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던 대로인 구석도 있지만, 한계도 뚜렷해 보였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연출이 돋보였다. 둘이 마주 보는 옆 얼굴 시퀀스들이 감각적으로 빛나 보였다. 묘한 긴장과 영화적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시퀀스 편집도 좋았다.
셀린 송의 감독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105분)가 지난 3월 국내에서도 개봉해 12만 관객을 모았는데 미처 보지 못한 이들이 볼 수 있게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제8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제7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 각본상 등 다양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주목 받았다. 한국어 대사가 많은 데 견줘 많은 관심과 흥미를 끌었는데 시적 연출이 한몫 했으며 CJ ENM과 A24 스튜디오의 협업이 빛을 발한 결과로도 보인다.
열두 살에 갑자기 해성(유태오)의 인생에서 사라진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 캐나다로 떠난 그녀는 우연히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다. 12년 만에 서울을 찾아 해성을 찾았으나 닿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와 어느 날, 전문작가 레지던시에서 만난 뉴욕 출신 유대인 작가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해 함께 작가의 꿈을 키운다.
또 12년이 흘러 이제 서른여섯 살이 된 해성은 나영이 있는 뉴욕으로 향한다. 둘은 브루클린 다리 아래와 회전목마, 전철,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스탠튼섬 보트 투어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이스트 빌리지의 좁다란 아파트에서 아서를 만나 파스타를 먹고 바에서 셋이 어색한 자리를 갖는다. 이틀을 보낸 뒤 해성과 어색하지만 진한 포옹을 나누고 헤어져 쓸쓸히 집에 돌아온 나영을 아서가 껴안는데 나영이 울먹이고 만다.
동양인들의 뇌리에 박힌 12란 숫자를 서양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지는 대목도 있다. 나영이 아서에게 '불교'와 '윤회', '전생', '8천 겹의 인연'을 설명하는 장면과 둘이 침대에서 '나영이 넌, 잠꼬대를 모국어로 해, 그럴 때 난 막막함을 느껴'와 같은 대사를 늘어놓는 장면이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뿐, 그 시간을 허락한 아서의 시선을 자꾸 생각하게 됐다. 난 그랬다. 나영은 '모국어를 나눌 수 있는' 해성을 부러워하고 질시할 것이 뻔한데 앞으로 12년, 또 12년이 흘러 지금 내 나이 육십에 이르면 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35년 전쯤에 뭔가를 대단히 확신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미국으로 떠난 여인 생각이 떠올랐다. 그니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런 확신하는 메시지를 남겼을까 궁금해지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문득 이 영화는 12년마다 한 번씩 꺼내 보아야 할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영화 평론이 인연이나 전생에 집중했는데 난 그보다 모국어에 대한 갈급이 폐부를 찌르며 다가왔던 것 같다.
지난 4월 맥킨지 앤 컴패니에서 낸 리포트에 따르면 이렇듯 아시아태평양 지역 디아스포라 얘기가 근래 부쩍 늘어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로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들이 아시아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략적 타깃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란 풀이다. 이 작품도 서양인들이 딱 알아들을 정도로 동양인들의 뇌리에 박힌 '갑'의 원리 등을 설명하는 것 같다. 그를 유대인 작가 아서의 눈으로 풀어내려 한다는 점도 지극히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해성의 친구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의 턱수염과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