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핑계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분명 인간이 당신을 도울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성경에서 다윗은 작은 목동에 불과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골리앗 같은 거인을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작은 물매와 돌로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 이야기는 외형적인 강함이나 능력보다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 주며, 작고 연약해 보이는 존재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잔 다르크는 농촌 출신의 평범한 소녀로, 군사적 훈련이나 정치적 권력이 전혀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프랑스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랑은 마중물과 같습니다.
마중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려면 그에 맞는 사랑만 조금 집어넣으면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해 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우리를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 ‘망상활동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 가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활동계는 뇌간에 있는 신경 네트워크로, 뇌와 신체 사이의 경계를 조절하고 의식, 주의력,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적으로, RAS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행장에서 쇼핑에 정신이 팔려 시계를 보니 이미 비행기 이륙시간이 지났습니다.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부쳤기 때문에 자기 없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주위는 자기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집중됩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고 이미 20분 전부터 방송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전에는 듣지 못했을까요? 망상활동계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오스카 쉰들러가 어떻게 1,100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구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발동하자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자동차와 나치 금배지를 팔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 정도까지의 의지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이게 됩니다.
줄 것이 없었다면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 보다는 ‘오늘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지?’라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지기만 하면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사랑하려는 의지.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0일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복음: 루카 9,23-26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젊은 시절,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이 기억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과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깊은 감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내게 수도회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으니, 어서 빨리 돌아가서 이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 돈보스코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마구 솟구쳤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마카오에서의 길고 긴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나 저와는 달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고국 땅 조선의 상황은 암담하고 살벌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었기에, 입국 과정은 철저하게도 은밀했습니다.
입국 과정은 소설 몇 권을 써도 남을 정도로 처절하고 위험했습니다.
육로가 꽉 막혀있으니 바닷길을 선택하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건너오다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조선 땅을 밟았지만, 언제나 사람 눈을 피해 산길로, 밤길을 쉼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숙박을 청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노숙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끼니를 자주 건너뛰니 건강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건강한 장정도 견뎌내지 못할 여행길에 온몸은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피 흘리는 순교 이전에 이미 땀과 일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활활 한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적색 순교자들로 흘러 넘치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백색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박해 시대가 지나가면서 순교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의 의미, 순교의 개념이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흘림 없는 순교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흘림 없는 순교를 영적 순교,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간 수도자들, 고행자들,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증거•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백색 순교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종교 자유 이후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겼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 역시 순교입니다.”
백색 순교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각자 삶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증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비록 피를 흘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사람이 되며, 백색 순교자로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강론>
(2024. 9. 20. 금)(루카 8,1-3)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아십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1) 복음서 저자가 여자들의 명단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열두 사도만큼이나 중요한 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여자들의 명단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모든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지만(마르 14,50), 여자들은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지켜보았고, 사도들이 숨어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마태 28,1-8).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서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여자들의 이름을 따로 특별히 기록해 놓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앙을 증언하는 ‘증인들’도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명단이 똑같지 않고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보통 ‘전승의 차이’ 라고 말하는데, ‘전승의 차이’는 사실 ‘기억의 차이’입니다.
예수님 승천 뒤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사람마다 기억에 차이가 생겼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다른 자료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만 의존해서 명단을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다른 여자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시중을 들던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아서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한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간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모두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데리고 가는 것은, 양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수가 몇 십억 명이라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 신앙인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시고,
신앙인들이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내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3) 우리 교회에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순교자들인데, 우리가 그분들의 이름을 모르고, 그분들의 삶을 모른다고 해도,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순교한 일의 가치와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전해지든지 전해지지 않든지 간에 모든 순교자는 다 위대합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서나 ‘무명 순교자’일 뿐이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니, 그곳에서는 결코 무명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신앙인들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기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