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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0 / 결실하는 인생 되기 (마13:18-23)
오늘은 십자가 수난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이자 주는 교회의 창립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두 큰 기념일을 맞아 오늘 교회에 모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젊은이가 추운 겨울날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는데 마주쳐 오는 찬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어 어찌나 춥던지 생각다 못해 잠바를 뒤집어서 입었습니다. 단추 있는 데가 뒤로 가고 꽉 막힌 등판을 앞으로 오게 한 후에 잠바 깃까지 세우니 바람이 파고들 틈이 없어 만족해하며 더욱 속도를 내어 달리던 순간 얼음 바닥에 미끄러지며 십여 미터를 나가떨어져 큰대자로 누웠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보니 젊은이의 목이 등 뒤로 180도 돌아가 있었습니다.
“이거 큰일이군. 목이 저리 돌아가 있으니 숨을 못 쉬어 곧 죽겠구먼” 그러더니 사람 하나 살려 보겠다고 사람들이 어깨를 밟아라 몸을 잡으라 하면서 목을 다시 180도 돌리는 와중에 젊은이는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퀴즈입니다. 이 젊은이는 왜 목이 꺾여 죽었을까요?
1) 오토바이가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2) 겉옷을 뒤집어 입어서.
둘 다 정답입니다. 1번이 외부 요인이라면 2번은 내부 요인입니다.
우리네 사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부득불 사고를 만날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고들 역시나 외부와 내부 요인이 이유입니다. 외부 요인은 세상에 널려 있는 환란의 요소들 때문이고 내부적으로는 뒤집힌 내 인생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인들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믿음 생활 중에도 늘 우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갑자기 닥치는 세상의 시련과 문제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스파이가 더 무섭다고. 어찌 보면 정작 인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방해꾼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인생과 신앙의 앞과 뒤가 뒤집혀 있다면 그땐 작은 어려움으로도 큰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적 요인들로 인해 아무리 불평하고 애를 쓰고 힘들어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썩었느냐?’고, ‘세상이 왜 이렇게 살기 힘이 드냐?’고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결국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바뀌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세상일지라도 우리 앞엔 가시밭 같은 인생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가르침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인생을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의 네 종류의 땅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다 같이 땅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어떤 땅은 길가로, 돌밭으로, 가시떨기로, 좋은 땅으로 변했다는 것인데, 이유가 뭘까요?
비유에서는 땅들이 그렇게 바뀌게 된 요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으면 돌밭이 되고, 말씀을 들으나 마음에 온통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뿐이면 가시떨기가 되며,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길가가 되고,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면 좋은 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각자의 인생도 비유에 나오는 네 개의 땅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과연 어떤 땅일까요?
흔히들 ‘꽃길만 걸으세요.’라고들 하는 데 꽃길과 반대되는 개념이 가시밭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뭘까요?
꽃들이 피어 있는 땅이 꽃밭이고 꽃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시밭은 가시나무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시밭이라 해서 땅이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안에 가시나무의 크고 깊은 뿌리들이 박혀 있다는 것이 꽃길과 다를 뿐입니다.
이렇듯 문제는 땅이 아닙니다. 가시나무에 있습니다. 알곡의 씨가 그 땅에 떨어져 나름대로는 열심히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보지만 곧 가시나무 뿌리에 양분을 뺏기고 가시나무 그늘에 가려 질식해 죽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신앙생활에서도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 무엇이 뿌리내리고 있나에 따라 참 성도와 불신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세요. 얼마나 많은 가시밭 인생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배에 잘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은혜도 받고 믿음이 자라는 듯도 합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일 받은 은혜가 일주일을 못 넘기고 그날 받은 설교가 하루를 못 갑니다. 당장 주일 저녁부터 불평과 혈기와 미움의 소리가 입에서, 생각에서 막 쏟아져 나옵니다. 월요일 밤이면 걱정 근심하는 소리가 와장창 납니다. 수요일쯤 되면 한숨 소리가 푹푹 터져 나옵니다. 그러다 금요일이 되면 낙심으로 풀이 죽어 어깨와 맘이 축 처져 삽니다. 그렇게 살다 주일이면 다시 교회에 나옵니다.
누구라도 매 주일을 이런 사이클로 사는 한은 믿음은 말라 시들어 가게 되고 인생엔 가시나무만 무성해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가시들을 제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살리는 길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그 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만 믿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세요. 이렇게 인생에서 가시나무를 잘라 내고 그 뿌리를 파내 버리는 것. 이것이 믿음의 결단이요, 이것이 신앙의 용기입니다.
이어, 믿음이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있는 가시는 또 무엇일까요?
본문에는 두 가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세상의 염려를 뽑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염려란 말은 원어로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인데 ‘물어뜯다, 찢다. 쪼개다’ 플러스 ‘마음’입니다.
결국 염려란 인생을 송두리째 물어뜯는 것이 염려입니다. 내 행복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내 성공과 기쁨으로부터 나를 갈라놓는 것이 염려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으로부터 비워야 하고, 버려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염려를 끌어안은 채 놓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들 좋아서 염려하며 사는 줄 아느냐?”라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염려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버리려고 안 하니까 못하는 게 아니고 버리고 싶어도 할 수 없기에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
염려는 현실이고 믿음은 미래라는 것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염려는 당장에 겪는 일이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기에 마음에 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겐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염려는 바꿀 수 없지만 다가올 미래는 바꿀 기회가 있기에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신자라면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살아야겠습니까? 현재를 바꿀 수 없는 염려입니까?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믿음입니까?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 했으니 오늘의 염려를 내일의 축복으로 바꾸기를 원하신다면 성경 말씀을 많이 알수록 좋지만, 특히나 요한복음 14:1은 반드시 외우셨다가 향후 혹시라도 원치 않게 염려 앞에 서게 될 때면 스스로에게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세요. 자기 이름을 부르며 “아무개야. 마음에 근심하지 말자. 하나님을 믿으니 또 예수님만 믿자!”
믿어야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염려가 해결됩니다.
믿어야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해야 믿음대로 됩니다.
누구라도 믿음 생활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사성어에 보면 ‘낙수공암’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인데, 마음에 박힌 가시를 한 번에 다 파낼 수야 없겠지만 낙수공암처럼, 한 번의 찬양으로, 한 번의 기도로, 한 번의 예배로 그렇게 한 번에 한 번씩 우리 각자의 신앙의 결심과 믿음이 계속 이어질 때면 반드시 모든 염려를 뿌리 뽑고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염려를 잡는 대신 믿음을 붙드시고, 염려에게 뺏긴 것만큼 하나님에게서 얻으려 하세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심령이 좋은 땅이 되기만 하면 우리네 인생에도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는 은혜와 복이 곧 있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믿음으로 재물의 유혹을 떨쳐 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과학자가 말하기를 ‘물질은 중성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인즉 물질 자체로는 나쁘거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으며 신앙인의 경우엔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기도원엘 자주 갔는데, 갈 때면 늘 성경 찬송가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습니다만, 한번은 어떤 분이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오셨기에 기회가 있어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증권 시황을 확인하지 않으면 잠도 안 오고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들고 왔다는 말을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쉼을 얻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응답을 받으려고 찾은 기도원인데 당일 증권시세에 따라 그날의 은혜가 되기도 하고, 신이 났다, 안 났다 한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신은 증권이지 하나님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유혹을 이겨내는 게 믿음입니다. 염려가 내 속사람을 망친다면 유혹은 우리 인생 자체를 망하게 합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한 아이가 1등으로 잘 달리다가 중간에 뭔가를 줍느라고 잠시 멈춘 사이에 추월을 당해 6명 중에 5등을 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가 핀잔을 줬습니다. ‘인석아, 잘 달리다가 왜 딴짓이야?’ 그랬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뛰다 보니 500원짜리가 보이길래….’ 그러더랍니다.
믿음 안에서의 영적인 경주도 마찬가집니다. 가끔 신앙인들조차도 세상에 떨어진 재물의 유혹에 빠져 신앙의 길에 멈춰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유혹은 마귀가 잠깐 주는 미끼일 뿐입니다. ‘잡은 고기에게 미끼 주는 거 봤냐?’라는 말도 있듯이 미끼는 미끼로 끝날뿐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이 평생 가고, 죽어서 천국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미끼는 단 한 번뿐이고 미끼를 문 이후에는 고통과 낭패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탄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어떤 부자가 죽었는데. 많은 문상객이 다녀가는 중에 한 사람이 부자의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친께서는 얼마나 남기고 가셨습니까?”
물론 아들이 물려받게 될 재물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남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계산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파악했던 겁니다. 즉 평생을 힘들여 쌓고 모았는데 세상을 떠날 때 보니 다 남기고 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아들도 자신도 결국엔 다 남기고 갈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말 중에 ‘다다익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자꾸 쌓아 놓으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아야 좋고, 얼마나 쌓아 놔야 만족할만할까요?
그렇게 늘 쌓아 놓으려고만 하다 보니 늘 부족을 느끼며 삽니다.
그렇다면 다다익선의 반대말은 뭘까요?
‘과유불급’입니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로,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혹? 행복과 성공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둘 다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해서 행복할 수 없고 원한다고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행복과 성공은 누구든 원하면 행복이 찾아오고 원하면 성공이 찾아옵니다.
뭐가 맞는 건가요? 행복이나 성공은 찾아서 얻을 수 없다 했는데, 그래 놓고 원하면 찾아온다니.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뭘 해야 행복과 성공이 찾아올까요?
어떤 분은 작은 것에도 만족하면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매사에 감사하면 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던가요?
잘 안 됩니다. 세상에 만족하기 싫어서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감사하기 싫어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거의 모든 경우에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으니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해본다 하지만 그런 억지 만족과 억지 감사가 얼마나 버텨줄까요? 어느 때에야 행복과 성공을 가져다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을 믿어야 행복이 찾아오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성공이 찾아옵니다. 이게 믿음이고 그래서 우리에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성공자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염려가 내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염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마귀가 던지는 미끼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재물의 유혹에 맞서 믿음으로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이행하십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볼 것이라고.
이제까지 여러분이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좋은 땅이 되게 하시고, 그래서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게 하실 것이기에 이제부터는 염려 대신 믿음으로, 유혹 대신 기도로, 여러분 각자의 행복과 성공이 찾아오게 하시고 그것들을 지켜내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목사님 주시는 말씀은
소가 여물을 되새김하여
계속 소화시키듯~
주일날 예배드릴때와
또 다른 은혜가 넘칩니다,,,,
이 시간은 주님을 믿고 있으며
주님께 간구할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샬롬!
다 남기고 갔습니다...
참 의미있는 말이네요
나는 어떤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하는지 한번쯤은 생각도 하고 돌아보는 삶을 생각해 보는 설교이었습니다
교회 창립을 축하하면서 작지만 좋은 교회
소망하는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