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는 장충단에 서 있던 비이다. 장충단은 을미정변과 임오군란 때 희생된 영령을 제사지내고 달래던 초혼단(招魂壇)으로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정변)에 희생된 홍계훈(洪啓熏), 이경식(李耕植) 등과 임오군란에 희생된 영의정 이최응(李最應)과 여러 신하 등의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영령(英靈)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다.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이다.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광무 4년(1900)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마구 설치하여 ‘장충단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광복 후 일제가 세웠던 건물을 모두 헐면서, 비도 다시 찾아 세우게 되었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서울시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에 옮겨 세웠다. 장충단비의 원래 위치는 신라호텔 본관 자리이다.
* 장충단비 원문: (表 面)/ 睿筆/ 獎忠壇/ (裏 面)/ 欽惟我/ 大皇帝陛下姿挺上聖運撫中興奠泰磐之業惕履霜之漸無奈天步時或迍邅乃有甲午乙未之事變而武臣之投難効死者多嗚呼其毅烈之凜於霜雪名節之炳如日星宜乎永享芬苾不朽竹帛是以/ 聖明特軫褒忠之義爰降惻怛之詔設壇竪碑而表㫌之繼又定春秋祀儀以示崇報以樹風聲此誠百世之曠典也勵士氣激軍心亹在於斯猗歟盛哉猗歟盛哉/ 正一品輔國崇祿大夫 元帥府會計局摠長兼任表勳院摠裁陸軍副將勳一等臣閔泳煥/ 奉/ 勅謹記幷書/ 光武四年十一月 日
* 장충단비 국역문: 예필/ 장충단/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폐하께서는 자질은 상성(上聖)을 타고났고 운수는 중흥(中興)을 만나 태산과 반석같은 공업을 세우고 불운의 조짐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국이 가끔 험난하다가 마침내 갑오 · 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武臣)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서릿발보다 늠름한 의열과 태양처럼 빛나는 명절(名節)은 길이 제향을 누리고 기록에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이리하여 임금은 특별히 충성을 포상하는 의리를 기려 이에 애통해하는 조서를 내리고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였으며 이어 또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는 법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교화를 심으니, 이는 참으로 백대를 놓고 보아도 없는 특전이다. 사기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키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다. 아, 위대하다. 아, 훌륭하다./ 정일품 보국숭록대부 원수부회계국총장 겸 임표훈원총재 육군부장 훈일등 신 민영환(閔泳煥) 삼가 칙서를 받들어 비문을 짓고, 아울러 서문을 쓰다./ 광무 4년(1900년) 2월 일.
장충단터의 장충단비 바로 뒤로 문화재밀매꾼의 비석? ‘제일강산태평세계(第一江山太平世界)’의 비와 두 개의 석등은 문화재밀반출업자 배성관이 개인적으로 장충단비 바로 뒤에 서있어 장충단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처음부터 줄곧 이곳에 놓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뒷면에 이 비석이 세워진 때는 단기 4296년(1963)년 5월 15일이고, 배성관(裵聖寬)이 근립(謹立)했다고 표시되어 있다. 배성관이란 사람의 정체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깨나 날렸던 골동상이다. 배성관이 제일강산태평세계 비석까지 새겨서 남겨놓은 의미는 무엇일까? 혹 그것이 제 자신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이 땅의 문화재에 대한 속죄의 표시일까?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중구 동호로 257-10 (장충동2가)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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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일.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