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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15>“공(空)과 인과(因果)에 대한 신심(信心) 있어야 진정한 불자”
기자명총무원장 진우스님
입력 2024.04.12 06:41
호수 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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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 삼독심이 생기지 않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진은 영축총림 통도사. 장용준 기자 jyjun@ibulgyo.com
탐진치 삼독심이 생기지 않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진은 영축총림 통도사. 장용준 기자 jyjun@ibulgyo.com
제27화 나는 상중하 근기(根機)중에 어디에 속하나
상사일결일체료(上士一決一切了)
중하다문다불신(中下多聞多不信)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중, 하근기는 많이 들을 수록 더욱 믿지 않는다.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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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집안에서는 사람의 부류를 3등분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지혜가 높아 신심(信心)이 깊은 사람을 상근기(上根機)라 하고, 중간이 중근기(中根機), 우이독경(牛耳讀經) 즉, 쇠귀에 경읽기처럼 아무리 일러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를 하근기(下根機)라 한다.
상근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부처님 법에 대한 신심(信心)이 깊어서 항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가진다. 중근기는 신심(信心)이 그리 깊지는 않으나 신심(信心)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주로 망각하여 일상 생활에 있어서 깜빡하는 경향이 있지만, 가끔은 절에도 가고 설법도 듣는 이들이다. 하근기(下根機)에 속하는 이들은 신심(信心)이 전혀 없고, 자기 생각에 갇혀서 본인이 생각하고 보는 것만 믿으려 한다. 부처님 법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믿으려 하지도 않으며, 아무리 설법을 해도 꾸벅꾸벅 조는 스타일이다.
진정한 신심이란, 세상 모두가 헛개비 그림자여서, 모두가 공(空) 아닌 것이 없다는 데 대한 철저한 믿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법(緣起法)과 인과(因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분별심(分別心)과 집착심을 없애면 마음을 깨쳐서 영원히 괴로운 윤회(輪廻)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을 말한다.
무조건 알지도 못하면서 말로만 믿는 것은 올바른 신심(信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을 가지면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이 생기지 않고 사고(四苦)와 팔고(八苦)에서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보너스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가끔 유세를 하는 신도가 있다. 스님이 조금 잘해주면 마지못해 다니고, 조금 섭섭하게 하거나 소홀하게 대하면 연락이 올때까지 버티거나 다니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 종단적으로 스님들이 싸우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도 다른 종교에 귀의 한다거나, 스님들이나 종단, 불교관계자들이 보기가 싫어 절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 말로 하근기 중에 최하근기라 할 수 있다. 종교, 특히 불교를 믿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자신의 업(業)을 닦아서 스스로 마음 챙김을 통해 안은적정하기 위함일진데,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잘 잘못을 따지려 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신심(信心)이 없이 의심을 한다거나, 부처님 법을 듣고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죽어라고 잘되기 만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을 떠나서 그에 대한 과보(果報)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니, 하근기(下根機)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 죄와 벌이 간단치가 않다.
옛 조사들의 말씀에 따르면 불교는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도 쉽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얻은 만큼 잃게 된다. 모두가 생로병사(生老病死)한다. 다만, 시간문제이다. 인과(因果)를 받더라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다르듯이, 기쁠 때와 슬플 때가 다르고, 즐거울 때와 괴로울 때가 다를 뿐이다. 이것이 인과(因果)이다.
그러므로 얻지 않으면 잃지도 않는다. 행복을 구하지 않으니 불행이 없고, 좋은 것을 탐하지 않으니 싫은 것도 없으며,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 않으니 괴로움도 없다. 좋지 않은 일이 오는 것은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쿵저러쿵, 좋다 싫다, 있다 없다 아무리 해봐야 결국은 모두 공(空)으로 돌아간다. 세상에 남는 것은 없다. 그러니 모자랄 것도 없다. 모두가 윤회(輪廻)할 뿐, 이조차도 모두 사라질 것이니, 그래서 집착할 필요도 없고 정(情)을 줄 이유도 없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치를 훤히 들여다보고,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이를 적용시킨다면 마음은 그 즉시 평온해 질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간단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확실한 믿음 즉, 적어도 공(空)과 인과(因果)에 대한 신심(信心)이 있어야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의지와는 별개로, 마음 감정은 마음 감정대로 움직이려고 하니, 이를 잡아 둘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제거하고,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확신과 신심을 고양해야 하는데, 이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역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함께 병행하여 나가야 한다.
제28화 바다의 파도와 미움의 파도
뒤로멈춤앞으로
단자회중해구의(但自懷中解垢衣)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
다만 스스로 품은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뉘라서 밖을 향해 정진을 자랑할건가.
[강의]
구름 걷히면 저절로 해가 드러나듯, 그동안 품어왔던 분별(分別) 망상(妄想)의 때 묻은 옷만 벗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지니, 굳이 정진을 함네, 기도를 함네, 수행을 함네 하면서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심명(信心銘)에 “불용구진 유수식견 (不用求眞 唯須息見)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라는 뜻과 동일한 내용이다.
마니주(摩尼珠)와 같은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번뇌망상과 분별취사(分別取捨)의 때묻은 옷 때문에 무한대의 보물을 하나도 쓰지 못하니, 뿌리가 어딘지도 모르고 가지를 더듬으며 잎이나 따는 하근기(下根機)의 멍충이를 면치 못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해인(海印)이라는 말을 알 것이다. 도장인(印)자를 쓰는 것은 완전한 약속을 뜻하고 틀림없다는 증명이다. 왜 바다에 비유할까? 우선 바다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다. 다만 바다는 들어오는 밀물과 나가는 썰물이 있듯이 마음도 이와 같이 왔다 갔다 한다. 밀물과 썰물같이 마음도 한번 들어오면 한번은 나가야 한다. 한번 좋으면 한번 싫고 나빠야 한다. 한번 즐거우면 한번은 괴로워지게 된다. 다만 들어오는 밀물의 시간과 나가는 썰물의 시간이 다르듯이 마음도 이와 같이 때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
그리고 기분 좋은 마음과 기분 나쁜 마음의 때를 업연(業緣)이라 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마음의 때에 맞춰서 밀물과 같이 좋은 현실이 나타날 때가 있고, 썰물과 같이 좋지 않은 현실이 나타나게 된다. 이를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누차 설명했다. 또 바람이 불면 바다는 출렁인다. 바람의 강도에 따라 파도의 높이가 달라진다. 마음도 이와 같다. 욕심의 바람이 불면 마음이 매우 출렁이고 흔들린다. 물론 짜릿한 맛도 있다. 무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욕심의 바람이 멈추면 마음의 바다 또한 잔잔해 진다. 욕심의 바람이란 이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언제 그랬냐 싶게 멀쩡하다. 바다는 본래 고요하고 잔잔하다. 마음도 본래는 이와 같다. 분별(分別)의 옷 바람, 취사(取捨)의 옷 바람, 고락(苦樂)의 옷 바람, 업연(業緣)의 옷 바람 등, 때묻은 옷 바람만 불지 않으면 마음의 바다는 항상 고요하고 잔잔하다.
기도와 참선과 보시와 정진이란 것 또한 자랑할 것이 못된다. 또 하나의 바람이 되어 마음의 파도를 일렁이게 한다. 그러니 다만 묵묵하게 고요히 행할 뿐이다.
돈을 버네, 출세를 하네, 지식을 쌓네, 자리를 차지하네, 평화를 부르짖네, 건강을 위하네, 남을 돕네, 수행을 하네, 노력을 하네, 기분을 좋게 하네 등등… 이러한 바램들은 인과(因果)의 바람을 일으켜 마음의 파도를 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고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른다. 업(業)과 습(習) 때문에 아집과 고집, 집착의 업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심 또한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때 묻은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맨날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를 받아 그 모양 그 꼴로 윤회(輪廻)의 고통을 면치 못하고 살아간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하지 않으면 안된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두발을 모두 떼어야 한다. 망상(妄想)의 때묻은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다. 방하착(放下着-당장 놓아라)이요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이렇게만 되면 생각을 일으키기 전에 한치 오차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여진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더 이상의 업(業)이 생기지도 않거니와 고(苦)와 낙(樂)의 파도가 일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음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해 진다. 이것이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선사들의 한결같은 어록(語錄)이다. 이러쿵저러쿵 머리를 써서 궁리하는 것은곧 파도가 일었다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런 마음의 파도를 두고 생사(生死) 고락(苦樂)과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그저 바다일 뿐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16호/2024년4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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