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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者)들의 삶이 다양화, 다변화, 고속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제사는 점차 구시대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조상의 기일이나 명절 때가 되면 정성들여 마련한 제사상 앞에 자자손손 모여
제례를 올리는 일이 우리네 관습의 당연한 규범이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의식을 최소화하거나 하다못해 생략하는 사례까지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삶이 바쁘고 각박해진 탓도 있겠으나 개인의 편리가 우선시 되는 세태
또한 그 한 몫을 할 것이다.
종가의 제례는 어떨까? 전통의 관습 중에서도 가장 엄정하기로 이름난 종가의
제례의식은 일반가의 그것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밀하고
품이 많이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종가의 제례는 그 종류 또한 다양하여,
일반적인 명절 차례와 기일제를 비롯해 이름도 생소한 불천위 제사나
일부 종가에서 행해지는 길제, 하천제 등 수많은 전통 의식들이 포함된다.
보통 종가집의 제례는 일 년에 12번에서 15번까지 치러진다.
여러 종가에서 소중히 지켜오고 있는 제례의식 중
의성김씨 학봉종택의 제례를 통해
명문 종가들의 제례의식들을 살펴보려 한다.
선조들의 예를 따르는 학봉 김성일 종택의 불천위 제사
유림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보통 4대를 모신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와 고조부다. 그런데 대가 내려가면
고조부의 제사는 조매(사당에서 모시던 신위를 산으로 묻는 것)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나라에서 사당을 하사하고
그에 따른 토지나 재물 등을 하사하면, 그 제사를 아랫대에서 영구히 모시게
되는데 이를 ‘불천위’라 한다.
영원히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를 모시는 종가는 고산 윤선도 종가,
광산 김씨 예안파 종가, 경주 월성 손씨 종가, 영천 이씨 농암 종가,
죽산 박문수 종가, 거창의 초계정씨 종가, 광산 김씨 사계선생 종가,
안동 하회 류씨 양진당과 충효당 종가, 재령 이씨 석계 종가,
안동 권씨 권벌 종가, 경주 최씨 사성공파 종가, 의성 김씨 김성일 종가 등이다. 이들 중 의성 김씨 김성일 종가의 중시조인 학봉 김성일(1538~ 1593)은
퇴계의 학풍을 이어받은 성리학자로 퇴계 문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1569년, 퇴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인재를 천거해 달라는
임금의 부탁에 김성일을 추천했을 정도로
퇴계 선생이 각별히 아끼던 제자였다.
임진왜란 전에 정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중인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중 56세의 나이로 순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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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학봉의 불천위 제사는
그의 기일인 4월 29일에 행해진다.
기일 전날 후손들이 모여 사랑에 둘러앉아 집사분정
(제사 의례를 행할 때의 업무분장)을 하며,
밤 열시 즈음 설소과(設蔬果 _ 채소와 과실 등을 진설하는 일)를 시작으로
제례의식이 시작된다.
1차 진설이 끝나면, 본 제사에 앞서 승진이나 좋은 일을 맞이한 후손들을
불천위 선조께 알리는 고유제가 시작된다.
이는 후손들의 영광을 조상의 음덕으로 돌려 선조께 감사의 뜻을 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고유제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밤 12시가 지나 종손을 비롯한 모든 참사자들은
두루마기나 도포, 유건 차림으로 전설되어 있는 정침에 도열한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다음으로 출주出主가 진행되는데,
출주는 신주를 사당에서 모시고 나오는 절차이다.
신주를 신위전으로 모실 때는 참신례 후 강신례를 행한다.
참신례는 조상신과 참사자가 해후하는 의례이며,
신이 제례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확인하는 의례이다.
다음 차례인 강신례는 신을 강림하게 하는 절차이다.
종손이 손을 씻고 제단으로 나아가 향을 세 번 피우고 술을 모사에게
따라 준다. 이는 땅으로부터 혼백을 불러 합치시키는 의례이다.
향은 향나무로 만든 천연향, 술은 청주를 사용한다.
진찬進饌은 신이 강림한 후, 더운 음식을 올리는 2차 진설 절차다.
이때 메(밥)와 갱(국), 면(국수), 편(떡), 도적, 탕 등을 올린다.
이때 메를 서쪽에, 갱을 동쪽에 놓고, 도적은 고기를 쌓는 것으로
메 앞의 서쪽에 놓으며, 편은 갱 앞의 동쪽에 놓는다.
이러한 음식들 중 도적은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나는 제물로
어적·육적·계적을 적틀의 맨 아래부터 쌓는데,
특이한 것은 모두 날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예기」의 혈식군자血食君子, 즉 ‘군자는 날것을 먹는다’는
설에 근거한다. 탕은 육탕·어탕·봉탕·소탕·잡탕 등 오탕을 올리는데,
그릇 수는 보통 3, 5, 7의 홀수로 사용하며 신분에 따라 제왕은 칠탕,
대부는 오탕, 서인은 삼탕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초헌례는 강림한 신에게 술을 권하고 언제 누가 누구에게 제사를 올리는지
고하는 절차이다.
종손이 손술을 올리고 참사자들이 모두 꿇어앉아 축문을 낭독한다.
초헌례가 끝나면 아헌례와 종헌례가 이어지는데,
아헌례는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순서로 아헌은 주부가 된다.
이는 특히 ‘제사는 부부가 함께 한다(夫婦共祭)’는 의미에서 나온 예법이다.
유식례는 신에게 음식을 드시도록 권하는 절차이다.
이때 술잔에 첨작을 하게 되는데 첨작은 식사를 하면서 반주로 술을
더 드시라는 의미이다.
유식례가 끝나면 참사자들은 모두 잠시 밖으로 나간다.
이를 합문례라고 하는데,
신이 조용한 공간에서 편안히 식사할 수 있도록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는 의례이다.
식사시간은 구식경이라 하여 밥을 아홉 숟갈 먹는 시간 정도로 한다.
종손이 3번 기침을 한 후 닫혀졌던 가리개를 거두는 계문례 의식이 끝나면,
식사를 마친 후 숭늉을 드리는 절차인 진다례를 행한다.
앞선 절차가 모두 끝나면 신을 떠나보내는 사신례를 드리는데,
수저를 거두고 뚜껑이 있는 음식을 모두 덮고 참사자 모두가 두 번 절하게 된다.
절을 마치면 종손은 축문을 불태우고 신주를 출주 때와 반대의 순서로
사당에 봉안하는데, 이로써 모든 예가 끝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정성들여 준비하고 드린 제례 절차를 마치면
음복을 하고 제상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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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와 종손의 정성과 예의가 담긴 제례 음식 그리고 묘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자형의 사랑방, 안방, 문간방,
사랑마루 등으로 구성된 정침과 운장각, 풍뢰헌 및 세 칸의 사당을 합해
모두 90여 칸으로 이루어진 전통 고택이다.
제사를 비롯해 종가의 많은 행사가 치러지는 탓에 부엌이나 저장고,
장독이 여염집의 수준과 크게 다르다.
3개의 부엌과 31개의 장독, 지름이 65cm에 이르는 커다란 무쇠솥이
준비되어 있다. 북쪽 부엌문을 나서면 얼음 창고인 빙고가 있는데
지금도 냉장고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시어머니인 종부 조필남 씨가 1993년에 작고한 이후, 현재 학봉종택의
제례상은 차종부 이점숙 씨가 맡고 있다.
보통 제례음식 준비는 종부와 함께 유사들이 도와 진행한다.
제사 음식 중 도적과 포는 문중회의에서 순번을 받은 유사 3명이 담당하고,
나머지 제사 음식은 종부의 지휘 하에 준비하게 되는데
제사 음식 이외에 손님 접대를 위한 접빈 음식도 함께 준비한다.
종부는 제사 하루 전부터 재계와 근신을 하는데,
재계와 근신은 음식에도 반영이 되어 전날부터 가족과 손님들은
고기나 생선을 먹지 않는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제례음식 준비 과정을 한 단계씩 따라가 보자.
가장 먼저 제사 때 각 유사(집사)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정하는
집사분정을 위한 문중회의가 제사 전날 행해진다.
일단 역할이 정해지면 1년간 각자의 소임을 맡게 된다.
장보기는 제물 장만을 위해 문중회의에서 선출된 남자 유사 3명이 담당한다.
제물 장만 비용은 종가에서 지급되는데,
2002년에 행해진 불천위 제사의 장보기 내역을 살펴보면 대략 60만 원이 넘게
들었다. 여기에 직접 농사지어 쓰는 곡물을 합하면,
제수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은 대략 120만 원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장을 볼 때, 유사들은 제수품의 값을 절대 깎지 않는다
제사 비용은 경작하는 땅인 위토와 땅의 관리를 위해 조상의 묘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所)에서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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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봉 종가는 문중의 공동 재산인 소를 6개 갖고 있다.
여섯 개의 소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인 안동시 와룡면의 가수내소는
학봉의 高祖인 원사공 김한계와 학봉의 시제를 모시기 위해 마련되었다.
답이 10마지기, 논이 29마지기, 산78 정보 외에 부근의 가옥과
대지 대부분이 이 소의 재산이다. 해방 전에는 지금보다 4배가량 많았지만
1949년, 농지 개혁으로 지금의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소의 재산은 보통 소작을 주는데, 소출의 1/3은 소작인들이 차지하고
나머지 2/3 정도를 제물 마련에 사용한다.
이밖에 밭에서 산출된 농산물 및 대지 임대료가 가수내소의 1년 제비가 된다. 한편, 안동 지방은 지역적으로 산악이 많고 평야가 적은 데다
건조한 곳이어서 논농사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태백산 줄기의 첩첩 산봉들이 가로 놓여 해산물의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로 건어물이나 염장 생선이 해산물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안동의 대표적인 음식인 안동 간고등어의 등장도 이런 배경으로부터 기인한다.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제례는 점차 뒷전으로 밀려가거나 변질되고 있다. 그나마 종가의 전통을 통해 과거 우리 선조들의 의식을 배우고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있어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세히 살펴보면 종가의 사정도 예전 같지는 않다.
과거 하인의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제사 준비는
현재 종부와 몇몇 유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물 마련을 위한 엄청난 노동력 또한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다.
옛 전통의 소중함을 알고 이에 대한 보존 노력이 점점 소중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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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 전통을 고수하여 제례를 지내는 종가집들이 아직도 있었네요.
구정을 앞두고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