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14개 봉을 모두 정복한 세계적 알피니스트
엄홍길(udt28차)·이순래 부부
“산에 미친 남편, 말없이 지켜봐준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고맙지요”
신들이 사는 곳 히말라야.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그곳에 도전하여 마침내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자랑스러운 한국의 아들 엄홍길(40). 그는 왜 죽음의 공포를 마음 속으로 삭이며 히말라야에 오르는가? 알피니스트 엄홍길의 산에 미친 삶, 그리고 그런 남편을 마음 졸이며 내조하는 아내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히말라야 14좌 최후의 고봉 K2마저 등정한 철인
“정상에 오르면 내려갈 걱정이 먼저 들지요.”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히말라야. 네팔과 파키스탄을 잇는 이 산맥은 산스크리트어로 ‘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눈으로 뒤덮여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이곳에 전 세계에서 8000M가 넘는 고봉 14개가 모여 있다. 산악인 엄홍길 씨는 지난 7월 31일 K2봉을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14봉을 모두 정복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14봉을 완등한 사람은 6명. 아시아에서는 엄홍길 씨가 최초다.
“이번에 오른 K2봉은 에베레스트보다 낮지만 기상변화가 심하고 난이도가 높아서 사고가 많은 곳입니다.”
프랭크 로담 감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K2는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해발 8611M. 에베레스트보다 200여 미터 낮지만 히말라야 14봉 중 가장 험해 등정 성공율이 50%에 불과하다. 그가 처음부터 14봉 완등의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산이 좋아 국내외의 산을 찾아다니던 그가 에베레스트를 오른 것은 1988년. 그때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14봉을 모두 오르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그러나 1995년 스페인 바스크 원정대의 초청으로 마칼루 봉을 오르게 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안나푸르나, 시샤팡마, 초오유, 낭카파르밧, 브로드피크, 로체, 다올라기리, 마나슬루, 가셔브롬1, 가셔브롬2, 캉첸중가, 그리고 K2.
그가 K2봉 정상에 올랐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왔고, 8월 11일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에서 열린 귀국 축하모임에는 이한동 국무총리가 참석해 그를 격려했다.
“정상에 오르면 아! 해냈구나. 목표를 이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그런 환희는 아주 잠깐 뿐이에요. 그 다음부턴 내려갈 걱정이 들어요. 과연 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정상 정복의 순간에도 하산할 걱정이 앞선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정상의 기쁨을 반추하고 동료들의 희생과 도움을 기리며 히말라야의 신들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동안 엄홍길은 8명의 동료들을 잃었다. 본인 자신도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에게 죽음이란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과도 같은 것이다.
“산을 타면 탈수록 자신감도 생기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뀝니다. 동료들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이 주는 충격에도 익숙해지는 거지요.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구별이 무의미해져요. 삶에 대한 애착도 사라지고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해지게 됩니다.”
강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죽음과 사투를 벌인 흔적이 남아 있다. 눈에 반사된 햇빛에 화상을 입어 허물이 벗겨진 자국이 선명하다. 그의 발가락은 발톱이 빠지고 험하게 변해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초연해졌지만, 어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는 산에 오를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두려움과 싸운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산에 오래 오르다 보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항상 사고를 예상하면서 가는 거죠.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다니는 산길을 갈 때도 어디서 바위가 굴러 떨어질 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게 되고 미끄러운 곳이 없는가 확인하면서 가요.”
오랜 산행으로 사고에 대한 예감이 발달한 그는 산을 오를 때마다 사고를 예상하고 위험요소를 면밀히 파악한다. 등반 중에 절대 살생을 하지 않고, 라마교 의식에도 참여하면서 현지인들이 지키는 사소한 종교적 규율도 어기지 않는다. 그가 현지인들이 걸어주는 부적 목걸이를 받아서 목에 걸기도 한다. 그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조그만 것에라도 의존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엄홍길은 자연의 섭리를 믿으며 자연 앞에 겸손하다. 그리고 미신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K2 봉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먼저간 동료들의 사진과 함께 성경책을 묻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그 깊이를 알게 된 엄홍길에게, 종교는 결국 자연과 같은 것이다. 자연 앞에 겸손하고 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서양의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를 오래 오르다보면 라마교 의식에 경도 되거나 동양 종교를 믿게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93년 여름, 수영장에서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어요”
산사나이 엄홍길 씨는 집에 있는 날보다 집 밖에 나가 있는 날이 더 많다. 모험가로서의 그의 인생과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일상이 서로 상반되지는 않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항상 산 생각만 합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산 생각만 하지요. 한번 산에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거든요.”
등반대 구성, 스폰서 모집, 등반 스케쥴 작성 등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해야 하는 그는 국내에 있을 때도 언제나 바쁘다. 코오롱스포츠와 파고다외국어학원 등의 스폰서들이 그의 생계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파고다외국어학원의 고인경 회장은 산악인 출신으로 엄홍길 같은 후배 산악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엄홍길은 현재 파고다외국어학원 비상근 홍보실장으로 직함을 갖고 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틈만 나면 늘 국내의 산을 오른다. 특히 집 근처의 도봉산에 자주 간다. 그에게 도봉산은 집과 같은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고 도봉산을 뛰어다니며 체력을 단련했다. 키 168cm에 몸무게 60kg의 작은 체구지만 히말라야 봉우리를 넘나드는 초인적인 체력은 바로 도봉산에서 기른 것이다. 부모님이 그곳에서 음식장사를 했고, 결혼해서 분가할 때도 도봉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봉산에만 오르면 마음이 편해진다. 도봉산 망월사의 능엄스님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다. 또 그의 모친은 아들이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망월사를 찾아 부처님께 그의 무사기환을 빈다.
히말라야 14봉을 정복한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 그가 국내에서 못 올라가 본 산이 과연 있을까?
“그럼요. 아주 많지요.”
그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특정한 산을 집중적으로 등반하면서 연습을 하기 때문에 국내의 산들 중에서도 못 올라본 산이 많다고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가족과 함께 산에 오른 적이 없다. 부인과 함께 등산을 가 보지도 못했다. 지은(4)과 현식(2)은 가끔씩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가 낯설다. 오랫만에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를 못 알아보고 우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도 가고 외식도 하고 싶지만 마음만 있을 뿐 함께 시간을 보내기 힘들다고 민망한 표정으로 털어놓는다.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까 아이들이 혼동스러워 하나봐요. 히말라야로 떠날 때 공항에서 울며 손 흔들던 애들이 집에 돌아오면 아빠를 못 알아봐요. 손님인줄 아나봐요. 국내에 있을 때도 주말마다 산에 가니까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힘들어요. 앞으로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가질 생각이에요.”
아이들에게 늘 미안하지만 그는 두 가지 일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자신의 일이 서로 상반될 수록 그는 자신의 일에 더욱 몰두한다. 그 일이 더욱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 항상 외국으로 떠돌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데다 집에 있을 때도 마음은 언제나 산에 가 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아내는 그가 집을 떠나 있을 때 가정을 지켜주고 집에 돌아오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그가 위험한 곳으로 떠날 때도 아내는 이웃 마실 가는 사람 대하듯 편안하게 배웅한다.
아내 이순래씨는 엄홍길과 10년 차이. 1993년 6월에 서울의 한 수영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평소 등산과 함께 수영으로 체력을 단련하느라 수영장에 자주 갔었는데, 함께 갔던 친구의 소개로 친구들과 함께 있던 그녀를 만났다. 스쿠바다이빙과 패러글라이딩 등 스포츠에 관심이 많던 그녀와 산을 좋아하는 그는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서로 호감을 느끼며 가끔씩 만나곤 하던 그녀에게 엄홍길은 부모님의 일을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주말이면 도봉산에서 음식장사를 하는 그의 양친을 도와드리곤 했다. 장남이면서도 산으로만 돌아다니던 그는 늘 집안 아른들에게 죄송스러웠고 자기 대신 양친을 따르는 그녀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가 97년 9월 6일 둘은 결혼했다.
그녀는 집에 있는 날보다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은 남편을 위해 특별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집에 돌아왔을 때 가끔 한약을 챙겨주는 정도라고 한다.
“언제나 남편이 자랑스러워요. 히말라야를 정복한 산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기쁜 일인가보다. 그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결혼 전 건설회사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경험해 본 그녀는 남편이 ‘산에 다니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회사에 다니는 것’이나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늘 위험한 곳으로 돌아다니는 남편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없을 리 없다.
“안나푸르나봉에 갔을 때 다리를 다쳤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그때 그 전화를 받고 하루종일 아무 것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다가 밤에 통화를 했는데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귀국해서 보니까 심하게 다쳤더라구요.”
그녀는 남편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다. 늘 지금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 같은 산악인이 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다. 중요한 건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이며,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늘 밖으로 떠돌아다니는 남편. 덕분에 변변한 가족사진 한 장 없다. 그래도 두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남편이 같이 있었다. 첫째 지은이 이름은 가족들이 회의를 해서 투표로 결정했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고 떠난 남편은 산에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위성전화로 불러주었다. 그 이름이 현식이다.
세 살 때부터 도봉산에서 성장, 운명처럼 다가온 산
“먼저 세상 떠난 동료들 넋 짊어지고 산에 오르죠”
인터뷰 중에 그에게 휴대폰이 왔다. 그는 낯선 외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하며 통화를 했다. 네팔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89년도에 네팔에 가서 한 1년 정도 있었어요. 네팔에서 체력 단련과 산악훈련을 하며 전지훈련 삼아 가 있었죠. 선배와 함께 산 밑에다 게스트하우스를 차려놓고 식당을 함께 운영했는데, 나중에 사업이 커져서 아주 바빠졌지요.”
히말라야에 가까운 곳에 있으면 산에 더 자주 가게 될 줄 알고 떠난 길이었다. 빈집을 고쳐서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그는 주방 일을 맡았다. 도봉산 자락에서 음식장사를 하던 집에서 자란 덕분에 어지간한 음식은 만들 줄 아는 데다가 오랜 산행으로 손수 음식을 해 먹던 습관이 있어서 숙박업을 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규모가 커지자 요리사, 심부름꾼, 정원사 등 8,9명의 현지인들을 고용했다. 그러나 사업에 매달리느라 정작 히말라야를 눈앞에 두고도 산에 오를 수가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수영을 하며 신선놀음을 하던 그는 문득 ‘젊은 놈이 뭐 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짐을 챙겨 귀국했다. 그의 일생 중에 유일하게 안정되고 한가했던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는 아이들이 커서 산악인이 되기를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가 산이 좋아서 산에 몰두하듯 아이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목표를 찾고 그 길에 몰두하기를 바란다. 부부가 생각이 똑같다. 다만 아이들이 원한다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자상하게 전해줄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엄홍길은 당분간 쉬면서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그리고 또 다른 모험과 도전을 찾아 떠날 것이다. 아직 확실한 계획은 없지만 올해 말쯤 남극 최고봉에 도전해볼 생각도 있다. 그는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산에 오를 것이라고 한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기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한다.
“산이 좋아서 오르죠. 세살 때부터 도봉산 기슭에서 살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산을 좋아했고 자연을 좋아했지요. 하지만 산에 계속 오를 수록 목표가 생깁니다. 동료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성원해주시는 분들의 염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오르지요. 이제는 산에 오를 때 먼저 간 동료들의 넋을 짊어지고 갑니다. 짐은 무겁지만 목표가 있기 때문에 더욱 힘이 납니다.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합니다.”
고독과 싸우며 홀로 한 발자국씩 정상을 향해 오르는 산 사나이에게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에 대한 기억과 주위 사람들의 기대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짐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인생인들 그의 인생과 다를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산악인 엄홍길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히말라야의 14개 봉우리를 정복한 그는, 과연 또 어디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을 것인지. 그의 다음 행로가 자못 궁금하다.
●글 / 김태희(자유기고가)
●사진 / 서범세
첫댓글 엄홍길님 존경합니다...당신은 최고의 산 사람입니다....^^