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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격려
요삼 1:1-8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요삼 1:1-8 / [인 사] 장로 요한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이 편지를 습니다. 2)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 영혼이 건전한 것같이 몸도 건강하기를 빕니다. 3) 믿음의 형제들 몇 사람이 여행 중에 이곳에 들러 그대가 언제나 순결하고 진실한 생활을 하며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4) 내게는 내 자녀들이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5) [가이오를 격려하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가 여행 중에 있는 교사들과 전도자들을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다니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훌륭한 봉사를 한 것입니다. 6) 그들이 이곳 교회에 와서 당신의 우정과 사랑에 넘치는 환대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대는 그들을 따뜻하게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여행지로 떠나 보내면서 풍성한 선물까지 안겨 주었다니 그것은 내가 받은 것이나 다름없이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앞으로도 그들을 잘 대접하여 보내시기 바랍니다. 7) 주님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필요한 음식이나 의복이나 잠자리나 돈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8) 그러니 우리 스스로 그들을 돌보아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주님의 일에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삼서는 가이오에게 보낸 개인 서신입니다. 나그네 즉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는 일에 대하여 칭찬하며 선한 일에 정진하도록 격려하고 진리 안에서 행함의 가치와 상반된 교만의 위험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잘 세워진 그리스도인(1-2) 요한은 가이오에게 보낸 짧은 서신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5회나 표현을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이 성구는 성도들이 많은 구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가이오는 약한 자이었으나 강건하고 신령한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오랄 로버츠는 청년 때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서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여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외치며 부흥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기쁨이 된 그리스도인(3-4) 형제들이 와서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증거에 요한은 심히 기뻐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복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요한이, 삼서 외에 신약성경에서 크게 강조되지 않은 문구입니다. ‘진리와 행함’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교회가 당면한 위기 즉 진리인 복음을 곡해하고 거짓된 교리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관용의 사람 가이오(5-8) 형제와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일은 성도에게 위임된 일입니다(롬 12:13). 초대 교회에서는 이 일이 중요한 사역이요 덕목이었습니다(마 10:10).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을 대접해야 합니다(행 15:40, 41; 롬 1:5). 이들은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음이 합당함에도 불구하고(고전 9:12, 14) 교회에서 도움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가이오와 같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에 칭찬을 받을 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고 격려하는 단계에서 그들이 다음 목적지까지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도록 전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들을 돕는 것은 그 사역에 함께하고 사귀는 일입니다(요일 1:3).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입이다(요 13:34, 35). 가이오는 관용의 사람입니다.
적용: 당신은 교회에 잘 세워진 성도인가, 주의 종들의 기쁨이 되는가? 당신은 얼마나 베풀고 후원을 하는가? 그 내용을 기록해 보십시오.
사람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소원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가장 강력한 소원 중의 하나는 남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마네치를 길러냈던 루마니아의 벨루아모터리 감독은 희망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던 메루릴 레턴의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재능과 그의 재질을 보고 그를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그 감독의 인정을 받은 매루릴 레턴은 그에게서 힘을 얻고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마침내 L.A. 올림픽에서 체조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인정을 받는 것은 삶의 최고의 재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최고의 자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 인정받는 삶입니다.
< 설 교 >
주님이 원하시는 것
요삼 1:1-8
만약 여러분에게 여러분 주위에 칭찬 받을 만한 사람을 한 사람 추천해 보라 하면 여러분은 누구를 추천할 수 있겠습니가? 여러분 주위에 그렇게 훌륭한 신앙인이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아주 믿음 좋은 한 신실한 동역자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가이오입니다. 성경에 가이오가 한 세명 등장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가이오라는 말의 뜻은 ‘기뻐한다.’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 지역교회 지도자인 가이오에게 친히 친필로 편지를 쓰면서 그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이오는 사도 요한에게 전도 받은 사람입니다. 전도 받고 사도 요한에 의해서 양육된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 4절에 보니까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내 자녀들이 감히 사도 요한은 물론 연세가 좀 많겠지만 가이오에게 내 자녀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영적으로 그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육적인 자녀도 있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전도해서 양육하면 영적인 자녀가 되는 것이죠.
여러분 여기 사도 요한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요한 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그리고 마지막 생애는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기도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 권위 있는 위대한 사도가 오늘 가이오를 추천하면서 그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 가이오는 매우 신실한 일꾼입니다. 그는 특별히 사랑이 많고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순회 전도자 순회 선교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고 누가 월급 주는 사람도 없지만 스스로 이곳저곳을 왕래하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여관이나 호텔이 없고 돈도 없으니까 어느 지역에 가면 그 교회나 그 교회 성도의 집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거기서 식사도 대접받고 잠도 자기도 하고 또 떠날 때 노자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가이오가 그런 사람들을 잘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이 바로 사도 요한에게까지 들려오게 됐습니다.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대접의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균형 잡힌 신앙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충실하게 순종하는가 하면 이웃사람들에게 사랑을 행하는. 그래서 말씀과 행함이 일치하는 사람이 바로 이 가이오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느 지역 교회에 지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와 대조되는 한 사람이 또 성경에 나오는데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한 번 9, 10절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만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아마 이 지역교회에는 가이오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이 디오드레베라는 아주 못된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의 특징은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최고되기 좋아하고 일등 되기 좋아하고 내가 제일 높고 힘이 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고는 사도 요한을 영접하지 않았다. 많은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말로 사도 요한을 비방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영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영접한 사람들을 오히려 교회서 추방한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교회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참 의심스럽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도자가 되고나서 아마 변질 된 것 같아요.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렇게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이 디오드레베에 비하면 가이오는 아주 흠모할만한 훌륭한 인격적인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더더욱 이 디오드레베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내기를 좋아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가이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6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 무슨 이야기일까요? 순회 전도자들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이 가이오가 그들을 사랑으로 영접하고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접받은 선교사들이 다른 곳에 가서 이 간증을 했어요. 가이오라는 분을 만나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소문이 사도 요한에게까지 들려 왔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면서 가이오의 신앙이 이렇게 훌륭하구나 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다. 내가 내 자랑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 사랑을 입은 사람에 의해서 그 소문이 사도 요한에게까지 들려지게 되었다. 아주 바람직한 것이죠.
여러분 제일 좋은 것은 정말 우리 모든 성도들의 훌륭하고 인격적인 삶이 이 지역 주민 이웃 사람들을 통해서 소문이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세 들었는데 그 주인이 너무 훌륭해서 제가 이 분이 누구인가 알아보니까 영신교회 집사님이네요. 얼마나 좋을까요? 혹 우리 집에 세 든 분이 있어서 참 삶이 아름답고 인사성이 밝고 명랑해서 자세히 보니까 우리교회 교인이라고 하네요.
여러분 이렇게 들어올 때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바로 가이오는 그런 사람이에요. 스스로 소문내지 않아도 그로부터 사랑과 영접을 받은 사람이 다니면서 이것을 간증해서 사도 요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사도 요한은 이제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이 가이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1절 말씀 한 번 읽어볼까요?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이 보통 편지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이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한다. 이것은 가이오에게만 보낸 편지가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가이오라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복을 받기 원하고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서 그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하나의 축복의 소원을 담고 있어요. 자 여러분! 오늘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향한 놀라운 축복의 소원을 담고 있다면 바꿔 말하면 이 편지는 주님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바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소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삶이 어떠하기를 원하실까? 이 말씀을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첫 번째는 ‘주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2절 말씀 잘 알지만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이 잘된다. 이 뜻은 헬라어로 유오두사이(ευοδουσαι) 이 말은 문자적으로 말하면 ‘좋은 여행을 하다.’라는 뜻이지만 이것을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번영하다. 성공하다. 잘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사도 요한은 가오이의 영혼이 잘 되기를 원하는거예요. 주님은 바로 우리 영혼이 잘 되기를 원해요. 우리 영혼이 복 받기를 원해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부모들이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해요. 망하기를 원해요? 잘 되기를 원하죠!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당신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세요.
때론 우리 육신적인 부모들도 자기 자녀들이 잘 되는데 자기보다 더 잘 되기를 원해요. ‘너는 나보다 더 잘돼야 돼. 너는 나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돼. 너는 나보다 더 믿음의 사람이 돼야 해.’ 이것을 원해요. ‘너는 나보다 잘 되면 안 돼’ 이런 부모는 없어요. 자녀가 더 잘 되기를 원해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세요. 영혼이 잘 되길. 이 영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푸시케(ψυχη)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최고의 가치를 지닌 영적 생명을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성소가 바로 영혼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 된 사람은 어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영혼이 풍성한 사람들은 예배가 기쁘고 즐거운거예요. 예배가 기대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들을 때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는거예요. ‘에휴 빨리 안 끝나나? 빨리 끝내지 뭘 이렇게 길게 해. 더운데.’ 이런 사람은 미안하지만 영혼이 풍요롭지 못한 사람이에요. 육신적인 밥을 먹고 싶어서 빨리 영적 식사가 끝났으면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우리 영혼이 기름지고 풍성하고 생기로 충만한 그런 영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풍성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진 영혼!! 만약 우리의 영혼이 여름에 비가 안 와서 땅바닥이 갈라지고 식물이 시들어 가는 것처럼 그런 영혼이라면 얼마나 피폐하겠어요. 비참하잖아요. 그건 직분과 상관없이 비참한거예요. 그러나 내가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영혼이 기름지고 풍성한거에요. 주님과의 관계가 늘 기쁘고 즐거운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니까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도적이라는 것은 누구에요. 사탄이에요. 사탄이 온 목적은 우리 영혼을 빼앗고 우리 영혼을 도적질 하고 우리 영혼을 멸망시키려는거에요. 그러나 내가 온 것은 내가 누구에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리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옆에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의 생명은 풍성하십니까?’ 살아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여러분은 다 살아계시죠.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명이 정말 풍성하고 기름지냐? 아니면 피폐하고 메마르고 갈라졌느냐? 그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건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리고 내 자신이 알아요. 영혼이 잘되는 것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요. 영혼이 잘 되면 모든 것에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태풍 두 개를 맞이했습니다. 첫 번째 태풍이 뭐였죠? 볼라벤. 이름도 참 신기하죠. 두 번째 태풍이 또 뭐죠? 덴빈. 덴뿌라로 생각하시면 돼요. 일본에서 지은 이름이 덴빈입니다. 그런데 이 볼라벤은 바람을 몰고 와서 모든 나무 가지의 낙엽을 다 떨궈버렸어요. 그런데 또 하루 만에 이 덴빈이 폭우를 몰고 와서 비가 내렸어요. 그러니까 침수가 될 수밖에 없죠. 광주나 목포에서는 도로가 침수가 돼서 차가 둥둥 떠 다녔어요.
왜 그랬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낙엽이 떨어져서 하수구 구멍을 다 막아 버렸습니다. 거기에 폭우가 오니까 그 물이 빠질 때가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침수가 돼서 차가 둥둥 떠다닐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 우리 영혼의 통로가 막혀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영혼의 관계가 파괴되거나 파이프가 막혀 버리면 우리의 육신적인 삶이나 우리의 모든 건강의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 거예요.
영혼이 피폐해지면 묻지마 범죄!! 영혼이 파괴된 분들입니다. 영혼이 다 메말라버렸어요. 증오로 국가가 나를 버렸어 회사가 나를 버렸어 가족이 나를 버렸어!! 증오와 원망이 가득 찬거에요. 그러니까 감사가 없어요. 영혼이 파괴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칼을 들고 아무나 닥치는대로 찌르는 거예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지나가는 사람을 찌르는 거예요. 이 영혼이 파괴된 거예요. 영혼이 파괴되면 환경이나 건강까지도 심각한 충격을 입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영혼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지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건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건강을 이야기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그에게는 선한 영향력이 있어서 범사!! 모든 것이 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또 건강의 축복도 그에게 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이 풍성하면 다 잘 되고 건강하고 병원에도 안가고!!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도 풍성하고 범사도 잘 되고 건강의 복도 누리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되기를 우리가 축복하시는 것이지!! 영혼은 정말 풍성한데 병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예외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궁핍하게 살았습니까? 매 맞고 궁핍하고 쫓겨나고 그래도 그것이 복입니다. 영혼이 풍성합니다.
여러분 욥 같은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지만 영혼은 풍성하지만 그가 마귀의 시험을 당해서 그의 몸에 질병을 당해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합니까? 이렇게 예외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육신은 풍년인데 영혼이 가뭄인 사람. 육신은 풍성입니다. 돈 잘 쓰고 건강하고 놀러 잘 다니고 신나!! 그러나 영혼은 메말라 있습니다. 바짝 바짝 말라 있습니다. 캄캄합니다.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외형적인 삶이 조금 부족해도 우리 영혼이 풍성할 때 그 사람이 진정한 행복한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원하건대 여러분이 영혼도 풍성하고 범사도 잘 되고 건강의 복도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풍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죠. 영혼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은 영혼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영혼에 생기가 흐르고 기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호흡이 있어요. 영혼의 호흡은 무엇입니까? 호흡 안하면 질식하죠?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마다 우리 영혼이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생기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영혼의 운동이 있어야 해요. 이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영적인 비만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신다. 영혼과 범사와 건강의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자 3, 4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오늘 사도 요한이 기쁨이 무엇입니까? 오늘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 큰 기쁨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우리 백성된 자녀들이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너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 된 여러분들이 어떨 때 기쁘십니까? 자녀가 바르게 살 때, 자녀가 말씀 안에서 공의롭게 살 때 부모의 마음이 기쁘고 행복해요.
그러나 만약에 자녀가 돈을 많이 벌어 집은 열채인데 매일 사기 치며 살아간데 남의 돈 뺏고 거짓말 하며 살아간데 그 소식 들으면 우리가 행복합니까? 말씀 안에 진리 안에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죠. 공의로운 말씀 안에 살기를 원하고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죠. 또 더 나아가서 이 진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곧 예수님을 가리켜요. 그리고 이 진리는 또한 복음의 말씀을 가리켜요. 네가 복음 안에서 네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네가 살기를 내가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내가 너무 기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 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이 되셔서 우리 주님에게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절에 ‘내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성경에서 소개되는 가이오가 그런 진리 안에서 거하는 사람이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죠. 디오드레베. 그는 하나님 말씀, 진리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빗나갔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는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는데 그는 으뜸이 되고 교만하기를 좋아했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의 연약한 형제들을 영접하라고 했는데 전도자들을 영접하라고 했는데 그는 거절하고 내쫓았어요.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형제를 향해 축복하라고 했는데 그는 악한 말로 사도 요한을 비방했어요. 그는 말씀에서 벗어난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영상에서 본 신천지 이단들!! 이것은 아예 진리에서 탈선한 사람들입니다. 아니 신천지는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만희 교주, 이만희 교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다 거짓된 얘기입니다. 이만희가 바로 예수고 이만희가 재림 예수라고 합니다. 백마 타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저도 전에 유원지 가서 백마 타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럼 저도 재림 예수입니까? 14만 4천명!! 이것 때문에 신천지 사람들이 얼마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쓰는지 몰라요. 제가 아는 분 물어보니까 2년만 지나면 14만 4천명을 채운데요. 그래서 남편 밥도 안 해주고 새벽부터 뛰어 나가서 보따리 들고 다니며 사람을 끌어 올려고 해요. 10년 안에 이만희는 죽을 거예요. 지금 아마 80 몇 세라고 해요.
문선명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며 천부교라고 해요.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으려고 해요. 문선명씨가 모든 신장 기능이 다 끝났데요. 그래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다 끝났어요. 모든 기능이 모든 병원에서 손들었어요. 그는 죽을 거예요. 이만희도 반드시 죽을 거예요. 14만 4천명 다 채우면 영생 불사하고 평생을 살 수 있데요. 매일 늙고 있던데 어떻게 안 늙습니까? 그는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진리에서 탈선한 사람들이에요. 벗어난 이단들이에요.
주님은 우리가 정결한 신부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떠났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 주님을 떠나서 진리를 떠났습니다. 초대교회들은 거짓 교사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거짓 이리가 되어서 믿는 자들을 미혹해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진리만을 전합니다. 인기를 끌려고 쇼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 교사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을 미혹하고 무슨 병을 고친다! 복을 받게 한다! 뭐 어쩐다!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거기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정결한 신부로 진리 안에 머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5, 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희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5절에 보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이 형제라는 것은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복음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 그리고 이 나그네 된 자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 이런 의미 보다는 오늘도 복음을 증거하는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순회 선교사들, 순회 전도자들 그들을 사랑으로 가이오가 영접하고 대접했어요. 이것은 매우 신실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각 교회에 다니면서 그의 선행을 증언했어요. 그리고 그 일이 바로 간접적으로 선교에 주의 일에 동역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니까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그 순회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나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는 두벌 옷도 가지지 말고 배낭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에서 이곳저곳 교회들이나 성도들로부터 공궤를 받고 숙식을 제공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이교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교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아이고 내가 노자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만원만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된다는 것이죠. 제가 어느 가정에서 심방 가서 아니면 전도하고 나서 ‘내가 배고픈데 저녁 좀 사주면 안 될까요?’ 이것은 안 되는 것이죠. 이교도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그 순회 전도자들을 잘 영접하고 섬기는 것은 이것은 바로 전도의 사역에 선교의 사역에 동참하고 동역하게 되는 것이죠. 자 오늘 성경 7,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진리를 위하여’ 는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들을 돕고 전도자들을 돕는 일은 나도 그 선교에 동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지에 가지 못하지만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로 후원하고 또 물질로 후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이오는 바로 순회 선교사들을 위해서 물질과 사랑으로 그를 후원한 복음의 동역자라고 오늘 사도요한은 그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을 보낼 때 두벌 옷 가지지 말라 노자돈 가지지 말라 가면 그들이 책임질 것이다. 그런데 이교도들에게는 부담을 주지 말고 같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가서 공궤를 받으라고 주님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10장 40절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너희라는 것은 누구일까요? 순회 전도자들이에요. 예수님의 보내는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보낸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가이오는 주님의 일에 함께 동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순회 선교사들을 내가 영접하고 사랑으로 대접하니까 그것은 곧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에요. 이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오늘 가이오는 주님의 선교에 동역자가 되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의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작은 자라는 것은 순회 전도자들입니다. 이름 있는 위대한 사도가 아니라 정말 이름 없는 볼품없는 선교사일지라도 내가 제자 이름으로 그를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하늘에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물질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거절하지 말구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 혹 선교사님들이 방문할 때 여러분이 정말 물질에 여유가 없지만 만원 이만원이라도 선교사님 이것을 필요한 곳에 쓰세요. 하면 선교사님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 방문했을 때 설렁탕, 갈비탕,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선교사님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선교에 동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교지에 갈 수 없지만 선교사님의 하는 일에 기도하고 물질로 도울 때 나도 거기에 동역자가 되는 것이고 함께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드리는 이 선교 헌금에도 열심히 참여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액수가 정성을 다하면 되지 많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면 그것이 내가 바로 선교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 많은 선교사를 지원하고 파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총회에 또 개척 선교헌금에 만원이라도 참여하면 그 만원으로 내가 벽돌 몇 장을 산 것이고 우리 총회가 한 두 교회를 세울 때 여러분도 그 선교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가 이 복음에 아름다운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또는 이 세상에 많은 미혹된 진리 가운데 미혹된 이단의 교리 가운데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진리 가운데 거하고 정결한 신부로 남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로 물질로 사랑과 정성으로 선교에 동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 속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드리는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이오와 같은 일꾼
요삼 1:1-8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퀴즈대회를 했습니다. 사회자가 사자성어 문제를 냈습니다.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학생들이 맞히지를 못했습니다. 사회자는 “네 글자이고 끝이 ‘가’로 끝납니다.” 라고 힌트를 줬습니다. 정답은 ‘고성방가’ 였습니다. 한 학생이 ‘고음불가’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학생은 ‘이럴수가’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학생은 ‘미친건가’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한 학생의 답을 듣고 모든 사회자와 모든 방청객들은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학생이 말한 답은 ‘아빠인가’ 였습니다.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좋은 멘토를 만나 성숙한 삶의 모습을 보고 배우며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귀중한 복입니다. 가정에서는 좋은 부모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자녀는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숙한 선배를 만나 그를 통해 사회를 배우는 것은 큰 복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좋은 신앙의 선배를 만나 신앙의 좋은 습관을 배울 수 있는 것은 큰 복 중의 복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도 요한은 초대교회 가운데 몇 개의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들 중의 어느 한 교회에 가이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이오는 교회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는 일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그와 함께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사도 요한에게 와서 가이오가 얼마나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리고 겸손하게 섬김으로 교회를 화목하게 만들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가이오의 신실함에 대해 전해 들은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3절에서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라고 말합니다. 가이오는 교회 안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잘 돌봤습니다. 교회에 순회 목회자들이 오면 그들을 잘 섬겼습니다. 교회에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아무 말없이 묵묵히 그 일들을 감당하며 교회에 덕을 세웠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가이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3서입니다. 요한은 편지를 쓰면서 ‘나의 사랑하는 가이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 사랑하는 가이오,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사랑한다고 네 번씩이나 표현할 정도로 가이오에게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를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맘껏 축복했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2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축복의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받고 싶어하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 행복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명심할 것은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축복의 내용이 아니라 축복의 기도를 받는 가이오의 신실한 믿음의 삶입니다. 축복을 받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가이오처럼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지 않고 축복 받기만을 받기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에서 추구하는 중심 내용은 축복입니다. 어떤 방법과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복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는 기복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복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복을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더 신실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복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행복한 교회를 영적으로 이끌어 가는 목사로서 우리 행복한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가이오가 받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복에 앞서 가이오가 가지고 있었던 신실한 믿음을 먼저 점검하는 건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오늘 안수집사로, 권사로, 명예권사로 취임하고 임직을 받는 모든 일꾼들이 가이오처럼 교회와 목회자에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신실한 믿음의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섬길 때 주의할 점을 11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리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교회에서 일꾼으로 섬길 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먼저는 교회 일꾼으로서 본받지 말아야 할 악한 일꾼으로 디오드레베를 소개합니다. 사도 요한을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에 대해 9,10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디오드레베는 교회를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나쁜 방향으로 이끄는 선동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행위들 속에 가리워진 속셈은 교회에서 첫 번째, 즉 으뜸이 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과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역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며 순회하는 사역자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악한 말로 중상모략 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요한 사도와 그의 동역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또한 디오드레베는 교회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도의 말보다는 자기를 따르라고 했고 그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교회 안에서 보복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형제들을 맞이 않고 맞이하는 자들 마저 쫓아내었습니다.
디오드레베가 교회 안에서 하는 역할을 보면 그가 교회의 중직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자기를 세우려고 하는 영향력이었지 교회에 덕을 세우는 영향력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교회와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악한 영향력이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자 같아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일꾼인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마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에서 섬길 때 자신을 높이려고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하는 디오드레베를 본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는 섬기는 직분자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면서 소개하는 사람이 12절에 나오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였고, 어떻게 섬겼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교회의 모든 성도들로부터 그의 신실한 신앙과 섬김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도들이 보아도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믿음의 멘토로 소개를 받는 가이오도 데메드리오가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소개하는데 이상하게도 아주 짧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보면 디오드레베가 으뜸이 되기 좋아해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했다면 데메드리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섬기는 일꾼임을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교회에서 신앙과 섬김의 본이 되었으면 사도 요한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큼 신실한 가이오에게 본받을 신앙의 멘토로 데메드리오를 소개했겠습니까?
데메드리오는 교회에서 꼭 필요한 좋은 일꾼 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교회 아에서 주님을 섬기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디오드레베도 나름대로 조직적으로 자기가 으뜸인 것을 지키려고 힘을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를 섬기는 일을 못하도록 방해를 했습니다. 교회 밖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은혜로 참기 쉬운데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훼방과 조롱을 받으면 그것은 너무 실망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혼란해지고 사단에게 이용당하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같은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부흥하고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고, 사단이 틈을 탈 수 없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가 데메드리오처럼 이렇다 하고 내놓을 것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되고 진실하며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이 되면 그는 매우 축복된 사람입니다. 또한 그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디오드레베와 같은 신앙생활을 모방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것이 성공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권력이 아닌 섬김의 도구인데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이 교회 속에도 들어와 교회의 직분을 개인의 명예와 교회의 권력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의 신앙과 교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으면 함부로 말하고 교역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자신의 힘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더 큰 일꾼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일꾼은 직분을 맡으면 맡을수록 더 겸손하며 교역자를 존중히 여기고 교회의 질서를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행복한 교회에서 안수집사, 권사로 세움을 받는 모든 일꾼들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와 같은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지기 전보다 일꾼으로 세워진 이후의 교회가 더 밝고 힘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워진 직분자들로 인해 교회 구석구석이 더 시끄럽고 혼란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목회자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일꾼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성도들에게 항존직분자로서 데메드리오와 같은 믿음의 귀한 멘토가 되어 신앙의 좋은 일꾼들을 세워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축복을 받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요삼 1:1-8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미움을 받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사랑받을만하고 어떤 사람은 미움을 받을만 합니다. 그러면 너무나 뻔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랑받는 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미움 받는 자가 되가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랑받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세상 앞에서든 하나님 앞에서든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 아내에게 존경 받는 남편, 부모에게 사랑받는 자녀, 자녀에게 높임 받는 부모, 직장에서 인정 받는 일군, 사회에서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고 주의 종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고 교인들에게는 높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는“사랑받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누가 사랑받는 자 입니까?
■ 미국 미네소타 로테스터시에는 유명한 병원이 하나 있는데 그 병원의 이름은「메이요 병원」입니다. 이 병원의 주인은「메이요 박사」입니다. 이 사람의 일화 가운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어느날, 한 동네를 찾아 언덕을 올라가는데 자동차가 멈췄습니다. 얼마나 당황되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걸어서 동네에 도착하여 한 집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집은 매우 허름한데 그 집의 여주인은 매우 상냥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차가 고장이 나서 그런데 전화한 통 쓸 수 있을까요?”“그러세요, 들어오세요, 전화는 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더위를 먹으셨는지 매우 힘들어 보이시네요 제가 찬 우유 한잔 대접해 드릴까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자동차 때문에 당황하고, 걸어오는데 지쳐있는데 찬 우유 한 잔을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한잔을 얻어먹고 나니 여주인은 또 한잔을 더 주겠다고 하여 염치불구하고 우유 두 잔을 다 마셨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하니 자동차수리공이 와서 자동차를 고쳐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유 두 잔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이해와 위로, 격려는 인생의 어떤 경험보다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그 여인의 행동에서 배우는 것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해 지나 큰 병에 걸린 어떤 사람이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곧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에게 우유 두 잔을 대접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했겠습니까? 메이요 박사는 정성껏 수술을 마치고 나서 청구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청구서에는 수술비, 약값, 입원비, 검사비등을 포함하여 모두 $1,500이란 큰 돈이 청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그 청구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상 위의 수술비는 몇 년전 여름, 자동차가 고장난 사람을 위해 제공한 전화 한 통과 우유 두 잔의 값으로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사랑받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1장에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셨겠습니까? 에서가 능력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능력이 많아 아버지의 신임을 얻어 아버지는 당연히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에서는 누가 보아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보다 모든 면에서 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을까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나의 소유와 능력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소유로,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배웠는지를 가지고 판단하고 그를 높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저가 나를 사랑하면 내가 저를 사랑할 것이요 저가 나를 찾으면 내가 저를 만나리라”오늘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은 나를 사랑해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부족해도, 세상사람들이 가난하다고 무식하다고 가진 것 없다고 배경이 없다고 나를 사귀기 싫어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시는 것 처럼 다 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올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관치 않습니다. 내 형편과 처지를 보지 않으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찾고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그 하나의 조건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에서는 능력이 많았기에 세상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하나님은 그를 미워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밖의 활동보다 집 안에 활동을 더 좋아하는 부족하고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할 만한 능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주님을 사랑할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요한이 가이오 장로에게“사랑하는 자여!”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칭찬한 것이니까? 가이오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나그네된 사람들을 성심 성의껏 잘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왕하4장에 보면 수넴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대접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왕하 4:8-10에“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너무나 감사해서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의 몸종인 게하시가“그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또한 그의 남편은 너무 늙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그러면 내년 이맘때 네가 자식을 얻으리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아들은 낳은 복을 받고, 어머니가 되는 복을 받고,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사랑을 낳고 복을 더불어 받는 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가이오를 칭찬합니까? 그것은 가이오의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바울은 그래서 사랑하는 자여라는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받을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1. 칭찬받는 사람이 사랑받을 자입니다.
칭찬받는 사람이 사랑받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비난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행2장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온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도가 칭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장이 올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내려가는 이유중 하나는 성도들이 칭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칭찬 받는 일에 힘쓰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칭찬을 받았을까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성령충만을 받으니 남을 도와주었고 남을 도와주니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칭찬을 받은 근본적인 원인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아서 새 사람이 되니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도“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 범사가 잘 되고...”라고 했던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사람이 범사가 잘 되는데 그 범사가 잘 되는 일 가운데 선행을 하니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내 영혼이 잘 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9:8에서“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착한 일이 넘치게 되는 이유는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 15:5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 이유는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돈이 있고, 지식이 있어야 한다, 뭔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하다보면 작심삼일 처럼 환경과 형편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잘된 사람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병들고 힘들어도 남을 도와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된 사람들은 있을 때만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없을 때, 콩 반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려고 하는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혼이 잘되기를 힘써야 하고 우리의 영혼이 잘될 때에 칭찬받는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생각하게 되면 내가 칭찬받지 못하는 이유는 영혼이 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사람, 주 안에 있는 사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임금은 지혜의 임금입니다. 그래서 그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가늠하러 아름다운 꽃 화분 두개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한 개는 살아있는 화분이고 또 하나는 사람 손으로 만든 조화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두개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는 솔로몬에게 어떤 것이 생화인지 밝혀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난감했습니다. 그리고는 부하를 불러 “밖에 나가 벌과 나비를 몇 마리 잡아오라”고 시켰습니다. 부하는 벌과 나비를 잡아 온 후 솔로몬의 명령대로 모든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벌과 나비를 놓아주었습니다. 어디에 앉았겠습니까?
그리고는“생명이 저 꽃에는 꿀이 있어서 벌이 날아들고 향기가 있기 때문에 나비가 날아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꿀과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주 안에 있게 되면 생명이 있고 향기가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잘 되기를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가이오 장로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 내용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옷 잘 입혔고, 밥 잘 먹였다는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또 이웃 사랑을 많이 했다는 칭찬도 아니었습니다. 그 칭찬은“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 하노라”는 것입니다. 실제 가이오가 한 일은 선행을 하고, 잠자리를 주고, 때로는 물질을 베풀었는데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 사람이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빌 1:3에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통해 밥을 먹게 되었다, 잠을 잘 자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은 내 것으로 받지 않고, 나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높이고 높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통해 사랑의 대접을 받다보니‘이 사람이야 말로 예수믿는 사람이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구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너희가 하나님보기를 원하느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니라”사도바울도 얘기했습니다.“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사도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라, 나를 드러내지 말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내 죄를 대신 갚아 주시고 그 사랑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는 내 아들이라, 딸이라”고 하면서 사랑받은 자로, 천국에 갈 것을 상상하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가이오 장로는 남을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얘기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우리동네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이 점심은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권했더니 그 다음주에는 몇 명밖에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교회 나오라는 말도, 예배 드리자는 말도,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그래도 드시고 돌아가시는 분들은 모두“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가 하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저 대접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을 대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와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은 하지 않지만 얼마나 정성껏, 겸손히 대접합니까? 그러니 식사하시는 분들이 그 밥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봉사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 사랑은 내가 마음에 결심하고 노력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롬 5:5에“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랑이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면 그냥 있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고 참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상대방에게 진정한 힘을 주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성도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동역하는 사람이 사랑받을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업, 동역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동역자가 되어 잘될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잘 도와주었더니 대통령이 그 일을 잊지 않고 갚아주어 잘 되었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게 되어 그분의 허물이 드러나게 될 때 같이 돈 주고 고생한 사람도 다 같이 감옥에 가고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의 동업자가 되는 것은 이처럼 잘될 때는 좋지만 안될 때는 엄청난 실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동업자가 될 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요삼 1:8에“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복음의 일군들을 특별히 잘 대접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시의 전도자들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에게 대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얻어먹고 신세지기 위해 다닌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믿는 사람들이 복음 전도하는 사람들을 잘 대접해야 했기 때문에 가이오가 이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종으로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메트로폴리탄 교회」를 목회할 때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초신자 명단이 붙어있는 게시판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가셨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할머니에게 그 이름은 왜 적어가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할머니는“저는 이 사람들을 위해, 초신자로서 시험에 들지 않고 신앙이 바로 성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일군이 되게 하기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이 할머니는 나의 목회에 있어서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한가지 꼭 기억하실 것은“예수님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대접하면 그리스도의 상을 받는다”말씀했습니다. 물 한 그릇을 대접해도 그리스도를 대접하듯이 진정으로 하면 그리스도의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런 사랑의 태도가, 이런 대접이 진리를 향하고 함께 일하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목사님은 아니지만 목사님을 대접하므로 목사님이 받을 상을 나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주의 일을 한다고 직장과 가정을 팽개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되기만을 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목사도 좋지만 우리 교인들은 부자가 많이 되어 교회에 필요한 것들을 다 채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쓰임 받는 훌륭한 경제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로님의 기도대로 우리교회에서 대통령도 나와 하나님의 교회의 복음 위해 귀한 동역자가 나오기 원합니다. 많은 지식인들도 많이 나와 훌륭한 목회의 협력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도 목사는 아니지만, 복음 전도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똑같은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지도자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디오드레베”이고 또 한 사람은“데메 드리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목회한다고 하면서 디오드레베는 접대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종들을 향해 접대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았으며 악한말로 헐뜯었습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이런 사람을 조심하고 본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절대 이런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면 데메드리오는 가이오 장로를 본 받아 접대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는 여러 가지 일군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역자들도 있고 각종 직분 맡은 자들, 교사로, 성가대로, 꽃꽂이로, 주방에서 도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약 목사를 도우면 목사의 상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분이 없는 사모의 상은 크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돕는 자는 그 돕는 만큼의 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사를 대접하면 교사의 상을 받고, 성가대를 대접하면 성가대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돕는 것으로 인해 내게 상이 오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두 종류의 병사가 있습니다. 전방에 나가서 직접 전투하는 전투병과 후방에서 전투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지원병이 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에는 직접 나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그들을 위해서 뒤에서 돕는 후원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로 돕고 물질로 돕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교하는 이들이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후원선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나가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후원선교사의 명단을 보며 물질로나 기도로 도울 때 우리는 선교사의 상을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점심식사를 만들고 대접하는 이들이 있고, 주일에는 차량을 안내하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봉사자입니다. 이들에게도 후원봉사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마다 20만원을 가지고 100명의 식사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몸으로는 봉사하지 못하나 물질로나마 봉사하는 사람들이 가정단위로, 구역단위로, 선교회단위로 또한 개인적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에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로 인해 “왜 하나님의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가”하여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헌금을 하여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냥 돈만 헌금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잘 도와주라는 명령에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병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었는데 어떻게 건강하게 되었는지를 물으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한자요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이런 사람이 신앙인이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에서 존귀함을 받아야 합니까? 누가 영접 받아야 합니까? 주를 위해 충성하고, 주의 종들을 돕는 목회의 동역자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칭찬받고 높임 받아야 될줄로 믿습니다. 물질과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들을 돕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복음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늘의 상이 있고 모든 일군들의 상을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은 비밀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엄청난 열매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자로 살기 원하십니다. 칭찬받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의 동역자가 되셔서 하늘의 큰 상을 받는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요삼 1:1-8 / 박상희 / http://Zoom-in Zoom-out
사도요한은 장로된 자로서 가이오 라는 성도에게 편지를 한다. 가이오를 위한 간구를 먼저 한다. "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길 간구하노라 " 하면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소식을 듣고서 기뻐한다고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가이오가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를 않고 주의 이릉을 위하여 이방인들을 말씀으로 섬긴 자들을 영접한 일에 대해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신실한 일이라고 칭찬을 하고 있다.
가이오라는 개인에게 편지로 격려와 사랑을 전하는 사도요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편지이다. 다른사람들이 사도요한에게 와서 가이오가 진리안에서 행하는 소식을 들려주어서 사도요한이 듣고서 " 심히 기뻐하노라 " 하며 요한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성도 한 사람의 믿음생활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요한은 편지를 쓴다. 그가 쓴 편지가 오늘본문인 요한삼서 이다. 한 사람이 진리를 받아 들이고 그 진리 대로 살아가는 모습에 나이든 요한은 너무나 기뻤다고 했다.
사도요한의 관심은 가이오라는 한 개인이 먼저 하나님 앞에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 로 가이오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영혼이 잘 되는것에 대해 간구를 하였다. 사도요한의 관심은 하나님앞 앞에서 가이오의 영혼이 바로 서는것이고 영혼이 옮바르게 잘 되는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앞에서 영혼이 잘 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속 사람에 관심이 있으시다. 사도바울은 "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 고 말씀하셨다. 겉 사람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힘이 없어지고 늙어가지만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매일 하나님 말씀으로 새로워져 독수리 날개 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새 힘이 매일 공급을 받는다. 사도요한의 관심은 가이오가 이 땅에서 잘 되는 복을 먼저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 그의 영혼이 잘 되는 것 "을 간구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깨어서 믿음의 본을 보이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를 하였다.
그런후에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를 한 것이다. 순서가 뒤바뀌면 안된다. 먼저 영혼이 잘 되고 난후에 범사가 잘되며 나아가 건강의 복 까지 받는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관심은 범사가 잘 되는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물질과 건강의 복을 달라고 기도를 하는 모습들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범사의 복과 건강의 복은 덤 ( Extra ) 의 축복이라는것을 사도요한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 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밀씀하실때 순서가 나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선순위가 있다. 성경말씀 속에 우선순위를 " 영혼이 잘 됨같이 "에 두고 있는것을 예수님 께서는 친히 "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으로 말씀하시고 있는것이다. 그런 삶을 가이오는 당시에 살고 있었다. 당시의 이방인들을 위해 무보수로 일하는 순회전도자 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대접한 가이오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자의 삶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가이오의 삶속에 여러사람들의 증언으로 사도요한은 듣고서 너무 기쁜 마음을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자로 살아간 가이오의 인생을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가이오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런 가이오를 바라보면서 가이오의 영혼을 위해 먼저 간구하는 사도요한의 마음을 통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영혼들을 위해 먼저 간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나아가 내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범사의 복에 촟점을 맟추는 인생이 아니라 내 영혼이 먼저 잘 되도록 매일 나를 말씀앞에 세우게 하신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요한삼서 / 정도열 목사
요한삼서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 이은 사도 요한의 서신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 예수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제자였고 또한 가장 오랫동안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었던 제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은 다른 형제들을 통해 가이오가 진리를 증언하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기뻐합니다.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요삼 1:3,4). 계속해서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 나그네 된 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마땅한 것으로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도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된다고 합니다(요삼 1:5-8). 그래서 요한은 참으로 사랑하는 장로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대상 4:9,10)와 같이 오해해서 보면 ‘영혼’이 잘되는 구원받음과 ‘범사’가 잘되는 만사형통에 ‘강건’함을 건강으로 풀어 ‘영육간의 만사형통’으로 이해해버리면 역시 성경을 성경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원함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One Story’를 지나오면서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이 한 이야기이고 구약의 율법서와 역사서 그리고 시가서와 선지서가 한 이야기이며 신약의 복음서와 역사서 그리고 서신서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절대로 성경이 여기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저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바울 서신서들 안에서 그리고 베드로 서신서들과 다른 사도 서신서들 안에서도 같은 내용과 흐름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요일 2:15-17) 이 세상을 나와(계 18:4) 본향을 향하는 자들이 되라’(히 11:13-16)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워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사랑하는 동역자 가이오를 위해 구한 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의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이 구절의 뒤에 오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라’는 말은 ‘영혼이 잘됨같이’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네 영혼이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으니 너는 ‘범사에 감사하고’ 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강건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핍박이 이어지지만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핍박이 심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요한은 사랑하는 장로 가이오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통해 사랑을 드러낸 것과 달리 디오드레베라는 자는 악한 말로 형제들을 비방하고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심지어 그 형제들을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요삼 1:9,10). 요한은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요삼 1:10)’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고 합니다.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속하였으며 무엇을 품고 쫓고 있는지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게 될 것입니다(마 7:16-20).
이제 성경 66권 중 64번째 책이고 사도 요한의 5권의 책 중 4번째 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로 보면 거의 마지막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무리되는 부분에서 성경은 ‘사랑하라’고 합니다. 복음서를 지나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땅 끝까지 퍼지고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사도들의 서신 이후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합당한 삶을 야고보서를 시작으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사랑하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 사랑을 드러내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의 온전한 삶의 이야기,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계속 이어집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라
요한삼서 1:1-8
요절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요한삼서는 전체 내용이 불과 15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입니다. 저자는 “장로인 나”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장로라고만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장로로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가이오는 ‘환희’,‘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인 ‘가이오’는 성경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본문의 내용으로 보면 그는 매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성도였으며, 훌륭한 인격과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요한이 보낸 선교사들을 사랑으로 섬겨준 가이오에게 쓴 감사편지요, 또 정치적인 리더에게 보낸 경계의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영적인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I.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1,2)
1, 2절을 보십시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저자는 가이오에 대한 사랑을 세 번이나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가이오에 대한 요한의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한은 가이오를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가이오를 생각만 해도 고맙고, 은혜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만나면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언짢고, 할 수만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고 싶고, 만나면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가이로라는 성도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만나면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고 사랑스러운 영적인 자녀들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축복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스런 가이오를 위해 간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조용기 목사님은 이 말씀을 근거로 삼중축복의 원리를 발견하여 목회생활의 큰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영혼이 잘 되는 것은 범사에 잘 되는 것의 근본이요, 몸이 건강한 것도 영혼이 잘 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또 영혼이 잘 되는 것 같이 범사에도 잘 되고, 강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가이오를 향한 사도 요한의 간절할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가이오의 영적인 상태를 근거로 범사의 형통함과 육신의 강건함을 기원하는 것을 볼 대 가이오의 영적으로 매우 건강하고 모범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범사에 잘 되고 몸도 건강하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기도는 가이오를 위한 요한의 축복기도였습니다. 요한이 간절히 구한 것은 영혼의 잘 됨과 범사에 잘 됨과 육체의 건강함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다 잘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잘 됨처럼 범사에 잘 되고 몸이 건강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영혼이 잘 된다고 범사에 잘 되겠는가라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리워진 모든 저주를 거두어 가십니다. 모든 불행의 요소들을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상처와 고통을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범사에 잘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 때문에 이복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17살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예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형통의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래서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형통케 하셔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우셔서 7년 기근으로부터 천하만민의 목숨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영혼이 늘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참으로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쫓기며 저리 쫓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생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험악한 세월 보내면서 늘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5)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 119:123) 다윗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여호와를 갈망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하여 기도하며 경건한 생활에 힘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범사에 잘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우리의 건강과도 직결됩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교인들과 불신자들을 각각 100명씩 건강진단해 비교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교인은 100명 중에 40%가 병자였고, 불신자는 100명 중 80%가 병자였습니다. 분석결과 네 가지의 이유가 나왔습니다.
첫째, 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건강하다.
둘째, 교인들은 교회에서 박수치고 찬송할 때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고 스트레스가 풀릴 뿐만 아니라, 온 전신의 근육과 신경이 운동하게 되므로 건강하다.
셋째, 교인들은 새벽기도를 오며 가며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때문에 폐가 아주 건강하다.
넷째,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기도하여 마음속에 쌓였던 근심과 걱정, 속상함과 불안 등을 해소하므로 울화병이 안생기고, 간에도 무리가 없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덧입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부모가 가장 마음이 아플 때가 언제입니까? 자녀들이 몸이 아파서 열이 펄펄 날 때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자녀들이 병이 들어 끙끙 앓고 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할 수만 있으면 대신이라도 앓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녀들에게 건강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불신자들보다 훨씬 건강한 통계가 나왔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이 잘 되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다윗처럼 영적인 갈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올 바른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늘 하나님 앞에 깨어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3,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3) 형제들이 와서 너에게 있는 진리를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이 형제들은 요한이 가이오의 교회에 보낸 순회 선교사들을 가리킵니다(요일 3:14).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서 선교보고를 하였는데 그 보고 가운데 특별히 가이오에 대해서 보고한 것이었습니다. 가이오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요한은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한이 수신자들을 내 자녀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부모와 같은 관심과 사랑으로 영육 간에 돌보던 사랑의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자녀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원어에는 더 기쁜 일이 없다는 말이 문장 첫 머리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이 다른 어떤 소식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진리 안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은 목자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진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진리라는 말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진리를 가리킵니다. 이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거짓 진리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복음진리를 가리킵니다. 이 진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할 때 그 진리는 물론 복음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 주신 모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요한은 진리를 강조하면서 이 '진리'를 '행함'과 철저히 연결시키고 있습니다(요일 1:6,7; 2:11; 요이 1:4,6). 이는 진리를 알 뿐 아니라 그 진리대로 행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쉽지만 그 진리대로 실천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이오는 진리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이런 성도들을 볼 때 목자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바로 목자의 기쁨입니다. 그들이 가이오에게 있는 진리와 가이오가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도 요한은 심히 기뻤습니다. 목자는 영적인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신앙이 자라가는 것을 볼 때 가장 기쁩니다. 그것이 목자의 보람이요, 영광이요, 즐거움입니다. 저는 가끔 옛날에 우리 모임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고 사모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헌신한다는 말을 들을 때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한 편으로는 목자의 기쁨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목자의 보람이요, 영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특히 요한이 이 편지를 쓰면서 가이오의 신앙에 대해서 감사한 것은 복음 진리를 반대하는 거짓 교사들의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복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1편에서 영혼이 잘 되는 사람의 모습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편에 서지 아니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아름다운 과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무엘 상 일용할양식을 집필하면서 다윗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많은 위기를 맞이했습니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얼마나 세상사람들처럼 사울을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특이 자기들이 숨어 있는 굴속에 사울 왕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을 때 얼마나 악인의 꾀를 좇아 행하기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원수 사울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이스라엘 땅을 떠나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유다 땅에 들어와 살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리 안에서 행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할 때 일시적으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진리 안에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조금 흔들리기는 하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수록 뿌리가 깊이 박히게 됩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셧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축가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며,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옥토에 뿌린 씨앗과 같아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III. 나그네를 섬기는 자가 진리의 협력자입니다(5-8)
요한은 이제 구체적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된 목적을 말합니다. 그 첫 번째 목적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가이오를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5) 가이오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이오가 요한이 보낸 목회자들, 순회 전도자들에게 행한 신실한 일에 대해서 칭찬했습니다. 요한은 나그네에 대한 가이오의 환대 행위가 최선을 다한 것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나그네 된 자들에 대한 '환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롬 12:13; 딤전 3:2; 5:10; 딛 1:8; 벧전 4:9). 이들은 오갈데 없은 나그네가 아니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나그네 된 자들이었습니다. 곧 순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이오 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이오는 신실한 마음으로 그들을 영접하고 사랑으로 섬겨주었습니다.
가이오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의 사랑을 증언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전송한다는 것은 그들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접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그들의 여행에 필요한 것을 챙겨주어 전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그네 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드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라'는 것은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고 격려하는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음 목적지까지 어려움 없이 갈수 있도록 물질을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영접하고 풍성히 대접하고, 그들의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며 전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선교사들을 환대함으로 그들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진리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순회 선교자들은 돕는 일이 그 형제들의 동역자가 되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진리 그 자체와도 협력자가 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장로를 세울 때에 조건 중의 하나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물론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스스로 나그네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나그네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이오는 바로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해 봉사하고 희생을 아끼지 아니했던 진정한 성도였습니다. 당시 가이오 같은 성도가 베푼 사랑의 헌신적인 후원이 복음 전도자들에게 큰 위로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복음 전도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에 마케도니아 같은 교회와 성도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복음 전도의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도 요한 우리에게 세 가지 영적 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늘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야하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셋째로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나그네 된 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김으로 복음 역사에 좋은 동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요한삼서 1:1-12
초대교회 시대에는 복음에 능통한 지도자가 부족하여 감독이 없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미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어 도처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이끌 전도자들이 대단히 부족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여러 교회들에 순회전도자를 파견했습니다.
저들은 교회마다 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성찬과 세례도 베풀었습니다. 목회자의 역할을 감당하여 준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상황도 파송 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때 순회전도자들은 전대도, 두벌 옷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지팡이 하나를 들고 다니는 가난한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들을 영접하여 복음전파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교회는 순회전도자들을 배척하고 그들을 파송한 사도를 비방하여 전체 교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요한은 요한 일서와 이서에 이어 세 번째 서신인 본서를 기록했습니다.
Ⅰ.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요한삼서 1:1에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사 도요한은 세 개의 서신은 물론 요한복음과 계시록까지 기록한 주님의 신실한 제자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사역했던 에베소에서 주후 90년경에 서신들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삼서는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지 교회에 보낸 서신이 아니고 이름 그대로 일반에게 보낸 공동서신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그 주된 내용을 요한일서에 기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형제와의 교제를 권했습니다. 거짓교훈과 거짓교사를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이어진 요한이서와 삼서에서 적용되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인 가현설에 대한 경고(요일 2:26)와 영생에 대한 확신(요일 1:4)을 기록했고, 요한이서는 거짓교사에 대한 경계를 적었습니다.
존경받았던 요한은 이어서 삼서를 기록하여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의 세 번째 편지는 대단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수신자인 가이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글 전반에서 발견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빌레몬서와 성격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요한이서에 이어 요한삼서에서 수신자에게 자신을 “사도”가 아닌 “장로(프레스뷔테로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당시 직분으로서 감독, 목사와 같이 사용되기도 했고,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이든 지도자를 장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직함은 초대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수신자인 가이오는 ‘기쁨’, ‘환희’라는 뜻으로 초대교회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첫 감독으로 전해지는 고린도의 가이오가 있습니다(롬 16:23, 고전 1:14). 바울의 동역자로 에베소에서 고난을 당한 마게도냐의 가이오도 있습니다(행 19:29). 바울의 마지막 선교여행 시 드로아까지 동행한 더베의 가이오도 있습니다(행 20:4).
이 세 번째 가이오가 사도요한에 의해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되어진 것으로 보아 본서의 수신자로 여겨집니다. 요한은 이 가이오를 자신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인적인 사랑이 돈독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요한은 이런 그에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심히 기뻐하면서 간단한 서신인 요한삼서를 시작했습니다.
Ⅱ.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요한삼서 1:5에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라고 밀씀합니다.
요한은 순회 전도자인 데메드리오의 보고를 접했습니다. 요한은 이에 근거하여 선한 접대를 베푼 가이오를 칭찬하고 순회전도자를 배척한 디오드레베의 악한 행위를 본받지 말도록 권고 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가이오를 칭찬했습니다(요삼 1:1-8).
가이오는 기쁨, 환희라는 이름 뜻대로 요한에게 기쁨이 되었고 나아가 주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잘못된 풍조에 편승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고 순회전도자를 사랑하고 영접했습니다.
순회전도자들은 순회라는 한계로 그들의 숙식이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도사역에 종사하면서 아무런 삯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복음을 이용하여 부를 취하는 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이방인들에게서 어떠한 물질적인 도움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들은 전도하는 중에 틈틈이 쓸 것을 벌었으며(행20:33,34, 고전 9:14,15) 이것으로는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오는 순회전도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복음증거가 제대로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전도자가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때는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를 사도요한은‘사랑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요삼 1:1).
인간적인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란 의미입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했습니다(요삼 1:2). 이는 요한이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개인적인 따뜻한 사랑을 전하는 말입니다. 가이오의 육신적 건강은 물론 영적인 건강까지 기원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를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라고 칭찬했습니다(요삼 1:4).‘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표현은 요한 서신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말입니다. 거짓교사들이 비 진리를 전파하여 혼란하게 한 상황에서 요한이 대응한 표현입니다. 가이오는 순회전도자를 대접하는 일에 신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순회전도자들이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요삼 1:5,6).
가이오는 선교적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가 어떤 것에 목적으로 두고 나가야 함을 보여준 주님의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의 선행을 칭찬하면서 계속해서 그에게 복음전도사역에 동참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요삼1:8). 복음전도사역은 직접적인 복음증거 행위 뿐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전도자를 후원하는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하는 사역자들을 위해 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마 10:10, 딤전 5:18). 이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오드레베를 책망했습니다(요삼1:9-11).
‘쥬피터 신이 양육한’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디오드레베는 성도들 가운데서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쥬피터는 헬라식으로는 제우스요 고대 근동식으로는 바알신입니다. 이름 자체도 비 신앙적이었던 그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독단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의 지시도 거부했을 정도로 독선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상모략까지 했습니다. 사도요한에 대한 이런 자세는 복음에 대한 배척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디오드레베는 대접하지 않고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였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요한의 사자들을 거절하고 냉대했습니다(요삼1:9).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체험한 자라면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행위가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를 보다 못해 그를 대신하여 방문자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는 그것마저도 방해하고 금지시켰습니다. 자신의 말을 안 듣는 성도는 교회에서 쫓아내어 버릴 정도로 악했습니다.
이런 그에게는 늘 악한 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어라는 선물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복음증거에 동원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디오드레베는 하나님 나라에 장애가 되는 일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믿음을 소유한 체 하나 속으로는 주님과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감동이 그와는 무관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디오드레베를 주님의 종인 장로의 권위로 요한은 책망했습니다.
데메드리오를 천거했습니다(요삼1:12).
‘백성들의 어머니’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데메드리오는 사도 요한의 설명과 일치하는 점이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 받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통해서도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회전도자였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악의에 찬 선동 속에 지쳐있는 가이오의 형제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타난 전도자였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에게는 신령한 젖인 말씀이 있었습니다. 진리의 증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진리를 사랑으로 증거 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에 뭇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뭇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배경에는 진리를 몸소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먼저 사도들의 인정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짧은 서신을 통하여 이런 데메드리오에 대한 증거를 분명히 했습니다.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에 대한 호의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과의 신실한 교제를 권면한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영적인 거룩한 동맹을 구축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와 같이 주님 나라의 일이 효과 있게 되도록 일꾼들을 움직였습니다. 장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자(목회자, 주의 종들)를 선대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왜 이렇게 일이 많아, 우리 목사님은 왜 이렇게 대접하기를 좋아해, 힘들어서 연합여전도회 일 못하겠네. 내년부터는 임원에서 빠져야지. 교회 빚도 많은데 선교는 무슨 선교 빚이나 갚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선지자의 상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고 그의 하는 일에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의인의 상을 받기 원하십니까? 경건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제자의 상을 받기 원하십니까?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주님을 위해 평생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일은 제자의 상을 받는 가장 값지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주의 종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동역자가 되는 성도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