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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유학중인 송윤선 저자가 색다른 방식으로 중국을 알리기 위해 직접 보고 느낀 중국 문학을 여행에 접목시킨 에세이다『베이징 문학 여행기』. 이 책에는 중국 대학의 양대 산맥을 책임지고 있는 칭화대와 북경대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자 : 송윤선
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쓰촨성 러산 시 ~ 1978년 6월 12일 베이징 시)는 중국의 신문학 활동가, 극작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공작자이다. 본명은 카이전(開貞), 호는 딩탕(鼎堂)이며, 모뤄(沫若)는 자이다.
하카계 출신이며, 쓰촨성 쟈딩 푸(嘉定府)의 중류 정도의 지주의 셋째 아들로서 출생하였다. 쓰촨성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1914년 일본 제국의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근대적 연구 방법을 익혔다. 이 사이에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혁명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하였으며 중국에서 반봉건 혁명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초기 활동가 중 하나였다. 그는 그러다 일본 제국의 여자와 결혼하고 극작가로서 여성 해방을 혁명 테마로 한 <3인의 반역적 여성>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중국 공산당의 신문학 운동 시기의 본격적 사극의 하나로 말해지기도 한다.
중국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고조된 후 1926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자 리다자오 등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영에서 거기에 참가하여 우한·상하이 등지에서 여러 직책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난창 봉기에 가담한 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피해서 일본 제국에 망명하였고, 이 기간에 유물사관을 가지고 중국 고대 사회를 연구하는 혁명 작업을 하였으며, 그것은 중국 고대 사회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각을 가져다 연구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때 충칭으로 귀국해서 중국 공산당 측의 문학 평론 공작의 책임을 맡고 공산당 혁명의 항일 전선에 참가하여 선전 활동에 종사하는 중에 극작(劇作)이나 평론 등도 많이 발표하였다. 그때 발표된 희곡 <굴원(屈原)>(1942)의 내용은 굴원을 항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중국 고대 애국 시인의 말을 따서 국민당의 부패 양상을 들춰내기도 하였다.
1949년, 1950년 파리와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 마오쩌둥 측의 문인 대표로 참가하였고, 중국 공산당 정권 성립 이후로 정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장,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과기대 학장, 중국 공산당 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 중국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등을 맡았으며, 마오둔, 저우양, 천보다 등과 함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정권에서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노선의 조타수가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크게 권력을 행사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 사상 방면의 공작자 중의 하나이었다. 문혁 초기에는 사인방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 마오쩌둥은 그의 보호를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에게 요구하였다. 문혁이 끝난 뒤는 화궈펑에 의해서 당내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였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화궈펑 정권에서 마오의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마오쩌둥이 죽은 뒤 얼마 후 사망하였다.
목차
머리말
베이징 문학여행기, 송윤선, 북경, 루쉰의 서당, 삼미서옥서점, 백초원, 독서, 조화석습, 갤러리, 서당, , 곽말약, 문학혁명, 신해혁명, 중국소설사략, 문천상사, 홍루몽,사합원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루쉰 - 루쉰 옛집(?迅故居)
루쉰의 서당 - 삼미서옥서점(三味?屋?店)
중국 신시(新?)의 대표작 《여신》의 탄생지 - 꿔모뤄 옛집(郭沫?故居)
중국의 노벨 문학상, 마오뚠 문학상의 시초 -마오뚠 옛집(茅盾故居)
송나라의 애국 시인 충절을 읊다 -문천상사(文天祥祠)
인민예술가의 비극 - 라오서 옛집(老舍故居)
라오서의 찻집 - 라오서 찻집(老舍茶?)
북경 서민들의 삶의 터전 - 사합원(四合院)
나도 이제 《홍루몽》의 주인공이다! - 북경대관원(北京大??)
북경에서 중국 각지를 돌아보는 방법 -도연정공원(陶然亭公?)
중국의 아픈 역사를 되짚으며 - 노구교(???)
달빛을 품은 연못 - 칭화대학교(??大?)
겨울에도 빛나는 식물원 - 북경식물원(北京植物?)
중국 문학의 명문 - 북경대학교(北京大?)
고전과 설화가 있는 길고 긴 회랑 -이화원(?和?)
형식 파괴를 통해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다 -현대문학관(?代文??)
맺는말
홍루몽 인물 관계도
북경 지도
출판사 서평
송윤선 저자의 ‘유학생이 쓴 살아 숨 쉬는 베이징 문학 여행기’에는 내로라하는 중국의 문인들과 작품들에 대해 상당 부분 수록되어 있다. 루쉰부터 시작하여 꿔모러, 문천상사, 라오서 등 문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북경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사합원과 홍루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북경대관원, 중국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구교, 중국의 고전과 설화가 살아 움직이는 이화원과 현대문학관까지 아우르고 있다. 중국 대학의 양대 산맥을 책임지고 있는 칭화대와 북경대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장성 사오싱시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중앙정부의 내각중서(內閣中書)였기에 유년기는 비교적 유복하게 지냈다. 유년기 이름은 아장(阿長)이었고, 학명은 장수(樟壽), 자는 예산(豫山)이다. Revolution이란 뜻의 '루쉰'이라는 필명을 <신청년>에서 1918년 처음 사용하였고 잡지 발간과 대학생 교육을 통해서 리다자오와 천두슈, 취추바이 등의 공산주의 혁명 활동에 적극 참여한 대학 교사이기도 했다.
17세 때는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이라는 군대학교에 들어갔고, 서방식 설비와 과목을 갖춘 광무철로학당(磺務鐵路學堂)에서 학업을 했고, 보수파 교육자 옌푸가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중 일부를 번역한〈천연론〉(天演論)을 접하면서 사회적 진화와 같은 근대 사상을 접하기도 했으나, 천두슈, 리다자오 등과 <새청년>의 참여를 통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시 일찍 접하였으며 보수파 옌푸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중국 인민이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길을 펴기 위한 계급적 투쟁에 나서게 하는 중국을 만들기 위한 혁명 소설과 경제적 투쟁의 노정에 나서는 한편, 좌익 작가 연맹과 민권 동맹 등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을 지원하였다.
광무철로학당 졸업 후 22세 때 청나라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유학, 고분학원(弘文學院)에 입학해 일본어와 과학 기초지식을 배운 뒤 1904년 9월부터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1] 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한족 혁명파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루쉰은 일본 유학 2학년 때 환등기를 이용해 수업하던 세균 수업에서 수업중 보여주던 시사 자료 가운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간첩 노릇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힌 몇몇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장면과 이에 분개하지 않던 이들의 모습을 보고 소설을 짓기로 결심하고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를 자퇴했다고 글을 적기도 하였다.(《눌함》 자서) 이 자서는 코민테른 활동을 하고 있던 리다자오, 천두슈, 취추바이 등이 애국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게도 만들었으며 1922년 말에 쓰여진 것이다.
당시 일본의 관립학교에서 중국인 유학생의 입학은 청나라 공사(公使)의 추천서를 통해 이루어졌고(중학 이상의 학력 조건이 붙었다), 시험 없이 입학한 루쉰이었지만 당시 의학전문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조차 졸업시험까지 가는 경우는 입학자 100명에 졸업 응시자 50명꼴로 드물었으며 루쉰처럼 1년 7개월 만에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입학한 첫 해 시험에서 루쉰은 백 명 가운데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60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그는 400엔이라는, 당시 중학교 교사의 수입을 넘는 거액 장학금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는 2학년에 올라간 뒤는 기말 시험 성적에 대해 일본인 동기생들에게서 억울하게도 '시험 문제 유출이 있었다'고 의심을 당한 일도 있었으며, 입학 첫 해부터 담임을 맡아줬던 해부학 후지노 겐쿠로(藤野嚴九郎) 교수가 호의로 중국 유학생 루쉰의 노트에 첨삭을 해줬던 점이 다른 학생들에게서 그런 의심을 받은 원인이기도 했다. 루쉰이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차별 감정을 받던 차에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06년 3월에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 퇴학하고 도쿄 생활을 시작하지만, 소설 창작은 미뤄둔 상태였다. 청나라로 돌아간 루쉰은 세 살 연상의 주안(朱安)이라는 여성과 봉건식 혼례를 올렸으나 2주 후 아우인 저우쭤런과 함께 다시 일본에 돌아갔고, 그 곳에서 발간에 노력했던 잡지 「신생(新生)」은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었으나, 「하남(河南)」이라는 잡지에 2년 간 '파악성론(破惡聲論)',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마라시역설(魔羅詩力說)' 등 문장을 썼고, 동부 유럽 여러 나라의 단편번역집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을 저우와 공역해 출판하기도 했다.
1909년 귀국하여 향리에서 교원으로 외국 소설 번역과 중국 고전을 연구하기도 했다. 항저우와 샤오싱 등을 거쳐, 1912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기대를 갖고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 하급관리로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양보함과 동시에 정부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갔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사는 현실에 실망하는 한편, 위안스카이 정부에 대한 반동도 있어 잠시 침묵의 생활을 보냈다. 문학혁명이 개시되자 잡다한 감각(雜感)을 쏟아내는 현실 비평에 나서는 한편, 유교와 중국에 대한 통절한 자기 부정, 중공의 혁명 정신을 제창하게 된 '광인일기'를 1918년에 리다자오, 천두슈 등과 긴밀히 협력했던 잡지 <신청년>에 내놓은 것이 중국 근대문학사와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이것은 1911년 시작된 문학 개혁의 흐름 상에서 <신청년>과 루쉰 등에 의해서 특정한 방향으로의 중공 문학의 성격이 형성된 것을 말한다).
이후 '루쉰' 및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120여 개가 넘는 아주 많은 다른 필명을 사용하면서 혁명 지도 활동에 나서게 된다. '미명사'(未名社), '어사사'(語絲社) 등에 의한 활동을 펴는 한편 베이징 대학 등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 문예 인력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은 고대 중국의 신화, 전설에서 청말까지의 중국 소설사를 논한 저술이었다.
담배 피우는 루쉰(1936)
루쉰의 무덤(상하이)
루쉰 공원(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대한민국의 해방과 광복을 위하여 의거를 치렀던 상하이 훙커우 공원이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건립과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지원한 공산 혁명 작가 루쉰의 이름을 붙여서 1956년부터 마오둔과 마오쩌둥 등에 의해서 루쉰 공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루쉰 동상
이후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큐정전」이라는 소설을 리다자오가 편집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신보부간>에 내놓았다.
루쉰은 어느 날 <새청년>의 편집진 중 하나이자 문화혁명가였던 첸쉬안퉁(錢玄同), 즉 진신이(金心異)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글을 지었다.
가령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이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방이야. 그 속에 많은 사람들이 쿨쿨쿨 잠들어 있지.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 다 숨막혀 죽어버릴 걸세.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직결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도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네가 지금 큰 소리를 쳐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들을 깨우면, 그들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는 임종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너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꼴이라고 생각되지 않겠는가?
진신이는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루쉰은 적었다. "그러나 이미 눈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때려 부수어버릴 희망이 전혀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루쉰은 이러한 말의 영향을 받아 그의 <새청년>에서의 첫 단편 소설 『광인일기』를 썼다고 소설의 서문에서 썼다.(『납함』 자서).
1926년의 베이징 정부와 리다자오, 천두슈 등 코민테른 활동가들 및 이들의 지도를 받았던 학생 노동자 스트라이크 학업 거부 충돌 뒤 잇따른 사건 뒤는 베이징을 탈출, 남하하여 샤먼을 거쳐 광저우로 이동하였으며, 다시 장제스의 국민당 혁명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건립된 후는 상하이로 옮겨 문필 활동을 계속해갔다. 상하이에서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화민국 정부와 투쟁을 가속시키기 위해 공산당에서 설립해 지도한 지하 좌익 작가 연맹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는 민권 운동에도 나서는 한편 속에도 소비에트 혁명과 거리를 둔 작가들과 뿐 아니라 혁명문학파 동료들과도 계속해서 전투적 설전을 벌이었으며 루쉰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성격이 보다 짙어졌다. 공산당 비밀 조직에 의해 세워진 지하 좌익작가 연맹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계급투쟁으로써 중국 정부의 공산 혁명 탄압에 맞서기 위한 부하 작가들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으며 다른 취지가 있던 작가들도 끼어 있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의 무산계급 폭력 투쟁에 건립 목적과 실행 방안이 두어진 것이었다. 루쉰과 조금이라도 설전을 벌인 다른 작자나 문인들은 루쉰에게서 반동파로 지목된 뒤 대부분 훗날 공산 정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루쉰은 페어 플레이를 외치며 유교파, 자본가파, 봉건파, 국가파 등 반동파 지식인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였다. 그의 사상 • 소설• 잡문은 중국 전반의 당시 온전치 못하였던 현실에서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의 투쟁이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에게 공산주의 혁명의 길을 터주려는 의도에서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다. 루쉰은 <신청년>에 의해서 근대 문학운동의 한 조류를 형성한 작가였을 뿐 아니라, 베이징 대학의 정치적 이정표이기도 하였으며, 루쉰의 이름이나 구호를 따진 학교나 투쟁 운동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 이후로도 옌안 근거지 등지를 중심으로 전국 도시, 사립 대학, 문학 잡지 등 곳곳으로 조직적으로 펼쳐져 나갔다면, 그러한 의도한 영향이 공산주의 혁명 개시 이래 나라 내에서 어떻게 학생과 노동자, 하층 지식인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선동해갈 수 있었을 것인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코민테른과는 거리를 두고 지식인적 양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문명과 제도의 건설에 마음을 쏟았던 작가는 아니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학의 공산주의 전투 노선이 중일전쟁의 심화를 야기하게 되는 과정에서 결국 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는 둘째 아내로 맞이했던 여제자 쉬광핑과의 은신적 투쟁의 삶을 이어가다 1936년 상하이 조계지에서 작가적 자유를 얼마만큼 누리고 적잖은 인세 수입도 얻었던 중에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생 많은 번역을 남겼고 중공 정부 수립 이후 절대적 영웅으로 고대한 지위를 누리면서 베이징 대학의 구좌파 좌익 파시즘에 의해서 문화대혁명에까지와 그 이후로도 중화인민공화국 청년들의 정치 운동의 '화차두(火車頭)'로서 계속해서 추앙되어가기도 한다. 한편 그와 성향이 달랐던 지식인들과 다른 색깔의 목소리들은 탄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혁명 작가로서 위치되기도 하였다. 루쉰이 리다자오, 천두슈, 덩중샤, 저우언라이, 취추바이, 상웨, 마오둔, 마오쩌둥, 장칭 등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작자들과 연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아시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후 한국의 분단과 이후의 국내 민족 갈등 및 민중 운동에 루쉰이 적지 않게 영향을 주기도 함으로써 국내 소장 연구자들이 복잡한 영향을 받기도 하여 왔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루쉰을 이념적으로 파급시켜 한국의 문학 실천과 비평을 1920년대 전후로부터의 신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으로 끌어들이던 운동권 학계 풍토에서는 연구자 시각과 성향이 조금씩 탈피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