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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에페소 4,1-7.11-13 마태오 9,9-13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이 될 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신가요?
십자가에 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만큼 예수님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예수님이기보다는 자비의 예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신 이유는 무언가 보여주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주님의 식탁에는 죄인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가시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은 그래서 그분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정말이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한 말기 간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습니다.
그 환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 있었고 친척들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신부님이 일어설 때 그가 신부님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죄 없어.”
이 말은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죄인인데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도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만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가 아니라 본성을 보신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화가 솟아나는지를 보십니다.
화가 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후회할 죄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본성이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결코 자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누구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나 제물이나 봉사가 아니라 바로 ‘자비’ 하나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에서부터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이 부르심 받은 이 은총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만이 결코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 마태 9,9-13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강론>
(2024. 9. 21. 토)(마태 9,9-13)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1)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마태오도 갑작스럽게 응답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부 출신 사도들의 경우처럼,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눈여겨보시다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곧바로’ 응답하지 못합니다.
서품식 때의 서약 예식을 보면, “원합니까?” 라는 질문들과 “원합니다.” 라는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서품 대상자들은, 그 전에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지를 엄격하게 심사 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갑자기’가 없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하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받은 ‘부르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로 보이긴 하는데,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심의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 자신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사도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3)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은, 직업과 낡은 인생을 버리고 ‘새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부들처럼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렸다면,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를(루카 5,29) 베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가 모든 것을 버린 때는 잔치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였을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집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사람의 내면은 보지 않고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만 자꾸 강조하는 이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이들’이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는 의인이냐?” 라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셨고,
‘모든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