것에 대한 기쁨보다 안식일 규정 위반죄로 받을지도 모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게 된 것은 ‘병을 고쳐 준 그분’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그분’으로 되어 있지만, 그 사람들 말에는 존댓말이 없고, 실제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 사람’입니다.) 그 병자는 나중에 ‘그분’이(또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바로 가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요한 5,15) 그것은 분명히 ‘배은망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너의 몸은 건강해졌다. 이제부터는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병에 걸려서 서른여덟 해나 누워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는 말씀 때문에 그가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단순하게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라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병자가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은 것과 ‘치유의 은혜’를 주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큰 은총을 받았음에도 은총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이기적인 삶’이 바뀌지 않은 그 병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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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한 가정주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타리나,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니, 나와 함께 천국에 가지 않으련?”이라고. 그랬더니 그 주부는 “예 주님, 어서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가고 싶어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타리나 주부가 막 주님의 손을 잡으로 할 때, 주님께서 가타리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타리나야,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에, 집안을 먼저 정리해 놓고 가면 좋겠지?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을 듯싶은데”
그래서 가타리나 자매님은 3일 동안 집안의 온 구석구석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다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다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타리나야, 천국에 가기 전에, 그 동안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사랑을 다 쏟아주지 않을래? 그래야, 가타리나가 천국에 가도, 아이들이 엄마의 사랑을 깊이 가슴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가타리나 자매는 또 다시 3일 동안 아이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랑을 나눠줬습니다. 다시 3일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가타리나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타리나야, 천국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잘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남편도 우리 가타리나가 천국에 간 후에 ‘참 좋은 아내였었는데’라고 생각할 텐데...”
그래서 가타리나 자매님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편에게 최선을 다해서 아내의 사랑을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3일이 지나자 가타리나 자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제 나와 함께 천국으로 가자”라고. 그랬더니 가타리나 자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몰랐어요. 제 남편이 있고, 제 아이들이 있고,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 곳에서 조금 더 지내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이제야 우리 가타리나가 철이 들었구나. 남편이 밉다던 네 마음, 아이들이 귀찮다는 네 마음을 내가 알고, 너에게 왔었던 거란다. 이제는 정말 가정이라는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보렴. 나는 언제나 너와 너희 가족과 함께 있었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진정 38년을 앓아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그러나 실상 그 주위의 모든 이들은 그 병자가 요를 들고, 일어서자 안식일에 요를 들고 걸어서는 안된다고 말을 하며, 그를 다시 한 번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진정 우리는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잊는 것처럼, 참된 천국에 살면서도 자신이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의미로써,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미카엘 성당 신자 여러분, 때때로 남편이 밉고, 아이들이 귀찮고, 며느리가 밉고, 시어머니가 짜증나더라도 그들에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사랑을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사람들이기에 그러합니다.
“나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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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민성기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1990년이니까 30년 전입니다. 우리는 사제품을 앞둔 부제반이었습니다. 설교학 수업에서 강론을 발표하였습니다. 기준에 대한 강론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 했습니다. 땅에서부터 기준을 잡으면 저는 키가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부터 기준을 잡으면 저는 키가 큰 편입니다.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을 때입니다. 엄하게 단속하고, 교칙에 따라 벌을 주었지만 흡연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화장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화장실에서의 흡연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면서 언제든지 교장실 방문을 환영한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가지 않았지만, 초코파이가 있는 교장실은 학생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게임 중독으로 학교에 오지 않고, 오더라도 잠을 자던 학생들을 야단치지 않고, 학교에 게임 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게임에 몰두하는 집중력을 키워주었고, 학생들 중에는 컴퓨터 전문가들이 생겼고, 컴퓨터를 전공으로 대학엘 가기도 했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이 공부의 기준이 아니라, 좋아하는 과목이 공부의 기준이 되니 학생들이 학교를 좋아했고, 학교의 분위기도 좋아졌다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꽁꽁 얼어붙게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국경이 없습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습니다. 감염 대책에 대해서 평가하거나 비판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국가적인 재난에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지혜를 모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의료진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는 것입니다. 감염된 분들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가 사라지도록 모임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걱정, 공포, 두려움, 분노는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내, 나눔, 격려, 지지, 희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대부분의 교구는 미사를 중단하였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미사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성찰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박해시기에 몇 년씩 미사 참례를 할 수 없었던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분주했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책을 읽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0년은 우리 민족의 저력이 드러났던 해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38년 동안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던 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짜타’라는 연못에 몸을 담그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도 있었지만 그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건강을 회복하길 원합니까?’ 환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원하지만 아무도 저를 저 연못으로 데려가 주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연못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직접 고쳐주셨습니다. 연못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크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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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외국여행을 하면서 실감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경치도, 장엄한 성당도, 새로운 만남도 좋지만 낯선 음식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바쁜 일정으로 음식을 여유롭게 맛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행은 늘 설렘이고, 그리움이고, 고마움입니다.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에는 ‘불이문’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남과 이별도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슬픔과 기쁨도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둥근 원처럼 그렇게 돌고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좋은 일을 보면서 감사드리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아픔을 견디어내고, 마치 봄날의 따사로움을 기다리듯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루르드에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성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지에 있는 샘물을 찾고 있습니다. 샘물로 몸을 씻었던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지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샘물로 안내해주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샘물로 몸을 씻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이 샘솟는 샘물 건너편으로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물과 관련된 성서 말씀이 적혀 있는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우물, 나아만이 몸을 담갔던 물, 벳자타 연못의 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등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생명을 살리는 물, 생기와 활력을 주는 물을 보았습니다. 물은 필요하고,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순히 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말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곧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말라 버려지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아야만 영적으로 충만해 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통로입니다. 기도, 전례참여, 단체 활동 등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주님의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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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단 한 사람에게라도>
요한 5,1-16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내 손길 간절히 바라는 이 너무 많아
도무지 손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아도
두 손 슬그머니 감추지 않고
단 한 사람에게라도 손 내미는 거야
그렇게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더디더라도 쉼 없이 손 내밀다 보면
내 손길 바라는 이 모두에게
내 손길 전할 수 없다하더라도
내 손길은 누군가의 손길을 타고
서서히 마침내 모두에게 나눠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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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어나 당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시오>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사랑하는 벗이여!
더 이상 그대의 삶을 한낱 들것에 맡기지 마시오.
들것에 누워 자유를 빼앗긴 채 삶을 근근이 이어가지 마시오.
당당히 들것을 박차고 일어나시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선물하신 강건한 두 발로 힘차게 걸으시오.
처음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오.
하지만 힘을 내시오한 걸음 한 걸음 쉼 없이 내딛으시오
그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걸으시리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시오.
다만 지금까지 그대가 의지해온 들것은 들고 다니시오.
그대를 일으키신 하느님께 대한, 그대와 함께 걸으시는 하느님께 대한,
그대를 업고 쉼 없이 걸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오리니.
지난 서른여덟 해 동안 그대의 안식처가 되어줌으로써 오히려 자유인 그대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들것을 바라보며 다시금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자유와 해방의 삶을 향한
열정을 불살라야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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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얼마 전 어머니께서 이사를 하신 관계로 집 축성을 해드리기 위해 본가에 방문했습니다. 축성을 하는 만큼 양복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었는데 어머니께서 왜 아직도 여름양복을 입고 있냐며 질색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초가울, 어머니께서 겨울 새 양복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받고는 무심코 장 속에 넣어두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름 양복만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 양복을 받아서 바로 꺼내 입었으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겨울이 다 지나가는 동안 여름 양복을 입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또 한숨을 쉬시겠지만) 아직까지도 겨울 양복을 꺼내놓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항상 입어왔던 옷을 걸치는 것이 편하고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무엇이든 전부터 해오던 방식을 고집합니다.
음식점에 가면 줄곧 같은 메뉴를 시키며 바지가 조금 찢어져도 입어왔던 것이라면 그냥 입고 다닙니다. 다른 새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몸에 익숙한 것에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앞서 말씀드린 양복의 경우처럼 정작 필요할 때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유학 시절부터 쓰던 작은 노트북을 최근에야 새 컴퓨터로 바꾸었는데, 속도가 빠르고 버벅거리지 않아 작업을 하는데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진작에 바꿀걸 괜히 고생하면서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절약 정신이 뛰어나거나 검소해서 길들여진 습관이 아닙니다. 그저 삶의 방식을 바꾸는데 다소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다들 한 번쯤은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기가 해왔던 방식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변화를 갖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러한 예는 나무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한 곳에 있었던 나무는 그만큼 옮겨심기 힘든 법입니다. 긴 시간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옮겨져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4배의 악력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결국 나무는 새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른여덟 해를 앓아온 병자를 고쳐주신 뒤 들것을 들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병자는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에게,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율법인데, 들것을 들고 가는 것조차 이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끝끝내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러한 행동을 했음을 트집 잡으며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전의 익숙한 삶에 매여 있는 유다인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은 모세로부터 이어져 온 율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이란 휴식을 취하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집중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 본래의 뜻, 즉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은 잊혀지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그저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 뿐입니다. 어느새 이 의무감은 편안하고 익숙한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익숙함을 자꾸만 변화시키려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율법의 의미를 일깨우려 하십니다.
만약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다인이라면 들것을 들고 가는 병자를 보고는 오히려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권위있고 두려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기엔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가 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곧 트집의 빌미가 되어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가려지게 됩니다.
어느덧 사순시기가 절반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다양한 권고와 모범을 통해 계속해서 삶의 변화를 요구 받아왔습니다. 그 안에는 주님의 애정이 있었고 따뜻한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순,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그 동안 오랫동안 입어 온 미움의 옷, 시기 질투의 옷, 게으름의 옷이 여전히 우리의 몸에 걸쳐져 있지는 않은지요. 새로운 겨울 양복을 꺼내 입으려 옷장 문을 열었다가, ‘아유, 나중에 입지 뭐’ 라며 다시 문을 닫는 저의 모습처럼, ‘사랑을 실천해야지,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야지’라는 결심을 다시 거두어버리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무가 새로운 땅으로 옮겨지는 것은 매우 많은 에너지가 들지만 거기에는 훨씬 더 따뜻한 햇빛이 있고 맑은 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새로운 땅 위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악력은 온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적응해 더욱 풍성한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인지, 아니면 초라한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바이러스로 인해 침체된 사회적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새로운 몸과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하는 새로운 옷을 걸쳐 입어야 하겠습니다.
저도 내일은 새 양복을 꺼내 입어볼까 합니다. 그런데 겨울이 이제 다 지나가버려 조금은 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저처럼 되지 마시고 어서 나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다행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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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은혜로운 벳자타 못에서...>
고운님들의 삶은 어떻습니까?우리는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을 지냅니다. 또한, 기쁠 때와 슬플 때, 잘될 때와 안 될 때, 살 때와 죽을 때를 겪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말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런 삶의 흔적들이 고운님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하느님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의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이제 무엇이든지 괜찮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장 안 좋은 절망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서른여덟 해나 앓는 병자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몸은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병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자신이 분명 그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건강해지고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계속 그 연못가에 누워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으리라.”
어찌 보면, 서른여덟 해나 된 그 병자는 벌써 절망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병자의 모든 사정과 처지를 아시고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병자가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벳자타의 물이 움직여야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영혼의 문(심령의 문)이 움직여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즉, 너의 믿음으로 내 말을 따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 병자에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병자의 믿음이 당당해져서 심령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물론 건강해진 38년 된 병자에게도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가기 전에는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건강해진 후에도 박해와 모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가 이런 비난과 모함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나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갑니다.” 이것이 당당한 믿음입니다. 이런 당당한 믿음이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의 심령의 문을 움직여서 “영적 치유, 마음의 치유, 그리고 육신의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의 은총이 있기까지 고운님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낫기를 바라는 희망보다 그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일 것입니다.
지금 저희는 코로나 19로 엄청나게 어렵고 힘든 시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한 당당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그 예수님은 절망과 상처받은 마음에 먼저 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곧 부활하셔서 오실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아멘. 사랑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코로나 19로 고생하는 모든 분과 고운님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건강한 눈, 건강한 몸과 마음, 건강한 영혼이 깃들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저 두레박 사제는 기도와 미사 중에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당당한 믿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떤 삶이 오더라도 당당한 믿음으로 “하느님,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라는 말씀과 함께 고운님들의 모든 삶을 선하게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벳자타의 못’에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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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46)
♧♧ 시편 78편 22절…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는 이스라엘 선조들이 광야에서 징계를 받은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중심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해 줍니다. 그렇기에 백성은 자신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실 분이신 하느님께 자신들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것입니다.(민수기 14장 11절. 참조) 이와 관련해서 저희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그분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우심에 의지한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서 자신의 온 삶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선조들은 그러하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하느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느님께 불평하고 반항하기만 했습니다.(탈출기 14장 11절, 15장 24절, 16장 8절. 참조)
♧♧ 시편 78편 23절…
"그러나 그분께서는 위의 구름에 명령하시고 하늘의 문들을 여시어."
* 그러나 그분께서는 위의 구름에 명령하시고...
여기서 ‘구름’은 ‘궁창’으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하크’는 드넓은 창공을 의미하는 창세기 1장 6절에 나타난 ‘라키아’와는 달리 구름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서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솨하크’나 ‘라키아’가 다 같이 땅위의 하늘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하여튼 하느님께서 ‘구름’을 명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태도가 얼만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 하늘의 문들을 여시어...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세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중 둘째 하늘은 반원형의 금속판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비, 눈, 우박, 번개 등이 보관된 창고가 있으며, 둘째 하늘의 금속판에는 문이 있어서 하느님이 그 창고의 문을 여시면 그 안에 저장된 것들이 땅에 쏟아지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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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얼마 전에 군대에 다시 입대하는 꿈을 꿨습니다. 꿈속인데도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분명히 제대했는데, 그래서 예비군과 민방위까지 모두 마쳤는데 다시 군대에 왔다는 사실이 눈물 나올 정도로 억울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참 병장이 아니라 이등병이었습니다. ‘다시 군 생활을 30개월이나 해야 해?’하면서 화를 내다가 잠에서 깼습니다. 사실 군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참 많습니다. 그 시간이 쉽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시간이었고 저를 성장시켜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군대에 가라고 하면 “죽어도 못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꿈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꿈꾼 것뿐인데 계속 걱정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다시 군대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럽다며 울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매여서 지금 충실히 살지 못하는 모습에 한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하는 걱정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또 일어날 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걱정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닐까요?
꿈에서 깨어나면 그만인 것처럼, 내 생각의 굴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나지 못한다면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해서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 가십니다. 이 벳자타 못은 사제들이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씻는 곳으로, 사람들은 이 못의 물이 출렁이면 천사가 내려온 것으로 신체의 질병이 치유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긴 시간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이 사라지는 건강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예수님 질문에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가장 근본적인 치유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일깨워주십니다. 헛된 생각의 굴레에서 깨어나라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지금까지 나를 지고 있던 육체를 들고 모든 선행 안에서 걸으라는 명령입니다. 단순히 병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내 생각의 굴레에서 깨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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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롭고 신나는 삶은 내 안에...>
인간의 몸은 여러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0~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포들은 각각 수명이 정해져 있어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매 순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사람과 같이 산다고 해도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다른 상황을 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 사람은 변하지 않아!”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또 “오늘도 똑같은 하루가 될 거야.”라면서 지겨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볼 때 분명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다른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결국, 지금 만나는 사람과 상황은 늘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겨울 수가 없는 것이며, 지루하지 않은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단정 짓는 나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 아닐까요? 늘 새롭고 신나는 삶이 내 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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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샘, 생명의 강>
-주님은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십니다-
생명의 샘, 생명의 강이 되어 살고 싶습니까? 우리 주님은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십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소원은 주님처럼 생명수 샘솟는 생명의 샘, 생명수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이 되어 사는 삶일 것입니다. 마음이 바짝 말라 있을 때는 흡사 바닥이 드러난 마른 샘같기도 하고 마른 강같기도 할 것입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살 때는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동 우물도 있었고 집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우물도 있었고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옹달샘도 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곳곳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도 많았고 물고기도 많았고 빨래터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름철 비온 후면 시냇물에서 물고기도 참 많이 잡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풍요로운 자연속에서 마음 부자로 행복하게 살았던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하염없이 바라 봐도 지루한 줄 모르는 것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 끊임없이 맑게 샘솟는 우물이요,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나 강물일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맑게 샘솟는 우물이나 맑게 흐르는 강을 보면 마음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젠 거의 볼 수 없는 샘물이요 시냇물이요 강물이 되었습니다. 이젠 두레박, 바가지, 우물, 샘터, 옹달샘 같은 단어도 죽은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맑은 샘’같은, ‘맑은 강’같은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마음 상쾌한지요! 아주 오래 전 언젠가 비온 후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꼭 비가 와야 맑은 물인가
가뭄중에도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일 수는 없나
맑게 샘솟는 우물일 수는 없나
늘 깊고 푸른 산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로 살 수는 없나
생명수로 촉촉이 적시며
임바다 향해 흐르는 맑은 강으로 살 수는 없나
언제 어디서나
밖으로는 푸른 산, 안으로는 맑은 강으로 살 수는 없나”-1998.9.21.
가능합니다. 바로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늘 생명수 맑게 샘솟는 생명의 샘이요 늘 생명수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생명수 샘솟는 ‘마음의 샘’으로, 생명수 맑게 흐르는 ‘마음의 강’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은 얼마나 은혜롭고 고무적이고 아름다운지요. 주님의 집인 성전에서 샘솟는 우물이, 또 여기서 발원發源하여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이 상징하는 바, 바로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기적들은 파스카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완전히 타락전의 에덴 낙원 동산 같고, 실낙원失樂園에서 복낙원復樂園으로 회복된 모습같습니다. 에제키엘의 복낙원의 꿈은 마침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에제키엘은 물론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복낙원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주일 복음은 태생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 못의 물로 눈이 떴는 데, 오늘 벳짜타 못가의 38년 동안 누워지내던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입니다. ‘파견된 이’의 말뜻대로 실로암 못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이셨고, ‘은총의 또는 자비의 집’이란 말뜻대로 베짜타 못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나 계시는 실로암 못이자 벳짜타 못인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대로 주님과 38년 중풍병자간의 대화는 미사중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이뤄지는 대화같습니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마음의 중풍병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 것을 들고 걸어 가거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영적 중풍병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곧장 일어나 내 ‘운명의 들 것’을 들고 힘차게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여기서 안식일을 범했다 하여 집요하게 시비를 걸고 들어오는 유다인들이 진짜 심각한 영적 중풍병자같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게 경직되고 굳어져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니 말 그대로 영적 중풍병자들입니다. 정말 인정머리 없고 싹아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인정머리 없는 놈, 싹아지(버릇) 없는 놈’이란 평가 들으면 그 인생 끝난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신 진짜 벳짜타 못인 예수님께서 치유받은 병자를 향한 강력한 권고입니다. 이 또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영과 육은,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참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영적건강에 육적건강이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날로 영육의 병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죄악이 많다는 표지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인간의 죄악으로 병들어 가는 자연의 역습이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이 주시는 징벌의 표지일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기도는 물론 공동운명체라는 자각하에 함께 어려움을 힘껏 참아 견디고, 지혜와 사랑을 나누며, 연대하는 길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용서받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때 비로소 영육의 회복이요 건강일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어, 우리 모두 당신 생명의 샘으로 살라고, 또 당신 생명의 강으로 살라고 우리 삶의 메마른 광야로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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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댔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대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쁜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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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떠한 매개체 없이 당신 뜻을 이루시는 말씀이신 분의 권능을 만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수님께서 서른여덟 해나 앓아온 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치유를 바라면서 벳자타 못가에 누워는 있지만, 출렁이는 물에 몸을 담글 첫 사람의 영예는 오랜 시간 그에게서 비켜간 터였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1)
그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적절한 도움을 못 받으니 물 근처에도 못 가 보았겠지요. 다른 이들이 치유를 받아 벳자타 주랑을 떠날 때 부러움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를 수십 년이었을 겁니다. 사람의 부재, 물의 부재는 그가 병을 계속 안고 살아야 하는 사유로 고착되어 버립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그는 누군가 물이 출렁일 때까지 그의 옆에서 기다렸다가 그를 부축해 물 속에 넣어주길 바랐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그를 돕지 않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은지 물으셨던 질문처럼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그에게 하신 이 말씀의 행간에는 "나 여기 있다"(이사 58,9)는 자상한 위안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곧, "얘야, 이제는 내가 여기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이제 너에겐 사람도 물도 필요 없단다. 내가 여기 있다" 하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세상을 되살리는 생명의 물을 이야기합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 47,9.12).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장소요 표지입니다. 성전을 근원으로 해서 흘러나오는 물은 씻기고 정화하고 키우고 살리는 주님의 생명력을 담고 있지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성전과 물이라는 매개로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의 현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현존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곧 성전이시고, 또 죄를 사하여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물이십니다. 그러니 그 병자에겐 다른 매개체가 필요 없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씀 한 마디로 인습적 절차를 뛰어넘어 그를 살리십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요한 5,10).
또 안식일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 법을 준수하느라 안식일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 일을 빌미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지요(요한 5,16). 율법이 가리키는 분이 오셨지만 눈을 감은 그들에게는 주님 현존보다 율법이라는 매개체가 여전히 편하고 익숙한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을 알고 만나고 그분께 머물고 그분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성전과 율법과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자칫 성전과 율법과 사람에 고착되면 정작 주님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던지시는 예수님 앞에서 언제까지 변화할 수 없는 이유, 거듭나기 어려운 핑게들을 대며 누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더 자유롭게 향유하려면 말씀으로 "성큼!" 들어오시는 주님을 피하지 말고, 돌리지 말고 그분 말씀에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유가 필요한 때입니다.
실로암, 벳자타의 물이 치유력이 있는 이유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그 성전이 오염되어 더이상 치유가 안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따라서 성령의 성전인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성전이신 분(예수)의 말씀을 믿고 맡기면 기쁨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 말씀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는 말씀과 어우러져 들려옵니다. 오늘 나의 들것, 나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니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걸어갑시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우리를 치유에로 초대하시는 성전이신 예수님께 달려갑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청합시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화답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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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요한 5,5)
<중풍 병자의 인내>
중풍 병자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그는 서른여닮 살이고 병에서 놓여나기를 줄곧 기대해 왔습니다. 그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그곳에 누워 기다렸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만큼 인내심이 없었다면,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의 전망만으로도 이미 실망을 안고 그곳을 떠나기에 족하지 않았을까요? 언제 물이 출렁일지 아무도 몰랐으니 그곳에 있던 병자들이 얼마나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다리저는 이들과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자들은 물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눈먼 이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주위의 소란으로 눈치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과도한 게으름을 부끄러워하고 반성합시다. 이 남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서른여덟 해가 지나도록 얻지 못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힘에 눌리고 억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 열흘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하다가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하면 이 남자처럼 꿋꿋하게 버티지 못하고 게을러집니다. 그런데도 같은 인간에게는 끝없이 기대합니다. 행여나 무엇을 얻을까 역경을 견디며 싸우고 비천한 일도 마다않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수고보다 훨씬 큰 보상을 주실 것이 확실한 우리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그만큼 정성을 쏟지 않습니다 '"설령 그분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분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무수한 축복아닙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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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당신의 뜻이라면 고통을 주십시오. 저의 큰 위안입니다.
당신의 뜻이라면 고통을 주십시오. 저의 큰 위안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 제게 보내주신 모든 고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 뜻에 맞는 일이라면 지금보다 백배 더 큰 고통을 주십시오. 빠져나갈 길 없이 저를 짓누르는 것이 당신께 기쁨이 된다면 저는 몹시 기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게 저의 가장 큰 위안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잔 속에 담긴 희망」에서
♣지혜 자체이며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 어깨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맙시다. 고통의 불은 우리라는 진흙을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달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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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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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저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당신 사랑의 표지로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의 표징, 생명의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야곱이 축복의 징표로 간직했던 엉덩이뼈의 상처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과 자비를 바라보며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가야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표시로 우리에게 남겨주신 상처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상처를 보여주시며 당신의 표지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는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과 자비를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사순을 살되, 부활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순은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닌,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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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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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구체화>
"건강해지고 싶으냐?"
소원이 뭐에요?
건강을 되찾고 싶다.
자식 취업하게 해달라.
열이 내리게 해달라.
밥을 먹을 수 있게만 되면ᆢ
통증만 없으면 ᆢ
아프면 일상이 얼마나
큰 기적이었는지, 소중함인지 압니다.
우리의 바램은 한계체험을 하면 할수록
소원의 폭이 더 작아지고 명료해지죠.
이것만 이것만 된다면!
명확히 찾고 구할때 들어주십니다.
코로나가 지속적으로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는 지금,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치유를, 이 상황을 버티는 의료진과
집콕을 해야하는 모두~ 힘냅시다!
"버티는 힘,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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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우리에게
안성맞춤의
건강을
저마다에게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봄이 있고
건강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삶을
원하십니다.
건강한 믿음과
건강한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건강한 삶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주님 사랑입니다.
본래의
우리자신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건강한 삶은
회개의 삶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건강한
삶의 기초입니다.
회개를 통해
건강한 삶의
원천이신
주님을 알게됩니다.
주님께로 돌아서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게 하는 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우리는 주님께
아픔을 건넵니다.
이 사순시기가
건강한 삶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치유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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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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