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토의 남성 연주자 6명. 왼쪽부터 패트릭 지(첼로), 스테판 재키브(바이올린), 리처드 용재 오닐(비올라), 지용(피아노), 자니 리(바이올린) 그리고 마이클 니컬러스(첼로). | | |
화엄 또는 화음 / 임동확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화엄이라는 말을
화음으로 잘못 알아들은 당시 아홉 살짜리 딸이
"응 그 뜻을 나도 알겠다"며 내게 설명하려 들던 일이
몇 년을 두고 기억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일생을 면벽하고도 도달하지 못할 화엄의 경계를
마치 나비 한 마리, 흰 구름 한 점이 지리산을 넘어가듯
필시 알아갈수록 엄청난 압박이고 구속일 게 분명한 관념어의 등선을
제가 피아노를 배우며 귀동냥했을 화음쯤으로
선뜻 받아들여 내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우린 그렇게라도 행복할 수 있었으며
종내는 무의미했을 관념의 제국들조차
한때나마 누구에게든 넉넉하고 아늑한
희망의 샘이 되어주었으리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린 앞으로도 한참 동안
그처럼 밉지 않은 오류와 오독의 길 위를 서성이리라
그리하여 어느새 수정하거나 번복하고 싶지 않은
하나씩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시집 <처음 사랑을 느꼈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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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이는 학교를 땡땡이 쳤다. 대신 호기심 많은 지용은 노교수의 지하 서재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레 밟아 내려갔다. 굳게 잠긴 문을 열기위해 전날 잭슨 교수의 호주머니를 뒤져 비밀의 열쇠를 찾아낸 것이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새벽 그 곳의 문을 연다. 두리번거리며 먼지 자욱한 서가를 입으로 후 불어본다. 그러나 ‘화엄’이란 마법의 상자는 보이지 않는다. 책 속엔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들, 주변엔 낡은 축음기와 라디오들도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낡은 진공관 라디오 하나를 찾아 볼륨을 올린다. 소리가 들린다. "어, 플러그가 빠졌는데" 하지만 한쪽 벽면 구석에 쳐진 붉은 색 커튼 안에서 계속 소리가 난다. 지용은 커튼을 천천히 열었다. "이게 뭐야?!" 그곳엔 인형이 아닌 다섯 명의 사람이 쉬지 않고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조금 다가서자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그들이 있는 곳으로 빨려들었다. 지용은 비어있는 피아노 앞자리에 앉았다. 열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그들이 내는 ‘화음’의 마법 같은 세계로 돌연 끼어든 것이다.
사실 지용이가 피아노 앞에 처음 앉아 본 건 네 살 때였다. 어느 날 음악학원을 하던 엄마가 원생들을 다 보내놓고 뒷정리를 하는데 한쪽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둘러봐도 눈에 띄는 아이는 없는데 지용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그 때 지용이가 두드린 곡은 조금 전 여중생이 반복해서 쳤던 베토벤 소나타였고, 그의 첫 피아노 연주곡이었던 셈이다. 음악학원을 하곤 있지만 엄마가 따로 가르친바 전혀 없고, 악보를 보고 쳤을 리도 없으니 그야말로 절대음감의 청음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아이의 능력을 본 지용의 부모는 일곱 살 때부터 본격적인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고 여덟 살이 되던 1999년에 보다 전문적인 실력 평가를 위해 미국을 찾았다. 지용을 본 미국 메네스 음대의 학장과 김유리 교수는 미국 유학을 권했고 가족은 다음해 3월 미국으로 이민했다. 지용이 아빠는 당시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였고, 엄마가 운영하던 음악학원도 썩 괜찮은 상황에서 그들의 모든 걸 접고 세탁기술 하나 달랑 배워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다음해인 10세 때 지용은 뉴욕 필하모닉 영 아티스트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하였고, 이듬해 미국 굴지의 클래식 매니지먼트사 IMG와 최연소 아티스트로 계약했다. 바이올린과 달리 악기 사이즈가 커 신동이 극히 드문 피아노 분야에서 그는 이렇게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리며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그 후 100여년 역사의 세계적 음악제 미국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선정되어 솔로 리사이틀을 가졌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도 1999년 이 페스티벌에 선 이후 세계적 아티스트로 발돋움 한 바 있다. 하지만 지용은 다른 여느 음악 영재들과는 달리 주말에는 줄리아드 예비 학교에 다니지만, 주중에는 뉴저지의 퍼블릭 스쿨에서 공부하는 평범한 고교생이다. 농구와 미식축구를 즐기고, 온라인 게임과 채팅에도 재미를 붙인 그에게 엄마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농구 때문에 손가락에 잔부상이 멈출 날이 없는데, 지용은 지용대로 그 잔소리 때문에 요즘엔 맘 놓고 운동도 못한다며 투덜댄다.
“음악만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음악가가 되기 위한 절반의 조건이다. 나머지 절반은 인생의 경험이다. 만일 책을 읽지 않거나 또래 친구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자신만의 개성과 안목을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지용이 평범한 일반 학생들과 함께 10대 생활을 즐기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지용의 부모와 지용을 ‘제2의 키신’으로 치켜세우는 소속사 IMG측의 일치된 견해다. 그래서 학교 친구들은 그가 프로 연주자인 것도 잘 모른다며, “먼 곳으로 콘서트를 하러 갈 때면 친구들이 ‘이기고 돌아오라’고 말해 줘요. 피아노를 ‘플레이(Play)’하는 게 ‘연주’가 아니라 ‘경기’인 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런 지용이 며칠 전 한국에 왔다. 지난 시즌 1,2를 통해 클래식 음악의 무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앙상블 디토(Ensemble DITTO)의 최연소 막내 멤버가 되어 한국을 찾았다. 앙상블의 리더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을 비롯해 바이올리니스트 쟈니 리와 스테판 자키, 첼리스트 패트릭 지와 마이클 니콜라스와 함께. 지용은 지난 시즌까지 디토 멤버였던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교체 멤버다. 이들은 더욱 풍성해진 레퍼토리와 국내 주요도시 순회공연으로 '클래식의 6월'을 장식할 것이다.
오늘 그 디토의 공연이 대구에서 있고, 나는 그 공연을 보러 간다. 정확히 말하면 공연 보다는 지용이를 보러 간다. 지용은 내 외사촌 동생 김관호의 아들이다. 지용이가 다섯 살 되던 해 명절날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만원을 직접 지불한 적도 있다. 그것도 피아노 연주를 다 듣고 머리 쓰다듬으며 준 게 아니라 발칙하게 돈, 그것도 배춧이파리를 줘야 연주(?)하겠다고 유세를 부렸기 때문이다.
당시 나와 다른 가족 친지들은 지용이의 천재성이 그 정도일 줄은 까맣게 몰랐다. 그저 유치원 재롱잔치나 피아노 대회에 나가면 상위권에 입상은 하겠다고 생각했었고, 당시엔 그런 프로가 없었지만 ‘스타킹’에 나가도 될 정도라 여겼지 지금의 지용의 모습을 보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한 살 아래인 동생이 국내에서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정리하고 지용에게 올인 할 때는 모두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며 말렸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참 멀리 왔으나 시에서처럼 ‘화엄’을 ‘화음’으로 오독한 시인의 딸아이와 같이 지용이도 그럴 것이라 예단했고 그에게 다 걸기한 동생 내외의 생각도 오판이 아닐까 염려했었다.
불우한 시대의 가난한 무명화가인 아버지(나에겐 외삼촌)를 경험한 탓일까. 처음엔 제수씨의 강력한 드라이브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생의 결심도 아주 단단해 보였다. 지금 독실한 크리스챤인 동생과 제수씨는 힘들게 세탁소 일을 하면서도 아들에게 ‘네 재능은 네 것만이 아니니까 이웃을 위해 쓰라’는 말로 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앙상블 디토의 문화적 신념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합류를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커피 CF에 국민배우 안성기와 출연하고 있는 용재오닐 뿐 아니라 수필가이자 영문학자로 이름난 고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이며, 하버드를 졸업(음악학·심리학)한 스테판 재키 등 다른 멤버들의 생각도 동일하다.
그들 멤버는 얼마 전 롯데 백화점 광고에 출연하면서 더욱 대중들과 가까워졌고, 국내 클래식음악계의 ‘꽃남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연주회장 밖으로도 인기가 확산되면서 20, 30대 여성 관객을 중심으로 ‘클래식 오빠부대’신드롬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이번 시즌의 테마는 여섯 남자의 사랑이야기, 'LOVE'라고 한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절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슈만과 클라라의 음악과 우리가 꿈꾸는 가장 로맨틱한 도시 '피렌체의 추억' 등 디토 멤버들은 클래식 음악을 통한 삶과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디토’는 클래식 작품 중 기분전환을 위한 밝은 음악을 지칭하는 ‘디베르 멘토’의 줄임말이자 ‘동감’을 뜻하는 영어다. 정통클래식을 추구하며 보다 젊은 관객들과 음악적 공감대를 나누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앙상블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한 지용이 앞에 ‘오류와 오독의 길 위를 서성’인건 결국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나는 오늘 저녁 그 앙상블의 ‘화음’에 ‘동감’하면서 ‘화엄’의 세계로 깊게 빠져볼 요량이다. 순간일지라도 ‘일생을 면벽하고도 도달하지 못할 화엄의 경계를’ 오늘 허물어보리라. ‘그리하여 어느새 수정하거나 번복하고 싶지 않은 하나씩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참고> 6월27,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의 디토 페스티벌을 비롯해 8개 도시 순회공연이 예정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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