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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홀로 테마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조선 재상 열전 15] 류성룡(柳成龍)전
월간조선 2024.03.14
시대를 잘못 만난 현상(賢相)
⊙ “그 학문을 논하면 章句에 얽매이는 고루한 선비가 아니오, 그 재능을 말하면 족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다”(선조)
⊙ “내가 유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할 때가 많다”(선조)
⊙ 임진왜란 때 戰時 宰相으로 이순신 등용, 훈련도감 설치 등 업적
⊙ 일본과의 화의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실각… 《징비록》 저술
류성룡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은 중종 37년(1542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柳仲郢)의 아들로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맑고 순수하여 4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6세에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8세에 《맹자(孟子)》를 읽었다고 한다.
21세 때 류성룡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안동 도산(陶山)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있던 이황(李滉· 1502~1571년)을 찾아갔다. 이때 류성룡을 본 이황은 좌우 제자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었다”라며 극찬했다. 류성룡은 여러 달 동안 도산에 머물면서 이황으로부터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 수업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이황을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명나라 유생들을 감탄케 하다
류성룡은 25세 때인 명종 21년(1566년) 문과에 급제해 일찍 벼슬길에 들어섰다.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을 거쳐 선조 2년(1569년)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성절사(聖節使) 서장관으로 뽑혀 명나라 경사(京師·북경)에 사행(使行)을 갔다. 당시 유명한 일화 두 가지가 정경세(鄭經世·1563~1633년)가 지은 류성룡 행장(行狀)에 적혀 있다.
첫째, 경사에서 대궐로 들어가는데 행렬 맨 앞에 불교 승려와 도교 도사[僧道]가 서고 그 뒤에 유생(儒生)들을 세운 것을 보고 류성룡이 명나라 유생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장보(章甫·유생)의 관을 쓰고도 오히려 저들 뒤에 선단 말인가?” 유생들이 답했다. “저들은 관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행렬을 담당하던 서반(序班)을 불러 따지듯 말했다. “우리는 유자(儒者)의 예복을 입고서 관직에 있으니 도석(道釋·도교와 불교) 뒤에 설 수 없다.”
서반이 외교를 담당하던 홍려시(鴻㱺寺)에게 말하니 승려와 도사를 뒤에 서게 했다. 이를 본 명나라 유생과 사람들은 모두 감동했다. 둘째, 류성룡이 명나라 유생들에게 물었다. “중국에서는 누구를 도학(道學)의 으뜸으로 삼는가?” 한참을 서로 돌아보며 망설이던 유생들이 말했다. “왕양명(王陽明)과 진백사(陳白沙)이다.” 류성룡이 말했다.
“진백사는 도(道)를 정밀하게 보지 못했고 왕양명의 학문은 오직 선학(禪學)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보건대 한결같이 정(正)에서 나온 설문청(薛文淸)만 못하다.” 사행에서 돌아온 류성룡이 이황에게 이런 내용을 편지로 보내니 이황은 “육선(陸禪·육상산과 불교)이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려 하는데 공이 능히 수백 유생을 상대하여 그 혼미함을 지적하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고 치하했다. 이를 통해 류성룡은 이미 양명학과 도학, 불교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中의 경세가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류성룡은 정(正)만 고집하는 막힌 학자가 아니었고 늘 그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중(中)의 경세가였다. 이 점은 일찍부터 드러났다.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그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인 선조 2년(1569년) 한창 제왕학 수업에 열중이던 어린 선조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옛날의 군주 중에서 누구를 닮았는가?” 정이주(鄭以周)라는 신하가 “전하의 다스림은 요순(堯舜)과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이를 지켜보던 강직한 성품의 김성일(金誠一·1538~1593년)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 성군(聖君)도 될 수 있고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이나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처럼 폭군도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명민하긴 했으나 포용력이 부족했던 선조는 낯빛이 바뀌었다. 이때 류성룡이 나섰다. “정이주가 요순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임금을 만들겠다는 뜻이고 김성일이 그렇게 말한 것은 걸주와 같은 임금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니, 둘 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확히 사안에 적중하는 중(中)의 대처법이었다.
류성룡은 선조 3년(1570년)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여해 신왕(新王) 선조의 공부를 곁에서 도왔다. 당시 이런 류성룡의 모습을 정경세는 “매번 입시(入侍)하여 답변할 때마다 명백하고 적절하고 그 분석이 정미(精微)하니 당시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는 명성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 무렵 실록을 읽어보아도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조 5년(1572년) 7월 7일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이 졸했다. 이준경은 선조에게 올린 유차(遺箚)에서 네 가지를 당부했는데 우선 붕당(朋黨)의 조짐을 경고했다. 실록은 “이때 심의겸(沈義謙)이 외척으로 뭇 소인(小人)들과 체결하여 조정을 어지럽힐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뭇 소인들 중에는 이이(李珥·1536~1584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준경을 옹호하다
이에 홍문관 응교 이이는 격정의 소(疏)를 올려 이준경을 비판했다. “참으로 정신(廷臣)들이 사당(私黨)을 결성한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 정승으로 있으면서 입고(入告)할 때에 명백하게 진술해서 그 길을 끊어버리지 않고,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야 감히 말을 꺼낸단 말입니까. 또 어째서 누가 붕당을 맺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고 얼버무림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모든 군신(群臣)을 다 의심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준경이 붕당으로 지목한 자들은 모두 한때의 청망(淸望)을 등에 업고서 공론을 주장하는 자들이니, 만약 이름을 분명히 말하면 사림에 죄를 얻어 결과적으로 자신이 소인이 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전하라도 그가 현인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을 의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강직한 자가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
많은 신하가 이이를 뒤이어 모두 같은 취지의 소를 올렸고 심지어 대간(臺諫) 중에는 이준경을 추죄(追罪)하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수찬 류성룡이 나섰다. “그 말은 옳지 않으나 그 잘못을 가려내면 그만이지 죄를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체모에 손상이 될 듯하다.” 이로써 이준경에 대해 사림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신망을 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3년 후인 선조 8년 이준경의 예상대로 조정에서는 당쟁(黨爭)이 본격화된다. 류성룡은 동인(東人), 이이는 서인(西人)에 속했다.
이이와 충돌
류성룡은 선조 6년(1573년) 다시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복제를 마치고 나서 선조 9년(1576년) 여름에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조정에 복귀했다. 류성룡은 대체로 홍문관과 대간을 오가며 관력을 쌓고 있었다. 그는 선조 11년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를 지내고 이듬해 동부승지에 오른다. 선조 14년(1581년)에는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같은 해 말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한다.
류성룡에게 처음 시련이 찾아온 때는 선조 16년이다. 이른바 ‘10만 양병’을 둘러싼 논란이다. 당시 선조는 호조판서로 있던 이이에게 “지금 우리의 국방력이 전조(前朝·고려)만도 못하다”며 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올리라 한다. 이에 이이는 서얼허통(庶孽許通·서얼이 관직에 차별이 없도록 하는 방안)과 ‘10만 양병’ 육성 방안을 보고한다.
이이는 “재주 있는 노비들의 속량(贖良)과 서얼허통 등을 통해 노력하면 10년쯤 지나 전조의 절반 정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의 절반이란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 왔을 때 이를 반격하기 위해 고려가 동원한 군사 20만 명 기록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류성룡에 의해 좌절된다. 류성룡은 “나라에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란(禍亂)의 단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논리로 반박했다. 또다시 류성룡이 이이를 이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선조는 이이와 류성룡 모두를 아끼고 있었다. 이이가 사망한 후이긴 하지만 선조 18년 5월 28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등용한 현인은 이이와 성혼(成渾·1535~1598년)이기 때문에 무릇 이 두 사람을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간사한 자라고 하였다. 류성룡도 역시 군자이다. 대현(大賢)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 사람됨을 보고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심복할 때가 많다.”
어쩌면 선조는 류성룡에게서 중화(中和)의 정치인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물론 이이와 류성룡의 충돌 배후에는 당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선조 16년 4월 17일 경안부령 이요가 선조와 독대(獨對)하여 조정의 안정을 잃게 하는 당쟁의 폐해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곤, 특히 “류성룡·이발·김효원·김응남 등은 동변(東邊·동인)의 괴수들로서 저희 멋대로 하는 일이 많으니 재억(裁抑)을 가하기 바란다”고 건의했다.
이요는 학식이 뛰어나 선조가 많이 의지했던 종친으로, 조식(曺植)에게서 양명학의 세계를 전해 듣고 오직 이쪽으로만 파고들어 남언경과 함께 선조 때 조선에 양명학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실제로 얼마 후 선조는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를 폐지해버렸다. 그러나 동인들은 “다 두려워하고 기가 죽었으며 류성룡 등도 불안하여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이건창은 적고 있다. 그들은 “경안부령 이요가 이이의 가르침을 받아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왕실 종친이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당장 사헌부·사간원 등에서 이요가 근거 없는 말을 했으니 파직시켜야 한다고 들고일어났다. 이에 선조는 이렇게 답했다. “요가 아뢴 내용도 자못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다. 내가 비록 매우 과매(寡昧·덕이 적고 우매하다는 겸손의 표현)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임금은 아니다. 이번 일은 요에게 하등의 죄를 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어찌하여 내 귀에 들어왔겠는가.” 선조도 당쟁의 실상을 상당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계미삼찬
선조 16년 6월 11일 병조판서 이이의 사소한 실수가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된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이가 이날 대궐에 들어왔다가 현기증이 생겨 선조를 알현하지 않고 병조에만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반대파들에게 이는 임금을 업신여기는 행태로 보인 것이다. 동인 쪽의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직제학 허봉(許篈) 등이 삼사(三司)에 연계(聯啓)를 올려, 이이는 임금을 업신여기며 파당을 만들어 바른 사람을 배척하므로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간신이라고 하였다.
이때 서인 쪽의 영의정 박순(朴淳)과 호군 성혼은 언근(言根)을 밝혀 주동자를 처벌해야 한다면서, 송응개와 허봉을 외직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삼사에서는 언론으로 죄를 줄 수는 없다고 맞섰다. 이에 다시 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송응개가 이이는 이익을 탐해 지방관을 위협하고 사류를 미워하며 해쳤다고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학생 및 전라도·황해도 유생들이 각각 연명으로 소를 올려 이이가 모함을 당했다고 변호하는 등 큰 파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죄를 밝혀 시비를 정하자는 서인 정철(鄭澈·1536~1594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사감(私感)을 가지고 공론을 가탁, 임금의 총명을 가렸다는 죄목의 친필교문을 내려, 박근원을 평안도 강계로, 송응개와 허봉을 각각 함경도 회령과 갑산으로 귀양 보냈다. 이를 역사에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찬(竄)은 유배를 간다는 뜻이다. 이후 선조 17년(1584년) 이이는 세상을 떠난다.
“임금과 신하이지만, 붕우와 같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선조 17년 9월 경상감사로 있던 류성룡이 부제학이 되었다가 마침내 예조판서로 승진, 임명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게 되었다. 이에 류성룡이 글을 올려 힘껏 사임하니 선조는 수찰(手札)로 뜻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옛 임금 가운데는 신하를 신하로 대하는 자도 있었고, 벗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으며, 스승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다. 이 뜻은 비록 후세에 전하진 않으나, 경이 10년 동안 경악(經幄·경연)에 나오면서 한결같은 덕으로 아무런 흠이 없었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라 하나 정의로는 붕우(朋友)와 같다. 그 학문을 논하면 장구(章句)에 얽매이는 고루한 선비가 아니오, 그 재능을 말하면 족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다. 나만큼 경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는 선조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 정철이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류성룡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관직이 계속 내려왔지만, 류성룡은 대부분 사직하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지극히 현명한 처신이었다. 그럼에도 류성룡에 대한 서인의 공격은 집요했다. 선조 18년(1585년) 의주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소를 올렸다. “정여립(鄭汝立)이 이이에게 보낸 글에서 ‘3인은 유배시켰으나 거간(巨奸)은 아직도 있다’라고 하였는데 거간이란 류성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도 선조는 어찰(御札)을 내려 류성룡을 옹호하며 말했다. “류성룡은 군자이다. 당대의 대현(大賢)이라 해도 옳다. 그 사람됨을 보고 말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심복(心服)된다. 어찌 학식과 기상이 이와 같은 사람이 거간이 될 리 있는가? 어떤 담대한 자가 감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류성룡은 소를 올려 물러나야만 하는 다섯 가지 사유를 아뢰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취(去就)의 의리는 의식(衣食)처럼 당장 해야 하는 데 있는 것이지 미적거릴 일이 아닙니다. 나아감은 이(利)를 탐해서가 아니며, 물러남은 은혜를 저버려서가 아닙니다. 백세(百世)가 앞에 있고 천세(千世)가 뒤에 있습니다. 스스로 꾀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면 이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서인의 공격
선조 22년(1589년)에는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조헌(趙憲)의 소로 인해 사직했다. 이때는 정여립의 난이 일으킨 후폭풍으로 인해 동인들이 일망타진당하던 시기였다. 류성룡도 큰 위기에 처했다. 같은 해 12월 14일 전라도 유생 등이 이산해(李山海·1539~1609년), 정언신(鄭彦信),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 등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류성룡을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류성룡은 소위 사류(士類)로 일신(一身)에 큰 명망을 차지하고 시론(時論)을 주관하면서 남의 말을 교묘히 피합니다. 이전의 일은 추구(推究)할 필요가 없으나, 요즘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도 사당(邪黨)을 배치시킬 뿐, 충현(忠賢)을 끌어들여 지난번의 과오를 고치는 계책으로 삼겠다는 한마디의 말도 없으며, 도리어 우성전(禹性傳·1542~1593년)이 이산해·김응남(金應南) 등의 기세를 꺾으려 한다 하여 옛 친구를 배반하고 새 붕당에 구합(苟合)하며, 매번 역적을 위하여 부회(傅會)와 찬양으로 온갖 정태(情態)를 써서 그를 끌어들여 우익을 삼으려고 천의(天意·임금의 뜻)를 탐지하고 병관(兵官)에 주의하여 낙점까지 받았으나, 그때 마침 조헌의 소가 올라와 취임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만약 병정(兵政)을 차지하여 흉모(凶謀)를 재촉하였다면 당당한 국가야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혈전(血戰)에 임한 군사들이야 어찌 조그마한 손해뿐이겠습니까. 류성룡은 진실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만약 반성해본다면 태양 아래서 어떻게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
서인 입장에서도 류성룡을 옭아맬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평소 진중한 언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선조는 오히려 이틀 후에 특지(特旨)로 류성룡을 이조판서에 임명한다. 류성룡은 사직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저의’ 문제로 정철 실각
이런 총애에 힘입어 49세 때인 1590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를 겸직했다. 그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영의정은 이산해, 좌의정은 정철이었다. 이산해는 동인이었고 실권은 서인인 정철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 즉 세자를 세우자고 했다가 한순간에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몰락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2월 우의정 류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와 영의정 이산해와 더불어 삼정승이 임금을 찾아뵙고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산해와 류성룡은 동인(이어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당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을 못 낳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암암리에 ‘광해군 세자론’이 퍼져 있던 때였다. 정철은 류성룡의 제안이 있었고 이산해와 류성룡은 같은 당파이니 서로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삼정승 중에서 가장 힘이 막강한 좌의정이니 임금을 만나는 경연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다.
경연에서 정철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선조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문제는 그 순간 이산해와 류성룡이 아무 말도 안 했다는 사실이다. 이산해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다. 결국 정철은 파직당해 마천령 넘어 함경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여기서 정철이 옳고 이산해가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당시는 정여립의 난 직후였기 때문에 서로 피 말리는 정쟁을 하던 중이었다. 문제는 이산해가 구사한 술수가 지극히 고전적인 수법이라는 사실이다.
진덕수의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따르면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B.C.112)은 공손홍(公孫弘)과 더불어 함께 황제에게 아뢰기로 했다가 정작 황제 앞에 이르자 급암은 자신의 품은 바를 남김없이 다 말했는데 공손홍은 오히려 면전에서 아첨을 일삼았다.
이처럼 함께 아뢰기로 했다가 면전에서 표변하는 수법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재위 712~756년) 때도 등장한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사례다. 당나라 현종은 삭방절도사 우선객(牛仙客)이 비용도 절감하고 무기 개량도 잘했다 하여 봉읍에서 실제로 받는 조세인 실봉(實封)을 높여주려 했다. 이에 충직한 성품의 장구령(張九齡)은 재상 이임보(李林甫)에게 말했다.
“실봉을 상으로 주는 것은 명신(名臣)과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인데 어찌 변방의 장수를 고위직에 올리면서 이리 급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공과 더불어 힘껏 간언을 올려봅시다.”
아첨에 능한 이임보는 그러자며 허락했다. 그러나 정작 황제에게 나아가 뵈었을 때 장구령은 할 말을 다 했지만 이임보는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이임보는 물러 나와서 장구령의 말을 우선객에게 흘렸다. 다음날 우선객이 황제를 알현하여 울면서 호소하자 황제는 다시 우선객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고 조정의 논의에 부쳤다. 여기서도 장구령은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그 순간 이임보가 “재능이 중요하지 사람됨을 말합니까? 천자가 사람을 쓰겠다는데 어찌하여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황제는 이임보는 꽉 막혀 있지 않아 좋다고 여겼다.
정철이 당시 고위 관리들의 필독서였던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제대로 보았다면 거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낡은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로 서인은 몰락했다. 이 사례는 류성룡이 정치 술수에도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얼마 후 좌의정에 오르는데 이때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다. 그에 대한 선조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戰時 재상으로 국난 극복
그러나 좌의정에 오른 류성룡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선 건국 200년 만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히려 류성룡의 활약은 눈부시다는 말만으로는 다 할 수 없을 만큼 국난(國難) 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기도 했다. 전란의 와중에도 당쟁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격화됐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전쟁 발발 직후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돼 왕을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따르는 일)했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됐다. 다시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 해에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다.
그해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한양으로 돌아와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순신(李舜臣)의 후원자 역할을 맡아 남해 바다를 지켜낸 공 또한 빠트릴 수 없다.
북인, 류성룡을 진회로 몰아세우다
선조 31년(1598년) 12월 6일 북인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주도한 홍문관 관리들이 소를 올려 류성룡을 탄핵했다. 그 배후에는 정인홍이 있었다.
“전 풍원 부원군 류성룡은 성품이 강퍅하고 행실이 사악할뿐더러 권병(權柄·권세)을 잡았을 때에는 그의 세력이 불길처럼 치솟아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화의(和議)를 주창하여 호택(胡澤) 심유경(沈惟敬)의 말에 부회하면서 감히 최황(崔滉)의 정직한 변론을 꺾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니, 송(宋)나라 때 진회(秦檜·1090~1155년)가 증개(曾開)를 매섭게 꾸짖은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회는 천하의 사람들이 자기를 논의할까 두려워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류성룡은 서신과 폐물(幣物)을 몰래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는 또한 진회의 죄인입니다.
옛날에 호전(胡銓)이 글을 올려 진회를 참수할 것을 청했는데, 노추(虜酋)에게 그 말이 전해지자 군신이 놀라면서 송나라에도 사람이 있다고 감탄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양사(兩司)의 논의가 실제로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고 화의를 주창한 자를 죄주자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신들도 그 말을 듣고 놀랄지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양사의 주청에 따르시어 신인(神人)의 분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소서.”
류성룡은 전란 내내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의 힘을 쏟았으나 전쟁이 끝나가던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류성룡은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 정경세는 말한다.
“애초에 정인홍은 평소 공을 원수로 여겨 음해하려 하였는데 대신으로서 공을 미워하는 자와 멀리에서 서로 결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인홍의 문객 문홍도(文弘道)가 정언(正言)이 되자 어깨에 힘을 주며 맡고 나서 온갖 말로 헐뜯으며 당(唐)과 남송(南宋) 때의 간신인 노기(盧杞)와 진회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조선에서는 그 후에도 주화(主和)를 주장하는 대신을 진회라고 몰아세웠다.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도 진회로 몰렸다.
《징비록(懲毖錄)》
류성룡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그가 은거하여 처음 한 일은 퇴계 이황 연보(年譜) 편찬이었다. 평생을 조선, 그것도 선조를 위해 봉사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독한 불명예였다. 그로서는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가 남긴 책 《징비록(懲毖錄)》을 읽어보면 그 원통함이 행간에 남아 있는 듯하다. 명재상이었으나 결코 행복했던 벼슬살이는 아니었다.
선조 40년(1607년) 류성룡은 졸했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했다. 〈류성룡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禮)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義理)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베이징)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나 힐난(詰難)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
‘국가의 안위가 그에게 의지’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그에 의지하였는데, 정인홍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인홍이 매번 공손홍(公孫弘)이라 배척하였고, 류성룡 역시 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같았다.
류성룡은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퇴계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1593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慷慨·원통하고 슬픔)해 마지않았는데 지난해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絶交)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는다.
류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상(임금)의 권우(眷遇·임금이 신하를 후하게 대우함)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류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할 때가 많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규모(規模)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直諫)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혼자 결정하고 단행함)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1589년)의 변에 권간(權奸)이 화(禍)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逆獄)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山林)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君臣)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千古)에 한(恨)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해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신구(伸救)하는 상소 가운데 ‘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器局)이 부족하고 대신(大臣)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무술년(1598년) 겨울에 (명나라에) 변무(辨誣)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사피함으로써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었고 상이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훈련도감,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졸기에는 그의 장점을 이렇게 기록했다. 〈임진난이 일어난 뒤 건의하여 처음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砲)·사(射)·살(殺)의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외방의 산성(山城)을 수선(修繕)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비어책(備禦策)으로 삼았다. 그러나 류성룡이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유독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그의 단점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실없는 말로 놀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