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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完走 - 불가능에 대한 무모한 도전
더위와 외국여행을 핑게로 나가지 않던 마라톤을 오랜만에 나갔다.
그리고 5시간 41분 55초로 겨우 완주를 하였다.
몸치의 완주
사전에 몸치라는 단어로 찾아보니 노력을 해도 춤이 잘 안춰지는 사람. 박자나 리듬, 율동등이 맞지 않고 어설픈 사람을 가리킨다고 되어있다.
사람마다 타고난 소질은 다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난 운동이라면 맥을 못추었다.
선천적 운동부적성에 후천적 노력마저 없었으니 여전히 운동은 나에게는 머나먼 남의 이야기였다.
내가 다닌 시골 국민학교에서는 가을에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회가 다가오면 학교는 물론이고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운동회준비에 바쁘셨다.
우선 운동장에 만국기를 달아 축제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놀거리가 없고 자주 만날 수 없는 동네주민들에게 그 시절 운동회는 1년에 한 번 농사일을 잊고
마을 주민들이 다 모이는 잔치고 축제였다.
아이들 학교에 보내놓고 바빠서 학교 한 번 찾지 않던 부모님이 오시고 맛있는 음식까지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고 어른들은 지쳤던 일을 내려놓고 간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 좋았던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로 그 날이었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걸렸고 낡은 스피커에선 역시 낡은 음악이 흘렀다.
뭐니뭐니해도 운동회 최고의 종목은 역시 달리기였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부모님에게 나의 달리기 실력을 공식적으로 뽐내 보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하얀 런닝에 가운데 하얀줄이 선명한 무명 반바지 그리고 까만 고무신이 공식 복장이었다.
3등 안에 들어야만 손목 도장과 월계수 문양이 그려진 공책을 받을 수 있었던 치열한 승부의 세계.
상이라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월계관이 찍혀진 공책.
지금까지 공부지진아로 천대받다가 오늘 하루는 보기좋게 자기의 소질과 기량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고학년은 남자와 여자가 별도로 팀을 이뤄 경주를 하지만 저학년인 경우는 남, 여 혼성으로 경기를 가진다.
즉 여자아이들과 하는 달리기 경주인 셈이다.
그런데 난 여기서도 여학생한테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운동이라면 주눅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몸이 약간 비대한 표준체중 이상이어서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 내가 마라톤 42.195키로를 완주하였다.
꼴찌에서 두 번째로
풀코스 278번째 완주이다.
“언제까지 뛸꺼예요?”
“풀코스 300회 까지만”
아마 내년쯤이면 300회 완주를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거기서 멈추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않는다.
몸치인 내가 이 정도까지 뛴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사실이지만 그 기적은 계속 만들어 질것이다. .
난 매번 완주할 때마다 죽을힘을 다해서 뛰고 피니쉬 라인을 통과할 때면 죽다가 깨어난다.
지금까지 나는 278번을 죽다가 깨어났고
이후로도 계속 죽다가 깨어날 것이다.
2. 完奏 - 깊은 산속에서 맑은 옹달샘을 만나다.
아마 노헌식 선생이 공연이 있나보다.
원장님이 들어 오셨다.
우선 벽쪽 피리자리를 본다.
빈 방석만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휴, 피 – 리”
“내가 거문고를 놓고 피리를 불어야 하는건데
칠판 글씨는 누가 쓴거요?”
칠판에는 오늘 연주할 곡목이 보통 때와 달리 眞書로 씌어져 있다.
15:05
壽延長
“오늘은 내가 어릴 때 배운데로 하겠습니다.
수연장 6장과 7장 마지막이 같으니 수연장 6장 첫째 줄에서 끝냅니다.
시간을 줄일 때는 이렇게도 합니다.”
이때 피리주자 한 명 입장해서 오늘 힘든 독주를 예고한다.
일주일 동안 묵은 악기에 김을 불어놓고 손을 풀어주고 사회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우리 소리에 맞추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다.
일명 밑도드리(尾還入)라고 하며 고려시대 중국에서 건너온 보허자의 파생곡으로 정악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곡이 바로 이 수연장이다.
그렇다고 이 곡이 쉬운 곡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한소리에서 와서 제일 먼저 국립국악원 무대에 올라간 것이 2007년 제 29회 정기연주회인데
그 때 이 곡을 연습하면서 도드리란 특징상 돌고 도는곳에서 몇 번이나 악보를 넣쳐 곤란에 빠진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곡은 우리가 가장 많이 연주하기 때문에 어떤 패턴에 얽메인 정형화된 느낌이 드는데 좀 더 세련된 소리를 만들어 위해 멋을 더하고 文理가 터질 정도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가들의 연주를 귀담아 들어보면 중요한 구절 구절마다 특유의 새김새를 넣어 어찌보면 무뚝뚝한 곡의 흐름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맛깔스런 맛을 깃들이기도 한다.
15:12
평조회상
원래 靈山會相은 靈山會相 佛菩薩이라는 불교 가사를 가진 성악곡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부처 생존당시 영산의 설법자리에 있었던 하늘에서 떨어진 꽃잎 한송이에서 以心傳心의 마음을 읽은 일화가 가사로 표현된 상령산과 중령산, 세령산, 가락덜이라는 변주곡이 추가되고 상현 도드리와 하현, 염불, 타령, 군악등이 포함되어 아홉곡의 모음곡이 되었다.
그러나 계면조보다 낮은 평조회상에서는 음역이 낮은 하현도드리는 더 낮게 변조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빠져 여덟곡이 연주되어 한 곡을 연주하는 시간을 버는 셈이 되는데 45분 가까운 연주시간에 모두 지쳐 있을 때 이 시간은 황금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영산회상 전곡 중간에 도드리를 놓고 마지막에 천년만세를 넣어 여러곡을 갖추어 연주하는 영산회상이라는 의미의 가즌회상은 전번주에 한바탕 연주한 적이 있다.
대개는 한소리 게시판을 통하여 다음 주 연주할 곡목이 미리 소개가 되는데 가즌회상이나 평조회상 전곡으로 적혀 있으면 5층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긴장의 기미가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평조회상을 연주할 때 상령산, 중령산을 끝내고 나면 중간쯤 되니 잠시 한숨 돌리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여유가 있더니 언제부터인가 장구채를 잡은 노선생의 심술보가 돋았는지 중령산끝나고 그대로 세령산으로 넘어가곤 한다.
그래서 항상 중령산 끝날 때 쯤이면 혹시나 하고 노선생의 얼굴을 훔쳐보곤 하는데 모른 채 외면하고 “세 – 령 - 산”하고 외치면 갑자기 힘이 뚝 떨어지고 여기 저기서 들릴락 말락 한숨소리와 신음소리가 세어 나온다.
평조회상의 상령산은 긴 가락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여백부분에서 멋이 넘쳐흐르고
후렴구의 반복부분에서는 숨을 멈춘다.
긴 여음을 이어 갈 때는 하나 둘 속으로 차분하게 수를 세면서 숨을 고르고 명상에 젖어들다 보면
그 여백의 공간에서 무한한 깊이와 넓이를 느낄 수 있고 이 부분을 잘 타고 넘는다면 몰입의 경지로도 넘어갈 수도 있으련만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항상 남은 악보의 시간을 가늠하기에 바쁘다.
2008년 2월 첫째 주
나는 1년 과정의 초급반을 졸업하고 중급반을 오르게 된다.
그런데 하필 중급반 승급한 첫 날 내가 속한 학회 이사회가 한양대학교에서 열렸는데 이사회가 예정보다 조금 늦게 끝나 승급 첫날부터 지각을 하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에 501호 문을 살포시 열고 들어오는 바로 그 시간에 서른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이 모여 평조회상 상령산의 후렴 부분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멋있었다.
구름에 둥둥 떠가는 느낌이 들었다.
서른명이 하나의 통일되고 조화스러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모습에 나는 반했고 그 감흥이 지금까지 내가 한소리 말석을 차지하고 눌러 앉아있는 이유가 되었다.
거문고의 박봉현 선생이 百樂之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여기에 대금꾼들과 피리잽이가 만들어내는
관악기 소리에 더해 해금낭자들의 두 줄에서 흘러 나오는 애절한 해금 가락이 곁들여지고 원장님의 채편소리를 더해 만들어 내는 소리의 여운은 5층 전체가 소리의 향으로 거득하고 사당골 일대가 우리 소리 여운으로 물든다.
오늘은 중령산 1장에서 5장으로 넘어가는데 이런 방법도 있다는 것을 내가 한소리 입문 십년만에 오늘 처음 알았다.
“상령산 1장은 아주 느리게 시작하다가 그 다음 부터는 아주 조금씩 빠르게 하다가 중령산에서는 표시가 날 정도로 빠르게 연주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령산, 가락덜이까지 하고 잠시 쉰다.
잠시 쉬는 동안 오경애 선생이 내 옆으로 와서
비장한 결심을 내비친다.
9월부터 그림을 배우기 위해 문화센터에 등록을 했단다.
내가 여행지에서 풍경을 그려내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기 때문이란다.
오경애 선생의 타고난 글 솜씨에 그림까지 겻들인다면 錦上添花가 되겠지.
내가 숨어서 쭉 해온 작업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행복 바이러스가 되어 남에게 어떤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표현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데 능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千軍萬馬를 얻은 기분이다.
15:49
상현 도드리부터 다시 시작
“거뜬 거뜬 하게 나갑니다.”
이 정도 되면 박자를 타고 리듬을 넘나 들면서 절로 흥이 돋는다.
염불에서 타령으로 넘어들면 한 박씩 따박 따박 넘어 가는 기분이 큰 산을 넘나드는 기분과 같고 딱딱 떨어지는 느낌이 선명하여 높은 산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났을 때의 개운함을 느낀다.
요사이 우리 주위의 음악이라는 것이 氣를 발산시키고 분산시키는데 비해
이런 평조회상같은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를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4-50분 정도 쉬지 않고 이 곡이나 가즌회상을 연주하고 나서는 우리 어렸을 때 방학 끝나고 개학날 방학숙제 검사를 맞은 후련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몸과 팔은 힘들지만 정신은 맑게 깨어난다.
16:05
군악 마지막 林에서 장구의 고마운 소리가 딱!하고 울린다.
잠시 쉽니다.
잠시 지나간 한주일의 안부를 물으면서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진다.
여기서 광고말씀.
11월 9일 수요일 남산국악당에서 우봉 가곡발표회 중간에 찬조 출연 요청이 왔습니다.
수제천이나 천년만세중에서 고르겠습니다.
16:18
종묘제례악(보태평/ 희문, 전폐희문)
종묘 제례악을 하면
운지도 다르고
느낌도 달라지고
분위기도 다르다.
“황부터 운지연습을 합니다.”
황 – 태 – 중 – 임 - 남 – 황- 태
다시
다시 한번 더
熙文
오늘은 노래가 곁들여 진다.
보통 때는 연주만 하다가 노래가 들어가면 느낌과 감흥이 전혀 달라진다.
박봉현 선생과 이영욱 선생의 노래에 연주가 곁들여 진다.
“아! 악보보고도 못혀?”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틀려도 되요. 틀려도 아무도 몰라요.”
“모르긴 왜 몰라? 악장만 모르지”
오경애 선생 존재의 의미가 확실하다.
“2년전에 예악당에서 했잖여?”
“그 때 가수가 지금은 강동 딴소리에 계셔”
“강동 어디쯤인데 나도 갈겨”
나한테 종묘라는 사진책이 한 권 있다.
흑백사진집인데 하얀 눈이 덮인 엄숙하고 고요한 종묘를 모습을 잘 그린 책이다.
종묘는 종(宗)의 묘(廟)이다.
왕들의 잠든 혼을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의 시작은 종묘와 사직단으로 부터였다.
종묘는 조상에게, 사직단은 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에 앞서 종묘와 사직단을 지었다.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인 유교 문화의 상징이었다.
유교는 사람이 죽은 후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된다 여겼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에 모셨다.
종묘는 왕과 왕비들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었다.
종묘제례악은 크게 定大業과 保太平 두 묶음의 곡들로 구성된다.
정대업은 왕조의 군사적인 업적, 즉 무공을 찬양하는 곡이고 보태평은 왕조의 학문적인 업적,
즉 문덕을 찬양하는 곡으로 확정된 순서는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享壽)-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등의 11곡이다.
지금도 종묘제례악은 지금은 5월 첫 일요일 종묘에서 거행을 한다.
무채색에 가까운 종묘 정전에 붉은색 제례의상을 입은 악사와 무용수들이 침묵속에 등장하고 이어 검은 색 제복을 입은 제관들이 정전에 입장하여 주악과 함께 제례가 거행된다.
신을 영접하는 迎神, 신에게 폐백을 올리는 奠幣, 초헌, 아헌, 종헌의 헌작뒤에 제기를 거둬들이고 신을 배웅하는 送神에 따라 진행되는데 큰 틀에서 보면 우리 시골집에서 지내는 제사의식과 거의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
전의 행사에서는 우리 대금반의 이해종교수가 아헌관을 했단다.
희문 한번 더
종묘가 무형문화제 1호이다.
그만큼 중요성과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국보 1호는 남대문이다.
그 남대문이 2008년 2월 10일 불탔다.
난 그때 외국에 있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으니 CNN에서 남대문 모형이 나오는 모습을 언뜻 보았다.
왜 이 방송에서 남대문을 보여주지 했는데 나중에 보니 화재사건에 대한 보도였다.
그 때 온 국민은 슬픔에 휩싸였다.
남대문 앞에다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고 국화꽃을 바쳤다.
남대문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상실감을 동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남대문이 국보1호로 지정된 것은 숭례문의 문화재적 가치와는 상관이 없다.
1934년 일본은 그동안의 무력정치에 대한 한국민의 반발을 의식해서 “천연 기념물 보존령”을 발표하고 지금까지 있던 한국의 문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 때 우리 문물을 관리하던 총독부 직원의 581건의 연명부 번호 앞에다가 보물을 추가해서 보물1호가 된것이다.
그 때는 우리나라가 주권이 없을 때 이니 국보라는 말은 없었다.
그러다가 1962년 제정된 문화재 보호법이 발효되고 국보와 보물로 체계적인 지정을 하게 되면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각각 국보, 보물1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하자는 말은 문화계 일각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남대문의 문화재적 가치가 낮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시 한번 더
“아이고, 죽겠어요.”
피리 哭聲.
奠幣熙文
두 분의 가수에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원장님까지 가세한다.
옛날 극장쇼의 사회자는 중요 출연자를 꼭 이렇게 소개를 했다.
그 당시는 우리의 공간적 스케일이 지금과 같은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고 동남아가
이 세상의 끝이었다.
일본이나 동남아가 그 당시 가수들의 꿈의 무대였을 것이다.
하기사 그 당시는 월남전쟁이 있었으니 동남아 순회공연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얼마전 원로 희극인 구봉서씨가 돌아가셨다.
춥고 배고프고 웃음도 메말랐던 그 시절 우리에게 웃음을 주신 분이다.
서영춘, 배삼룡, 양훈, 양석천 같은 분들이 다 고인이 되셨다.
그런 의미에서 송해씨가 사회를 보는 전국노래자랑을 꼭 챙겨 봐야 되겠다.
역시 인간의 목소리보다 더 좋은 악기는 없다.
세 분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으면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낀다.
바리톤과 테너 그리고 알토.
들어서 기분 좋은 소리들이다.
천년만세
“거뜬거뜬 하게 넘어갑니다. 잉?”
천년만세는 우리 음악이면서 가장 서양음악의 멜로디에 가깝게 느껴지는 곡이다.
계면 가락도드리 – 양청 도드리 – 우조 가락 도드리의 세 곡을 연속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그러나 곡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이 나고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 가는 조화가 멋지다.
이 곡은 연주할 때마다 흥이 나고 신이 돋는다.
해물 매운탕을 먹을 때 미더덕을 씹는 기분 즉 각 음마다 탱글탱글한 느낌과 봄나무에 어리는 물기처럼 소리에 생기가 돋고 고무줄 같은 탄력을 느낀다.
내 개인적으로는 양청 6장에서 분위기가 싹 바뀌면서 7장으로 넘어가는 그 부분이 정말 좋다.
이습회가 끝나갈 때도 되니 더 좋고
16:50
남창 가곡 言樂
옛날 선비들이 부르던 가곡이다.
가곡은 삭대엽에서 파생된 초삭대엽, 이삭대엽, 삼삭대엽과 일종의 변이형인 弄(언롱, 평롱, 우롱)과 樂(계락, 언락, 우락) 編(편삭대엽, 편락)이 있는데 언락도 그 변이형중의 하나이다.
우리 가곡은 은근한 노랫말이 멋지다.
(초장) 벽사창이 어룬어룬커늘,
(2장) 임만 여겨 펄떡 뛰어나가보니,
(3장) 임은 아니 오고 明月이 滿庭한데 碧梧桐젖은 잎에 봉황이 와서 긴 목을 휘여다가 깃 다듬는 그림자로다,
(4장) 맞초아,
(5장) 밤일세만정 행여 낮이런들 남우일뻔 하여라.
나는 이 곡을 연주하면서 하이얀 두루마기 정갈하게 갖춰입고 화문석 자리위에 막걸리 주안상 앞에 놓인 우리 고향집 하엽정을 그린다.
16:57
경례.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제 514회 이습회를 마친다.
지도 조성래 원장님
거문고 박봉현
피리 주상철
대금 김종현, 설종수, 엄태경, 이해종, 김관묵, 박금희, 유선임, 윤석조, 박명덕
해금 오경애, 김정신, 신현주, 한숙자, 이형욱, 이경미,임채린, 송정아
3. 完酒 - 그래도 못다한 이야기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가는 사람들이 있다.
오경애선생이 그 동안 병이 깊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대상포진에 이어 칫몸질환까지
그렇지만 이번 아들래미가 어느날 홀연히 직장을 관두고 세계여행을 나섰다가
미쓰 페루출신의 규수를 하나 얻어 돌아 왔단다.
축하드릴 일이다.
그동안 나오지 못하는 동안 이습회가 그리웠고 더 그리웠던 것은 이 자리에서 마시던 막걸리맛이었다는 것을 실토하여 제사과가 아니라 젯밥과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12월 26일이 환갑인데 식사 한번 내겠다는것도 말씀하셨다.
이 집에 모이면 처음에는 점잖은 音樂이야기로 시작하다가
좀 있으면 연배가 연배인 만큼 건강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 날도 이런 류의 이야기가 주로 나왔는데 내 비망록에는 그 날 했던 淫樂적인 말씀이나
淫惡적 행동이 전부 기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기서 했던 이야기들 전부 발설해 버리면
가정사는 물론 국기까지 흔들릴 우려가 있어 차마 필설로 옮길 수가 없다.
누가 구음회를 나온 것은 스스로 나온것이 아니고 중광지곡을 암보하지 못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도 발설하면 안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이다.
그 날 술자리에서 거문고하는 분과 해금하는 두 여인이 옆에 앉았고 거기서 나눈 이야기는 더더욱 밝힐 수 없는 극비사항이다.
“우리는 一泊二日을 같이 한 사이다.”라고 극히 비밀스러운 일을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도 발설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렇지만 차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불경하다거나 건성 박수를 치면 하나씩 밝힐려고 깊이 감추어 둔다.
평소에는 나의 존재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오늘 일지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교수님은 전설이다.”
“머리가 염색을 안했는데도 젊어 지셨다”라는 억지성 발언을 한 사람도 있다.
전부 다 내 비망록에 고이 기록되어있다.
여기에서도 성이 풀리지 않은 사람은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거기서 또 모처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가운데는 페루 순회공연 때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혜성처럼 나타는 분이라는 말도 있는데
글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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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은 이습회에서 공부는 안하고 남들 행동 하나 하나 원장님의 말씀 토씨하나 안빠드리고 일지만 적으셨나요
너무 생생비디오 입니다.
저도 9월 첫주 이습회에 두달여만에 간다고 준비하고 가방메고 나오려는데....
세상사 참 어쩔수 없는일이 가끔 생기네요
가방내려놓고 뭐 끌려가듯이 끌려갔습니다.
맥주집에서의 자리가 종갓집 뒤풀이보다 더 좋았다는 소문이 솔솔`.... 가을바람 불어오듯이 들립니다.
페루의 여인이 김유찬씨의 부재에 대하여 한참을 아쉬워 했습니다.
교수님의 일지는 한권의 자서전을
재미있게 읽은 느낌입니다.~~.
멋진 일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날의 상황을 간간히 기록해두었다가 올린것입니다.
제가 이걸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는걸 알고 놀랐습니다.
김교수님다운 말씀.. 저는 슬슬 건너 뛰었는데~~
영광입니다.
같은 길을 간다는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에 양소유로 환생한 성진이 남전산에 올라 도인과 거문고를
몇 곡을 타고 내려왔는데 봄, 여름, 가을이 지나는 구절이 생각나 혼자 웃어봅니다.
교수님 글 너무 재미있어 읽다 퇴근이 늦어졌습니다.ㅎㅎ~
대금계의 한참 선배가 되시죠?
좋은길을 닦아놓아 쉽게 따르고 있습니다.
물 흐르듯 정악이 흐르고 글 속에 교수님의 정겨운 어린시절 이야기와 함께 우리의 지난 삶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6.25 이후 황량했던 서울에 미국인 성요셉 신부님이 원장으로 계셨던 돈보스코 유치원 학예회 때 발레복을 입은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있었지요.
그때 온동네 사람들은 다 온듯 운동장을 가득 메웠는데 조금도 떨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배운 동작을 해냈던 6살 꼬마 여자아이가 있었답니다.^^*
중간 중간 순서도 잊었지만 당황하지 않고~~나름 재구성해서 율동을 무사히 마치고 과분한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래 전 추억을 일깨워주신 교수님의 일지 감사드립니다.^^*
초롱초롱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윤초시 손녀딸같은
야심한 밤에 박교수님의 일지를 읽다가 깜박 졸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읽다가 또 한번 졸고 그러나 심기일전하여 기어이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정독을 하였습니다 ㅡ새벽 1시에.
흠...대단하다ㅡ
오랜만에 만났으나 어제 헤어지고 오늘 본듯 반가움과 친밀함이 변함없으니 한소리를 친정에 비유함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언제라도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는 벗이 있어 즐겁고 또한 더불어 배우고 익히니 더 이상 바랄것이 없습니다. 님들 사랑합니다 !!!
페루여인의 등장에 한소리가 떠들썩합니다.
대중적 위력을 실감합니다.
完走에서 完奏로 完酒까지 역시나 박교수님의 일지 읽고, 배우고,복습까지~~~~~~~
감사 합니다.
좋으신 분과 같이
할 수있어 힘이 납니다.
만국기가 운동장 가득 걸린 추억의 운동회날.
까맣게 얼굴이 그을린 한 소년이 승부욕을 불태우지만 여자애과의 달음질박에도 지고서, 이걸 어떻게 해야 이길까 고민했을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집니다 ^^ 누구나 있을 것 같은 좋은 추억입니다.
이습회의 교실의 풍경과, 편안하고 정이 있는 해설을 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 끝무렵에서 비망록을 운운하시면서 약간의 엄포를 하시는게 보입니다.
모두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펜의 힘은 순교자의 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꽂감 빼먹듯
하나씩
둘씩
지칠줄 모르는 박교수님 - 우직하고 소탈하신 성풍에 대단한 정력가이십니다.
나중에 국악이론 박사학위 도전한번 해보심이 - -
과찬이십니다.
좋은곳을 마련해주셔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제사라 냬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