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분단은 선조(宣祖)의 나쁜 DNA가 유전되어 왔다.
격암유록(格菴遺錄)을 읽다가 이 글을 쓴다. 격암유록(格菴遺錄)은 조선 명종(明宗) 때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가 기록한 민족의 대예언서로 전해지고 있다. 격암유록(格菴遺錄)은 국립중앙도서관 고서목록(古書目錄) “古1496호 격암유록(格菴遺錄)”으로 등록되어 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板門店)에서 문재인 김정은 정상회담이 열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판문점은 우리나라와 북한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휴전협정 특수 구역이다.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간의 2000년·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모두 평양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은 한국측 구역인 “평화의집”에서 열였다.
판문점(板門店)은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다. 1953년 7월 27일 당시 38도선에서 가장 가까운 개성 부근 “널문리” 마을에서 휴전(休戰)협정을 맺었었다. 이 “널문리” 마을이 훗날 한자어(漢字語)인 “판문점(板門店)”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판(板)-나무판대기를 말한다. ※문(門)-문이다 ※점(店)-가게 상점(商店) 전방(廛房)이다 ⁂판문점(板門店)은 나무판대기 문으로 되어 있는 상점이다.
필자가 이 글을 소개 하는 것은 “널문리” 마을 이름 속엔 우리 역사의 가슴 아픈 장면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판문점의 원래 이름인 “널문리”는 “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조선 14대 임금 선조(宣祖)의 피란과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을이다.
1592년 4월 일본은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조선 침략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 상륙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단숨에 함락시킨다. 그리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쪽 한양(漢陽)을 향해 올라왔다. ※파죽지세(破竹之勢)-대나무를 쪼개듯 거침없이 적을 물리치는 기세
선조(宣祖)는 일본군의 침략을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名將)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申砬) 장군이 막아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신립(申砬) 장군의 조선군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서 크게 패했고 신립(申砬) 장군은 남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왜군은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빠르게 진격해 나갔다.
신립 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宣祖)는 그날 밤 난리를 피해 궁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는 파천(播遷)을 결정한다. ※파천(播遷)-임금이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을 떠나 딴 곳으로 피란을 가는 것.
전쟁이 나면 국가의 상징인 임금은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나라를 지켜야 하는데 백성 모르게 도망을 결정한것이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 같이 퍼부었다. 선조(宣祖)는 새벽 비속을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피란길에 올랐다. 선조(宣祖)의 피란길은 한양(漢陽)→파주(坡州)→개성(開城)→ 평양(平壤)을 거쳐 압록강 옆에 있는 마을 의주(義州)로 이어졌다. 이 코스를 “의주길”이라고 한다.
궁궐을 버리고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선조(宣祖) 일행은 벽제(碧蹄)를 거쳐 얼마 뒤 임진강 나루에 이른다. ※벽제(碧蹄)-지금의 고양군 덕양구 문서로 일대.
비는 대창(竹槍)처럼 세차게 내린다. 칠흑(漆黑) 같은 어두운 밤이다. 선조의 피난 행렬은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했다. 왜놈의 총칼이 곧 뒤쫓아 오는데 신하들인들 평소때 왕을 모시듯 하겠는가? 임금보다 자기 목숨이 급한데---
조선왕조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신하들이 주변에 있던 집지을 때 쓸 것이라 모아둔 목재들을 모아 불을 질러 강을 밝혔다. 강을 밝혀 간신히 임금 일행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는 신하들이 불을 지른 건 주변 재목이 아니라 정자(亭子)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정자의 이름은 “화석정(花石亭)”이다. 필자도 파주 율곡리 화석정(花石亭)을 답사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이라 한다.
화석정(花石亭)에 따르는 설화(說話)에 의하면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화석정(花石亭) 기둥과 바닥에 수시로 기름칠을 잘 해두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이(李珥)의 예언처럼 약 8년 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선조(宣祖) 행렬이 캄캄한 임진나루에 도착했을 때 신하인 이항복(李恒福)이 화석정(花石亭)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평소 기름칠을 잘 해둔 화석정(花石亭)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 나루 일대를 대낮처럼 밝혔다.
필자 생각에는 꽃바위라는 뜻의 화석정(花石亭) 보다 불을 밝힌다는 화석정(火晳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폭우 속을 간신히 강을 건넌 선조(宣祖) 일행은 파주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선조는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 개성으로 향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에 인근 마을 널문리(판문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조 행렬 앞에는 임진강이 가로막았다. 캄캄한 밤이다 비까지 내린다. 배도 한 척 보이지 않았다.
왜놈들은 금방이라도 눈앞에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다. 신하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배를 구한다거나 아무 대책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떵떵” “떵떵” 마을에서 뭔가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짝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인 마을 백성들이 하나둘 강가로 나타났다. “전하, 저희가 지금 이 문짝 널빤지로 다리를 만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성들은 자기 집 대문 널빤지를 뜯어와서 그것들을 이어 다리를 놓았다. 마을 백성들의 노력으로 선조 임금은 무사히 강을 건너 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이 마을을 “널문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역사는 수백 년이 흘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범하였다. 그리고 1953년 휴전협정이 되었다.
휴전협정은 이 마을에 주막을 겸한 상점인 “널문리 가게”에서 서명식이 열렸다. 이처럼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가를 책임진 임금은 제 혼자 살기위해 도망을 쳤다. 순박한 백성들은 도망치는 임금을 걱정하여 집 문을 뜯어다가 다리를 놓아 도망치게 했다.
선조 일행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거처를 옮겼다. 선조는 그 와중에 “만약 나와 세자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명(明)나라로 가면 나라에 임금이 없게 된다”며 세자인 광해군에게 본국에 머물며 조정을 이끌게 명령했다. 세자를 전쟁터를 책임지우고 선조 자신은 명나라에 가서 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조는 “조선을 두 편”으로 나누었다 조선은 선조(宣祖)를 따르는 신하들로 이루어진 선조(宣祖)중심의 조정과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따르는 신하들로 이루어진 조정으로 나뉘었다. 이것을 광해군이 이끈 조정을 “분조(分朝)”라 한다. 조정(朝庭)을 아니 국가를 두 조각으로 나눈 것이다.
광해군은 이후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에서 분조(分朝)를 이끌며 의병(義兵)들을 격려 하며 왜군들과 싸웠다.
선조(宣祖)는 이순신 장군이 남해(南海)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광해군은 의병(義兵)들과 같이 왜군과 싸웠다. 명(明)나라 참전 등으로 왜적의 전세가 바뀌자 선조는 피란 1년 6개월 만에 한양에 돌아왔다.
역사 속에 “폭군 광해군”이란 이름은 아버지 선조가 만든 것이다. 휴전선으로 나라가 두조각 난 것은 선조(宣祖)의 더러운 DNA가 유산으로 남은 것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에 “소두무족(小頭無足)”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살아자(殺我者) 소두무족(小頭無足)”이라는 대목에서다.
필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殺我者(살아자)-나를 죽이는 것은 小頭無足(소두무족)-머리는 작고 발이 없는 것이다.
소두무족(小頭無足)은 핵탄두 미사일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이 밥을 굶어가면서 죽기 살기로 만들어낸 것이 이 “소두무족(小頭無足)인 핵미사일”이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