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루 - 함주시초2
- 백 석 -
장진(長津) 땅이 지붕넘어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등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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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양순할매는 아직 나이가 60살도 안된 새까만 머리숱이 수북한 할매인데
원래 고향은 김제 원평이나 어릴때 새로 결혼하는 아버지를 따라 동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들어 갔다가 새 엄마에게 잘못 보였는지 그 집에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세월따라 떠돌며 학교 한번 제대로 못가고 결혼한번 제대로 못해 정 붙일데 하나
없이 식당집 주방 찬모 같은일 하며 이나이 되도록 살다가 칠팔년전 이동네에 혼자
사는 광식할배 하고 신접살림을 시작하였는데 승질은 좀 있지만 맘씨하나는 무지
하게 착한 사람입니다. 인정은 또 얼마나 많다구요..
광식 할배는 십여년전 본각시가 갑자기 병으로 죽고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덩그런 시골집에 살며 혼자 끓여먹고 혼자 이불빨래하며 그렇게 오륙년을 홀아비
로 지내다 요행이 양순할매 만나 요새는 소도 키우고 마늘 농사도 지으며 부지런히
살지만 머리가 아주 허옇고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70도 넘은 냥반인데 혼자살때
늘은 술이 아직도 줄어들지 않고 있어 항상 양순 할매가 그것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습니다.
양순할매는 노상 광식할배 본 각시 묏동이 잘못 되었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광식할배 자식들이 모두 하나 같이 잘 안풀리기 때문입니다.
그 중 사십중반인 큰아들은 전주 나가서 무슨 건축자재사업 하다가 쫄딱 말아먹어
광식할배가 혁신도시 땅장사들에게 가진 논 다섯 필지 몽땅 팔아서 빚을 갚아주었
는데도 삼년도 안되어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 갔다고 얼마전 양순 할매가 그 집에
가서 이삿짐도 싸주고 들어갈 집 청소도 해주고 몇 일을 다니며 고생하다 왔습니다.
애들이 아직 어린데 큰아들 각시가 집을 나가 소식이 없다고 광식할배 알까 속으
로만 끙끙대며 양순할매는 연신 뻐끔 담배를 피웠습니다.
참깨 좀 털면 그걸 이고 전주가고 고추좀 말리면 보따리 싸서 익산가며 이집저집
광식 할배 자식들 몰래 챙기는 것이 양순할매 일입니다.
들어올때는 면 소재지 장터에서 광식 할배 술국거리 사다가 끼니때 마다 할배 몸
챙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광식할배는 양순할매 없으면 진작에 저 세상으로 갔지 싶습니다.
얼마전 양순할매와 저의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것 같더니 갑자기 양순할매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슨 지난밤에 광식할배가 술이 만취가 되어 양순할매한테 나가라고 했다
는 것이 었습니다.
"야이 오살헐년아 이천만원 줄팅게 당장 이집에서 나가 이년아!"
그 할배 이천만원은 커녕 단돈 이십만원도 없을겁니다.
그건 할배가 할매한테 너무 미안한게 많아서 그런거라고, 의지할데라고는 할매밖에
없으니 투정부리는 거라고 위로 하려다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할매가 일찌감치 금구면 소재지에 나가 쉽게 돌아오지 않자 광식할배는 버스
정류장 마을 회관앞에 나와 흘끔흘끔 소재지 쪽을 엿보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며 얼른 먼데 산으로 눈길을 돌리지만 부신듯 눈시울이 가랑
가랑 하였습니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할배 밥 굶길 생각이었는지 양순할매는 새로 두시가 다 되어서
집에 돌아왔고 소 여물하고 토란대 말리는 것에만 분주한체 합니다.
광식할배는 짐짓 점잔은 표정을 하고 딴청을 부리지만 그 안도하는 속마음을 다 알지요.
모르긴 해도 양순할매 장보따리엔 광식할배가 좋아하는 뼈다구 술국감이 들어 있을
겝니다.
양순 할매의 무릎 관절이 안 좋아서 요새는 전주에 있는 큰 병원 다녀오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아직도 어디 식당을 나가면 한달에 백만원은 문제 없다고 호기를 부리지만 그 역정 큰
소리도 이내 큰아들 사는 걱정 어린것들이 불쌍타는 한숨뒤로 숨어 버리고..
영감탱이 술좀 작작 했으면 살것다고 완두콩 꼬투리 따는 손이 빨라집니다.
촌에서 사는게 다 그렇지요.
소값이라도 좋으면 몇마리 팔아 할배 빚이라도 갚을 터인데 요새는 사료값이 비싸 소는
커녕 갱아지도 못 키우겠다고 그럽니다.
할배 술값만 아껴도 빚 다 갚고 떼부자 되겠다고 어느새 쿨렁 왜소해진 할배 등뒤로
한바탕 쏘아 대지만 일전에 그 일이 있고난 뒤로 할배가 많이 점잔해 진것 같아 양순할매
눈물 날일이 줄어든 듯 합니다.
뙤약볕 아래서 참깨 밑둥에 낫질을 하는 양순 할매를 멀리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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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 새끼가 터앞 당콩순을 다 먹어 속이 상한것 보다
양순할매와 광식할배 건강이 자꾸 안좋아 지는 것이 안타까운것 보다
산골 사람과 노루 새끼가 서로 닮었다 하니
세상 여린 목숨들이 모다 슬퍼졌습니다.
첫댓글 구수하네요
가장 다정했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