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짝퉁거리 이미지 벗어 ‘하드록카페’ ‘에뀌메’ 등 트렌디한 식당 잇따라 생겨 유행 선도하는 이색거리로
19일 오후 3시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호텔 뒷골목. 차 한 대가 지나가기도 버거운 골목길 양쪽으로 수십 개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다. 파스타가 맛있는 '마이 첼시(My Chelsea)', 검은색 바탕의 고급스러운 원목 장식을 한 프랑스 레스토랑 '르 생떽스(Le Saint Ex)', 테라스가 멋진 '게코스 가든(Gecko's Garden)'…. 튀는 간판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이국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련되진 않지만 독특한 개성의 가게들이 각자의 멋을 내뿜는 런던의 '소호(Soho) 거리' 같다.
한껏 멋을 낸 20대 여성 세 명이 점심을 먹고 나와 "이제 어디 가지?"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옆으로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레스토랑 앞 메뉴판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점심 먹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지만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태원이 변하고 있다. 허름하던 술집은 세련된 펍(pub)으로, 투박하던 음식점은 분위기 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짝퉁(명품 이미테이션)을 팔던 옷가게들은 개성 있는 디자이너 숍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거리를 활기차게 만드는 20~30대 젊은이들 사이로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최모(28·송파구 가락동)씨는 "대학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만나 중동 음식점 '페트라(Petra)'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친구 황모(28·강남구 신사동)씨는 "집에서 멀긴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이태원 맛집을 꼭 찾는다"며 "이색적인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많다"고 했다.
▲ 행인들이 이태원 해밀턴호텔 뒷골목 레스토랑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한국의 소호(Soho) 거리'
이태원은 오랫동안 '이방인의 거리'였다. 일본강점기에는 일본인 전용 거주지였고, 한국전쟁 이후엔 미군 기지가 들어오면서 기지촌이 됐다. 하지만 1970년대 팝송이 유행하면서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제3한강교가 들어서자 '1차는 강남, 2차는 이태원'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1988년 올림픽 때는 '잠실에선 스포츠 올림픽, 이태원에선 쇼핑 올림픽'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할 정도로 인파로 붐볐던 곳이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이태원은 미군들만 다니고, 범죄가 많고, 짝퉁만 파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기면서 시민들의 발걸음이 줄어들었다.
이태원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다시 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 유학과 해외 연수로 외국 문화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가 이국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을 찾으면서부터다. 커밍아웃을 한 탤런트 홍석천이 운영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아워 플레이스(Our Place)'에 연예인이 많이 찾고 음식도 맛있다는 소문도 일조했다.
황순옥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국장은 "10년 전 이태원에 오는 사람들은 외국인(특히 미군)이 70%, 한국인이 30% 정도였다면 요즘은 한국인이 60% 정도로 늘었다"며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하루가 멀다고 개성 있는 디자인의 카페나 레스토랑이 새로 들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강북과 강남의 중간이라는 지리적 요인도 장점으로 꼽힌다. 장여진(30·서초구 서초동)씨는 "강북 사는 친구들 만날 때 이태원에서 약속을 잡는다"며, "이색적인 분위기도 느끼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 주인이 직접 옷을 디자인해 판매하는 원피스 전문숍‘킴스 부티크(Kim’s Boutique)’. /송혜진 기자enavel@chosun.com
2005년부터 태국 음식점 '부다스 벨리(Buddha's Belly)'를 운영 중인 김태응(38) 사장은 "강남의 레스토랑은 대부분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인테리어를 해 '멋지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반면, 대부분 비슷한 분위기"라며, "반면 이태원에서는 식당마다 주인의 개성이 묻어나 강남 쪽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 장안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트렌드 세터(trend setter·유행 선도자)'들이 몰리자 유명 식당들도 따라왔다.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 같이 가장 '핫(hot)'한 곳에만 들어선다는 미국식 레스토랑 '하드록(Hard Rock) 카페'도 2년 전 청담동에서 이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인기 있던 유럽 음식점 '에뀌메(Ecume)'도 최근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김상철(38) 사장은 "서래마을에서는 인근에 살던 프랑스인들만 주로 찾은 반면, 이곳에서는 다양한 고객층을 겨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해밀턴 호텔~지하철 4호선 녹사평역 간 550m 구간을 '디자인 서울거리'로 지정해 화강판석을 깔고, 10여개국 국기와 인사말이 새겨진 국가별 상징 동판을 75곳에 설치해 거리를 깔끔하게 만들었다.
◆해밀턴 호텔 앞 '패션의 거리'
해밀턴 호텔 뒷골목이 '맛의 거리'라면 호텔 앞 도로는 '패션의 거리'다. 이곳에선 개성 강한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들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특히 할리우드 배우 시에나 밀러도 즐겨 입는다는 원피스 전문숍 '킴스 부티크(Kim's Boutique)', 탤런트 하유미가 극찬했다는 수제화 전문 '제이 바니(Jay Vany)', 양가죽을 직접 수입해 옷을 만들어 파는 '페라라 코리아(ferrara korea)', 직접 리폼한 빈티지 옷들로 유명한 '제이스 클로젯(J's closet)' 등이 유명하다.
2007년 말 동생과 함께 가게를 열었다는 '킴스 부티크'의 김소라(41) 사장은 "처음에는 명동이나 홍대 앞을 물색했지만, 이태원의 독특하고 재미있는 분위기에 끌렸다"고 말했다. 특이한 옷이 많은 만큼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오는 단골손님도 많다. 이보미(22·서대문구 연희동)씨는 "빈티지 스타일이나 시폰 원피스를 좋아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들른다"고 말했다.
▲ 20일 오후 이태원의 프랑스 레스토랑‘에뀌메(Ecume)’에서 한 종업원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앤티크 거리
해밀턴 호텔 맞은편에서 보광동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앤티크(고가구) 거리'도 형성돼 있다. 40여년 전 주한 미군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가구를 처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거리는 현재 100여개가 넘는 앤티크 가구들이 늘어서 있다. 지금은 외국인과 부유층뿐 아니라 색다른 걸 좋아하는 20~30대 젊은이, 새로운 영감을 받기 위해 이색적인 가구를 둘러보는 디자이너들이 많이 찾는다. 가격은 꽤 비싸지만, 발품을 좀 팔면 손때가 묻은 탁자, 빛바랜 콘솔, 살짝 칠이 벗겨진 촛대 등 세월의 때가 내려앉은 물건을 건질 수 있다.
37년 역사의 해밀턴 호텔은 지난해 5월 야외 수영장을 새로 개장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외국 휴양지를 연상시키는 수영장은 TV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가수 유이와 배우 박재정이 찾아 더 유명해졌는데, 술을 판매하고 흡연이 가능해 '청소년 출입금지'다. 크라운 호텔도 2008년 '클럽 볼륨'을 오픈하면서 '클럽=홍대·압구정'이라는 공식을 깼다.
용산구는 "올해 안으로 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로 된 다국적 IT 안내시스템을 녹사평역~한강진역 1.4㎞ 구간 곳곳에 설치해 거리를 거닐다가 편리하게 주변 관광지와 편의시설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