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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연의 시낭송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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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스크랩 김재진 시 모음
김서연 추천 0 조회 737 16.07.19 16: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대 가슴 만지듯 그리움을 만지네

                           詩 : 김 재 진

어느 날 내가 한 조각
빵처럼 부푸는 시간
마른 입술 적시듯 그리움이 젖네
묵은 치통이 소리내지 않고 입 속에 머물듯
한번도 불면을 경험하지 않은 라듸오가 잠속에 빠지듯
내속에 숨어 있던
외로움이 갑자기 발가락을 간지르네
망가진 자본주의의 미친 길은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로 차들과 다투고
바퀴는 이미 구르는 것이 아니네
단지 우리 사이를 가르는
절망일 뿐 바퀴는
하나의 별도 찾을 수 없는 검은 하늘에 걸려 있는
무거운 심연일 뿐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나는 손바닥 위로
까칠해진 턱을 괴어 놓네
야윈 이 턱은 불안의 상징, 아니면
견고한 콘크리트를 쪼아보는 새의 부리처럼
무의미한 장식일 뿐
달그닥 거리던 소리 그친 위층에선 가느다란
여자의 신음소리 묻어오네
아득히, 아니 까마득히
그들은 비로소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던 심연을
건너고 있는 것이리
한편의 邦畵(방화)를 떠올리며
코끝에 걸린 고독을 티슈처럼 뽑아 볼뿐
내가 걸린 감기는
버림 받던 시절의 음악
쿨럭이며 기억 너머 그대 가슴 만지듯
정성들여 나는
아무 것 아닌 상처들을 포장하네
입술이 남긴 쾌락의 흔적 지우지 못한
그리움이 휴지를 찢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呂)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듯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드뷔시를 추억함


너를 기다리느라 저녁을 굶곤 했다.
전신주에 연결된 끈이란 끈은
모두 끊어내는 동안
끝내 너는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았다.

윙윙거리며 울고 있는
내 마음의 전신주,
마음의 끈들 자르지 못해 나는
저물도록 서성인다.

여전히 나는 너에게 묶여 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결박당한
나의 무능함

가끔 나는 드뷔시를 떠올린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던
인상파 음악의 선구자
그 여자와의 사이에 드뷔시는 슈슈라는 딸을 낳는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드뷔시로 하여금 아내를 버리게 했을까?

사람들은 왜 평생의 반려로 생각하던
자신의 반쪽을 버리는 걸까?

아내 릴리를 자살미수에 이르게 했던
드뷔시의 음악 속에서 나는 결코
불륜을 예감하지 못한다.

사월에 눈 내리고
민들레 홀씨가 명상에 잠긴다.
기다리는 것보다 힘든 시간을 이기지 못한
내 마음이 종내
방바닥에 머리를 찧고 만다.



달빛가난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흥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지 말고 그냥 발길 따라만 가면 된다'.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도 무섭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눌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부지 그림자가 내 그림자 보다 더 커요'.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지'.
그날 밤 아버지가 지고 오던 궁핍과 달리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조금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1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세우다 돌아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 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를 향해
미안하단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으리.

기쁨뒤엔 슬픔이
슬픔 뒤엔 또 기쁨이 기다리는 순환의 원리를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너에게 말해 주리.
 

2
한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쉬 너를 보내지 않으리.

밤새 썼다 찢어버린 그 편지를
찢지 않고 우체통에 넣으리.

사랑이 가도 남은 마음의 흔적을
상처라 부르지 않으리.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망설이기만 하다 포기하고 만
금지된 길들 찾아가보리.

사랑에는 결코
금지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리.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내 마음 흔들어 놓던
너의 그 눈빛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
돈에도 이름에도
그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으리.



여우의 사랑

사랑한다는 말보다 쉬운 말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낡은 말도 없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랑 앞에 다쳐 내 마음은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기 두렵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하는 내 마음
달리 표현할 길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결코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낡은 말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내 마음
습관에 길든 한 마리 여우입니다.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문이 닫히고 차가 떠나고
먼지 속에 남겨진 채 지나온 길 생각하며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얼마나 더 가야 험한 세상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아득한 대지 위로 풀들이 돋고
산 아래 먼길이 꿈길인 듯 떠오를 때
텅 비어 홀가분한 주머니에 손 찌른 채
얼마나 더 걸어야 산 하나를 넘을까.
이름만 불러도 눈시울 젖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네 따뜻한
가슴에 가 안길까.
마음이 마음을 만져 화사하게 하는
얼마나 더 가야 그런 세상
만날 수가 있을까.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김 재 진


만남이 이별을 감추고 있다면
기쁨은 또 슬픔을 감추고 있습니다
내 가슴이 사무치는 건 결코
당신이 떠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만남이 마침내 다다르고 마는 이별 보다 나는
이별 뒤에 찾아올 망각을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까맣게 잊어버리고야 말 당신은 이제
허공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없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의 나를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없습니다.
떨어지는 저 나뭇잎 한 장의 의미도 우리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만남이 이별을 감추고 있다면
희망은 또 상처 속에 숨어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별 보다 아픈 건 망각이라 스스로를 베면서도 나는 또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인연

                        김 재 진


         한 세상 입던 옷 벗어놓고 우린 모두
         어딘가로 떠나야 합니다.
         마당에는 불 켜지고
         이모, 고모, 당숙, 조카,
         이름도 잊어버린 한순간의 친구들
         때 묻은 인연들 모여 잔치를 벌입니다.
         술잔이 돌고 덕담이 오가고
         더러는 떠나는 것을
         옷 갈아입는 거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기 전 나는 훌훌
         가진 것 다 비워내고 빈 몸이고 싶습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헛된 이름인들 남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헌옷 벗어 개켜놓고 그렇게
         목욕탕에 갔다 오듯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은둔의 사랑

그 자리에 네가 있어 주기만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멀리서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스치기 전 한 번쯤 내가 보낸 눈길에
미소짓기만 해도 너를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기다림은 멀고 나의 밤은 채워지지 않는다.
단지 제 이름 불러 스스로를 애무하는
고독한 위로.
세상 어딘가에 네가 존재하기만 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허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12월

달력 속의 숫자에 우표를 붙인다.
이혼한 여자처럼 불 꺼진 그믐에
혼자 앉아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쓴다.
십이 월, 십이 월……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그대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일에 나는
길들어져 있다.
단념하듯 날 저물고
눈 내린다.
일제히 하얀 점으로 변하는
눈동자 속의 십이 월,
길 위로 나서기 위해
목이 긴 구두를 꺼내 신는다.
여름의 끝에 헤어진 친구를
눈발 속에서 찾다.
그대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일에
정말 나는 길들여 있을까.
사막에 눈 내리면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젖는다.
타클라마칸이나 라자스탄 쯤의 십이 월,
때로는
지쳐서 주저앉아 있는,
내 청춘의 사막쯤에 숨겨놓은 십이 월,
가끔은
그대 침묵 앞에
온몸을 사르는 숯으로 빛나고 싶을 때가 있다.



멀리있는 연인 에게

바깥으로 나오면
건물의 입구에 앉아 있거나 비스듬히 기댄 채
찢어진 바지 더 찢거나 담배피고 있는 여자.

편지를 보냈어요. 산성비에 젖어
당신의 주소가 흐려졌어요.

우체통을 본다 낡은 추억의, 붉어지는 그림자.
뒤뚱거리는 육교 밑으로 즐거운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는 아무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 것을 안다.

조명 아래는 하루살이떼처럼
붐비는 사람들,
붐비며 기어코 잊으려 하는 사람들,
한 줄의 기타, 몇 가닥으로 번지는 그리움 뜯어내며
그 여자는 노래한다 부드러운 목젖 떨리며.
그 여자가 말하는 그리움을 나는
모른다.
멀리 있는 연인에게 아무 것 보낼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내 속에 남아있는 한 방울의 기다림도 짜 내버린다.

가령 누가
어떻게 말한다거나, 노래한다거나,
누군가 죽는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은행나무 아래서 나는
은행잎으로 어지러운 길들이
인간의 꿈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을 본다.

은행나무 사이에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해요.

그래, 가령 누가 누구를 생각한다 이건
그리움과 다르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가고,
시간의 사이에 납작하게 낀 사람들이 나사못처럼
건물 속에 박혀있다.

또 한 통의 청구서,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이름들을 나는
수첩 가득 적어넣기도 한다.
죽은 가수를 추모하는 콘서트가 열리고, 시간이
멀리 있는 연인의 우편함을 기웃거릴 때까지.



상실

노랗게 번지기 전 나는 이미
개나리가 필 것을 알고 있다.
가파른 비탈에 뿌리내린 채
겨울을 견디어 준비한
네 눈물의 빛깔을 알고 있다.
미미하게 묻어오는 바람의 안부를
속달로 접수하며
나 역시 봄을 준비할 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세라도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것 같은
그 화사한 절규 속에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꽃은 나무의 눈물,
가지마다 별을 달고 솟아오를
말없는 탄식.
또 한번의 상실 다가오는 비탈에 서서
네 이름을 불러본다.



그대 가슴만지듯 그리움을 만지네

어느 날 내가 한 조각
빵처럼 부푸는 시간
마른 입술 적시듯 그리움이 젖네.
묵은 치통이 소리내지 않고 입 속에 머물듯
한번도 불면을 경험하지 않은 라디오가 한순간에 잠 속에 빠지듯
내 속에 숨어 있던
외로움이 갑자기 발가락을 간지르네.
망가진 자본주의의 미친 속도의 시간
길은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로 차들과 다투고
바퀴는 이미 구르는 것이 아니네.
단지 우리 사이를 가르는
절망일 뿐 바퀴는
하나의 별도 찾을 수 없는 검은 하늘에 걸려 있는
무거운 심연일 뿐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나는 손바닥 위로
까칠해진 턱을 괴어놓네.
야윈 이 턱은 불안의 상징, 아니면
견고한 콘크리트를 쪼아보는 새의 부리처럼
무의미한 장식일 뿐
달그락거리던 소리 그친 위층에선 가느다란
여자의 신음소리 묻어오네.
아득히, 아니 까마득히
그들은 비로소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던 심연을
건너고 있는 것이리.
한편의 방화邦畵를 떠올리며 나는
코끝에 걸린 고독을 티슈처럼 뽑아 볼 뿐
내가 걸린 감기는 버림받던 시절의 음악
쿨럭이는 기억 너머 그대 가슴 만지듯
정성 들여 나는
아무 것 아닌 상처들을 포장하네.
입술이 남긴 쾌락의 흔적 지우지 못한
그리움이 휴지를 찢네.



사랑한다는 일의 부질없음

의자왕의 삼천 궁녀처럼
치마 뒤집으며 뛰어내리는 물방울들
물보라 하나 일으키지 않는 그것들을 다시
폭포라 이름 부를 순 없다.
누구는 그 아래 득음得音을 위해 목 갈랐다지만
한때의 풍문
바위에 깨진 이마 싸매며 물방울들은
쉬 마르거나
속 보이는 웅덩이로 몸을 숨긴다.
갑자기 실명한 사람들이 봐버린
깜깜한 절벽 밑으로도 떨어지고 있을 꽃 이파리
흐르는 눈물 뺨뺨이 적시며
한사코 기어오르는 담쟁이의
무모한 저 집념은 어디로 갈 것인가.
부질없는 격정에 다친 폭폭는 이제
스스로 낙차를 조절할 줄 안다.
세파에 둥글어진 바위와
굴곡의 삶 연명하고 있는
틈새의 늙은 저 소나무
실연의 상처 내다버린 벼랑 끝은 더 이상
유혹적이지 않다.
눈 먼 세월에 헛디뎠던 발 들여놓으며
이제 더 방황하지 않고 멈추어 있는 시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때의 타오르던 증오로 말라버린
물길 위로 하늘이 비친다.
사랑한다는 일의 부질없음……



눈 오는밤

편지를 쓴다.
모처럼 하얀 종이 위에 써보는 편지.
사각거리며 걸어가는 연필심 따라
어디선가 환하게 눈 내린다.
미끄러지는 사람 있는지
까르르 입을 막는 여자의 웃음소리 들린다.
검은 세상의 하얀 약속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몸을 담그는 거라
너는 가르쳐 주었다.
어느새 눈 그치고
사각거리던 편지도 마침표에 닿는다.
지치도록 걸어가도 집이 보이지 않던
젊은 날의 시간
아무도 몸 담그지 않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편지의 말미에 얼른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추신한다.



길에나가 물어보네

먼지처럼 비 내리네.
내리는 비 속에 한 사람 서 있네.
생각만 가까울 뿐 멀리 있는 사람.
아무 것도 더 기다릴 것이 없네.
흐르는 눈물 채 훔치지 못한
길에 나가 물어보네.
끝나지 않을 듯 누가
나무 뒤에서 키스하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낸
내 입술 위로 비 떨어지네.
달콤하고 캄캄한 혀,
눈 감고 한없이 속삭이는 소릴 듣네.



성욕

내 속에 있는 짐승이 소릴 지른다.
네 발로 기고 있는 이
안면몰수의 사랑스러움.



세월

그런 삶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 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 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가을 입니다

한 그루 나무이고 싶습니다.
메밀꽃 자욱한 봉평쯤에서
길 묻는 한 사람 나그네이고 싶습니다.
딸랑거리며 지나가는 달구지 따라
눈 속에 밟힐 듯한 길을 느끼며
걷다간 쉬고, 걷다간 쉬고 하는
햇빛이고 싶습니다
가끔은 멍석에 누워
고추처럼 빨갛게 일광욕하거나
해금강 바라뵈는 몽돌밭을 지나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고 싶습니다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이
구두 아래 바지락거리는 이맘 때
허수아비처럼 팔을 벌린 내 마음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비상

잠들지 마라 내 영혼다.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농아처럼
하염없는 길을 걸어 비로소 빛에 닿는
생래生來의 저 맹인처럼
살아 있는 것은 저마다의 빛깔로
부시시 부시시 눈부실 때 있다.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내다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이 인생.
덫에 치어 버둥거리기만 하는
짐승의 몸부림을 나는 이제
삶이라 부르지 않겠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숨막힘,
사방으로 포위된 무관심 속으로 내가 간다.
단순히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넘어진 것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렇듯
넘어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일으켜 세우는 자 없어도 때가 되면
넘어진 자들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바닥에 닿은 이마 들어 지평선 위로
어젯밤 날개를 다쳤던 한 마리 새가
힘겹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아라.




다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라는 표현은 어딘가 낡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 눈은
그렇게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공중전화에 매달려 있는 한 여자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푸르고 짙은 청동의 녹,
한동안 닦지 않아 멈춘 시계처럼 어느날 문득
당신에게 향하는 내 마음도 녹이 낀 걸 알았습니다.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그 말의 무게에 눌려 나는 시퍼렇게 잊혀졌을 뿐입니다.
발 동동 구르며 누군가를 갈망하던 여자는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공원 저쪽으로 사라집니다.
여자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나는 무심코
당신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맙니다.
실수였습니다 그건.
한동안의 지독하던 습관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나눌 누군가를 호출하려 했을 뿐,
정말 실수였습니다 그건.
그렇듯 당신을 사랑했던 것 또한 실수였습니다, 나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눈이 그치고
다시는 비치지 않을 듯 싶던 태양이
세상의 지붕을 적십니다.



사랑의 이유

당신이 꼭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것으로부터 당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장점보다
결점이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어쩌다 보니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 하고 싶을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힘들던 마음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겨울 나그네

비오는 밤 편지를 쓴다.
키보드 두드리는 전자 우편 아닌
만년필로 써나가는 고전적인 노동,
노동하듯 나는 네게
힘들여
사랑한다는 한 마디 하고 싶다.
사랑한다.
잘 못 걸려온 전화처럼 수화기 내려놓으며
나 이제 너를 향해
한 통의 전화조차 할 수 없지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려오는 네 음성 듣고서도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바깥에는 비 내리고
나는 지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처음 본 지붕과 낯선 길들
끈질기게 따라온 절망을 버리기 위해 나는
정류장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쉴 새 없이 물건을 사고,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말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듯
혼자 있는 방에서도 지껄였다.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말을 하고,
아무도 읽어주는 이 없는 글을 썼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듯 확인하는 일,
한때 네가 확인하던 내 마음처럼
두드리고 만져보는 일,
눈 대신 바깥에는 비 내리고
아무 것도 더 확인할 것 없는 너를 향해 나는
쓰고는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전화조차 할 수 없는 너,
사랑한다는 말이 죄가 되는 너,
나는 너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나무

문득 눈앞의 세월 다 지워지고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수첩 속에 빽빽하던 이름들 하나같이
소나기 맞은 글씨처럼 자욱으로 번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세파에 치어 각양각색인
남루 또한 지나간 상처 마냥 눈물겹고
서있는 사람들이 한 그루 나무처럼
이유없이 그냥 아름다울 때 있다
가파른 세월이야 지나면 그뿐,
코끝을 감고 도는
한 자락 커피 향에 두 눈을 감고
비 맞는 나무처럼 가슴 적시는
무심한 몸놀림이 아름다울 때 있다



따뜻한 그리움

찻잔을 싸안듯 그리움도
따뜻한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생각하면 촉촉이 가슴 적셔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라면 좋겠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또 네가
나에게 기대는
풍경이라도 그렇게 흐뭇한 풍경이라면 좋겠네
성에 낀 세상이 바깥에 매달리고
조그만 입김 불어 창문을 닦는
그리움이라도 모락모락
김 오르는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은어

썩어가는 모과에서 향기가 납니다.
자식들 다 키우고 홀로 된
어머니 품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사랑도 어디쯤 지나간 사랑에선
향기가 납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상처에도 향기가 있습니다.
수박 향 서늘한 은어회처럼
상처도 견디면 향기가 납니다.
세월 속에 곰삭은 향기가 납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알지 못한 향기도
저만치 떨어지면 느껴집니다.
멀리 갈수록 잘 보이는 산처럼
헤어져 있는 동안 그대 모습이
은은한 향기처럼 그립습니다



행복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 고요할 때
나는 행복하다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로 개울을 건너거나
대지의 맨살을 발바닥으로 느낄 때
만지고 싶은 것
입에 넣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나 없이 비어 있을 때
행복하다

가령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어깨에 닿고
한 마리 벌이 꽃 위에 앉아 있는
그 짧은 세상을 눈여겨 보라

멀리 산 그림자 조금씩 커지고
막 눈을 뜬 앵두꽃 이파리 하나 하나가
눈물겹도록 아롱거려 올 때
붙잡는 마음 툭, 밀어 놓고 떠날 수 있는
그 순간이 나는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에요, 여기에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지,
사랑은 기다림만큼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세월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 살자.
먼길을 걸어 가 닿은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 살자.



너를 만나고 싶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서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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