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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대도 조세형 탈주 후 5일 만에 검거
대도 조세형.
대도(大盜) 조세형씨가 1983년 4월 19일 탈주 5일 만에 서울 장충동 민가에서 시민의 신고로 충돌한 경찰관의 총을 맞고 검거됐다.
조세형은 4월 14일 법원에서 결심공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넘겨지던 중 법원 구치감벽의 환풍기통을 뜯고 탈주했었다.
조세형은 10살 때 친구들과 숟가락을 훔치는 것으로 범죄와 질긴 인연을 맺기 시작, 1982년까지 절도죄로 10차례나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교도소에서 보낸 세월만 해도 정확히 자기 인생의 절반인 27년이나 됐다.
1982년 3월 출소한 그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담벼락을 넘나들며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 보석류와 현금, 수십억원대의 기업어음(CP)을 닥치는 대로 훔쳤다. 그는 이중 일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줘 `의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햇볕도 들지 않는 청송교도소의 1평짜리 독방에서 15년을 살아야 했던 조세형은 1998년 11월 수감 15년 만에 석방돼 절도방지를 위한 강연에 나서는 등 다양
한 사회활동을 펼치며 살았으나 2001년 일본에서 다시 절도행각을 벌여 비난을 자초했다.
▶2009년현대ㆍ기아차 10종 4만8천636대 리콜
▶2004년자민련 김종필 총재 정계 은퇴 선언, `3金시대` 종말
▶2004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 9만9622점 용산 박물관 이전 시작
▶2004년김정일 북한 위원장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
▶2004년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 짐 칸달루포 심장마비사
▶2003년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 선생 118년 만에 명예졸업장 수여식 거행
미국 메사추세츠주 북쪽 바이필드 시의 ‘가버너 더머 아카데미’ 건물 정면에는 ‘1763년 지어진 미국 최초의 보딩 스쿨(기숙사를 갖춘 학교), 최초의 교실’ 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지은 한국의 개화 선각자인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1856~1914) 선생은 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1884년 9월 이곳 학교 3학년 과정에 입학했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다음해인 1885년 6월 한국으로 귀국했다. 존 마틴 도거트 교장은 이날 유길준의 후손인 유석재씨와 그 일행에게 유길준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고,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측이 준비한 유길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2003년 프랑스, 이슬람 여성에게 신분증 사진 촬영 시 스카프 착용 금지 선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내무장관은 2003년 4월 19일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이슬람 단체연합(UOIF) 총회에서 “신분 증명서 사진을 찍을 때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 머리에 아무것도 써서는 안 된다고 법은 명시하고 있다”라며 “이슬람교 여성이라고 해서 신분증명서에 관한 법과 다른 특혜를 누릴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르코지의 발언에 대해 한 이슬람교도 여성은 “스카프는 이슬람에서 여성의 개별성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프랑스 법이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반대 입장을 나타냈지만, CFCM의 달릴 부바쾨르 의장은 스카프 착용 금지안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2001년우주 왕복선 엔데버호 발사 (21일 국제우주정거장 도킹)
미국인 4명과 캐나다·이탈리아·러시아인 각 1명씩 모두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우주왕복선 엔데버호가 2001년 4월 19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돼, 21일 지구 상공 311km 궤도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했다.
11일간 우주 공간에 머무른 이들은 22일 길이 17.6m, 무게 1620㎏의 거대한 기중기 형태의 로봇팔을 ISS의 실험실 모듈에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업은 캐나다인 크리스 해드필드 대원과 미국인 스콧 파라진스키 대원이 해냈다. 캐나다측이 제작해 `캐나다암 2`라고 이름붙은 이 로봇팔은 제작비가 9억달러나 된다. 엔데버호에는 또 이탈리아가 만든 화물 운반기 `라파엘로 모듈`이 실려 있다.
▶2000년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 별세
▶2000년필리핀항공 보잉 737-200기 사말섬 추락. 131명 사망
▶1999년`아이스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 은퇴
북미아이스하키(NHL) 최고의 스타 `아이스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38)가 1999년 4월 19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피츠버그 펭귄스와의 최종전을 끝으로 은퇴했다.
1979년 데뷔한 그는 NHL 22년 동안 최다득점 외에 18차례 올스타에 선정됐고, 10번이나 득점랭킹 1위, 19시즌 동안 정규리그 MVP에 9차례 뽑히는 등 신화적인 기록들을 작성했다.
특히 1999년 3월 30일 프로통산(WHA·월드하키연맹 포함) 1072번째 득점을 올려 그의 어릴적 우상인 고디 하우(71)의 `불멸의 기록`(1071점)을 깨는 신기록을 이룩했다. 통산 최다득점(894골)과 최다어시스트(1962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레츠키는 1998년 `하키뉴스지`에 NHL 역대 최고선수로 선정됐었다. 또 고향인 캐나다 온타리오에서는 숫자 99를 말해야 할 때 그의 이름(99는 그의 배번)이 언급될 정도로 그레츠키는 추앙받는 존재였다.
▶1999년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부군 에든버러 공이 3박4일 일정으로 1999년 4월 19일 방한했다. 영국 왕의 방한은 1883년 한-영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래 116년간의 양국관계 사상 처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내외는 이날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한 직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데 이어 청와대를 방문, 공식 환영행사를 갖고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정상환담을 갖고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 방안과 문화 등 공동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여왕 내외는 또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방문, 태권도 시범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7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주최한 리셉션에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방한 3일째인 2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둘러보고 안동 청과시장, 봉정사 등을 방문했다.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 한옥의 전통적인 건축미가 잘 보존된 풍산 류씨 문중의 충효당(보물 414호)을 방문해 집을 둘러 보고, 서애 류성룡의 후손 탤런트 류시원의 본가인 담연재에서 하회별신 굿탈놀이 아홉마당을 관람하며,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조옥화씨(78)가 여왕의 73회 생일을 위해 마련한 생일상을 받았다.
▶1999년독일의 도이체 텔레콤과 이탈리아의 텔레콤 이탈리아, 합병에 합의. 세계최대 통신사 탄생
▶1999년서울시지하철공사 전면 파업에 돌입
▶1998년이봉주, 제18회 로테르담 마라톤대회서 2시간7분44초로 한국신기록 수립
▶1997년규제개혁추진회의 발족
▶1996년북한 경비정 2척 서해 한계선 침범
▶1996년모스크바에서 핵안전 정상회담 개막
▶1995년오클라호마시, 극우파에 의한 폭탄테러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는 1995년 4월 19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 있는 앨프리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다. 이 테러의 범인인 티머시 맥베이는 민병대 운동의 동조자였다. 이 사건은 2001년 9·11 테러가 있기 전까지 미국 영토에 대한 가장 심각한 테러 사건이었다. 이 폭탄 테러로 6세 이하 아동 19명을 포함한 168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680명 이상 사람이 부상을 입었고 6억 5200만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한다. 연방정부에 대한 그의 증오와, 1992년 루비 능선 사건 및 1993년의 와코 포위 작전 때 자신의 실수로 여겨진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맥베이는 웨이코 사건이 일어난 지 2주년이 되는 때에 맞춰 테러를 감행했다.
▶1994년황영조 미국 보스턴국제마라톤대회서 4위 - 2시간 8분 7초 한국신
▶1993년미국 사교집단 `다윗파` 집단자살
미국의 사교집단인 다윗파 광신도들이 1993년 4월 19일 집단 자살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51일 동안 투항해 온 이들이 자살을 택한 것은 FBI의 기습작전에 교주 데이비드 코레쉬가 자살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광신도들의 방화로 95명 중 86명이 사망했다.
교주 코레쉬는 지하무기고까지 있는 요새화한 텍사스주 웨이코 외곽의 31만평 규모의 마운트 카멜 농장에서 추종자들과 수도나 전기시설 없이 자체 학교와 언론기관을 운영하며 원시생활을 해왔다.
코레쉬는 성경이 진실이라면 자신은 예수라고 자처했고 추종자들은 그를 신약성경 묵시록과 관련, 전쟁, 질병 등 신이 내릴 7가지 재앙을 개봉할 유일한 인물이라고 믿어왔다. 다윗파는 미 전역에 2천-3천명의 신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전경련 고문 이원순옹 타계
▶1993년무장 탈영병 서울 도심서 총격난동
▶1992년제1회 세계체조개인선수권대회서 유옥렬 우승
▶1991년고르바초프 방한으로 제주정상회담 개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공식 한국방문이 1991년 4월 19일 이루어졌다. 남북한을 통틀어 소련의 최고지도자 국가원수가 한반도를 방문하는 것은 유사이래 처음이었기에 상징적 의미가 컸다. 이날 한국과 소련의 정상들의 회담이 서귀포 중문단지 내 제주 신라호텔에서 개최됐다.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두 차례의 단독회담과 한차례의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아태 및 동북아지역 정세,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한소 쌍무관계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양국정상은 특히 한반도에서의 안정과 평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아태지역의 평화와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공통인식 아래 남북대화 및 교류 협력, 한국의 연내 유엔가입,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협정 서명, 북한의 개방문제 등을 집중논의 했다. 이번 제주정상회담은 두 사람간에 오간 대화내용보다 회담 그 자체가 갖는 상징적 의미에 더 비중이 있었다.
비록 일본방문 후 귀로에 그것도 국빈방문이 아닌 실무방문으로 들른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방한을 했다는 그 자체와 양국이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1986년프로야구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 첫 맞대결
👉🏿86년과 87년 프로야구는 롯데 최동원 선수와 해태 선동열이 펼친 맞대결로 뜨거웠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 투수인 이들의 선발 맞대결은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1986년 4월 19일 부산에서 열린 첫 대결은 선동열의 1대0 완봉승. 정확히 4개월 후인 8월 19일 최동원은 2번째 맞대결서 똑같이 완봉승으로 `복수`했다. 1987년 5월 16일 세 번째 맞대결은 15회 연장 끝에 2대2 무승부였다. 9회까지 던지고 연장에 접어들었지만 아무도 두 선수를 마운드에 내려가게 하지 못했다. 이경기서 최동원은 209개, 선동열은 232개의 공을 던지며 끝까지 버텼다. 세 차례 맞붙은 최종 전적은 1승1무1패였다.
▶1984년동남여객선 페리호 조난
▶1983년문공부, 공산권의 순수 음악 음반 수입 허용
▶1983년대도 조세형 탈주 후 5일 만에 검거
▶1980년베트남 억류 세 외교관 5년 만에 귀국 발표
▶1974년파키스탄 근대화에 기여한 대통령(1958-1969) 아유브 칸 사망
▶1972년대한항공(KAL) 태평양 횡단 첫 취항
▶1971년미(美) 살인범 맨슨 재판, 사형 선고
▶1967년서독 초대총리(1949-1963) 콘라드 아데나워 사망
▶1967년수원에 경기도청사 본관 준공
▶1964년라오스 우익 쿠데타, 1일 만에 실패
▶1960년4.19혁명 발발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자유당 정권의 오랜 독재 정치와 부정 부패로 국민의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데다가 1960년 3월 15일의 부정 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돼 일어난 혁명이다. 1952년 7월 4일 집권욕에 사로잡힌 자유당 정권은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 뒤 1954년의 관권선거,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로 자유당 정권은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1955년피분 태국수상 내한
▶1952년동양통신 창간
▶1948년장개석,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선출
▶1948년김구-김규식,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참석차 방북
▶1947년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제패
1947년 4월 19일 오전 11시, 제51회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한 8개국 156명의 선수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선에는 가슴에 ‘KOREA’ 와 태극기를 단 서윤복(徐潤福)과 남승룡(南昇龍)의 모습이 보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경기 시작 전 출전을 포기한 손기정 감독이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무국적 선수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의 프로펠러 군용기를 얻어타고 서울을 출발, 괌·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일주일이나 걸려 도착한 탓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165cm·55kg의 왜소한 체격, 그러나 스물 네 살의 서윤복은 뛰다가 쓰러질지언정 기권하지는 않겠노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출발신호가 떨어졌다. 중간지점부터 선두를 달리던 서윤복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30km지점. 연도의 한 관중이 서윤복을 격려하려고 박수를 친다는 것이 그만 끌고나온 개의 끈을 놓친 것이다. 도로 안으로 뛰어든 개 때문에 서윤복이 넘어진 사이 7∼8명의 선수들이 서윤복 곁을 스쳐 지나갔다. 벌떡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운동화가 말썽이었다. 끈이 풀린 것이다. 서윤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처 달렸다. 마침내 선두 탈환. 멀리 결승점 보스턴시 청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2시간25분39초,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광복 후 처음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국제 마라톤대회, 더구나 우승까지 일궈냈으니 손기정도 서윤복도 서로를 부둥켜 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곧이어 남승룡도 2시간 40분 10초를 기록하며 열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서윤복의 장거에 감격한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를 휘호로 써주었고, 이승만 박사는 울면서 축하해줬다. 다시 3년 뒤 함기용·송길윤·최윤칠 세 선수가 보스턴마라톤에서 각각 1·2·3위를 차지, ‘코리아’ 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다.
▶1943년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 나치스에 봉기
유태인들이 학살 수용소로 가기 전 임시로 거주했던 바르샤바 게토에서 1943년 4월 19일 나치스에 대항하는 격렬한 봉기가 일어났다. 유태인들을 격리하기 위해 1940년 11월 설치된 바르샤바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유태인 40여만 명이 좁고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그 곳에는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1942년 7월 이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은 모두 동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해 여름에만 3만명의 유태인이 이곳을 떠나 트레블린카 학살수용소로 수송되었다. 대이동은 계속되었고 봉기 전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유태인 수는 고작 7만명 뿐이었다. 이들에게도 고통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남아있는 그들 대부분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나치스 SS대 전국 지도자인 힘믈러는 "바르샤바의 게토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1943년 오늘 SS대원 58명과 장교 16명이 전차와 장갑차로 게토에 침입했다. 유태인들은 격렬히 저항하며 그들에게 유탄과 화염병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나 이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기도 보급도 없는 주민들은 다가오는 적들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주민들의 방어기지인 지하실을 파괴했고, 화염 방사기로 집들을 불태웠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인 슈트로프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바르샤바에는 이제 유태인 거주 지역은 한 군데도 없다. 저녁 8시 15분에 모두 종료됐다. 체포되거나 학살된 유태인 총수는 5만 6천 65명이다."
▶1941년프랑스, 국제연맹 탈퇴
▶1938년독립운동가 우강 양기탁 사망
▶1935년소설가 성해 이익상 사망
▶1925년한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송욱 출생
▶1914년미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 사망
▶1912년미국의 핵화학자 시보그 출생 -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들 분리로 노벨화학상 수상
▶1906년피에르 퀴리(퀴리부인의 남편) 사망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는 아내인 마리 퀴리가 워낙 유명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공동연구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이다. 그는 상온에서 1400 ℃ 정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화(磁化)가 온도에 역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했고, 퀴리온도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895년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마리 퀴리)와 결혼한 후,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 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을 탐구하던 중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다.
▶1903년소련 키시네프에서 유태인 120명 학살
▶ 1897년 제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 1895년 역모 죄인의 姓을 없애는 법례 폐지
▶ 1895년 을미개혁 단행
* 단발령 시행에 관한 관보
▶ 1883년 브라질 대통령(1930-45, 1951-54) 바르가스 츨생
▶ 1882년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 사망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
1856.5.14 종(種)에 관한 방대한 책을 집필을 시작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그랬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친히 복을 내려 주신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불과 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이런 특별한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기독교 전통에 선 서양인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지만,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뭔가 특별한 혹은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은 다른 전통에 선 사람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찰스 다윈이란 잉글랜드의 아마추어 자연학자가 있었다. 그가 1859년에 세상에 내놓은 <종의 기원>이란 책은 서구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책의 영향은 서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전기를 쓴 어떤 이들의 말대로 이 구세계의 자연학자는 “우리가 이 행성 위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변혁했다”
어린 시절 다윈은 공부보다 딱정벌레 수집에 더 기쁨을 느꼈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의사 로버트 웨어링 다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은 이름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인 조사이어 웨지우드였다. 어린 시절, 다윈은 식물이나 새알, 광물 등을 수집하는 ‘하찮은 소일거리’에 푹 빠져 있었다. 그에게 그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의학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특히 해부학은 “따분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목사의 길을 권했다. 다윈은 아버지의 권유대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신학 공부보다는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일에 더 기쁨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뒤인 1831년, 다윈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제의를 받았다. 해군 측량선 비글 호에 자연학자로 승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곧 아들의 고집에 손을 들고 허락했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이 청년은 아직은 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했었다. 그해 12월,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그 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기까지 5년여 동안 그는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섬 등을 둘러보았다. 비록 뱃멀미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물침대에서 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향수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는 노예 소년이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노예 제도를 혐오하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던 그는 브라질을 떠나면서 “내가 또다시 노예 국가를 방문할 일이 없음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썼다.
하지만 다윈에게 이 항해는 대단한 지적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이 항해에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 첫 권을 가지고 갔다. 지구에서 일어난 변화는 바람이나 물 같은 힘들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었다. 훗날 다윈은 “내 생각은 반은 라이엘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썼다. 한편 그는 동식물을 수집하면서 지질학이나 생물학과 관련된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열성적인 노력과 집중적인 관심을 쏟은 결과 많은 것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 이런 훈련이야말로 내가 과학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가장 근본적인 도움을 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다윈은 1839년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마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여행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벌였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갈라파고스 제도를 항해한 후 '종의 변화'에 대해 착안하다
1835년에 도착한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윈에게는 아주 특별한 곳이 되었다. 약 4주 동안 머문 그곳에서 그는 작은 새들을 표본으로 만들어 가져왔다. 항해가 끝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그 작은 새들 중 십여 마리가 모두 핀치류라는 존 굴드의 말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새들은 부리의 모양이 모두 달랐던 것이다. 어떤 녀석은 짧고 두터운 부리가 있어 씨를 깨서 먹기에 용이했고, 또 어떤 녀석은 날카롭고 뾰족한 부리가 있어 곤충을 잡기에 용이했다.
다윈이 1837년 생물의 종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고민하며 비밀노트에 그린 '진화의 나무'
사실 그는 이 새들의 표본을 채집하면서 정확히 어느 섬에서 잡은 것인지를 표시해 두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자연학자로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마추어다운 실수였다. 하지만 그 새들을 서로 다른 섬에서 잡은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새들이 모두 한 종류에 속하고, 게다가 섬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새들이 살고 있다니! 그는 이 사실들이 “종의 안정성을 손상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설명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아직까지 그는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과연 인간도 ‘변화’해 온 것인가? 하지만 그는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런 말들을 적어놓았다. “인간은, 경이로운 인간은 예외다.” “인간은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찰스여,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 신중하기를”
그러던 중 1838년 9월, 다윈은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6판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맬서스는 그 책에서 ‘과밀과 생존 수단에 대한 간섭’이 개체의 수를 제한한다고 했다. 다윈은 ‘종들의 싸움을 맬서스의 이론에서 추론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20년이 넘게 흐른 1856년 5월 14일, 마침내 다윈은 종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원고 작업이 3분의 2쯤 진행되었던 1858년 앨프리드 월리스라는 자연학자가 말레이 군도에서 그에게 원고를 보냈다. 발표 전에 다윈의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다윈은 경악했다. 월리스가 보낸 원고가 다윈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내용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20년 넘게 연구한 결과물이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과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잡한 우선권 논쟁이 또 벌어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다윈 역시 신의와 이기심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월리스와 다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자신의 1844년 원고 일부와 월리스의 원고를 함께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날의 발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초판 1250부가 당일로 매진되었고 '원숭이 다윈'만평이 쏟아져 나왔다
이듬해인 1859년 11월 22일 화요일,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원래 쓰려고 계획했던 방대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었다. 초판 1250부가 당일로 매진된 이 책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애서니엄>이란 학술지에 실린 서평에는 이런 문장까지 등장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면, 무엇이든 인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다윈의 책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다윈을 원숭이로 묘사한 만평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무수히 등장했다.
다윈을 원숭이의 모습으로 풍자한 캐리커쳐
그리고 1860년 6월 옥스퍼드의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와 토머스 헉슬리 사이의 그 유명한 논전이 벌어진다.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연례 회의장이었다. 윌버포스가 연설 도중에 헉슬리에게 그가 원숭이 자손이라면 할아버지 쪽인지 아니면 할머니 쪽인지를 물었다. 헉슬리는 중요한 과학 토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데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다고 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정작 다윈 자신은 이런 싸움의 선봉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보완해 좀 더 명확하게 할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사육에 의한 동식물의 변이>, <인간의 유래 및 성에 관한 선택>,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등의 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한 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더 강해지거나 더 빨라지거나 하는 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종이 어떻게 생겨나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종이 변화한다는 생각을 한 이는 그가 최초는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설명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종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리고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도 있었다.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세상을 떴다. 다윈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월 26일 결국 그곳에 묻혔다. 물리학의 거인 아이작 뉴턴이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뉴턴이 물리학에서 그랬듯, 다윈도 종의 변화라는 생물학의 일반 법칙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 일에 성공했을까?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원래 극소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 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 넣어졌고, 그 뒤 이 행성이 정해진 중력 법칙에 따라 계속 도는 동안에, 처음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형상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1859년에 발행된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의 타이틀 페이지
다윈은 1872년 <종의 기원> 제6판에서 처음으로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진화론은 뉴턴의 중력 법칙처럼 일반 법칙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장엄한 생명관은 생물학과 관련해서는 뉴턴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 이상으로 크나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 사회에까지 적용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부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다윈주의는 자유경쟁을 지지하는 사업가들, 자신들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창조론과 진화론의 불화 역시 아직도 완전하게 봉합되지 않았다. 2004년 실시된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에 인간이 신의 인도 없이 다른 생명체로부터 발달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의 수는 13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 1824년 영국 시인 바이런 사망
▶ 1775년 미국 독립전쟁 발발 - 미국 독립전쟁
▶ 1481년 성종 12년 동국여지승람 완성
▶ 1395년 화약 만든 최무선 세상 떠남
신무기로 왜구를 섬멸한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
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崔茂宣,1325~1395)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인물로 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무선 졸기(卒記)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이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태조실록] 1395년 4월 19일)
이 말은 그가 중국에 이어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를 발명한 원동력이었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 태어났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기록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고려 말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최무선과 이성계가 함께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고령의 최무선이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모아 그의 일생을 재구성해 보면, 최무선은 1328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부친이 재직했던 광흥창은 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한 관청이었다. 광흥창사는 정5품의 관직으로, 관직 서열상 그리 낮은 관직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7세손이었던 최무선 때부터 영성공파(永城公派)라는 별도의 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 초기에 그의 화약 발명의 공이 크게 인정받아 ‘영성공’으로 높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영천 최씨 영성공파가 되었다.
최무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태조실록]에 천성이 밝고 방략(方略: 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는 고려왕조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때였다. 지배층은 권력을 잡기 위해 정쟁만 일삼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왜구가 빈번히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최무선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랐다. 아버지가 광흥창사였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부친의 직업으로 보아 개성 혹은 예성강 하구의 바닷가에 살면서 고려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광흥창사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리고 있었다.
최무선이 언제 어떻게 관리가 되었는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가긴 했지만, 조상의 음덕, 즉 음직(蔭職)을 통해 관직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경로를 통해 관직에 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기시(軍器寺) 소속의 하급 관리부터 출발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훗날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만든 것으로 보아 병기제작 관련 업무를 맡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집념으로 화약을 만들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든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집념의 결과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장 달려가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정이오(鄭以吾)의 [화약고기(火藥庫記)]에 따르면, 최무선은 중국말을 잘했다고 하고 [세조실록]에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화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전한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드는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쓰면 되는 것이어서 귀찮게 국산으로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화약은 불꽃놀이와 같은 장난감에나 쓰는 것이지, 무기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무선은 달랐다. 그는 일찍이 화약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을 이용한 무기도 개발하여 왜구 소탕에 사용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무선의 오랜 꿈이 이루어 진 것은 1377년(우왕 3) 10월의 일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火器)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된 것이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그가 화약 만드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무선은 이원과 같은 동네에 살아 친하게 지내며 은근히 화약 만드는 기술을 물어보고 자기 집 하인 몇 명을 시켜 화약제조법을 완전히 익힌 다음,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화약 제조뿐만 아니라 화통도감의 설치 또한 그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뒤에 최무선은 도당(都堂)에 건의하여 시험해 보려 했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속이려 하는 인물로 비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화약 제조를 건의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왕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게 하여 마침내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화포의 제조와 왜구의 섬멸
전라북도 군산시에 위치한 진포대첩지비. 1380년(고려 우왕 6년) 진포에서 있었던 고려군과 왜군의 해상전투에서 고려군은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앞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화통도감을 맡은 최무선은 곧장 화포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곧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 다양한 화포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약 무기 제조의 결과는 엄청났다. 1380년(우왕 8) 가을에 왜선(倭船)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그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였다. 최무선은 도원수 심덕부(沈德符)·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화포를 배에 싣고 왜구가 들끓고 있는 진포로 갔다. 고려군에게 화약이 있는지 모르고 있던 왜구들이 배를 한곳에 집결시키자 최무선은 그곳을 향해 화포를 발사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 잔당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이번에는 병마도원수였던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모두 섬멸시켰다. 진포 전투 이후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무선이 그리도 열심히 만들어 낸 화통도감은 고려 창왕 때(재위기간 1388-1389) 없어지고, 그 기구는 군기시(軍器寺)에 흡수되었다. 화통도감이 사라진 이유는 불분명하다. 왜구를 성공적으로 소탕한 뒤 더 이상 필요 없어져 버린 것인지, 아니면 고령이 되어 더 이상 공직 생활을 할 수 없던 최무선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화약 제조법, 조선으로 이어지다
최무선은 1395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은 바로 아버지가 진포 싸움에서 왜구를 물리친 그 해, 세상에 태어났다. 최무선이 죽었을 때 최해산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아내 이씨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최해산은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고, 이후 1401년(태종 1) 군기시에 특채되어 화포 개발 실험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야사에 따르면 최해산은 장남이 아니고 차남인데, 장남은 화약 실험 중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설도 전한다.
우리나라 무기의 역사를 바꿔 놓은 최무선이었지만, 아쉽게도 [고려사] ‘열전(列傳)’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와 함께 진포전투에 참여한 나세 장군만 [고려사] 열전에 이름이 올랐다. 나세는 원나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친 공을 남긴 장군이다. 최무선은 [고려사] 나세전에 살짝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는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아들 최해산을 통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기술로 전수되었다. 세종대에 보다 향상된 화약제조법이 나오게 된 것 또한 최무선 부자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이 조선군을 압도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화포 기술에서 앞서 있었던 것도 최무선의 화약제조 덕분이었다.
▶ 1390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2세 사망
https://youtu.be/o084kHv8SQ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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