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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알비스가 나름대로 하다가, 안케님 연재에 뭔가 자극을 받아 시작합니다. 게임 중간에 AAR화 하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알비스가 어느정도 시간 후에 가서야 스크린샷을 도입할 것임을 밝힙니다.
* 게임에 저장되있던 역사 파일을 찾아내서 기록한것이기도 합니다.
1836~1845 기간의 일입니다.
"나도 그 말을 봤는데, 그 말은 철로 만들어진것 같으니, 이를 보며 아무리 날랜 기병이 말을 타고 가 봤다지만, 철마가 30리를 달리는 동안 말은 15리밖에 달리지 못하였다." - 어느 백성이 회고하여 '나'에게 일러준 이야기 중 하나.
1836년,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를 통해 일본에서는 란가쿠(蘭學)이 존재할 때, 조선은 어렵게 그들의 서적을 어느정도 찾아내었고, 역관을 통해 네덜란드에서 기술을 들여왔다. 조선은 이제 새 시작을 내딛었다.
(사실 게임에서 네덜란드에게서 네빌을 이용해 근대 기술을 먹었거든요.)
변화의 소식은 북쪽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첫날부터의 불안의 시초였다. 3월 8일, 함경도 경성부에서 농민전쟁 일어났다. 그들은 북병영의 병기를 노획하여 무장하였기에 쉽사리 그 일대를 장악하였다. 조정은 급히 함경 남병영의 군대를 동원하여 막아보려 했지만, 성진에서 패배하여 기세가 기울어진 뒤, 6월에 가서는 이원과 북청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조정의 예상으로는 원산이나 강릉, 철원등지로 내려올 듯 했지만, 그들은 강계와 혜산일대로 이동하여 장기전 양상을 보였다. 7월 11일, 의주와 안주에서 파견된 부대조차 적유령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그들에게도 내부 갈등은 있었는가? 그들은 공교롭게도 5월 17일 농민군에 동조하였던 농민들이 강릉에서 봉기하였다 진압된 폭동을 계기로 지휘부간에 분열이 생기고 말았다. 그들은 한동안 남쪽, 아니 적유령을 넘지 않았다. 9월 16일, 반란군 진압을 위하여 5군영군의 병력을 징발하여 한성에서 달려온 정예부대는 근처 희천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10월 15일, 적유령에 진을 치고 있던 반란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여 11월 3일에 가서 그들의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주모자들은 전부 한성으로 압송되어 의금부의 심문을 거쳐 능지처참 당하였다.
그렇지만 잔당과의 전투 때문에 제대로 행정력이 발휘되지 아니하여, 1836년 6월 3일에 가서야 경성부에서 행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반란이 북쪽을 휩쓴다한들, 조선의 변화는 지속되었다. 조선은 재빨리 네덜란드인들의 도움을 얻어 유럽의 병법을 익히고, 청나라에 있던 서양인들에게도 자문을 얻기도 하였다. 조선은 재빨리 5군영의 군인들부터 유럽이라는 머나먼 땅의 군인들처럼 만들기 시작하였다. 1837년 2월 5일, 그들은 법국(法國)의 조미니(Baron de Jomini Henri)라는 자가 주창한 병법을 따라 병참을 중시한다는 결정을 내려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아마 농민전쟁때 병참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북쪽이 불안했던 것이 원인인 듯하였다. 그리고 그 원칙은 그 해의 8월 5일 가서 전국적으로 실시된다는 윤음이 발표되었다.
* 윤음: 국왕이 발표하는 일종의 담화문
1836년 12월 6일, 각도의 조운선과 일부 경강상인의 배를 모아 수송대를 창설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계속 조운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는 근해의 물자를 수상에서 보급토록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1837년 3월 3일, 삼짓날. 조선의 5군영군이 근대화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한성 거리를 행진하였다. 각 지방의 병영에도 1000명가량밖에 안 되었지만 5군영군의 병기로 무장한 무장대가 창설되어 평양, 경성, 북청, 원주, 해주, 강진, 전주, 충주, 공주, 대구, 진주등지의 거리에서 행진하였다. 경제적인 변화도 있었다. 5월 20일, 전국의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모여 비록 나무로 만들었지만, 서양에서도 기계라 불러도 될 만한 능력의 탈곡기를 만들었다. 마침 가지고 있던 봄에 수확한 보리를 탈곡하는 모습을 생생히 왕과 공조판서 앞에서 선보였다.
6월에 가서 전국의 도로는 많이 넓어졌고, 특히 새재의 길은 넓어져 새재를 드나드는 나그네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한다. 8월, 제주부에 서귀포진을 설치하여 수군의 새로운 근거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신작로라 하였다.
1838년 3월, 조선에 새로운 서적이 하나 들어왔다. 청나라와 일본을 통해 수입된 책에는 석탄을 다루는 법에 관한것이 실려있었다. 전국의 석탄 광산은 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39년 7월 8일, 전국 각지에 수공업장등을 모은 '공장'이 들어섰다. 어느정도 기계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직 생산량은 미미했다. 조선은 아직 유럽의 한 개 큰 지방정도 수준의 생산력 수준이었다.
1840년 1월 6일, 조선은 함경도 경성부에 새로운 조선소를 열었다. 경성의 반란을 어느 정도 줄이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그곳에 세운 것이었다. 한편, 8월에 잠시 학질이 유행하려 했으나 규녕(奎寧, 퀴닌)이라는 약이 유럽에서 도입되어 학질의 발생량이 줄어 사망자는 단 1명뿐이었고, 그나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자였다.
1841년, 드디어 영일만 근처에 '강철'이라고만 알려진 새로운 '무쇠'를 만드는 제철소가 건립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한(큰) 대장간'이라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제철소'라고 일러줬다 하지만이였다.
그해 7월, 왕은 명령하였다. "백성 모두가 다 같이 부르며, 과인에게 충을 다짐하는 곡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만, 아악반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인들은 이를 보고, '조선은 아직 국가(國歌)를 만들지 못하는 나라다. 음악가라는 게 없어서'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해는 과연 철마의 시대였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과 사노비들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건설한 철마가 그 위세를 드러내었다. 부역으로 동원된 농민과 노비들은 철마를 보고 놀라하였다. 관료들은 이를 '기차'와 '철도'라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철마는 인천, 대구, 동래포, 전주, 공주, 한밭, 광주, 목포·해남, 진남포, 의주등 전국 각지에 다 같이 달렸다. 조운선 담당자들은 한동안 철도를 습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양에서 들여온 새 수송선을 이용해 제주도나 남해안의 섬, 일본등지의 물자를 수송하거나 교역하기도 하였고, 아니면 수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미 조운제도는 신작로를 이용하라는 명령에 따라 세곡을 신작로로 나르다가, 기차로 나르기 시작하였다.
그해 12월 15일에는 웅기에 폭약창이 들어섰다. 그들의 폭약의 괴성은 천지를 요동하여 근처의 닭과 돼지들은 거의 며칠을 못 가 백정들의 손에 넘겨져야만 했다.
1842년 2월 22일, 양주의 남쪽 한강변에 양조장이 설치되었다. 이천과 여주의 쌀을 양평을 통해 날라서 곡주를 빚었다. 그 양조장이 설치되던 날, 종로 거리에는 '계몽사상' 이라는 책이 팔리기 시작하였는데, 삼백권을 준비하였다지만 천 오백명이 몰려오니 닷새가 아니라 다섯 주동안 천 이백여 권을 다시 내야 했었다. 그만큼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그 인기를 이어 '현상주의'는 9월, '낭만주의'는 1843년 3월에 출간되어 다시금 장안의 화두가 되었다. 이를 쓴 육문현(陸文賢)이라는 자는 그 이후 '조선 3대 서양사상학자'라 불리기도 하였다.
* 육문현은 가상인물입니다.
1843년 3월 18일, 새남터는 총성이 요란하였다.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다시금 옛 정권을 세우려는 역적들과 외인들이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장비는 압수되었지만, 조선군은 이를 보고 총포를 급히 모방하여 9월 공개된 총포를 만들기도 하였다. 서양인들은 이를 보고 '전장식 총포'라 불렀다.
그해, 황해도 송립의 겸이포에는 영일만의 그 제철소가 새로 문을 열였는데, 이때에는 영일만과 크기와 생산량이 비슷해서, 두 제철소의 생산량이 유럽의 1개 대형 제철소 수준에 이르렀다.
1844년 1845년, 그 두 해에는 조선 외부만 시끄러웠지, 보통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최초의 '상업목적의 은행'인 '양원은행'이 종로의 두 개의 점포를 터서 문을 열고 조선인들에게는 생소한 '금융'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평양에 새로운 물질인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이 설립되었다;.
그때의 세계
조선에서는 반란이 불길이 타오르던 그때, 유럽의 백이의(白耳義, 벨기에)와 화란은 내전에 휩싸였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치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고, 전쟁은 유럽국가들의 중재로 어느정도 끝났지만, 륜돈(伦敦, 런던)에서 맹약으로 이를 화해하려 하였다만, 3년 뒤(1839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백이의는 독립국임을 인정받았다.
1837년, 영국에서는 유다리아 여왕(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였다. 그 해 법국(프랑스)은 아이급리아(阿尔及利亚, 알제리)를 무력으로 침탈하여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1938년에는 영국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이라는 작품이 발간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6년뒤 조선에도 '고추루'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해 토이기(土耳其)의 황제였던 술탄 압둘 메지드 1세는 자국의 헌법을 도입한다 하였지만 외국인들의 조언은 받지 아니하였다.
한편, 그 나라에는 위기가 있었는데, 애급(埃及)의 지도자 아라비 파샤가 이끄는 군대가 파륵사탄(巴勒斯坦, 팔레스타인)에 주둔하던 토이기군을 급습하였다. 이에 놀란 영국이나 보로서(普魯西, 프로이센)은 토이기를 지지하였고, 법국은 애급을 지원하였다.
1839년 ,청의 임칙서는 자국의 아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경하게 대처하였으나, 영국은 무력을 동원하려 했으나, 거리가 멀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1842년, 영국의 노동자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들이 벌인 '인민헌장 운동'이 성공하여 어느정도의 권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중미의 중미주련합성(中美洲联合省, 중앙아메리카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어 위지마랍(危地马拉, 과테말라)·니가랍과(尼加拉瓜, 니콰라과)·살이와다(薩爾瓦多, 엘살바도르)·굉도랍사(宏都拉斯, 온두라스)·가사대려가(哥斯大黎加, 코스타리카)로 분리되었다.
그해, 애급의 지도자 아라비 파샤가 이끄는 애급 군대는 결국 토이기 제국군에 항복하고 파륵사탄에서 전면 철수하였다.
1843년은 청국에 있어 치욕적인 해였다. 영국군은 6월 26일부터 (香港, 홍콩)과 광주(廣州, 광저우)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청군은 궤멸되었다. 이에 놀랜 청은 항복하고 남경(南京, 난징)에서 맹약을 맺고 항향을 넘겨줘야만 했다.
그해 일본은 화란의 국왕으로부터 '근대화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내용의 국서를 받았지만, 국제정세라는것을 모르던 일본은 이 서신을 거부하였다.
1845년, 서서(瑞西, 스위스) 동맹은 특별동맹 반란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영국의 지원으로 특별동맹이라는 자국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해 애란(愛蘭,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영국을 원망하였다. 자국에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도의 펀자브와 신드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하기도 하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소홀하게 다루었던 다른 나라 이야기도 써 주시니 더 좋네요.
잘 읽고갑니다.
오오오오오 알비스님의 연재입니다[응?]
안케패스님이나 알비스님 글 읽으면 마치 중국에서 세계사 공부하는듯 ㅋㅋ 아이급리아 강추~!아얼지리아~
사실 '대한뉴스' (정부 수립때부터 94년까지 극장을 통해 상영된 국정 홍보 영상물)에서도 터키를 토이기라고 발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상으로 확인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중국어식 표기를 버리고 원어나 영어식 표기를 한 건 짧습니다.
법국은 어느나라? 프랑스인가요?
옙 불란서입니다[동문서답?] 토이기는 오스만 대식국 그런데 살펴보니 주룽반도쪽은 (香港, 홍콩)만 나와있군요[응?]
Daumkang/ 주룽반도는 제 2차 아편전쟁에 가서야 영국이 조차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